〈 120화 〉[3권] 120회 - 나그네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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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낙 리차트라와 마지막 결전이 터지기 전의 새벽. 하딘은 피카니에게 언성을 높였다.
“마법사님은 우리 모두 다 구하고 싶었어. 상의했으면 계획을 짰을 거다. 네가 말도 없이 독단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세상의 균형이 바뀔 수도 있었어.”
“일일이 뒷일 따져가면서 움직일 때가 아니었습니다.”
“뒷일이 걱정 안 된다면 놈들하고 네가 무슨 관계로 엮였는지도 말할 수 있겠군.”
피카니는 싸늘하게 말했다.
“당신은 내 상관이 아니야. 나도 당신 부하가 아니고.”
하딘이 작게 속삭였다. 벽에 귀를 바짝 붙이고 이야기를 엿듣던 단테는 거기까지는 못 듣겠다 싶어서 포기했다. 건물 안의 사람들이 갈 길 따라 헤어지는 기척이 느껴지자 단테는 벽에서 귀를 때고 자신도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조각상처럼 가만히 있는 늑대를 껴안으니 따끈했다. 그리고 덕분에 단테는 크게 외롭지 않았다. 그는 늑대와 함께 하품을 크게 뱉었다.
“승자는 누가 되고. 추락할 자는 누구인가….”
사실 여태껏 단테가 귀를 대고 있던 장소에서 정확하게 바로 맞은편에 아비투스가 귀를 대고 있었다. 건너편에 아무도 없는 걸 아비투스가 말했다.
“그 친구 갔습니다.”
하딘은 원래 어조로 목소리를 되돌렸다.
“방법이 하나 있다. 네 도움이 필요해.”
잠시 후.
피카니는 담요를 몸에 번데기처럼 몸에 칭칭 감고 있는 단테에게 다가가 흔들어서 깨웠다. 같은 시간 다른 방에서는 사람들이 당장 떠날 준비를 마치고 기척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딘과 그의 부하들은 물론 핑커튼도 그랬다.
피카니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말했다.
“미끼가 출발했습니다.”
그 말을 신호로 사람들이 한 번에 움직이자 군단이 행군하는 소리가 났다. 히콕과 아비투스는 분해한 기관총이 담긴 상자를 같이 옮겼다. 윈프리와 그녀가 불러온 사람들은 그녀의 지시를 받고 서둘리 움직였다. 레오포드가 하딘에게 말했다.
“다른 방법이 없어서 차마 반대하지 못했네만. 이건 도가 지나치게 교활하네.”
하딘은 눈을 가늘게 떴다.
“교활하다는 건 나 같은 사람에겐 칭찬이지. 내 부대가 어떻게 싸우기 위해서 모인 자들인지 알려줄까?”
“당신에 대한 무용담이라면 이미 알고 있소 대위.”
“엑시투스 악타 프로밧(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하리라). 이게 유일한 길이오 탐정 양반.”
그때 윈프리가 끼어들었다.
“어떤 친구들은 굳이 비효율적인 길을 고르던데요.”
하딘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그 사고뭉치들 같은 영웅이 아니오.”
“흥.”
윈프리는 안경을 벗고 세련된 손짓으로 자신의 하얀 눈썹을 가다듬었다.
“공동의 적이 있으니 제 나름대로 최선은 다하겠습니다. 제 전령도 곧 주둔지에 도착할 거고 만약에 대비해서 제가 소집할 수 있는 핑커튼도 최대한 모일 겁니다. 시간에 맞추기는 어렵겠지만요. 그리고….”
“그리고 뭐?”
잠깐 뜸을 들이고 목소리에 무게를 실어서 그녀가 말했다.
“핑커튼은 용병이라는 걸 확실히 해두죠. 그리고 아시다시피 핑커튼은 연방 정부를 비롯한 여타 공적 기관에 고용돼서는 안 되죠. 예전에 법안으로 그렇게 정해졌으니까요.”
“지금 우리가 여기서 대화하고 있는 것도 불법이지. 나도 알아. 그래서 본론이 뭐요?”
“우리는 고용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그저 공동의 적이 있으니까 서로를 위해 잠깐 도왔던 거죠. 고용되지 않았다는 건 부탁이나 명령을 듣는 관계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레오포드가 마무리했다.
“이 싸움 이후로 우리는 서로 처음 보는 사람인 거지. 핑커튼은 중립이오.”
그때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히콕이 그 소리를 듣고 멈췄다. 무슨 말을 할지 다 안 다는 듯 윈프리가 저쪽을 흘깃 바라보고 말했다.
“캘러헬과 그 제자들은 핑커튼하고 계약 관계가 자유로우니 별개로 생각하시고.”
법정의 서기처럼 똑 부러지는 말투로 간단한 말을 복잡하게 빙빙 돌려서 말하는 윈프리에게 하딘은 짜증이 났다. 짜증 나라고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집이나 잘 지키고 계시오.”
◆
하딘은 만년필을 귓등에 끼우고 손깍지를 목에 걸쳤다. 등받이에 몸을 실으면서 그가 말했다.
“우리가 멍청했던 탓에 마법사님을 납치당했지. 그게 첫 번째 위기였어.”
타티아나가 말했다.
“파스낙이 보냈던 그 자객들은 그때 저까지 해치울 생각이었겠죠.”
피카니가 물었다.
“그렇게나 첩자가 미리 파고 들어있었는데 왜 녀석이 여태껏 뜸을 들였던 거지?”
그녀는 뚜렷하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타티아나가 말했다.
“전 모릅니다. 파스낙의 마음 한구석에 제가 단념하고 자기 발로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죠. 저한테 걸려있던 저주도 그런 거였으니까요.”
하딘이 혀를 차서 주의를 자기 쪽으로 돌리고 이야기를 이었다.
“그런데 웃기게도 파스낙과 접촉한 레스와 아자리가 마법사님을 대신 구해줬지. 그 자리에 있던 우리 애물단지도 빼먹지 말자고.”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군요.”
피카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하딘은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시간에 나는 그들의 동료를 연방 보안관에게 넘기고 있었지. 거기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가 받은 거? 그놈들은 톤토를 데려다줬어. 타티아나 소위의 계약서도 파기해줬고.”
화제를 대신 이으거나 끼어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하딘은 계속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일행을 미끼로 써먹자고 결정했다. 상대의 마음조차 읽을 수 있는 마법사를 상대로 미끼는 자신의 역할을 다했고. 그렇게 캘러헬이 혼자서 판을 깔아준 덕에 우리는 아무 위험 없이 일방적으로 적들의 뒤통수를 칠 수 있었지.”
타티아나가 자학하고 있는 그를 또렷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변호해주었다.
“전술적으로 대위님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모든 면에서 불리했습니다. 시간도 우리 편이 아니었고 파스낙만 노리려고 해도 그는 치외법권에 있었죠. 그날 당장 결판을 내지 않았다면 달아났을 테니 수단을 가릴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때로 몇 번이고 돌아가더라도 나는 같은 결정을 내렸을 거다. 임무의 목적과 날 따르는 부하들의 목숨이 걸려있는 한 그것보다 명예롭지 못한 방법도 얼마든지 할 거다.”
“그리고 마법사님의 마음도 영영 돌아오지 않겠죠.”
카르델이 그렇게 말하고 허탈하게 웃는 소리를 냈다. 피카니가 시선을 땅에 두면서 말했다.
“마담 윈프리가 주둔지로 보낸 서신에 분명 우리 계획이 상세히 적혀있었겠지. 상세하게. 루나는 우리가 그들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을 거고.”
“알았든 몰랐든 마법사님의 성품에 그 상황이라면 어차피 의도적인 실수를 하셨을 겁니다.”
아비투스가 말에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
단테와 아자리는 같이 레스를 기관차에 실어 올리고 가쁜 숨을 골랐다. 열차 안에는 샤카자이아가 미리 자리를 잡고 배낭을 베게 삼아서 누워있었다. 단테가 레스를 옆에 나란히 눕히다가 그의 몸에 박힌 칼을 보고 물었다.
“칼은 어쩌죠? 뽑아요?”
“나는 괜찮아아….”
레스가 눈을 반쯤 감으면서 몽롱하게 헛소리를 했다. 아자리는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 안 돼요! 뽑았다간 끝장이에요.”
“그렇다고 이대로 내버려 둡니까? 마법으로 어떻게든 응급처치를 하는 게….”
아자리는 급해지려는 자기 마음을 다스리느라 필사적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제 피라도 뽑아서 넣어주고 싶지만 레스가 최근에 마법으로 몸을 고친 횟수가 너무 많아서 이제 그런 방법은 안 통해요. 마신 물약 때문에 체내균형도 엉망이고요. 제 지팡이는 방금 절 지켜주느라 충전된 힘이 떨어졌어요. 윈프리 씨가 챙겨준 물건에 수술 도구가 있으니 여기서 나가는 게 최우선이에요.”
“그렇군요.”
단테는 고개를 끄덕끄덕 급히 흔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운전대를 맡았다. 그가 레버를 당기자 약간의 진동 뒤에 일행은 본격적으로 철로를 따라 움직였다. 열차는 방치된 지 시간이 제법 지났는지 굴뚝에서 나는 냄새가 지독했다. 아자리는 동맥을 압박하면서 다친 곳을 자세히 살폈다.
“흑요석 칼에 찔려서 다친 곳이 깔끔한 게 다행이네요. 정말이지 사서 하는 고생에 한해서 운이 기가 막혀.”
흑요석의 가장자리는 원자 하나만큼이나 좁고 예리하다. 딱 칼날 하나만큼만 상처가 난 덕에 다친 곳 주변만 꽉 붙잡기만 해도 피가 거의 흘러나오지 않았다. 하여튼 이렇게 진동도 심하고 지저분한 곳에서 수술은 어림도 없었기에 아자리는 그에게 말이라도 계속 걸었다.
“제 말 들려요? 힘들겠지만 계속 말해요. 조금만 버티면 바로 고쳐줄 테니-”
“나는 괜찮아. 의외로 깊이 찔리는 쪽이 살짝 베이는 것보다 덜 아파.”
레스는 잠에서 깬 표정으로 눈을 반짝 뜨고 능청스레 대꾸했다. 출발하는 진동으로 의식이 돌아온 샤카자이아는 바로 옆에서 배에 칼이 꽂힌 채로 같이 누워있는 레스를 보고는 질겁했다.
“레스?!”
소리를 지르다가 갈비뼈가 부러진 곳이 욱신거려 그녀는 몸을 떨었다. 레스가 눈짓으로 저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샤키 좀 챙겨줘. 많이 맞아서 힘들 거야.”
“제발 가만히 좀 있어 줄래요?”
아자리는 저절로 기분이 냉정해졌다.
“농담 아니야. 칼에 찔린 곳보다 멍든 곳이 더 아파.”
“아픈 사람이면 아픈 사람답게 닥치고 있어 봐 화상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까는 쉬지 않고 계속 말하라더니 이제는 또 닥치란다.”
일어서서 운전대를 맡은 단테는 뒤를 보고 싶은 마음이 참 간절하였다.
“이제야 원래대로 돌아왔네.”
“뭐가 돌아와?”
자기도 모르게 나온 단테의 혼잣말에 레스가 말했다. 확실히 아자리의 염려와는 달리 레스는 말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단테는 한쪽 어깨를 조금 으쓱였다.
“다 같이 모여서 이래저래 하는 거요.”
“어쩌다가 이렇게 됐더라?”
샤카자이아가 끼어들었다.
“내 기억으로는 너희 둘이 술 마시고 돌아오고 나서부터 문제가 점점 심해졌었다.”
레스와 아자리는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과거사를 들추는 기분이었다. 둘은 기분이 나빠졌다. 얼버무리듯이 샤카자이아가 덧붙였다.
“나 혼자서 무리하다가 히콕에게 붙잡힌 것도 문제였지.”
“다들 지나간 이야기들 그만합시다!”
단테가 거칠게 소리치자 일행은 입을 다물었다.
“앞으로 몇 분이면 도시를 빠져나갈 겁니다. 철로가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는데 적당한 때가 되면 바로 멈춰서 상처를 봐야겠어요.”
아자리가 물었다.
“철로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모른다니요?”
“자꾸 까먹는 사실인데 세상은 아직도 전쟁 중이거든요. 틈만 나면 도중에 끊어지고 부서지는 게 철로랍니다. 이 동네도 사정은 마찬가지라 열차들이 모두 운행을 멈추고 방치되어 있었어요. 저희가 열차를 큰 고생 없이 뺏어 타고 있는 덕도 바로 그거죠.”
“그럼 어디서 멈추느냐가 문제네요. 철로를 많이 이용할수록 추적당하기도 쉬울 테니.”
그때 레스가 아자리에게 뭔가를 달라고 손짓으로 시늉했다. 아자리가 단테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잠깐 쉬는 사이에 몸을 일으킨 거였다. 그는 한쪽 다리를 열차 바깥에 내놓고 기관차 가장자리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열차 안에는 그 외에 적당히 기댈만한 곳이 없었다.
“지금 뭐 해요?”
아자리는 레스가 하는 짓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의 몸에 칼이 박혀있는 걸 깜빡할 뻔했다. 그녀의 눈으로 레스의 가만히 있는 모습과 함께 세차게 스쳐 가는 도심의 풍경이 들어왔다.
“너 평소에 일기 쓰던 수첩. 지금 꺼내봐.”
“제발 부탁이니까 얌전히 누워있을래요?”
“수첩에 지도 그려놨어?”
“그려놨어요. 틈날 때마다 보죠. 그런데 그게 왜요?”
아자리는 그의 옷깃을 붙잡고 다시 눕힐 준비를 하고 있었다. 레스는 그녀가 더 가까이 오기 전에 거칠게 손짓하면서 외쳤다.
“중요한 거야! 파스낙한테 알아낸 정보들을 기록해놔야 해. 다음에 내가 정신이 들었을 때 그것들을 모두 기억할 거라는 보장이 없어. 그러면 우리 고생은 헛것이 돼.”
이렇게까지 말하자 아자리도 손길을 멈추고 침을 꿀꺽 삼켰다. 단테가 아자리의 가방 안에서 수첩을 꺼내서 저쪽으로 전달하자 아자리는 수첩을 받아서 지도가 그려져 있는 쪽을 펼치고는 연필을 쥐었다. 그는 바깥에 아슬아슬하게 걸쳐놨던 한쪽 다리를 거두고 수그리면서 수첩을 노려보았다.
“이런. 너무 어두워서 잘 안 보이네.”
“그렇다고 불을 켜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에요.”
단테가 말했다. 하지만 때마침 비가 멈추고 먹구름 너머로 햇빛이 강해지고 있었다. 드디어 아침이 왔다. 레스와 아자리는 수첩을 바닥에 내려놓고 바깥에서 들어오는 자연광에 의지해서 보았다. 레스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다른 무릎은 책상다리해서 쪼그리고 왼손으로 지도의 곳곳을 가리켰다. 아자리는 그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서 일단 표시하고 물었다.
“이게 다 무슨 의미예요?”
“양쪽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장소들. 지금 여기서부터는 가위표로 그려놔. 그건 마왕군. 여태까지 동그라미로 표시했던 곳은 제국군이야. 한참 남았으니까 집중해.”
그의 가리키는 대로 표시하는 짓을 쉰 번가량 반복하자 아자리는 경악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맙소사.”
“확실히 우리가 안전하게 지나갈 만한 곳이 너무 적지.”
“아뇨. 그것보다는… 당신 기억력이 이 정도로 뛰어나다고는 생각도 못 했거든요. 육체파라는 인상이 있어서. 이것들 제대로 알고 표시해주는 거 맞는 거죠?”
레스의 건강에 적신호가 왔다. 그의 혈압이 올라갔다.
“난 유목민이야. 유목민은 평생 지도를 본다고. 지리 외우는 건 자신 있어.”
“그런데 당신은 피카니하고 헤어지자마자 반년이나 길을 헤맸다면서요.”
“그때는 내가 지도에 그려지지 않은 곳에 있었으니까! 거기 들어갔던 거 생각하면…. 어 잠깐만 기다려봐. 내가 애초에 이 수많은 주둔지를 어떻게 피해서 여기 왔지?”
뭔가 중요한 걸 떠올리는 거 같으니 아자리는 말을 걸지 않고 숨죽이고 기다렸다. 아픈 곳을 붙잡고 앓고 있던 샤카자이아는 답답해져서 끼어들었다.
“부탁인데 레스한테 제발 얌전히 누워있으라고 해줘.”
대체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레스는 그걸 계기로 기억을 떠올렸다. 계기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아자리한테 떠는 손으로 연필을 뺏고 지도에 구역을 크게 표시했다. 레스가 크게 표시한 지역 근처에는 주둔하는 군대가 거의 없었다. 그냥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아자리의 지식으로는 이곳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여기가 어디죠?”
“명칭은 나도 몰라. 위험한 곳이었어. 하지만 그래서 우리한테 유용할지도 몰라.”
앞을 향한 단테의 시야에 도시의 끝자락이 들어왔다. 그가 쾌활하게 외쳤다.
“계획이 생겼다니 다행이네. 이야! 전속 전진이다!”
마침 직선으로 달리는 구간밖에 없었다. 그는 속력을 최대로 올리고 엔진에 석탄을 삽질로 퍼넣었다. 기관차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고 하늘에서는 따듯한 광선이 먹구름 사이로 흘러나왔다. 이 얼마나 희망찬 광경인가. 아자리는 혼잣말했다. 잘 있거라 문명아. 샤카자이아가 말했다. 왠지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데.
“무슨 말발굽 소리?”
레스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바깥에서 올가미가 날아와 그의 몸을 옭아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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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딘이 일행을 하나씩 손가락질했다. 아비투스 그리고 피카니.
“너희들이 캘러헬한테 날 맡기고…. 아니, 날 내버려 두고 간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난 의식을 차렸다. 캘러헬은 묘한 사람이더군. 난 카우보이들을 비롯한 옛 시대의 괴물 사냥꾼들에게 존경심이 깊은데 그랜드마스터를 직접 대면하니까 긴장되더라고.”
카르델이 물었다.
“뭐 이상한 짓은 안 했습니까?”
“그다지. 그냥 남자들끼리 만나면 보통 하는 대화로 시작했어. 그도 한때 제국군 출신이었는데 지금은 군대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묻더라고. 쇼생의 용기병이었다더군.”
아비투스가 짤막하게 반응했다.
“바게트.”
카르델은 인상을 찡그렸다.
“아. 그래서 내가 취조실에서 바게트 샌드위치로 고문을 당했었구나.”
일동들의 주목이 여기로 쏠리자 카르델은 다급히 둘러댔다.
“못 들은 거로 쳐줘.”
“카르델. 지금 진지한 이야기 중이다.”
“죄송합니다.”
타티아나가 나서서 분위기를 수습했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셨죠?”
“말을 주고받으면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캘러헬이 경련을 일으키면서 정신을 잃더군. 그때 내 마음속에서는 그를 보살펴줘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바깥에 있는 너희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생각이 더 앞섰다. 당장 장비를 챙기고 너희 쪽으로 향했지.”
잠깐 뜸을 들이고 하딘이 설명을 덧붙였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캘러헬은 라카키와 영적으로 이어진 관계라더군. 레오포드와 슌카와칸처럼. 그 오르골이 작동되는 순간 라카키에게 문제가 생기자 캘러헬에게도 그 영향이 전해졌었던 거지.”
“그다음은 제가 할까요?”
타티아나의 정중한 제안을 하딘은 손짓으로 거절하고 직접 이야기를 이었다.
“난 너희 쪽으로 향했다. 그때 소위와 만났지. 소위는 너희 쪽에서 내 쪽으로 오던 참이었다. 간략하게 상황을 전달받고 우리는 같이 그들을 쫓았다.”
피카니가 손을 들고 물었다.
“대위님하고 소위가 그들이 열차로 향한다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냥 알았다. 회의 중에 지도를 봤을 때 내가 그들 입장이라면 거기를 이용할 거라고 바로 짐작이 갔어. 소위가 가리킨 방향을 보고 나서는 완전히 확신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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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티아나는 하딘과 같이 말을 타고 공장으로 향했다. 그들이 알 방법은 없었겠지만 방금 그들이 지나친 곳에는 레스 일행이 숨어있는 골목이 있었다. 레스 일행도 방금 자신들을 지나친 기척의 정체를 알 수 없던 건 마찬가지였다.
갈림길이 나오자 타티아나가 하딘에게 말했다.
“여기서 갈라지죠. 이곳은 제가 맡겠습니다.”
“혼자서 괜찮겠나?”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럼 나는 만일을 위해 앞질러서 대비하지.”
둘은 묵례만 나누고 헤어졌다. 하딘은 자신의 애마와 함께 전력으로 열차역을 향해 달렸다. 누군가가 어떤 방법으로든 도시를 나가려면 지나칠 수밖에 없는 장소였다. 실제로 숨어서 기다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하딘에게는 밤을 새우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지금, 하딘이 손에는 레스를 옭아맨 올가미가 쥐어져 있다. 타티아나와 다른 부하들은 어떻게 된 건지 속으로 갖은 걱정이 지나갔지만 하딘은 필요한 말만 했다.
“세워! 당장!”
속력을 올린 열차에 맞춰서 나란히 말을 몰면서도 하딘은 능숙하게 균형을 잡았다. 아자리는 올가미에 끌려나가려는 레스를 붙잡고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레스는 당연히 죽을 맛이었다. 올가미에 죄이면서 몸이 압박되자 칼이 박힌 곳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레스는 절규했고 아자리도 거기에 묻히지 않으려고 크게 외쳤다.
“그만! 그만 하세요! 이러다가 진짜 죽어요!”
“친구가 죽는 거 보기 싫으면 세우면 될 일이오!”
샤카자이아가 이를 악물면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활을 쥐려고 했는지, 아니면 다른 칼을 꺼내서 올가미를 잘라낼 생각이었는지, 의도가 뭐였던 간에 하딘은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는 고삐를 잡던 다른 손을 놓고 권총을 꺼냈다.
그리고 쐈다. 튕겨 나간 총알에 정말 누가 맞을 수도 있었으니 기관차를 겨누고 쏜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위협 사격이었다. 놀란 단테는 샤카자이아를 자신의 몸으로 덮어서 감쌌다.
“고민하지 말고 당장 멈춰! 아직도 모르겠나!”
극심한 긴장과 공포에 판단력이 흐려진 단테는 조종간으로 손을 뻗으려 했다. 하딘의 손과 아자리의 손 사이에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던 레스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한 번 더 위협하려던 하딘은 레스가 어디에 시선을 뺏긴 건지 의문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같은 방향을 보았다. 그리고 당황했다.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는 한 번의 순간을 겪고 그는 결정했다. 마지막으로 힘을 쥐어짜서 그가 외쳤다.
“단테! 맹세를 지켜!”
그는 몸을 내던졌다. 어린 여자의 힘으로는 그걸 붙잡을 수 없었다. 하딘의 양손은 올가미와 권총에 빼앗긴 상태다. 그는 대책 없이 자신에게 날아온 레스와 부딪혀 말에서 떨어졌다. 땅을 구르는 두 남자를 남기고 열차는 순식간에 멀어졌다.
샤카자이아가 외쳤다.
“뭐 하는 거야! 열차를 멈춰! 레스가 저기 있잖아!”
단테는 속력을 올렸다. 레버가 부러질 정도로 최대한으로 잡아당겼다. 그의 온몸은 떨렸고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자리도 그에게 달라붙어서 애원했다.
“안 돼! 안 돼요! 그만! 바로 저기 있는데! 바로 저기 있잖아!”
열차는 멈추지 않았다. 질주하는 말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잠깐 넋이 나갔던 하딘은 아름다운 아침의 햇살의 장막 아래로 검은 굴뚝에서 연기를 뿜고 있는 열차가 작아져 가는 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따라잡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그는 인정하고 땅에 주먹을 내리쳤다.
내리친 주먹에는 떨어지는 와중에도 놓지 않았던 올가미가 쥐어져 있었다. 올가미의 끝자락에는 피투성이가 된 남자가 신음을 흘리며 매번 마지막이 될 것 같은 날숨을 쉬었다.
“대체 네 놈은….”
하딘은 이제야 레스의 몸에 칼이 박혀있었다는 걸 알았다. 레스가 뭔가를 중얼거렸다. 무슨 말인지 들으려고 가까이 다가가자 레스는 조금 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흔 가리븐 와타리큰….”
순식간에 그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지더니 레스는 눈을 감았다. 열차 안에서는 그의 친구들이 흐느끼고 있었다.
◆
“나흔 가리븐 와타리큰이 무슨 뜻이지?”
타티아나는 아려오는 마음을 참지 못해 표정에 씁쓸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우리는 나그네이자 길이다.’ 바다위윤들의 기도문입니다.”
카르델이 한숨을 쉬고 조심히 운을 뗐다.
“대체 뭐 때문에 녀석이 그렇게 다급한 결정을 내린 겁니까? 그놈들 총도 있었을 텐데요.”
“선로차단기가 앞에 있었다. 레버식이었지. 딱 내 올가미에 걸릴만한 높이였어.”
피카니는 바로 정황을 파악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열차가 지나가는 순간에 선로가 바뀌었겠군요. 속도도 빨랐으니 탈선하면 열차가 뒤집혔겠죠. 그 자식…. 당장 자기가 죽을 와중에 거기까지 생각했나….”
하딘은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이제 자네들 차례야.”
그는 아비투스와 피카니, 카르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카니가 물었다.
“저희 차례라니요?”
“오르골을 작동시키자 땅이 통째로 무너져내렸다고 했었지. 어떻게 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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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밑이 꺼지면서 피카니의 몸과 마음은 칠흑으로 빠져들었다. 추락은 감정과 구별할 수가 없는 감각이었다. 물에 젖은 돌무더기에 몸을 짓눌리자 숨 쉴 공간도 없어졌다. 마음에는 공포도 있었고 희망도 있었다. 무엇을 향한 희망인지는 알 수 없었다. 기쁨도 있었고. 슬픔도 있었다. 차례차례 피카니의 몸과 마음은 본능대로 죽음을 맞이할 각오를 잡고 있었다.
자신은 누구였나? 무엇을 위해서 살았나? 살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나?
죽음을 앞두면 과거의 기억이 한꺼번에 지나간다는데 피카니는 자신의 의지로 떠올리는 걸 거부했다. 사실은 자기 근처 어딘가에 있는 오르골이 아직도 쉬질 않고 불쾌한 소리를 울려대는 통에 정신이 사나워서 그런 거였다.
누구나 그렇듯 그는 살면서 많은 일을 했다. 패배의 아픔을 겪었고 승리의 쾌감도 즐겼다. 좋은 일도 했고 나쁜 일도 했다. 사람을 숱하게 죽였고 죽을 뻔한 위기에서 살아남기도 했다. 연애하고, 친구를 만들고, 그리고 배신하고.
최후의 최후에 남는 거라고는 외로움밖에 없었다. 아니. 마지막이라서 외로운 게 아니라 삶 그 자체가 외로움 아니었던가.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사람을 사귀는 것도, 배신하는 것도 삶이 외로움 그 자체이기에 일어나는 거 아닌가.
“컥! 컥! 거흐으으윽!”
갑자기 몸을 짓누르는 압박이 사라지자 피카니는 거칠게 기침하면서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게다가 어디선가 타오르는 빛이 칠흑을 걷어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는 도중에 그는 여러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아비투스, 카르델, 히콕. 모두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어둠의 기둥에 갇힌 죄수이자 지옥의 구덩이에 빠진 희생양이었다. 하늘은 아직도 먹구름으로 새카맣지만 주변의 어둠이 더 진해서 구별이 되었다. 그 한복판에 루나가 있었다. 말을 걸려다가 피카니는 바로 그만두었다.
“맙소사.”
그녀의 온몸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흘러나와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표정은 인형처럼 굳었고 눈에서는 별똥별 같은 섬광이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연료로 타오르는 화염이나 태양의 광선하고는 전혀 다른 빛이었다. 그래서 누구도 그것을 표현하거나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러한 의문보다도 장엄함이 그녀를 지켜보는 남자들의 마음을 지배했다.
루나는 자신의 두 다리로 서 있는 게 아니었다. 마치 자신을 감싼 신비로운 화염의 상승기류에 몸을 맡긴 것처럼 위태로이 흔들리고 있었다. 불붙은 허수아비의 마지막 춤사위 같기도 했고 화형을 당하는 마녀 같기도 했다. 소름 끼치면서도 고독을 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오르골은 아직도 정신 사나운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 반주 속에서 루나는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어둠을 밝히고 돌무더기를 띄워 올렸다.
◆
하딘은 자신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어디 아픈 사람처럼 기어가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소위. 그 오르골은 마법의 힘이 강한 상대에게 쓸수록 효과적인가?”
“제가 그런 말을 꺼낸 기억은 없습니다만. 예. 실제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마법사님이 그걸 극복한 것도 현실이지.”
“예….”
“대체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
다들 말을 꺼내기가 무서웠다. 아비투스가 용기를 내서 첫마디를 시작했다.
“방금 피카니 경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한계를 초월하는 힘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거나 능숙하게 다룬다고. 제 생각에는 그러한 사람이 지금 저희 주변에 있는 거 같습니다. 두 명이나 말이죠.”
“마녀와 총잡이가.”
카르델이 별생각 없이 읊조렸다. 하딘은 만년필의 촉을 자신의 눈높이로 들면서 노려보았다.
“그들은 총잡이를 잃었고. 우리는 마녀를 잃었군.”
피카니는 팔짱을 낀 손가락에 힘을 줬다.
“대체 그 모든 싸움을 통해서 얻은 결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