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4권] 124회 - 전진과 후퇴
루나는 병실에 목인장이 설치되는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피카니는 불만을 팍팍 담은 표정을 지은 채 거친 손짓으로 받침대와 막대기를 기둥에 끼워 맞췄다. 레스는 자기 침상에 젖은 빨랫감처럼 엎어졌다. 타티아나는 땀이 차서 셔츠의 윗단추를 평소보다 2개나 풀었다. 항상 뾰족하게 섰던 고양이 귀도 지금은 접혀있다.
피카니가 레스와 타티아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이게 왜 여기 있는지는 둘째치고. 당신들 분명 차 타고 가야 할 곳까지 갔었지? 저걸 둘이서 들고 그 거리를 걸어온 거야?”
레스가 엎드린 채 대꾸했다.
“댁 눈에는 저게 자동차 트렁크에 들어갈 거 같아?”
타티아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상대의 시선을 피했다. 대답할 기미는 없었다. 피카니는 노려만 보다가 다시 시선을 레스에게 돌렸다.
“8일을 침상에서만 보내다가 먹은 거라고는 멀건 죽 밖에 없는데 용케도 해냈군.”
“닥쳐.”
“알았어. 그쪽은 어찌할 거요?”
타티아나는 영혼이 반쯤 나간 거 같았다. 저번에 싸우는 모습을 봤을 때는 힘들어하는 티를 본 기억이 없었는데 거참 이상하네. 피카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전 그쪽하고 교대해줄 체력이 없습니다.”
표정과 입가가 거의 움직이질 않아서 복화술 하는 거 같았다. 피카니는 괜찮다고 손짓했다.
“상관없어. 나도 지금 여기가 제일 편하거든.”
그는 파이프 의자를 가져와서 거기에 다리를 꼬아 앉았다. 그녀가 물었다.
“아까 교대하기 직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 그냥, ‘시크릿 서비스’ 놈들 눈에 띄기 싫어서 여기로 피난 왔습니다.”
루나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눈을 떴다. 레스는 여전히 덜 마른 빨랫감 같은 모습으로 엎어져 있었다. 그녀가 목인장을 가리키면서 타티아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목인장은 왜 여기 두나요?”
과연 여러 문화에 해박한 사람답게 루나는 저게 어떤 물건인지 알아보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변명하기 난감해졌다. 그녀는 레스를 삿대질했다.
“저놈이 가져오자고 했습니다.”
“사적으로 놔둘 곳이 없어서 여기에 두겠다고 한 건 너잖아!”
엎어져 있던 레스가 몸을 뒤집으면서 타티아나를 째려봤다. 피카니가 인상을 찡그리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 말이 맞는 거야?”
낮고도 날카로운 목소리로 루나가 말했다.
“둘 다 벙어리가 됐는데 뭐하러 물어보나요.”
사실 레스와 타티아나는 할 말 자체는 많았다. 당장 말이 없는 건 레스와 타티아나 둘 다 꺼낼 말을 고르기가 힘들어 아직도 고민하느라 그런 거였다. 반박해야 하는데 서로 거짓말은 안 했으니까 서로 꼬투리 잡을 여지가 떠오르질 않았다. 이렇게 엉망으로 분위기가 흐트러진 와중에 하딘과 그의 부하들이 병실로 우르르 들어왔다.
하딘이 안을 쓱 둘러보고는 말했다.
“뭐야. 다 여기 모여있었나.”
카르델은 바로 옆에 보이는 목인장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또 뭐야.”
아비투스는 방안에 감돌던 묘한 기색을 느끼고 정중히 물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피카니가 대답했다.
“아뇨. 전혀. 다들 여기에는 무슨 일입니까?”
하딘이 말을 받았다.
“자네랑 같은 이유. 놈들이 사방에 깔렸어. 안심할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어.”
넓지도 않은 방에 있는 사람이 전부 합쳐서 일곱이다. 예민해진 사람한테는 각자 숨만 쉬고 있어도 분위기가 산만하게 느껴졌다. 지금 레스가 그러한 사람이었다.
“맙소사 이젠 회의도 여기서 할 작정이요?”
“맞아.”
하딘이 간결하게 대꾸했다. 레스는 눈자위를 까뒤집고 헛웃음을 쳤다.
“그럼 난 신경 쓰지 말고 알아서들 하셔. 난 귀 막고 자고 있을 테니.”
레스는 한숨 자려고 몸을 완전히 누이고 이불을 덮으려 했다. 그때 다짜고짜 카르델이 그의 손에서 이불을 뺏었다.
“눕지 마 새끼야. 너도 강제 참가다!”
“좀! 피곤하다고! 난 인권도 없냐!”
피카니가 이불을 가지고 실랑이하고 있는 레스를 째려보았다.
“네 치료비는 전부 내가 내고 있거든?”
반사적으로 투덜거리려다가 레스는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피카니는 지금 레스를 상대로 안면을 튼 티를 노골적으로 내고 있었다.
“야 잠깐…. 사람들 보고 있는데 그런 말투 써도 되냐? 그런 건 우리끼리만 있을 때….”
피카니는 손가락을 하나씩 세워가면서 레스의 말을 끊었다.
“일단 하나. 그건 이상한 쪽으로 오해받기 좋은 대사야. 둘. 어차피 너하고 나랑 면식이 있다는 건 다들 이미 눈치챘어. 그렇죠?”
피카니가 방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그렇게 말하자 대부분은 입을 다물고 긍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타티아나만 빼고. 그녀 혼자서 손바닥이 보이게 손을 들고 말했다.
“누가 설명 좀 해주시겠습니까?”
아비투스가 답했다.
“우리도 당사자한테서 정확한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
레스가 말했다.
“댁들은 언제부터 눈치챘는데.”
하딘이 말을 받았다.
“자네 일행하고 숲에서 만났던 날부터.”
“그런 애매한 신뢰 관계로 여기까지 용케 오셨군.”
레스가 비아냥거리는 순간 카르델은 이불을 빼앗고 가지런히 개켜서 아비투스에게 건넸다. 아비투스는 개켜진 이불을 목인장한테 모자처럼 씌우고 하딘을 바라보았다.
“뭐부터 시작합니까.”
“저 둘의 사연도 궁금하지만 당장 닥친 상황이 더 급하다. 길어질 테니 다들 자리 잡아.”
하딘은 벽에 기대어 섰고 다른 남자들은 벽에 대고 쪼그려 앉았다. 타티아나는 레스의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것 때문에 레스는 다리를 접고 몸을 웅크려야만 했다. 침대 머리 쪽으로 웅크린 채 꼴사납게 기어가면서 그가 외쳤다.
“그러니까 난 댁들 사정은 관심 없다고 몇 번을 말해. 딴 데 가서 하라고!”
타티아나가 레스를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난 원래 마왕군 측의 공작원이었어.”
“근데?”
“보다시피 난 전향했지. 원래는 국경 너머에 있는 인간들의 땅으로 향할 계획이었고. 증인 보호 신청을 하고 지붕 밑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었는데도 여기에 남았어. 왜 그랬을까?”
불안한 예감을 느끼면서 레스가 말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너 때문이라고! 네가 아자리아를 저쪽으로 보냈으니까!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책임감을 챙겨!”
레스는 타티아나가 자신에게 내밀어준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부축을 받지 않으면 타티아나가 그 손으로 자신의 멱살을 잡거나 목을 조를 거 같았다. 방 안에 있는 사람을 한 번씩 훑어보고 레스는 목을 가다듬은 다음에 또박또박 말했다.
“어차피 댁들이 나한테서 원하는 건 나더러 내 친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거잖아. 난 그럴 마음도 없고 그럴 방법도 몰라. 이 판국에 내 책임감이 무슨 의미가 있는데?”
“하자르 씨.”
루나가 나직하게 말했다. 일동의 주목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녀의 얼굴이 엄격했다.
“부탁드려요.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전 제 행동의 책임을 질 각오가 됐어요.”
루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숨을 참거나 침을 삼켰다. 무서워서. 레스가 제대로 허리를 세우고 들을 준비를 하자 하딘은 말라버린 입술을 핥고 운을 뗐다.
“지휘관으로서 난 지금 두 개의 기로를 앞에 두고 있다. 전진과 후진. 먼저 후진에 대해서 말해보자고. 지금 여기서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주겠나?”
피카니가 가장 먼저 주저 없이 손을 들었다. 하딘이 말하라는 의미로 그를 향해 손짓했다.
“이 일은 우리 능력을 넘어섰습니다. 원정은 실패했다고 보고합시다.”
“명색이 용사인데 가장 먼저 마음이 꺾이셨나.”
타티아나는 노골적으로 그를 비난했고 다른 사람은 무감정한 얼굴로 말을 아꼈다. 루나는 피카니를 동정하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하딘이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우리는 상황이 매우 나빠. 일단 머릿수부터가 일곱이야. 총알 일곱 개로 몰살당할 수 있지. 쫓아야 할 대상은 어디에 있는지 실마리도 안 보이고 이제부터 우리는 여태껏 겪어왔던 것보다 더한 위기를 겪게 될 거다. 이건 명백한 현실이고. 우리가 포기한다면 어떻게 될지 설명해주지.”
레스가 손을 들고 물었다.
“왜 머릿수에 나까지 포함하는 건데?”
타티아나가 퍽하고 레스의 어깨를 쳤다. 하딘은 무시하고 이어서 말했다.
“먼저 나를 비롯한 레인저들은 육군본부에 도착하자마자 엄청난 양의 경위서를 작성한 다음 아주 따분한 과정을 거쳐서 처벌을 받거나 훈장을 받겠지. 피카니 경은 극소수의 병력을 지휘해서 다양한 업적을 이룬 영웅으로 보도될 거고. 타티아나 양은 문제없이 제국으로 전향할 수 있을 거요. 별 탈 없이 우리가 짊어진 건 잊어버리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타티아나가 하딘을 노려보았다.
“진심으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지휘관으로서 나는 언제나 작전 포기를 각오하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가망 없는 도박에 목숨을 걸다가 의미 없이 죽는 거야. 특히 다른 사람의 목숨도 걸렸다면 더욱 그렇지. 넘어가고. 문제는 이거야. 마법사님하고 사쿠라비는 어떻게 될까?”
루나가 말했다.
“그건 저희 사정이죠. 전 준비됐어요.”
레스도 말했다.
“나도 마음 비웠어. 미련 없이 끝까지 싸웠고 후회도 안 해.”
하딘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 루나를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교황청에서 기사를 보냈습니다. 심지어 기사단의 그랜드마스터가요. 시크릿 서비스와 함께 직접 왔습니다. 마법사님을 데려갈 겁니다.”
루나는 표정이 얼어붙었고 레스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시크릿 서비스는 뭐고 기사단은 또 뭐야? 일단 대단한 작자들인 건 알겠다만.”
피카니가 말을 받았다.
“바깥에 있는 양복 입은 뺀질이들이 시크릿 서비스야. 인류의 모든 제국을 대표해서 움직이는 범국가적 정보기관이지. 군대가 인류의 방패이자 창이라면 저놈들은 총이라고 생각하면 돼. 가장 높은 곳에 앉은 사람들이 방아쇠를 당기는 총. 군대보다도 지위가 높아.”
“너만큼은 아니겠지.”
레스의 가벼운 말투에 피카니는 정색하고 말했다.
“아니. 비공식적으로 나보다 더 높아. 그리고 시크릿 서비스의 현장 요원은 모두 강화 시술을 받았어. 이 현장 요원에는 연방 보안관도 포함되어 있고.”
“연방 보안관을 담당하는 조직이라고? 아, 산책하던 도중에 대강 들었던 거 같아. 너랑 내가 같이 잡았던 그 역겨운 새끼가 특이했던 게 그래서였구나?”
“그리고….”
피카니는 다음 말을 꺼내려다가 루나가 그의 말을 낚아채듯이 예고 없이 먼저 말했다.
“기사단은 이름 그대로 상상하면 되는 조직이에요. 교회의 명을 받드는데 그 역사가 천년이 넘어요. 물론 이쪽도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죠. 그런데 저한테 용무가 있다니, 종교 재판이라도 열려나 보네요.”
레스는 루나가 마녀라는 사실을 먼저 생각하다가 그녀가 줄에 묶여서 불에 타죽는 모습까지 연쇄적으로 떠올리고 말았다. 사람 생각은 다 비슷한지 방안의 일동들 모두 표정이 안 좋았다. 하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들에게 이유를 물어봤습니다만 저들은 대답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마법사님이 벌이셨던 기적에 대해서 이미 알고 온 눈치였습니다.”
이번에는 피카니가 놀랬다.
“뭐? 어떻게?”
타티아나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소문이 저쪽까지 닿았거나 여기에 있는 정보원이 먼저 알렸겠지.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기관인데 이 정도로 놀라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놈들이 섭섭해할걸.”
하딘은 얼굴을 한 번 움켜쥐고 호흡을 골랐다. 이번에는 레스를 바라보면서 그가 말했다.
“미스터 하자르. 자네가 맞이하게 될 최악의 운명이 뭐라고 생각하나?”
“신경 안 써. 그런 운명이라면 이미 한 번 겪어봤어. 루나 씨가 더 걱정이야.”
레스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진심으로 자신의 안위를 신경 쓰지 않는 모습에 하딘은 감탄이 표정으로 나타나려는 걸 손으로 가려야 했다. 입술을 깨물고 그가 다시 말했다.
“아마 자네는 아주 오랫동안 어딘가에 갇히거나. 고문당하거나. 아니면 제거당하는 걸 각오하고 있겠지. 하지만 제국이 자네의 진가를 몰라보고 그런 식으로 시시하게 낭비할 거 같나?”
“요점이 뭐요.”
레스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하딘이 타티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위. 마계에서 능력은 좋은데 협조를 안 하는 사람을 어떻게 다루나?”
타티아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어떻게든 쓸모를 찾아내죠. 어떻게든 그렇게 만듭니다.”
레스를 바라보면서 그녀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스. 마계에서 끝내 정보를 불지 않고 자살해버린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아? 흑마술로 그 시체를 잠깐 살려낸 다음 마법으로 머릿속을 들여다봐서 기어코 정보를 캐내지.”
그는 그 말을 에둘러서 하는 협박이라고 받아들였다. 레스는 아니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요점이 뭐냐고.”
“우리가 원정을 포기하고 네가 우리 손에서 벗어나게 되면 시크릿 서비스는 분명 널 데려갈 거다. 아니면 지금 당장 널 데려갈 수도 있고. 그들은 너의 협력을 받아내겠지. 네 의지가 꺾이냐 꺾이지 않느냐는 상관없이 무조건 그렇게 될 거야.”
“댁이 저주에 걸려서 계약서를 가진 파스낙의 명령을 받는 신세가 된 것처럼 나도 그렇게 될 거라는 뜻이야?”
타티아나는 숨을 고르고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였다.
“그래. 아마도 비슷하게. 지금 시국이라면 분명 너한테 아자리아를 쫓게 시킬 거 같아.”
레스는 인상을 풀고 한숨을 푹 쉬었다.
“다들 날 그 정도로 걱정해주다니 고마워. 하지만 시크릿 서비스가 나한테 용건이 있을 거라는 건 어디까지나 추측이잖아.”
피카니가 목에 힘을 잔뜩 주고 굵게 말했다.
“아니. 분명 너 때문에 왔을 거다. 다른 이유로 왔어도 너한테 볼일이 있을 거다.”
일동의 주목이 그에게 쏠렸다. 레스는 대화가 시작한 지 처음으로 피카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을 걸었다.
“어떻게 그 정도로 단언하는데?”
“놈들은 네가 진짜 용사라는 걸 알아.”
그리고 방안은 정적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