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4권] 122회 - 다른 차원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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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어때? 아픈가?”
톤토는 석고 붕대를 푼 타티아나의 팔을 이곳저곳 매만지면서 물었다. 그녀는 지극히 차분한 표정을 지켰다.
“문제없습니다.”
톤토는 물에 적신 수건으로 그녀의 팔을 닦아주었다.
“내가 보기에도 괜찮아 보이는군. 이제 재활 훈련을 해도 되네. 당연히 손날로 벽돌 깨기 같은 건 하지 말고.”
바로 옆에 있는 침상에 누워있는 레스가 톤토의 말이 끝나는 순간에 끼어들었다.
“굳이 여기에서 진찰해야겠어요?”
톤토와 타티아나는 레스의 병실에 있었다. 타티아나는 흘겨보는 눈짓으로 대신 대꾸했다. 톤토가 말했다.
“이제 자네 차례야. 일어나. 팔 뻗어.”
상대의 부축을 받으면서 레스는 윗몸을 일으키고 하라는 대로 했다. 톤토는 그의 팔을 안마하듯이 주무르면서 레스의 표정을 살폈다. 레스의 표정은 평범했다.
“아프지는 않네요.”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네.”
그가 주문을 외우자 눈동자 가운데에 하얀색 점이 떠올랐다. 주문을 쉬지 않고 중얼거리면서 레스의 팔을 훑어봤다. 손톱을 깨물면서 생각에 빠진 상대에게 레스는 말을 걸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뭔가?”
“처음 만났을 때 그쪽은…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굉장히 전형적으로 야만적인 주술사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정반대네요. 말투도 그렇고.”
“아 그 분장? 나랑 레오가 우리 부족에 있던 시절에 진짜로 그렇게 하고 다니기는 했어. 그 꼴은 날 가둬둔 놈의 요구사항에 맞춰주느라 그랬던 거야.”
“그 연방 보안관이 그러기를 원했다고요? 그 특이한 분장을?”
“개성이 강렬한 물건일수록 수집하는 보람이 크지. 그리고 나도 좋았어. 예전 생각나서. 도시에 정착한 뒤로는 분장할 일이 없었으니까.”
루나는 레스의 바로 옆에 있는 침상에 자리를 잡고 책을 보고 있었다. 읽는 게 어떤 책이고 어떤 목적으로 하는 독서인지는 레스가 알 길이 없었다. 레스는 괜히 말을 걸어서 루나를 방해하기는 싫었고 루나도 마찬가지로 이쪽에 상관하지 않았다.
톤토는 레스가 축 늘어트린 팔을 손에 들고 빤히 보다가 혀를 차고 말했다.
“근육, 뼈, 신경. 모두 정상이야. 붓지도 않았고. 엇나간 곳도 없어. 물론 다 나으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이 정도면 좋은 편이지. 하마터면 손을 절단할 수도 있었으니.”
“뭐요?”
“44구경 매그넘 탄을 한 호흡에 전부 속사하다니. 차라리 손목을 마차 바퀴 밑에 깔아두지 그랬나? 그동안 내가 얼마나 고생해서 관리해줬는지 자넨 절대 모를 거야.”
레스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음…. 감사합니다. 그래서 좋은 소식이에요 나쁜 소식이에요?”
“좋은 소식은 자네의 생명력이 굉장해서 충분한 시간을 갖고 휴식을 취한다면 완치될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 거네. 나쁜 소식은 자네의 문제가 완전히 다른 영역에 있다는 거지.”
“무슨 영역이요?”
“자네의 손이 떨리는 건 심리적인 외상 때문이야. 몸에 난 상처를 고치는 건 쉽지만 마음에 생긴 상처는 그 어떤 마법으로도 고쳐줄 수 없네.”
조용히 손을 줬다 폈다 하던 타티아나가 그 말을 듣자마자 무심결에 끼어들었다.
“몸과 마음은 이어져 있죠.”
레스는 자신의 손을 처음 보는 물건처럼 바라보았다. 멍하니 그러고 있는 그에게 톤토는 어깨를 두드려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루나가 진찰을 받을 차례였다. 그녀는 책을 닫고 톤토와 마주 보았다.
“저도 당신에게 궁금한 게 있었어요. 제가 패혈증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있었을 때 특별한 약을 써서 구해주셨다고 들었어요. 항생제라고 부르셨던가요? 곰팡이로 만들었고?”
“정확히는 푸른곰팡이요.”
“제가 명색이 인류에서 최고로 통하는 대학에 있었는데 그런 약은 그곳의 누구도 상상조차 못 했어요. 세균이라는 게 있다는 것조차도 비교적 최근에 발견됐는데 어떻게 개발하셨죠?”
흥미가 생긴 타티아나는 자리를 바꿔서 귀를 기울였다. 레스가 자기 침상에 타티아나가 앉자 불만을 품은 시선을 쏘아 보내고 있었으나 그녀는 무시했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만든 게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만든 걸 가져다가 쓴 거요.”
루나가 열정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누구죠?”
톤토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할 수 없소.”
“당신의 항생제로 살릴 수 있는 목숨을 생각해봐요! 왜 그런 걸 갖고도 공개하거나 특허를 내지 않으셨죠?”
“설명하려면 이야기가 길어지는 데다가 또 복잡해지는데.”
레스가 말했다.
“저도 듣고 싶네요.”
타티아나도 말만 하지 않았을 뿐 눈빛으로는 그의 이야기를 원하고 있었다. 톤토는 깊이 고민하다가 뜸을 들이고 간신히 말문을 뗐다.
“미스터 하자르. 나하고 처음 만났을 때 내가 했던 말 기억하나?”
“저희 일행이 당신을 구하러 올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면서요.”
“일단 ‘어떻게’ 했는지부터 시작하겠네. 당신들이 황무지라 부르는 이 땅에서 태어난 나와 나의 동족에게는 대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비전이 있네. 그쪽 학계에서는 흑마술로 취급하는 힘이지. 우리끼리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칭하는데 나는 이 힘을 ‘부두’라고 부르네.”
“당신 부족에게만 내려오는 건가요?”
가만히만 있었더니 심심했던 타티아나가 말을 꺼냈다.
“그럴 리가. 황무지의 모든 부족이 자기만의 비전을 갖고 있지. 그리고 이 비전을 몸에 익혀서 부족을 인도할 힘을 얻는 자가 추장이 될 자격을 얻는다네.”
이번에는 레스가 끼어들었다.
“당신 추장이었어요?”
레스는 지금 머릿속에서 슈슈니 족 마을의 추장을 떠올리고 있었다.
“추장이 될 자격을 얻는 거지 마법 실력으로 추장을 결정하지는 않아. 차기 추장의 후보였던 적도 있었는데 그 얘기는 넘어가겠네. 아무튼. 이 힘을 편의상 계속 부두라고 부르겠네. 부두는 문명사회의 마법사들이 다루지 못하는 영역을 다루는 일에 익숙하다네. 여기서 문명사회는 마족과 인간 양쪽을 말하는 거고.”
루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받았다.
“무슨 영역을 말하는 거죠?”
“한 단어로 압축하면 시공간. 너무 거창한 소리를 해버렸는데 달리 대체할 단어가 없군. 내 장기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거야. 정신을 집중하면 과거의 흔적을 들춰내거나 앞으로 다가올 징조도 읽을 수 있지. 그런데 아주 가끔은, 아예 완전히 다른 세상이 보인다네. 완전히 다른 세상의 과거나 미래의 모습이 보여. 처음에는 순전히 우연이었어.”
톤토는 말을 마치고 사람들이 이해할 시간을 주었다. 잠시 후에 루나가 자기 생각을 정리해서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보다 훨씬 진보된 세상을 목격하셨고. 그걸 반복해서 거기서 본 것을 토대로 항생제를 만드셨다는 거죠.”
“아까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고는 했는데 사실 거울에 비친 것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하고 닮은 곳이었어. 사람들의 생김새도 그렇고 문화까지. 심지어 그들이 쓰는 언어까지 공용어랑 거의 비슷했다네. 최소한 그 항생제를 개발한 사람은 공용어랑 비슷한 말을 썼어.”
레스는 넌더리가 난다는 반응이었다.
“이야기의 규모가 너무 커서 말 그대로 다른 세상 이야기네.”
루나는 그보다는 차분한 반응이었다.
“여러 차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마법사라면 다들 알아요. 그리고 레스 씨도 라카키 씨를 만났잖아요. 페어리가 차원을 넘나드는 종족이라는 거 아시죠?”
레스는 할 말이 없어져서 괜히 목을 이리저리 돌려 기지개를 켰다. 톤토가 다시 말했다.
“다른 세상을 들여다본 뒤로 나는 지식적인 열정에 휩싸여 와시추의 책까지 직접 구해가며 다양한 학문을 공부했네. 하지만 좋지 않은 때여서 그 모습은 부족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지. 개인적인 사정까지 겹쳐서 나와 레오포드는 부족으로부터 쫓겨났고, 캘러헬의 도움을 받아서 이곳에 정착한 뒤로도 나는 계속 연구했네. 셀 수 없는 시행착오를 거쳐 항생제를 만들었어. 동시에 와시추와의 전쟁도 끝났고. 그다음은… 별로 할 이야기가 없군. 나도 항생제를 공개할 생각은 해봤지. 오랜 고민 끝에 결국 항생제는 중요한 순간에만 가끔 쓰기로 했네. 여태껏 아가씨처럼 집요하게 물어보는 사람은 없어서 진실을 들키는 위기는 없었지. 얘기 끝났소.”
루나는 입술을 깨물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면서 말했다.
“시대를 거스르는 물건을 공개하는 게 간단한 일은 아니죠. 하지만 항생제로 살릴 수 있는 수많은 생명을 생각해보세요. 당신은 존경을 받는 건 물론이고 사람들이 원주민들을 대하는 시선도 바뀔 거예요.”
“세상 사람이 아가씨처럼 좋은 쪽으로만 생각해준다면 얼마나 좋겠나.”
레스는 어느 쪽의 편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입장 문제도 있었고 그는 두 사람의 말 모두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 잠깐 방에 정적이 감돌았는데 타티아나가 침묵을 깼다.
“원주민들이 전쟁에서 패배한 뒤로 부족 대부분은 헐값에 땅을 넘기고 척박한 보호구역에 갇혀서 싸구려 배급으로 연명하며 가축처럼 살고 있죠. 약을 공개하지 않은 건 백인들을 향한 증오 때문입니까? 아니면 인류 제국이 약을 독점할까 봐?”
“난 애초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었어. 그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하던 일로 돌아가자고. 손 이리 뻗으시오 아가씨.”
톤토가 루나를 진찰해주는 사이 레스가 타티아나에게 말을 걸었다.
“댁은 언제까지 여기서 놀 생각이야.”
“노는 거 아니야. 당신들의 의식이 돌아왔으니 이제 쭉 우리 눈에 둬야지.”
“설마 24시간 교대로?”
타티아나는 대답하지 않고 노려보았다. 톤토는 맥박을 재다가 루나의 손목에서 손을 떼고 물었다.
“당신의 파란색 머리카락 말인데. 그건 선천적인 건가?”
“학생이었을 때 실험사고로 이렇게 됐어요.”
“그게 언제였소?”
“어…. 30년 전.”
레스와 타티아나는 눈을 크게 뜨고 저쪽을 보았다. 톤토는 차분하게 할 말만 했다.
“올해로 나이가 어떻게 되오?”
“46…살.”
레스와 타티아나는 여태껏 루나의 나이를 최대한 많게 쳐도 자기하고 비슷한 또래라고 여기고 있었다. 두 사람은 턱이 떨어졌다.
“민감한 질문이겠지만 지금의 모습은 마법으로 꾸민 거요? 아니면 그 실험사고의 영향을 받은 거요? 아니면 그냥 동안인 건가?”
“머리카락 색이 바뀐 뒤로 노화가 느려졌어요. 정말 그거뿐이에요.”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면서 대답했다. 루나가 비슷한 질문을 얼마나 많이 받아왔을지 보는 사람들은 절로 상상이 갔다. 톤토는 죄책감까지 느꼈다.
“그럼 마지막으로 부렸던 한계초월은 어떻게 설명할 거요?”
“저도 몰라요. 기억나지도 않는 걸 무슨 수로 설명하죠.”
음. 톤토는 턱을 위아래로 살짝 흔들었다.
“뭐. 일단 아가씨…의 건강 상태에 특별한 이상은 없소.”
“방금 아가씨에서 말꼬리가 길어진 건 기분 탓인가요?”
톤토는 루나의 게슴츠레 뜬 눈을 피하면서 말했다.
“타티아나 양이 말했듯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으니 명상을 하면 회복에 도움이 될 거요.”
그때 갑자기 피카니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급하게 움직였는지 머릿결과 옷깃이 흐트러져 있었다. 레스와 피카니는 잠깐 서로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피카니가 먼저 시선을 피하고 타티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랑 교대합시다.”
타티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습니까?”
“당연히 있었지. 대단한 일은 아니야. 당신은 이참에 사적인 일을 정리하는 게 어때?”
그녀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입을 가리며 살짝 탄식했다. 타티아나가 레스의 침상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얼마나 우아했는지 옷깃부터 머리카락 한 톨까지 흔들리는 게 없었다. 피카니와 타티아나가 교차하는 순간 톤토가 급하게 말했다.
“잠깐만. 타티아나 양. 바깥으로 나가는 김에 이 친구도 데려가.”
그의 손은 레스를 가리키고 있었다. 레스도 놀라서 자기를 가리키며 눈썹을 찡그렸다.
“이 친구는 일주일을 넘게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어. 빨리 회복하려면 바깥 공기를 쐬고 자기 다리로 걷게 해줘야 해.”
피카니는 목소리를 깔았다.
“여기 두 사람은 나갈 수 없습니다.”
“어차피 이 두 사람을 데리고 계속 전진하던 제국으로 끌고 가든 빨리 몸을 회복시켜서 입원 기간을 줄여야 하지 않겠나? 댁들은 지금 시간이 1초도 아까울 텐데.”
루나가 끼어들었다. 소녀 같은 살짝 토라진 말투였다.
“혼자 내보내는 것도 아니고 동반해서 바람 좀 쐬어주는 게 그토록 정색할 일이예요? 그리고 환자가 도망을 쳐봤자 얼마나 친다고. 쪼잔하게.”
마지막 마디에 피카니는 총 맞은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타티아나는 레스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다가 톤토를 보고 말했다.
“제가 갈 곳은 여기에서 걸어가기에는 좀 멉니다.”
“그럼 내가 차로 태워다주지. 바로 앞에 주차해놨어.”
그녀는 놀라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자가용이 있다고요?”
“왜? 피부가 검붉거나 마법사면 운전면허 따면 안 된다는 법 있나? 원하는 곳까지 내가 운전해주겠네.”
톤토가 자신을 바라보기에 레스는 말했다.
“저야 바람 쐴 수 있으면 좋죠.”
피카니는 입가를 잡아당기면서 콧김을 세게 내쉬었다. 그리고 품에서 수갑을 꺼내 타티아나에게 건넸다. 타티아나는 살짝 떫은 표정을 짓다가 수갑을 자신의 왼쪽 손목에 채우고 레스에게 다가갔다. 레스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맙소사. 또?”
레스는 오른손을 내밀어 타티아나와 같이 수갑을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