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4권] 123회 - 기념품
신발은 슬리퍼를 신었고 다른 겉옷도 없이 환자복 차림 그대로였다. 타티아나를 따라서 레스는 비칠거리면서 걷다가 금방 평범한 사람처럼 보일 만큼은 활동에 익숙해졌다. 타티아나와 레스, 그리고 톤토는 계단을 내려갔다. 가는 길에는 검은색 정장과 파란색 넥타이로 복장이 통일된 남자들이 자주 보였다. 남자들은 레스 일행에게 다가오지는 않았으나 시선은 계속 이쪽에 꽂아두었다. 그래서 레스는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다.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그는 피부에 직접 닿는 햇볕에 신음하며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으으…. 낮에 나온 흡혈귀들의 기분을 조금 알겠어.”
그 말을 듣고 타티아나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톤토는 일행을 남겨두고 주차된 자동차로 먼저 향했다. 레스는 타티아나와 같이 가만히 기다렸다. 뒤늦게 자기한테 날아오는 시선을 눈치채고 그가 물었다.
“왜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거야?”
“흡혈귀를 본 적 없는 사람처럼 말하잖아.”
“본 적 없어. 아, 지금 사막에서 온 주제에 햇볕에 기겁했다고 놀리는 거지?”
“그런 뜻은 아니고.”
갑자기 타티아나는 말을 끊고 피식 웃었다. 레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타티아나는 한쪽 뺨을 살짝 부풀리며 웃음기를 계속 참고 있었다.
“이번에는 또 뭐야?”
“말 안 해줘. 나중에 꺼내는 편이 더 나으니까.”
그들 근처로 톤토가 차를 몰고 다가왔다. 자동차에는 운전사를 포함해서 4명이 탈 수 있었고 지붕이 없었다. 타티아나와 함께 뒷좌석에 앉으면서 레스는 불만을 담아 그녀에게 말했다.
“적어도 나한테 ‘나중에’가 있기는 하나 보네.”
“무슨 얘기야?”
“아무것도요.”
타티아나는 자기가 언제 웃었냐는 듯 시치매 뚝 땐 얼굴로 톤토의 말에 대답했다. 톤토는 대로변으로 운전했다. 도로는 청소되지 않아서 지저분했고 시민들도 도로를 수시로 가로질렀기 때문에 제대로 속력을 낼 수가 없었다. 그들이 탄 자동차는 평범한 사람이 빨리 걷는 거랑 비슷한 속도로 움직였다. 느긋하게 차를 몰고 있던 톤토가 옆좌석에 놔둔 신문 다발을 쥐고 자기 어깨너머로 뻗었다.
“여기. 오늘 자야.”
신문은 타티아나가 고맙다고 말하면서 받았다. 아직 톤토가 신문을 사놓기만 하고 보진 않았는지 종이 다발이 단단했다. 다발을 펼치자 종이 한 장이 흘러내려 좌석의 바닥에 떨어졌다. 레스는 그걸 주우면서 적힌 것을 보았다.
[용사는 거짓이다! 속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만든 도시는 우리만이 지킬 수 있다! 진정한 적은 마계와 마왕이 아니라 우릴 노예로 부리는 우리 제국의 왕가들이다! 일어나라 동지들이여! 시대는 변하고 있다! 지배하는 자도, 지배되는 자도 없는 진정한 자유의 땅을 만들라!]
“허?”
레스는 다 읽고 반사적으로 그리 말했다. 타티아나도 그걸 보고 말했다.
“요즘 돌아다니는 거군.”
“누가 뿌리는 거지?”
“전 아닙니다.”
톤토는 장난스럽게 말하고 페달을 밟았다.
그들은 배급소와 거기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을 만났다. 주변에는 노숙자도 있었고 호객꾼도 있었고 경찰도 있었다. 인파가 상당한데도 그곳은 조용했다. 시민들은 하나 같이 뺨이 홀쭉했다. 일행이 탄 자동차가 사거리에 섰다. 톤토가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갈 곳이 어딘가?”
“키르기스탄 대사관입니다.”
“예전 집 말이지. 길은 알고 있네.”
자동차는 시끄러운 배기음을 내면서 방향을 꺾었다. 톤토가 말없이 운전하는 동안 뒷좌석에서 타티아나와 레스가 신문을 훑어보고 있었다.
[사건들 뒤에는 피카니 조슈아 홀리데이 경과 그 일행이 관련해있었다. 홀리데이 경은 과거 ‘닥 홀리데이’라는 이명으로도 유명했으며 조사결과 용사의 혈통이 흐르는 몰락한 가문 출신으로 밝혀졌다. 단독으로 마왕을 사로잡은 인물로도 알려져 있으며 인류의 모든 제국은 그의 공적과 혈통을 근거로 홀리데이 경을 지금 시대에 재림한 용사로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이는 여태까지 제국의 성격을 생각하면 파격적인 행보로 홀리데이 경이 아카수스 제국 왕가 바깥의 인물이며 황무지에서 태어나 자란 인물이기 때문이다. 사회 일각에서는 ‘제국이 개척지의 도시들을 제국에 융화시키려는 의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레스는 해당 면을 대충 훑어보고 타티아나에게 물었다.
“파스낙은 나오지 않았군. 내 이름도 없네.”
“아쉬워? 현상금 올릴 기회를 놓쳐서?”
그녀는 표정 없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레스는 평범한 어조 그대로 말했다.
“당신들이 내린 거지?”
“글쎄.”
“보아하니 우리가 했던 짓까지 피카니가 한 것으로 처리했나 보네. 파스낙은 어떻게 됐어?”
타티아나는 바깥쪽을 보면서 뜸을 들이다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앞으로는 그놈하고 상관할 일이 전혀 없어. 해 줄 말은 그것뿐이다.”
“우리 지금 그놈 집으로 가고 있잖아. 그러니까 당신이랑 그놈의 집.”
“그냥 뒷정리하러 가는 거야. 대단한 이유는 없어.”
레스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살짝 어두운 감정을 느꼈다. 그는 다른 궁금한 것들에 대해서 꼬리를 물고 계속 물어볼 수도 있었으나 방금 의욕을 잃고 거리나 구경했다.
파업하고 문을 닫은 작업장, 깨진 유리창, 약탈당한 흔적이 신선한 잡화점, 도로는 쓰레기가 뒹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도시에 처음 왔을 때 느꼈던 세련된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파스낙과 연방 보안관의 지배에서 벗어난 도시는 분명 자유를 되찾은 모양이었다. 레스는 갓 배급받은 것으로 보이는 물건을 웃돈 받고 다른 사람한테 파는 시민을 보았다. 대화도 얼추 들렸고 물건을 사는 쪽의 표정이 울상이어서 틀림없었다. 그가 톤토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일상으로 돌아가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톤토는 말투를 통해 레스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느꼈다.
“책임감을 느끼나?”
“저희가 부숴 먹은 게 많긴 하니까요. 저는 경찰도 많이 쐈고.”
“도시의 가면이 벗겨지고 실체가 드러났을 뿐이네. 자네가 신경 쓸 곳은 어디에도 없어. 오히려 자네와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소리 없이 죽어갈 사람들이 더 많았을 걸세. 나도 여전히 갇혀있었을 거고 타티아나 양도 지금 자리에 없었겠지.”
위로는 고마웠지만 레스의 마음은 나아지지 않았다.
“제가 연방 보안관이었더라면 더 나은 쪽으로 총을 쓸 수 있었을 텐데. 새삼 꿈을 포기한 게 뼈저리게 안타깝군요.”
신문을 소리 내면서 다음 장으로 넘기던 타티아나가 그를 힐끗 보았다.
“인류 제국의 연방 보안관이 되고 싶었다고?”
“그랬어. 왜 신경 써?”
“병원에서 봤던 양복 입은 놈들의 정체가 뭐라고 생각해?”
“그 친구들? 잘은 몰라도 당신들 만나러 왔겠지. 분명 높은 곳에서 보내….”
여기까지 말하고 레스는 타티아나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눈치챘다.
“진짜?”
“그중에 몇이나 연방 보안관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네가 연방 보안관이 됐다면 너도 그렇게 차려입고 다녀야 했을 거야.”
갑자기 그녀는 품평하는 시선으로 그를 머리부터 발까지 훑어보고는 덧붙이는 투로 잽싸게 말했다.
“차려입으면 괜찮을 거 같아. 면도만 꼬박꼬박하면 되겠어. 처음 봤을 때는 정말 별로였거든.”
레스는 자기도 모르게 발끈하고 언성을 높였다.
“왜 만나는 사람마다 내 수염을 못 깎아서 안달이야?! 삭발당한 건 상관없어도 수염은 기껏 기른 거 다 사라져서 안 그래도 신경 쓰였구먼!”
그녀는 상대해줄 가치도 못 느끼겠다는 듯 눈짓으로 그를 진심으로 비웃고 신문이나 보았다. 레스도 딱히 더 이어나갈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신문이나 보았다.
바로 눈에 띈 것은 시사 풍자 삽화였다. 피카니의 얼굴을 한 땅딸막한 남자가 기사처럼 갑옷을 두르고 검과 방패로 괴물과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피카니의 등 바로 뒤에는 정장과 드레스로 고급스럽게 꾸민 뚱뚱한 사람들이 탁자 둘러싸서 자리 잡고 있었다. 자기들끼리는 태평히 차와 다과를 즐기면서 필사적으로 싸우는 피카니를 삿대질하고 가짜 용사라고 조롱하고 있다. 삽화 밑에는 ‘가짜의 희생’이라는 문구가 덧붙여져 있다.
그녀는 레스의 반응이 궁금해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레스는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는 복잡한 표정을 굳힌 채로 그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얌전히 있었다. 자동차의 시동을 끄면서 톤토가 타티아나에게 물었다.
“다 왔어. 난 여기서 기다리는 게 낫겠지?”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자동차에서 나와 걸었다. 톤토가 그녀를 따라서 나란히 움직이는 레스의 뒷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발 끌지 말고 규칙적으로 걸어야 하네!”
저쪽을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흔들면서 레스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톤토는 뒷좌석으로 손을 뻗어 신문을 다시 챙겼다.
이제 두 사람은 대사관의 울타리 문 앞에 섰다. 타티아나가 손끝으로 살짝 건드리자 대문은 스르르 밀렸다. 안으로 들어가서 보니 대사관은 겉으로 보기에는 특징 없는 1층짜리 목조 건물에 불과했다. 타티아나는 이곳의 흙을 밟는 것만으로도 심경이 복잡한 눈치였다. 몇 초 정도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가 그녀가 상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방문을 환영한다.”
그가 자기 가슴에 손을 올리면서 무뚝뚝하게 답했다.
“손님으로 받아주는 건가?”
“좋은 쪽으로 생각하시길.”
타티아나가 수갑 찬 손을 흔들자 사슬의 금속 소리와 함께 레스의 손도 따라 움직였다. 둘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웠고 복도 바닥에는 허연 먼지 뭉치가 솜털처럼 굴러다녔고 반쯤 벗겨진 벽지 사이에는 회칠이 어설프게 되어 있었다. 버려진 장소처럼 보이는 것치고는 냄새가 나쁘지는 않았다.
복도를 다 지나서 문을 열자 둘은 응접실로 들어갔다. 벽지도 깔끔하게 도배됐고 가구도 있어서 이제야 사람 사는 곳다웠다. 타티아나가 커튼을 치우고 창문을 열자 컴컴한 실내가 밝아지면서 나무 의자와 나무 탁자에서 고급스러운 윤이 났다. 여기서 다른 곳으로 향하는 복도로는 전화기도 보였다.
“여기는 이제 어떻게 되려나?”
“물건들은 빠짐없이 정부가 압류하고 건물만 남겠지.”
타티아나는 맥빠지는 목소리로 그렇게 흥얼거리고 레스를 어딘가로 데려갔다.
“여기가 파스낙의 방이다.”
문을 열어주면서 그녀가 말했다. 타티아나는 스위치를 눌러서 전구에 불을 켜려고 했는데 전기가 끊겼는지 켜지지 않았다. 레스는 어둑한 내부를 한번 훑어보고 눈꺼풀을 살짝 내렸다. 볼품없는 바깥과는 대조적으로 파스낙의 방은 지나치게 사치품으로 빼곡해서 레스는 거북한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 창문도 없는 곳이었으니까.
“잠도 여기서 잔 거야? 침대도 없는데.”
“난 파스낙이 편히 누워서 자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타티아나는 대답하면서 1인용 소파를 가리켰다. 비싸 보였고 당연히 먼지가 쌓여있었다.
“모처럼인데 한 번 앉아보지?”
“흠.”
레스의 제안에 그녀는 흥미를 보였다. 타티아나는 파스낙의 소파에 다소곳이 앉았고 레스는 바닥에 대충 주저앉고 수갑을 찬 손은 팔걸이 위에 올려놓으면서 옆으로 몸을 기대었다. 그가 물었다.
“무슨 느낌이야?”
“여기 앉으니 방이 더 좁게 느껴지는군.”
타티아나는 만감 가득한 표정을 짓다가 미련 없이 바로 소파에서 일어났다. 둘은 이번에는 소파 맞은편에 있는 벽난로로 향했다. 그녀는 옆에 걸려있는 부지깽이로 벽난로 안에 쌓여있는 잿더미를 뒤적였다. 잿더미 사이로 하얀색 종잇조각이 보였다. 레스가 말했다.
“정보가 될 만한 건 다 태웠나 보네. 싸움에서 이기든 지든 떠날 생각이었댔지.”
타티아나는 날숨을 길게 뱉고 방 밖으로 나왔다. 어지간히 서둘러 나오고 싶었는지 레스는 목줄에 끌려다니는 개 마냥 수갑에 팔이 딸려갔다.
“아프잖아! 이제 돌아갈 거야?”
이번에는 수갑을 살살 당기면서 그녀가 말했다.
“아직 하나 남았어.”
“또 어디?”
“내 방.”
둘은 응접실로 돌아와 다른 복도로 방향을 틀었다. 그쪽 복도에 보이는 문은 하나밖에 없었으니 타티아나의 방이 어디인지는 레스도 알아서 찾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갑자기 긴장으로 몸을 굳히면서 숨까지 참아가며 자신의 기척을 억눌렀다. 이유는 레스도 금방 알게 됐다. 타티아나의 방에서부터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나고 있었다. 단순한 도둑이나 노숙자인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인가? 정체가 무엇일지는 가만히 숨어서 추측하는 것보다는 직접 확인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 그녀는 먼저 벽에 바짝 붙었다.
“악!”
지나치게 습관대로 움직였다가 타티아나는 레스를 깜빡했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자기 손목을 어루만지는 레스와 점점 다가오는 기척을 번갈아 보았다. 타티아나는 초조해졌다. 그녀는 품에서 수갑 열쇠를 꺼내려다가 대신 뒤쪽 허리춤에 수평으로 찬 칼집에서 단도를 꺼냈다. 여차하면 집어던질 각오로 칼을 거꾸로 잡고 다가오는 기척을 기다렸다.
방문을 느긋하게 열고 나타난 상대는 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머리에는 두건을 썼고 얼굴에는 복면을 두르고 손에는 먼지떨이를 들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깜짝 놀라면서도 순식간에 단도를 칼집으로 되돌렸다.
“소냐!”
“언니!”
레스는 얼얼한 자기 손목을 어루만지면서 두 사람의 재회를 잠자코 바라보았다. 방금 괜히 그까지 긴장했던 탓에 분위기가 풀어지자 하품이 나왔다. 타티아나는 선명하게 놀란 감정을 표정으로 나타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내 방은 왜 청소하는 거고?”
“주인님이 마지막으로 남긴 서신에 곧 언니가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적혀있었어요. 그냥 평소처럼 꼬박꼬박 출근했어요. 다른 곳은 청소 안 했지만요.”
“여태껏 계속?! 일당도 안 받으면서?”
“돈이라면 이미 분에 넘치게 많이 받았어요. 부모님 빚을 갚고도 남을 정도인 걸요. 그 사람들 다시 만날 생각은 없지만요. 아무튼, 바로 다른 일을 찾을 수도 있었지만 당장 돈이 궁한 것도 아니고 주인님이나 언니가 혹시 돌아올지도 몰라서….”
“맙소사.”
레스는 타티아나를 보면서 그 모습이 재밌다는 듯 목으로 소리 안 나게 웃었다.
“청소는 거의 끝낸 참이에요. 들어가시겠어요?”
두 사람은 소녀의 안내를 받으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넓었다. 원래는 직원이 여럿이 모여서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던 곳이리라. 지금은 넓은 공간에 운동기구와 간단한 가구만 비치되어서 운동하기 좋은 곳으로 꾸며져 있었다. 큼지막하게 뚫어놓은 창문들도 모두 활짝 열려서 쾌청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이 실내를 채우고 있었다. 레스는 감탄했다.
“우와.”
타티아나는 조금 다른 의미로 감탄했다.
“세상에. 고마워.”
여자아이는 순수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누구신가요?”
안 그래도 예상치 못한 만남 때문에 혼란스러웠던 타티아나는 어떻게 대답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이 슬리퍼와 환자복 차림의 수상쩍어 보이는 남자에 대해 무슨 수로 뒤탈 없이 설명하지?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레스는 타티아나의 동공이 흔들리는 걸 보고 속내를 짐작했다. 그가 수갑이 걸려있는 손을 들어 보이면서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이는 그대로. 그런 관계.”
그 말을 듣고 잠시 후에 여자아이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자기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아! 현상수배 전단에서 봤던 얼굴이다! 수염이 없어서 몰라봤었네! 혹시 언니가 요즘 바빴던 이유도 나쁜 사람들 잡느라 그랬던 건가요?”
“자세한 건 말할 수가 없어.”
레스가 첫 단추를 끼워준 덕에 타티아나는 자연스럽게 술술 말했다. 여자아이는 그 말을 듣고 자기 마음대로 흥분하고는 속사포처럼 떠들었다.
“소문에는 용사님 근처에 언니랑 똑 닮은 사람이 있었댔는데 그게 정말로 언니였군요! 사정을 말해줄 수 없는 이유도 그래서인 거죠?!”
그녀는 겸연쩍게 웃었다.
“들어봐. 나… 하고 파스낙은 이제 여기 돌아올 일이 없을 거야. 오늘은 미처 못 챙긴 내 물건들 확인하러 왔어. 그러니까 너도 이제 자기 삶을 찾아야 해.”
“알아요. 알고는 있었어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기어갔다.
“널 여기로 데려와 놓고 그동안 자리를 비워서 섭섭했겠지. 날 아직도 기억해줘서 고마웠고,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녀가 손을 뻗자 여자아이는 양손으로 꼭 쥐었다. 레스는 애써 다른 곳을 보며 이 상황이 어서 빨리 끝나길 바랐다.
“이리 와봐.”
타티아나가 한쪽 무릎을 꿇고 한쪽 팔로 여자아이를 꽉 끌어안았다. 레스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검은자위를 위로 치키고 오른팔을 쭉 내렸다. 잠시 후에 품에서 나온 여자아이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마지막 부탁이 하나 있어요.”
“말하렴.”
여자아이는 일어나서 벽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기구에 다가갔다. 레스에게는 난생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뭐야 저거?”
사람 키 높이의 굵은 나무 기둥이 넓은 받침대 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나무 막대기가 또 나무 기둥에 사람 팔뚝처럼 수평으로 박혀 있었다. 여자아이가 타티아나에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언니가 단련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그녀는 입가를 옴죽거렸다. 괜히 시간 끌기 싫었던 레스는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고 서둘러서 말했다.
“수갑 풀어.”
레스가 다짜고짜 직설적으로 말하자 타티아나는 조금 당황했다.
“풀어달라고?”
“네 것만 풀어. 어서. 애가 기다리잖아.”
그 말대로였다. 타티아나는 품에서 수갑 열쇠를 꺼내 자신의 손목에서 수갑을 풀었다. 레스는 철봉으로 만든 운동기구에 다가가서 자기 손으로 반대편 수갑을 거기에 채웠다. 타티아나는 양쪽 소맷귀를 하나씩 접어가며 훈련용 나무 기둥에 다가갔다. 간단한 준비운동으로 손목과 발목을 풀고 그녀는 자세를 잡았다. 그 모습을 보고 레스는 저 묘하게 생긴 나무 기둥이 사람과 맞붙는 상황을 가정해서 만들었다는 걸 알았다.
[텅-]
타티아나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기둥을 손바닥으로 때리자 듣는 사람을 저절로 집중시키게 하는 맑은소리가 방에 울렸다. 첫 번째 메아리가 완전히 가라앉을 때 그녀는 불꽃처럼 움직였다. 다양하게 자세를 바꿔가며 손날, 손바닥, 팔꿈치와 발로 나무를 때렸다. 소리는 타악기로 하는 경쾌한 연주 같았고 동작은 춤사위였다. 그리고 뒷모습에서는 구도자의 신념이 피어올랐다. 레스는 왜 저 여자아이가 마지막으로 그런 부탁을 했는지 이제 충분히 이해가 갔다.
[탁- 탕- 터덩-]
잠깐 동작을 멈추고 흐트러진 소맷귀를 다시 접으면서 그녀가 레스에게 말했다.
“목인장이라고 한다. 이걸로 훈련할 수 있는 동작이 100개가 넘지.”
“그걸 다 외운 거야? 대단한데.”
진심으로 감탄해주는 레스에게 그녀는 입술을 깨물어 억누른 미소를 보였다. 잠깐 그녀의 치아가 보였다.
“사실 나도 절반 정도밖에 몰라.”
여자아이는 괜히 분위기에 휩쓸려서 타티아나의 말투에 풉하고 웃었다. 타티아나는 다시 목인장을 두드렸다. 대단원을 위해 그녀가 마지막 발차기에 힘을 실어서 때리자 목인장이 덜컹거리며 받침대까지 통째로 흔들거렸다. 여자아이는 메아리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는 영영 볼 수 없겠네요.”
타티아나는 접었던 소매를 다시 피고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담고 있는 게 레스의 눈에도 보였다. 그녀가 양손을 다소곳이 모아 고개를 숙여 묵례했고 여자아이는 허리 숙여서 받았다. 이제 여자아이는 자리를 떠날 준비가 되었다.
그런데 레스가 상대를 불러서 세웠다.
“애야. 잠깐.”
“예?”
여자아이는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레스는 진지하게 말했다.
“앞으로도 가족하고 영영 만날 생각이 없는 거냐? 정말로?”
“왜 아저씨가 신경 쓰세요?”
“물론 나야 네가 무슨 사정을 겪었는지 알 길이 없지. 그래도 최소한 시도라도 해봤으면 좋겠다. 지금 말고 한참 나중에라도.”
여자아이는 못마땅하다는 얼굴이었다.
“끼어드시는 까닭을 도저히 모르겠네요.”
“그냥 너무 안타까워서 그래. 어떤 사람은 시도조차 못 하거든. 할 말 다 했다.”
타티아나는 동전처럼 동그랗게 뜬 눈으로 레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그의 말을 속으로 곱씹는 듯 가만히 초점 없는 시선으로 멍하니 서 있다가 말했다.
“수갑을 차고 계셔서 그런지 전달력이 남다르네요.”
레스는 검지와 중지를 모아서 안녕히 가라는 손짓을 보내주었다. 여자아이는 이번에야말로 타티아나를 향해 미소와 함께 작별을 고하고 방을 나왔다. 겨우 방에 둘만 남게 되자 타티아나는 긴장이 풀려서 안도의 숨을 한꺼번에 내쉬었다. 레스가 물었다.
“정리해야 할 사적인 일이 저 애였군?”
“거리에 버려져 있던 걸 내가 마음대로 데려와서 우리 시종으로 삼았었어.”
“그 애를 봤더니 아자리가 떠오르네. 그 녀석들 밥은 챙겨 먹고 다니려나.”
타티아나가 그에게 다가와서 다시 수갑을 자신의 손에 채웠다.
“가만히 있어도 됐을 텐데. 왜 날 도와줬지?”
“지금은 내가 손님이니까.”
“뭐?”
“네가 아까 나한테 말했잖아. 방문한 걸 환영한다고. 손님이라면 집주인에게 예를 갖춰야지.”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레스의 목소리는 지극히 진지했다.
“추방당했어도 난 엄연한 ‘바다위(بدوي)’다. 어떤 상대라도 손님이라면 예를 갖출 것이고 손님이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엄격히 계율을 지킬 것이다.”
“사라진 전통을 너처럼 진심으로 말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잠깐 뜸을 들이고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은 기억하겠다.”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나? 나 이제 피곤한데.”
“여기서 내 소지품들 몇 개 더 챙겨갈 거야. 가장 애착이 가는 물건은 저거다만.”
타티아나가 목인장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럼 가져가면 되잖아?”
레스는 장난스럽게 말했고 당연히 바보 취급하는 소리로 돌려받을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상대가 입을 다물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레스의 불안도 커졌다. 고개를 돌려서 타티아나의 옆얼굴을 보니 그녀는 턱에 손까지 대가며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눈치였다. 타티아나가 눈동자만 굴려서 이쪽을 흘겨보는 모습은 꿈에 나올까 두려울 정도로 섬뜩했다. 검은자위가 10% 흰자위가 90%
시간이 흐른 후 루나가 있는 병실에서 조용히 앉아있던 피카니는 아래층으로부터 이상한 소란이 들려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바깥을 보니 타티아나와 레스가 웬 통나무를 같이 낑낑거리면서 들고 계단을 한 단씩 오르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아래쪽에서 목인장을 받쳐 들고 있는 레스가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구경만 하지 말고 봤으면 도와 새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