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4권] 125회 - 위험한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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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하늘 아래에 탁 트인 초원의 풀들은 모두 갈색이었다. 뛰어다니는 들짐승은 없었고 날아다니는 새도 없었고 바람조차 한 점 안 불었다. 나무가 되려던 묘목들은 반만 자라서 뼈다귀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다.
높은 곳에 여자아이가 지팡이 위에 다리를 모아서 걸터앉고 둥둥 떠다녔다. 그녀는 고개를 삐죽 내밀면서 사방을 둘러봤다. 눈이 닿는 곳 끄트머리에 푸른 소나무숲이 보였다. 여자아이는 머리에 쓴 고깔모자와 앉아있는 지팡이를 손으로 잡으면서 서서히 땅으로 내려왔다. 바로 아래쪽 땅에는 그녀의 일행이 앉아서 쉬고 있었다.
여우의 머리를 달고 있는 사람은 신발을 벗고 자신의 발을 부지런히 주무르고 있었다. 과하게 걸어 다녔는지 엄지발톱에 금이 가 있다. 근처에는 사람 몸집의 두 배는 될만한 부피의 짐이 배낭에 묶여 있었다.
뾰족한 귀와 진한 갈색 피부를 가진 여인은 화살을 다듬고 있었다. 몸통이 휘어져서 쓸 수 없게 된 것은 깃털과 촉만 떼어냈고 괜찮아 보이는 돌조각이 보이면 주머니에 넣었다. 여인이라고 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행동과 표정에서 아직 앳된 기운이 느껴졌다. 피로와 따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여인은 하품을 크게 뱉었다.
허공으로부터 지금 땅으로 내려온 여자아이는 억척스럽게 기지개를 켜고 일행에게 말을 걸었다. 목소리에는 기품과 친근함이 오묘하게 담겨 있었다.
“숲이 보였어요. 단테? 괜찮아졌나요?”
단테는 자신의 발을 아직도 매만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쉴래요.”
이번에는 귀가 뾰족한 여인을 바라보며 소녀가 물었다.
“언니 생각은요?”
상대는 더 다듬을 화살이 없어지자 땋았던 머리를 풀어서 손으로 빗질을 하고 있었다.
“쉴 수 있을 때 쉬어두자.”
“알았어요.”
아자리는 벗은 고깔모자를 접어서 배낭에 넣고 수첩과 연필을 꺼냈다. 그리고 장을 펴서 끄적이기 시작했다.
[도시를 벗어난 뒤로 1주일이 지났고 우리는 특별한 문제 없이 계속 전진하고 있다. 레스가 있었을 때는 우리 모두 평등한 관계로 지내왔다고 생각했는데 잃고 나서야 우리가 얼마나 그를 의지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샤카자이아 언니와 단테 씨는 암묵적으로 나에게 결정권을 주면서 같이 움직이고 있다. 친구들의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책임감이 괴롭다.
레스를 구하러 가자는 계획도 진지하게 세워봤었다. 하지만 단테의 냉정한 충고를 듣고 나서는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때 우리는 몸과 마음이 한계에 달해 있었고 살아남으려면 일단 달아나야만 했다. 그는 우리를 구해줬는데 우리는 그를 구해주지 못했다. 당장은 레스의 헌신을 물거품으로 만들지 않도록 도망만 치고 있지만 그를 구할 생각은 항상 하고 있다. 기회가 생기면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수첩에서 잠깐 눈을 떼고 평온한 초원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차분해지자 아자리는 일지의 주제를 바꿔보기로 했다.
[도시에서 겪은 일이 너무 힘들어서 그런가. 요즘 들어 북적이고 시끄러운 문명 세계보다 탁 트여있는 야생이 더 마음에 든다. 난 도시 촌놈인데.
야생에서 살아남으려면 문명에서 살아남는 것보다 더욱 원초적인 고생이 든다. 예술 작품도 없고 안전한 곳도 없다. 허나 문명은 사람이 만든 세계고 야생은 이미 만들어진 세계다. 야생의 아름다움은 조화와 공생에 있다고 생각한다. 문명이 해온 짓과는 완벽히 반대된다. 본디 문명과 공동체는 조화와 공생을 위해 만들어졌을 텐데.
며칠 전에 우리는 어떤 원주민들이 살았던 곳을 지나왔다. 지금은 땅이 오염돼서 잡초조차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단테가 말해주기를 그곳은 원래 들소 떼가 서식하던 땅인데 인간들이 석유를 뿌려서 숲과 들판을 태워버렸다고 한다. 들소가 사라지자 생계 대부분을 들소 사냥에 의존하던 원주민들은 인간들에게 굴복했다. 들소도 멸종했다.
내 조국도 분명 비슷한 짓을 했으리라.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되겠지. 부족의 미래를 책임진 언니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샤카자이아가 머리를 땋다가 자기 어깨 쪽으로 코를 킁킁거리더니 아자리에게 말을 걸었다.
“나 냄새 많이 나?”
“저도 냄새나요. 우리 모두 여태껏 못 씻었잖아요.”
샤카자이아는 자기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다가 진저리를 쳤다.
“토사물 냄새가 나! 으웩!”
아자리는 뺨을 깨물면서 수첩에 한 줄 더 끄적였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나는 세상의 운명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다. 암살자나 현상금 사냥꾼을 만나기도 전에 온몸이 썩어버릴 거 같다.]
◆
그림자가 길어진 늦은 오후. 병원의 옥상에 하딘과 그의 부하들, 그리고 피카니가 다 같이 굴뚝처럼 담배 연기를 내고 있었다. 하딘은 혼자 파이프 담뱃대로 도도하게 피고 있다. 카르델이 이빨로 깨물고 있던 꽁초를 손으로 들면서 말을 꺼냈다.
“사쿠라비를 처형한다는 소식을 신문에 올리는 건 어때? 분명 구하러 오지 않을까?”
아비투스는 물고 있던 담배를 손으로 들고 말했다.
“빈틈이 너무 많아. 1주일이나 지났잖아. 지금 와서 유인하기에는 너무 늦어.”
피카니도 피우던 담배를 뱉고 의견을 냈다.
“아자리가 그 소식을 듣는다면 분명 함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구하러 오겠지. 하지만 저쪽이 신문을 못 보거나 안 보면 의미가 없어. 봤다고 쳐도 저쪽이 레스를 구하러 올 수가 없는 사정에 처해있으면 또 의미가 없지.”
하딘은 파이프 담뱃대를 손에 들었다.
“그 말대로 필요한 조건이 너무 많다. 그리고 겨우 미끼로 쓰기에는 녀석의 능력이 아까워.”
피카니가 말을 받았다.
“레스가 우리를 위해서 도와줄 거 같습니까?”
“도와줄 수밖에 없도록 해봐야지. 대의가 걸리면 사적인 감정은 내려놓는 친구니까.”
하딘은 한 박자 뜸을 두고 피카니를 째려보았다.
“자네랑은 다르게.”
카르델도 경멸을 담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쏘아붙였다.
“내가 저 사쿠라비였다면 바로 다 까발리고 저 대갈통에 구멍을 냈을 거야.”
아비투스가 언성을 높이고 카르델의 말허리를 끊었다.
“야! 아무리 그래도 지킬 선이 있지!”
“같이 지내면서 조금은 남자다운 새끼인 줄 알았는데 자기 친구를 내쳤다잖아! 왜 우리가 쫓아다녔던 놈이 유난히 특이했는지 이제야 앞뒤가 맞아. 저놈이 진짜 재림한 용사야! 이 새끼 때문에 전쟁이 제대로 안 끝난 거고 또 우리가 이 고생을 하게 된 거 아냐!”
피카니는 아무 말도 안 했고 아무 반응도 안 보였다. 그의 손에 가만히 들려 있는 담배만 타들어 가고 있었다. 하딘이 연기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마왕은 저 둘이서 같이 잡았다고 했잖아. 재림한 용사 같은 건 어디에도 없어. 넘어가고. 홀리데이, 자네는 어쩌고 싶은 거야?”
“제 의견은 여전합니다.”
하딘은 파이프 담뱃대를 뒤집어서 털고 담뱃재를 짓밟았다. 다른 사람들도 들고 있던 꽁초를 버리고 불씨를 밟아서 껐다. 하딘이 말했다.
“지금쯤이면 정신을 차렸겠지. 내려가자.”
그들은 옥상에서 계단을 타고 레스와 루나가 있는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은 타티아나가 지키고 있었다. 루나는 창문을 열고 거기에 기대서 바깥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레스는 입을 벌리고 반만 뜬 눈을 까뒤집은 채로 침대에 누워서 꿈쩍도 안 했는데 가끔 경련이 일어나 그의 몸이 움찔거렸다. 하딘이 그를 손으로 가리키자 타티아나가 대답했다.
“내내 저랬습니다.”
“아무나 좋으니까 저 친구 좀 깨워주겠나?”
하딘의 한탄이 섞인 부탁을 듣고 창가에 있던 루나가 레스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가 레스의 어깨를 쓸어주며 귓가에 뭐라고 속삭이자 그는 침대가 들썩거릴 정도로 벌떡 일어났다. 레스가 기침으로 콜록거리면서 제정신을 차리는 동안 사람들은 알아서 자리를 잡았다. 타티아나는 자기가 앉아있던 파이프 의자를 비워주고 또 레스의 침상으로 갔다.
레스는 루나가 건네준 물에 적신 수건으로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렸다. 오만상을 쓰면서 실눈으로 방안을 둘러보고 그가 말했다.
“어휴 냄새. 그사이에 얼마나 피우고 온 거야?”
피카니가 말했다.
“기절한 네가 잘못이지.”
“가뜩이나 몸도 안 좋았는데 그 소리를 듣고 어떻게 맨정신으로 버티냐!”
레스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체 어디를 봐서 몸이 안 좋다는 건지. 피카니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넌지시 말했다.
“그런데 왜 네가 먼저 말 안 했어? 시간은 충분히 있었잖아.”
그는 시선을 피하고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귀찮아서. 어쨌든 내가 기절한 사이에 뭐가 어떻게 돌아간 거야?”
“너희 일행이 너와 나에 대해서 아는 만큼 여기 있는 사람도 이제 알게 됐어.”
근처 창가에 있던 루나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저도 잠깐 기절했어요. 궁금하시지는 않았겠지만….”
루나와 피카니는 한순간 눈이 마주쳤다가 서로 시선을 피했다. 피카니는 잡념을 떨쳐내고 원래 화제로 내용을 이어갔다.
“나는 여기서 그만뒀으면 좋겠어. 너하고 마법사님은 내가 지키겠다.”
레스가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는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진지하게 말하는 거구나. 그렇지?”
피카니도 말투에서 격식을 버리고 단번에 대꾸했다.
“그래 지금 겁나게 진지하다고.”
“나는 반대할 수가 없는 계획이군. 애당초 나한테 선택권이 있기는 했었냐만.”
“내 도움이 없으면 너하고 마법사님은 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곳으로 끌려가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운명에 처할 거야. 그러니까 그만 빈정거리고 협력 좀 해!”
어지간히 억눌린 게 많았는지 피카니는 갑자기 울컥하고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상대의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렸다가 레스는 방안의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키워서 또렷하게 말했다.
“놈들은 어떻게 나에 대해 아는 거지?”
“내가 말했어.”
“뭐?”
여태껏 인상을 구기고 있던 레스는 경악하면서 주름이 사라졌다. 다른 사람들도 놀라서 공기가 술렁거렸다. 피카니는 쓴 걸 씹는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 말했어. 내가 공식적으로 용사가 되자마자 그들한테 너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어. 늦게나마 네 이름을 알리고 널 찾으려고. 하지만 그들이 거부했지.”
“어째서요?”
루나가 말했다. 피카니는 입을 벌린 채로 굳어있다가 힘겹게 말했다.
“레스의 존재는 그들이 만들어준 제 권위를 방해하니까요.”
레스는 눈을 반쯤 감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놈들이 진실을 안다는 걸 너도 알고 있었던 거군. 좋아. 그런데 말이야. 이건 어디까지나 내 직감인데 제국으로 가면 너도 위험한 거 아니냐?”
“우리는 계속 싸우겠지. 그건 어쩔 수 없어.”
레스는 게슴츠레 뜬 눈 그대로 조금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
“네가 왜 그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여기서 그만두자고 하는지 알겠다. 마음이 꺾인 게 아니라 일단 루나 씨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루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피카니를 바라보았다. 다른 남자들은 그를 쳐다보지 않고 어딘가 생각에 빠진 눈치였다. 피카니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대답할 의무가 없는 질문이야.”
“하긴.”
하딘은 날숨을 한 번 내쉬고 어조를 부드럽게 가다듬었다.
“좀 있다가 다시 보세. 서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군.”
그 말을 신호로 남자들이 자리를 떠나는 와중에 타티아나는 병실을 나갈 기미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 이곳을 맡는 중이었으니까. 그래서 다들 그녀를 내버려 뒀는데 하딘은 타티아나를 향해 말했다.
“소위. 이쪽으로.”
타티아나는 저들이 자기한테 볼일이 있다는 걸 알고 군말 없이 병실을 나왔다. 그녀는 병실의 문을 소리 안 나게 닫고 일행을 따라갔다.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는 장소를 찾아서 그들은 병원을 돌아다니다가 결국 아예 바깥으로 나왔다. 병원 바로 옆에는 환자들이 산책하는 용도로 작게 꾸며진 공원이 있었다. 마침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적절했다. 그가 부하들에게 손짓하자 카르델과 아비투스는 조금 간격을 두고 멀찍이 서서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망을 보았다. 그리고 타티아나에게는 벤치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하딘은 타티아나와 같은 벤치에 앉았다.
“자네하고 만나자마자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네.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미뤄버렸군.”
피카니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근처에 대충 서 있었다. 타티아나는 괜스레 똑같은 질문을 또 던지지 않고 가만히 상대의 말을 기다렸다. 하딘이 말했다.
“우리는 원래 아자리아를 쫓을 생각이 아니었어.”
“뭐라고요?”
“처음 출발했을 때 우리는 아자리아가 어떤 존재인지도 몰랐어. 그리고 레스 알 하자르가 어떠한 존재인지는 방금 알았고.”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피카니가 화제를 이었다.
“아자리아를 데려가는 건 저에게만 비밀리에 내려졌던 임무입니다. 마법사님을 포함해서 대위님과 대원들은 원래 다른 이유로 소집됐습니다. 하지만 보다시피 제가 지켜야 했던 기밀은 깨진 지 오래고 해야만 하는 일의 우선순위도 처음하고는 많이 달라졌죠.”
“우선순위가 달라졌다고?”
하딘이 의문이 깃든 투로 말하자 피카니는 고민하고 나서 뜻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그랬구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레스가 얽히면 항상 엉망이 된단 말이지.”
타티아나는 문명화된 사회인답게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하면서 묵묵히 기다렸다. 피카니와 하딘은 서로 누가 먼저 말할지 눈치를 보다가 결국 하딘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마족들의 국경 너머까지 정찰할 생각이었네.”
“미쳤군요.”
그녀는 단호하게 바로 반응했다.
“이제 집중해서 듣게. 지금 듣게 될 비밀은 용사의 정체보다도 더 위험한 거야.”
“알았습니다.”
하딘은 타티아나가 담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말했다.
“우리 쪽에서 저쪽에 보내둔 첩보원들로부터 응답이 없다는군. 전부.”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게 문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파악이 안 돼. 저쪽에 보내둔 사람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니면 배신을 한 건지. 본토에서는 확인할 방법이 전혀 없어.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가 거기까지 직접 가서 눈으로 보는 것뿐이지.”
타티아나는 전직 공작원답게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고 현기증을 느껴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신음을 참았다. 몇 번 심호흡하고 진정한 다음 그녀가 말했다.
“지금 처음 듣는 소리입니다.”
피카니가 추궁하는 투로 말했다.
“정말이야?”
“그만한 규모의 어마어마한 방첩 계획이 있었다면 저하고 파스낙도 어떻게든 거들었거나 소식을 들었을 겁니다. 한순간에 모든 정보망을 뭉개버리려면 준비하는 데에 적어도 몇 년은 걸릴 텐데 저희가 몰랐을 리 없습니다.”
피카니는 그녀에게 삿대질했다.
“파스낙은 알았는데 당신만 몰랐을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저도 물을 게 있습니다. 어딘가에 첩자를 심어둔다는 건 마치 보이지 않는 작은 나라를 세우는 것만큼이나 공과 시간이 많이 드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상 전멸을 당했다면 분명 여러분 측의 정보 조직들은 난리가 났겠군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하딘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녀가 말했다.
“왜 이 사태를 육군이 수습하는 겁니까? 첩보원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다른 첩보원이 나서야 정상입니다.”
하딘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상부는 첩보 부서에 결함이 있다고 판단했네. 그래서 우리가 선택됐지. 나하고 내 부하들은 의심받을 구석이 전혀 없으니까. 여기 있는 홀리데이 경도 마찬가지고.”
“결함?”
타티아나는 자기 입으로 의문을 던져놓고 바로 뜻을 이해했다. 하딘은 바로 물었다.
“지금 우리 쪽에 심겨 있는 저쪽 사람들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그녀는 습관적으로 그 질문을 받고 고민하는 티를 내고 말았다. 남자들은 특별한 감정 없이 그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타티아나는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숨기려는 게 아니라 몸에 배어서.”
“신경 안 쓰네.”
“저희 사람들은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규모의 인원을 은어로 ‘가족’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들이 ‘서커스’라고 부르는 것처럼요. 제가 아는 바로는 아카수스 제국에는 ‘가족’이 열. 르바티아에는 다섯. 드레스 중립국에는 하나. 여기서 제일 가까운 슈타이만에는 일곱. 황무지에는 도시마다 하나씩. 이곳에는 그 ‘가족’이 저랑 파스낙이었죠. 내통하는 인간은 그냥 짐작 가는 곳이라면 항상 있다고 생각하는 게 편합니다.”
국가의 역사와 첩보의 역사는 같은 세월을 공유하는 법.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하딘은 직접 듣게 되니 머리가 지근거리고 입에서 절규가 나오려 했다.
“여왕 폐하 맙소사.”
“그리고 ‘시크릿 서비스’에도 ‘가족’이 최소한 하나 있습니다. 그것 말고는 저도 아는 게 없습니다. ‘가족’끼리 연락을 나눌 때는 서로에 대한 정보는 드러내지 않는 게 규칙입니다.”
“상식적인 이야기군. 당연히 그렇겠지.”
하딘은 관자놀이를 한 번 힘을 줘서 손가락으로 눌렀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눈을 뜨고 그가 피카니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미스터 홀리데이. 아자리아를 데려오라는 명령은 누가 내렸지?”
“인류 연방 기관으로부터 받았죠. 제일 높은 곳에서.”
“그들로부터 직접 받았나. 도장이 찍힌 서신을 다른 기관으로부터 받은 게 아니고?”
피카니는 갑자기 말문이 막혀버렸다. 하딘과 타티아나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본의 아니게 그는 사실을 털어놓게 됐다.
“시크릿 서비스한테 전달받았습니다. 제가 용사가 됐을 때부터 공적인 일이 생기면 그들과 자주 만났습니다. 지금 위험한 상상하시는 겁니까 대위?”
하딘의 표정은 빈말로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타티아나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