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4권] 121회 - 굴러온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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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는 모두 서쪽에서 오거나 서쪽으로 향했다. 공무원들은 방금 도착한 열차의 화물칸에서 물건들을 한 아름 들고 코앞에 있는 배급소로 향했다. 그곳에 줄을 선 사람들을 하늘에서 바라보면 검은색 뱀 같았다.
“차례대로 오십시오 차례대로! 어제 번호표를 받아갔던 사람부터 처리합니다!”
열차역에 있는 배급소는 하나인데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은 수백 명이었다. 분주히 일하다 직원 중 하나가 분을 못 참고 투덜거렸다.
“밥도 아니고 커피 좀 못 받았다고 수백 명이 나한테 지랄을 하네.”
“닥쳐. 그 수백 명이 곧 수천으로 늘어날 테니.”
방금 도착한 열차로부터 한 무리의 사람이 나왔다. 하나 같이 탄탄하고 균형 잡힌 체격에 까만 맞춤 정장과 푸른색 넥타이로 차려입은 남자들이 오와 열을 맞춰서 움직이는 모습에 사방의 이목이 쏠렸다. 그 행렬의 끝자락에 살짝 기간을 두고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나타났다.
한 사람은 앞장선 이들처럼 같은 정장 차림이다. 검은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서 짧은 꽁지를 틀었고 윗입술부터 턱까지 수염을 짧고 깔끔하게 가다듬었다. 눈가와 미간만 주름이 칼자국처럼 패여 있고 얼굴의 다른 부분들은 팽팽하고 활기가 넘쳐서 중년과 청년을 구분할 수가 없는 묘한 인상이었다. 아몬드형으로 찢어진 눈매에 눈동자는 검었고 피부색은 누리끼리했다. 최소한 이 열차역과 그 주변에서는 그가 유일한 황인이었다.
바로 옆에는 갑옷을 입은 사람이 있었다. 목 위를 통째로 덮어버리는 양동이 같은 철모를 쓰고 있었는데 최소한으로 앞을 보고 숨만 쉴 수 있게 터놓은 틈이 십자 모양으로 나 있었다. 어깨에는 견갑을, 다리에는 각반을, 신발은 철판을 덧댄 군화였고 가슴에는 두툼한 흉갑을 꼈다. 등 뒤로는 아주 얇은 검은색 망토가 그림자처럼 나부꼈다. 팔뚝에는 손가락만 비단으로 되어있는 쇠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왼쪽 장갑은 유난히 큼직하고 총구 같은 부품도 달려 있었다. 보호구로 가려지지 않은 곳은 강베송으로 덮여있어서 맨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성별을 짐작하기는커녕 저것의 정체가 인간이기는 한 건지 주변 시민들은 의문에 빠졌다.
한 남자와 한 사람이 앞장선 이들 속으로 들어가자 그들은 자연스레 절도있게 같이 움직였다. 멀지 않은 곳에 자동차 여러 대가 그들을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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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초콜릿 제가 다 먹어도 돼요?”
루나 센델자레의 목소리는 명랑했다. 군청색 머리카락은 지난주보다 많이 자라서 여기저기 뻗치고 부스스했는데도 맑은 눈빛과 밝은 표정 덕에 그런 모습마저도 야생화 같은 다듬어지지 않은 매력이 되었다. 걸치고 있는 여성용 환자복은 품이 넉넉한데도 가슴께와 골반에서 드러나는 여성스러운 굴곡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요.”
녹슨 쇠막대기에 사포질할 때나 날 법한 쉰 목소리로 레스 알 하자르는 대답했다. 그는 환자용 침대에서 윗몸을 일으킨 채 식사 중이었다. 손에 든 그릇에는 건더기가 거의 없는 허연 죽이 담겨있다. 수저를 쥔 오른손은 틈만 나면 예고 없이 자기 마음대로 떨거나 굳어버렸고 레스는 그럴 때마다 인상을 쓰며 손목을 털어댔다. 그의 수염은 깔끔하게 면도 됐고 머리카락은 삭발하다시피 숱이 처져서 둥근 두상이 눈에 확 띄었다. 피부는 푸석거리고 눈가에는 그늘이 졌다.
루나는 레스의 침대 옆에 쌓여있는 물건들 사이에서 고급 초콜릿 상자를 집고 포장을 뜯었다. 그러다 리본에 끼어있는 쪽지가 눈에 띄어 루나는 거기에 적힌 것을 바로 읽었다.
“‘하얀 모자에게 경의를.’ 누가 보낸 건지 알겠어요?”
“마음이 넓은 사람이니까 루나 씨가 먹어도 삐지거나 하진 않을 겁니다.”
아까보다는 덜 쉰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쇠막대기의 녹이 좀 벗겨진 모양이다. 초콜릿을 입에 넣고 풍미를 감상하면서 루나는 창밖을 봤다.
“날씨가 좋아요. 오늘 산책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루나 씨는 저보다 상태가 좋으니까 나갈 수 있을 겁니다.”
죽 그릇을 입에 대고 한 번에 들이킨 다음 그가 말했다. 빈 그릇을 바닥에 대충 내려놓고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오만상을 찌푸리고 힘겹게 누웠다. 왼손으로는 오른손을 어루만지고 오른손으로는 배를 어루만졌다. 루나는 손가락을 빨고 빈 초콜릿 상자를 내려놓았다.
“그게. 사실 제 상황이 좀 복잡해요.”
“왜요?”
자기 입으로 질문을 꺼내놓고 레스는 바로 알아서 대답했다.
“아, 그때 그거 때문에?”
“후회는 없어요. 살면서 그 정도로 충동에 몸을 맡겨본 적이 없었는데, 신기해요.”
레스는 누운 채로 목만 돌려서 루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가… 그건 정말 고마웠습니다. 나머지는 뭐라 할 말이 없군요.”
루나는 몸 어딘가가 근지럽다는 반응을 보이다가 큰 생각 없이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생각해보니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 더 있네요.”
“전에는 또 무슨 사고를 쳤는데요?”
레스도 별생각 없이 화제를 잇다가 바로 뱉은 말을 수습했다. 루나의 눈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냥 해본 말입니다.”
루나는 쑥스러워했다.
“어차피 한동안 저희끼리 여기 있을 거 같으니 심심할 때 털어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요. 당장은 말고.”
그녀는 레스의 침대에 걸터앉아서 말없이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자기 침대로 돌아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레스는 꺼낼 말이 없어 멍하니 천장만 노려보았다. 당분간 그대로 시간이 흐르다가 병실 바깥에서 누군가가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내 하딘 대위와 피카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피카니는 루나가 레스와 가까이 있는 걸 보고는 표정이 굳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을 때는 시선을 피했다.
하딘이 루나에게 정중히 말했다.
“실례하겠습니다, 마법사님.”
루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침대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피카니가 루나를 불러세웠다.
“마법사님. 바람 좀 쐬지 않으시겠습니까? 많이 답답하셨을 텐데.”
말하면서 피카니는 양손으로 정중한 손짓으로 병실 바깥을 가리켰다. 그녀는 레스와 하딘을 바라보고는 당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피카니가 어찌할 줄을 모르고 멍청하게 있자 하딘이 한숨을 쉬고 수습했다.
“이 친구에게는 아무 짓도 안 합니다. 방금 것은 정말 순수하게 배려로 드린 제안이었습니다만. 굳이 같이 있고 싶으시다면 저희는 말리지 않겠습니다.”
“고마워요.”
피카니는 입술을 깨물고 하딘 쪽으로 갔다. 루나는 자신의 침대에 걸터앉아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레스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낑낑거리며 윗몸을 일으켜 상대와 마주했다. 레스는 하딘의 얼굴에 난 큰 흉터에 눈이 끌렸다.
“그 상처는 어떻게 난 겁니까?”
하딘은 물음에는 대꾸하지 않고 파이프 의자를 발로 끌어와 앉았다. 그리고 공책과 만년필을 손에 들고 오히려 물었다.
“이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뭐하러?”
“이름.”
하딘은 목소리에 힘을 한층 더 주었다. 레스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레스 알 하자르.”
“보고서에는 완벽하게 정확한 내용을 적어야 해. 다른 이름.”
레스는 아니꼽다는 표정을 짓다가 혀를 차고 마지못해 말했다.
“레스 알 하자르 이븐 라 아하드 사쿠라비.”
루나는 듣자마자 화들짝 놀랬다.
“어머나.”
피카니가 그에게 물었다.
“왜 사쿠라비가 이름에 들어가는 거야?”
“무슨 상관이야?”
레스가 가시 돋친 말로 대꾸했다. 하딘과 피카니는 어떻게든 대답을 듣겠다는 분위기여서 그걸 본 루나가 끼어들었다.
“지방마다 차이가 있기는 한데 사쿠라비는 이름 구조가 넷으로 나뉘어요. 이름. 성. 아버지의 이름. 마지막으로 소속된 부족이요. 하지만 레스 씨는 부족으로부터 추방당한 거죠?”
“잘 아시는군요.”
그는 덤덤히 말했다. 하딘이 물었다.
“좋아. 대충 알겠어. 추방당하면서 정확한 출신을 밝힐 자격도 잃은 거로군. 그럼 아버지의 이름이 이븐 라 아하드인가?”
“이븐 라 아하드는 누구도 아닌 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레스는 처음에는 말하기 주저했다가 루나의 눈치를 보고 자기 입으로 단번에 말했다. 하딘은 들은 내용을 곰 씹었다가 공책에 펜으로 끄적였다.
“누가 널 보냈나?”
“뭣?”
“누가 자네를 여기로 보내서 아자리아 비온 라프라스를 도우라고 명령했지?”
레스는 기운 없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당신 완전히 엉뚱한 곳을 짚고 있어.”
“우리더러 자네 일행이 정말로 우연히 뜻이 맞아서 뭉쳤다는 걸 믿으라는 건가?”
“저는 말하기 싫을 때는 그냥 입을 다무는 사람입니다. 거짓말이나 연기에는 재주가 없어서 금방 들키니까.”
“타티아나 소위는 자네가 술탄이 보낸 공작원이라고 생각하네.”
레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피카니는 그가 정색하는 모습을 보고 침을 삼켰고 루나는 겁먹었다.
“누명을 쓰거나 오해를 사는 일은 많았지만…. 이번에는 참.”
그는 눈은 가만히 두고 입꼬리만 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쪽 이름이?”
“헨리 웨슬리 하딘이다. 숲에서 만난 뒤로 처음으로 통성명하는군.”
“미스터 하딘. 난 뒤끝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계속 제가 로스마니 제국과 술탄을 섬긴다고 착각하거나, 그걸 인정하라고 강요한다면 진짜 화낼 겁니다.”
“그렇군.”
하딘은 다리를 꼬고 팔꿈치를 등받이에 올렸다.
“나도 술탄이 자네를 보냈다고 진지하게 생각하진 않았어. 내가 술탄이라면 자네 같은 사람은 절대 안 보내.”
“나 같은 사람이 뭐길래?”
“대체 어떤 공작원이 자기 임무와는 상관없는 일을 위해 목숨을 걸고 희생하겠나.”
레스는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듣고 말문이 막혔다. 하딘은 자기 뺨을 살짝 깨물면서 숨을 길게 뱉었다.
“이 도시의 많은 이들이 자네 일행에게 빚을 졌네. 마법사님도 자네 일행이 구해줬고. 또 나를 포함한 내 부하들까지도 자네 일행에게 빚을 졌지. 별 위안은 안 되겠지만 우리가 안다는 걸 자네도 알았으면 해서.”
레스는 코웃음을 치고 시선을 살짝 하딘의 옆으로 두었다.
“원래라면 나도 덕담으로 받아줘야겠지만 당신한테는 절대 좋은 소리 못해.”
“샤카자이아 때문이지?”
레스가 주먹을 쥔 오른손에서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났다.
“루나 씨랑 관련된 빚을 갚으라는 소리는 안 해. 내 신조대로 했던 거니까. 댁이 내 몸에 올가미를 걸고 죽일 뻔했던 건 신경 안 써. 그건 어디까지나 내 싸움이었고 내가 각오한 일이니까. 하지만 당신은 쓰레기한테 내 친구를 팔았어. 그리고 내 친구를 미끼로 썼지. 당신이 나한테 결투를 걸어줬으면 좋겠어. 지금 당장이라도 받아주지.”
주변 사람들은 하딘의 표정으로부터 그가 여러 가지 감정을 누르고 있는 걸 쉽게 엿볼 수 있었다. 그가 손에 쥔 만년필이 진자처럼 규칙적으로 까닥까닥 흔들렸다.
“이제부터 어떻게 될 거 같나?”
“몰라. 힘들어서 생각하기도 귀찮고.”
“8일이 지났네. 그들은 저쪽에 있고 우리는 아직도 여기 있지.”
“8일?! 나하고 애들이랑 같이 있던 시간보다 배는 되잖아! 세상에! 그렇게나 지났다고?!”
레스는 아까까지의 살기서린 태도를 거두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레스에게 당황해서 어찌할 줄 모르는 하딘을 대신해서 피카니가 화제를 이었다.
“굉장히 뻔한 질문이고. 또 어떻게 대답할지 예상이 가지만 그래도 일단은 물어본다. 아자리는 어디로 갔어?”
“그걸 지금 내가 어떻게 알아?! 8일이 지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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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딘과 피카니는 병실을 나왔다. 바깥에는 카르델, 아비투스, 타티아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카르델과 아비투스는 환자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하딘이 목을 가다듬고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았던 거 같아.”
“마법사님은 어떻습니까?”
아비투스가 말했다. 피카니는 고개를 숙이고 좌우로 저었다.
“그나마 건강은 되찾으셔서 다행입니다.”
이번에는 카르델이 말했다.
“이제부터 어떡합니까 두목.”
“이제부터 논의해야지. 우리는 지금 갈림길에 서 있어.”
그가 엄지로 자신의 등 뒤를 가리키면서 연달아 말했다.
“그들도 마찬가지고.”
다 같이 모여서 계단을 통해 밑으로 내려가려는데 아래쪽에서부터 울려오는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그들은 발을 멈췄다. 금속과 금속이 맞물리고 묵직한 물체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기척의 정체들은 계단을 중간쯤 올라오다가 하딘 일행과 눈이 맞았다. 황인 남성과 갑옷을 입은 사람, 그 뒤로 다른 양복을 입은 이들이 줄줄이 있었다.
황인 남성이 하딘을 보자마자 명령조로 말했다.
“내려오시오.”
하딘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침착하게 말했다.
“어디에서 왔소?”
황인 남자는 이쪽을 올려다보는 게 싫다는 듯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품에서 배지만 꺼내어 이쪽으로 보였다.
[SECRET SERVICE – SPECIAL AG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