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6화 〉[4권] 126회 - 경의를 표하며 (126/188)



〈 126화 〉[4권] 126회 - 경의를 표하며

“시작부터 이상하다는 조짐이 있었어. 이만한 정황이 있으면 상상이 아니지! 너도 우리랑 처음 만났을 때 왜 하필 우리끼리 모였는지 이상하다고 했잖아! 이제 후퇴했다간 사이좋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운명이 기다리게 생겼군!”


하딘은 거칠게 지적하고 이빨이 보일 정도로 턱에 힘을 줬다. 타티아나는 대조적으로 훨씬 침착해졌다. 그의 흥분을 가라앉히듯 그녀가 차분하게 말했다.

“아직은 추측일 뿐입니다. 진실이 아니고요. 지나치게 모든 상황을 대비하려다가는 해야만 할 일을 잊게 됩니다.”

하딘은 가만히 숨만 골랐고 피카니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타티아나는 그사이에 껴서 중재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녀는 최대한 중립적인 시선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도록 감정 없는 목소리로 피카니에게 물었다.

“아직도 본토로 돌아가자는 생각입니까?”


“달리 뭐가 있는데? 마음 굳게 먹고 앞으로 가자고 쳐도 마법사님하고 레스는 어차피 본토로 끌려갈 거고 우리는 아무 단서도 없이 1주일이나 앞서간 아자리아를 찾아 헤매야 해. 게다가 마계로 가는  미친 짓이라고 당신이 방금 말했잖아.”


“해야  미친 짓은 얼마든지 있죠. 그냥 본토의 명령은 무시해버리고 이대로 마법사님하고 레스를 데리고 몰래 출발한다면요?”


하딘이 그 말에 반응했다.


“뒷수습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건 반역이야. 그리고 마법사님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분은 이제 우리에게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어. 레스는 언젠가 터질 게 확실한 폭탄이지. 그 둘을 같이 데리고 가는 게 좋은 생각인지 난 도저히 모르겠네 소위. 제길!”

타티아나는 팔짱을 끼고 입술을 깨물었다. 답이 안 나오는 토론 때문에 분위기는 점점 질식할  같은 불편함으로 가득해졌다. 그때 아비투스가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슬그머니 그들에게 다가오더니 작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7시 방향으로부터 탱고 접근 중. 대위님 기준입니다.”

그 말만 남기고 아비투스는 지나가던 사람처럼 다시 슬그머니 다른 곳으로 멀찌감치 섰다. 일행은 정장을 차려입은 무리가 이쪽으로 오는 걸 보았다. 그 무리를 이끄는 이는 뒤로 넘긴 머리를 묶어서 짧은 꽁지를 튼 황인이었다. 목소리가 닿을 만큼 가까워지자 피카니가 먼저 몸을 돌려 그들을 맞이했다.

“좋은 오후요 모르스 요원.”


“좋은 오후요 피카니 경.”

혀를 굴려야 하는 발음마다 두드러지게 각이 지는 억양으로 모르스 요원이 말했다. 자신의 무리는 뒤에 두고 그는 홀로 다가왔다. 넥타이는 풀었고 블레이저 재킷은 벗어서 한 손으로 쥐어 어깨에 걸치고 소매를 반쯤 걷었다. 모르스가 타티아나와 하딘을 번갈아 봤다.


“내가 중요한 이야기를 방해한 건가?”

“면접하는 중이었소. 우리 여정에 같이할 의향이 있다더군.”

일상적인 어투로 하딘이 대답했다. 타티아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모르스는 ‘흠’하고 점잔빼는 소리를 내면서 노골적으로  말이 있다는 티를 냈다. 생각을 정리하고 그가 말했다.


“당신 수고를 덜어주지. 레모니 양이 어떤 사정으로 파스낙의 수하가 됐는지 들었소?”

“아니. 아직.”


“레모니 양은 싸움만 잘하고 현장에서는 감정에 휘둘려서 일을 자주 그르쳤어. 데리고 있기 거북해진 욜스카의 첩보국은 적당히 쓸만한 사람을 보내달라는 마왕의 요청을 듣고는 주저 없이 그녀를 좌천시켰지. 나머지는 본인에게 들으시길.”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타티아나는 물론 하딘과 피카니까지 얼굴이 굳었다. 모르스 요원은 태연히 자신의 말을 이었다.


“그녀를 깎아내리는 소리로 들렸다면 그건 터무니없는 오해라는 게 객관적인 사실이라오. 싸움은 잘하니까 첩보원으로는 실격이어도 당신 부대원으로는 적당한 인재라는 뜻이요. 동시에 대위의 면접 시간을 줄여주려는 내 작은 배려이기도 하지.”


그의 말은 각이 지는 딱딱한 어투까지 더해져 듣는 사람의 신경을 한계까지 긁었다. 피카니는 사냥감이 걸린 덫처럼 모르스가 입을 다물자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바로 말했다.

“볼 일이 뭐야?”

모르스 요원은 자신의 어깨에 걸쳐둔 블레이저의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봉투는 하딘이 받아서 겉을 뜯고 안에 든 서류를 꺼냈다.

같은 시간. 병실에 있는 루나와 레스는 창가에 기대어 저쪽 일행을 보고 있었다. 저쪽과 이쪽은 거리가 꽤 돼서 무슨 말을 하는지 당연히 안 들렸다. 그래도 분위기가 심각하다는  정도는  수 있었다. 서류를 다 읽은 하딘이 벤치에서 일어나 모르스 요원에게 격하게 항의했다. 피카니는 서류를 보고는 절망한 사람처럼 팔을  늘어트리고 표정이 사라져버렸다.

레스는 창가에서 떨어져 커튼을 치고 자신의 침대로 돌아왔다. 루나는 커튼의 틈 사이로 저쪽을 계속 보다가 침대로 돌아왔다. 레스는 루나에게 말을 걸었다. 기운이 없어 보였다.

“많이 불안하신가요?”


“네.”

루나는 침대 위에 다리를 올리고 무릎을 끌어안으면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얼굴은 무릎에 파묻었다. 괜한 소리로 건드려봐야 좋을 게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레스는 조용히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루나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레스 씨는 언제나 다른 사람 걱정만 하는군요.”

바람이 분다. 커튼이 흔들리고 방안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왼팔을 거기에 올렸다.


“저도 불안합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요. 그때는 코앞에 총구가 있었는데도 겁이 안 났는데 지금은 꼴사나운 기분만 들어요.”

그녀는 다 말하고 코를 훌쩍거렸다. 레스는 조금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한테 도시 절반이 빚을 졌잖아요. 종교재판이라고요? 변덕으로 실수  번 했다고 놈들이 당신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저희 사회를 모르시나 보군요.”

루나는 책상다리로 자세를 바꾸고 눈가를 비볐다. 새빨개진 눈으로 그녀는 레스와 마주 봤다.

“인간 마법사들은 마족들만큼 신분이 자유롭지가 않아요. 마법의 소양을 가진 사람이라면 14살이 될 때 예외 없이 정부 기관에 이름을 등록하고 서약을 해야 해요.”

“서약?”

“마법사가 될 것이냐. 아니면 마법사가 되지 않을 것이냐. 마법사가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교회가 관리하는 전용 교육시설로 등록되어 마법과 신앙의 길을 걷게 되죠. 마법사가 되지 않기로  사람이 만약 독학으로 마법을 배웠다면 종교재판을 거쳐서 공개적으로 처리되고요.”


레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통제당하는군요.”

루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차별이 아니에요. 사회를 위한 규칙이죠.”


“제가 만났던 마법사들은 모두 자유롭게 살았는데요.”


“레스 씨는 야생으로부터 오셨잖아요. 저는 문명에서 왔어요. 그리고 문명은 원칙과 정의가 폭력보다 우선시 되어야만 하죠. 특별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규칙 속에서 살게 되면 특별하지 못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꼴이 돼요. 그게 더 옳지 못한 거죠.”


“저 같은 야만인도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결점이 바로 보이는데요?”

루나는 타이르는 투로 침착하게 말했다.


“제 말의 핵심은 인간 사회의 마법사들은 종교와 밀접하다는 거예요. 이쪽의 마법사들은 학자이자 성직자죠. 그리고 제게는 제국 수석 마법사라는 칭호가 붙어있어요. 이 칭호를 받아들이려면 재차 서약을 맺어야 해요. 신의 앞에 서서 어떤 죄도 저지르지 않겠다는 맹세를요. 이해하시겠어요?  제 일행과 인류만 배신한  아니라 신을 모욕한 거예요.”


말을 마치고 그녀는 갑자기 감정이 복받쳐서 또 눈가를 감싸 쥐었다. 그가 보기에 루나는 마음은 여렸으나 신념이 굳었다. 그리고 현실의 풍파를 머리로만 이해하고 몸으로는 아직 겪지 못한 사람이었다. 어설픈 위로는 의미가 없으리라. 레스는 시선을 돌리고 생각에 빠졌다. 서로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다가 그녀는 습기 찬 목소리로 흐느꼈다.

“제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어요. 피카니 씨하고 대위님도 좋아서 손을 더럽힌 게 아닐 텐데. 하지만 동시에 여러분들이 너무 불쌍했어요.  손으로 제가 한 맹세를 깼으면서 지금 받게 될 벌이 두려워서 떨고 있다니…! 내가 이리도 한심하다니!”

레스는 분명하게 들리도록 나지막하게 힘줘서 말했다.

“맹세는 수단입니다. 루나 씨는 죄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자신의 기준을 따라 맹세를 지켰습니다. 만약 신이 수단 그 자체보다 중요한 존재라면 그건 신이 아닙니다.”

시간을 오래 들여서 그들은 쉬었다. 울음을 그치고 루나가 레스에게 물었다.

“레스 씨는 정말 침착하시네요. 자기 걱정은 하나도 안 하고. 심지어 피카니 씨를 미워하는 기색도 안 느껴져요.”


“그렇게 보여요?”


“예.”


레스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말을 돌렸다.

“그쪽은 피카니가 어떤 사람으로 보입니까?”

“그쪽하고는 닮았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사람.”


진지한 대화 중에 분위기 깨는 말은 삼가야겠지만 레스는 이런 쪽으로는 참을성이 없었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평소의 한가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루나가 뭐라고 말하려는 차에 바깥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레스! 안에 있냐?!”

피카니의 목소리였다. 그냥 열고 들어오면 되는데 왜 굳이 문을 두드리는지 레스는 이해가 안 갔다. 심상찮은 예감을 느끼고 레스는 표정이 불안해졌다. 레스도 외쳤다.


“당연히 여기 있지!”


“마법사님도 계십니까?!”

루나는 문 쪽을 바라보다가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레스에게 작게 속삭였다.


“저 없다고 둘러대 주세요.”


그리고 루나의 몸 주위에 아지랑이 같은  펼쳐지더니 곧 그 자리에서 완전히  보이게 됐다. 레스는 난처해져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화장실 가셨어! 혼자 있고 싶으시대!  걸릴 거야!”


아무도 보이지 않는 허공에서 루나의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더 나은 변명은 없었어요?!”

마녀들이란. 레스는 해탈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한탄했다. 하지만 피카니는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마라톤이라도 하고 온 사람처럼 팔을 터덜터덜 흔들면서 기운 없는 몸짓으로 레스의 침대 앞까지 파이프 의자를 끌고 왔다. 자기 앞에 자리를 잡는 피카니에게 레스가 눈을 똑바로 뜨면서 물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길래 꼴이 그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당장은 그냥 너랑 단둘이 있고 싶어서 왔어.”


피카니는 정신이 조금 나간 거 같았다. 레스는 만약에라도 그가 루나가 숨어있을 방향을 의식하지 않도록 몸을 옮겨서 피카니의 시선으로부터 루나가 있을 장소를 완전히 가렸다. 레스가 말했다.


“좋아. 너 먼저 말해봐.”


피카니는 바닥에 쌓인 먼지가 움직일 정도로 한숨을 거칠게 쉬었다.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쥐고 머리칼을 헝클었다.


“그날 갈림길에서 헤어졌을  만약 네가 나처럼 되고. 또 내가 너처럼 됐다면 세상이 더 나아졌을까?”

레스는 담백하게 말했다.

“마왕을 데려갔던 게 나였냐면 어떻게 됐겠냐고? 글쎄. 인간 세상이 나처럼 피부가 검은 사람을 용사로 인정해줬을 거 같지는 않다. 술탄의 첩자라고 의심부터 했겠지.”


“엿 먹을 놈의 문명 세계. 황무지로 돌아가고 싶어.”

목소리가 쉬어있었다. 잠깐 여유를 갖고 피카니는 말을 이었다.

“포상금은 넘치도록 받았어. 지금도 온갖 명목으로 돈이 내 계좌로 들어오지. 하지만 제대로 써본 적이 없어.  좋은 곳에 집 짓고 간단한 목장이라도 꾸리면서 평화롭게 살 생각이었는데 용사가 된 뒤로 난 같은 곳에 이틀 이상 머문 적이 없어. 방랑하는 거랑 다를 게 뭐냐고.”


“미안한데 너네 여기서 머문 기간이 일주일 넘지 않았어?”

“넌 초를 치지 않으면 죽는 병이라도 있는 거냐! 지금 심각하다고!”

기분 탓인지 레스는 뒤통수로부터 따끔한 감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한심한 놈으로 취급하는 눈으로 째려보는 거 같았다. 레스는 이를 빠득빠득 갈고 있는 피카니에게 사과했다.


“미안. 옛날부터 참으려고 노력은 해봤는데 타고난 기질이라서 쉽지가 않아.”


“아니. 너하고 이렇게 바보 같은 말 주고받는 것도 오랜만이라서 기분이 나아졌어. 분명 너희 친구들은 너랑 같이 지내면서 즐거웠겠지.”


레스는 한쪽 입가를 잡아당기면서 시선을 위쪽 어딘가에 두고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나 때문에 휘말린 고생들 생각하면 오히려 지금쯤 후련하다고 여기지 않을까 싶은데. 객관적으로도 짧은 인연이었잖아.”


“같이 지낸 시간의 양이 관계를 만드는  아니야. 단순히 오래 알고 지내는 것만으로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믿을 수 있다면 모든 가족이 행복하게 살았겠지. 내 아버지는….”


“잠깐만.  이야기는 넘어가자. 난 이미 들었잖아.”


레스는 루나가 듣지 못하도록 바로 화제를 돌렸다. 피카니는  의심 없이 말을 끊고 숨을 골랐다. 분위기상 아무래도 자기가 말을  차례 같아서 레스는 말했다.

“너한테 있어서 루나 씨는 대체 어떤 존재야?”

“갑자기 세게 나오시네.”

피카니는 씁쓸하게 웃었다. 처음보다는 기분이 풀어진 눈치였다. 레스는 재촉했다.

“내가 보기엔 너하고 루나 씨는 친한 사이 같지는 않던데. 서로 신경은 많이 쓰지만.”


“그런 사이는 아니지. 그리고 나한테는 그럴 자격도 없지. 나한테 마법사님은…. 너에게 알미트라 같은 존재야.”

“흠.”

레스는 눈을 크게 떴다가 반쯤 감으며 놀란 감정을 진정시켰다. 피카니는 계속 말했다.

“살면서 좋은 일도 했고 나쁜 일도 했어. 미움도 받아봤고 사랑도 해봤어. 특별한  없이도 적당히 살다가 자유롭게 죽으면 전부라고 생각했지. 그게 무법자의 삶이잖아. 그러다 너를 만나니까 여태껏 해온 일들이 다르게 느껴지더라고.”

“그래?”

“카드 게임은 여전히 좋아해. 그런데 게임에 이겨서 돈을 따봤자 뭐가 남는지  수가 없더라고. 어딘가에 정착하지 않고 자유로이 떠도는 삶도 싫지는 않았어. 그런데 새삼 고독하게 느껴지더라고. 그런데 너는 돈에도 관심 없고 떠돌이 신세면서도 다른 사람 돕는 걸 좋아하고 살인을 피했지. 처음에는 널 보고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1년을 같이 지내다 보니까 나도 똑같이 이상해진 거 같아.”


“1년. 참나.  안 했으면 잊을 뻔했네. 겨울은 정말 힘들었지.”

레스는 입술을 살짝 비틀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피카니는 코를 한 번 잡아당기고 손에 턱을 받쳤다.

“마법사님은 내가 용사라서 따라온 거야. 원래 따라와서는 안 될 사람이었는데  때문에 용기를 냈다고. 날 위해서 기도까지 해줬어. 기도를 해줬다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게 신에게 비는 건데 누군가가 날 위해서 기도해주는 게 그렇게 기쁜 일인지 몰랐어. 그러니까 내 말은…  말은….”


레스는 상대를 진정시켰다.


“천천히 말해. 아무도 안 쫓아와.”

피카니는 고개를 숙인 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난 살면서 해선 안 되는 짓을 너무 많이 했어. 너에게 한 짓을 포함해서. 난 무법자로 사는  지겨워서 정착하는 삶을 바란 건데 이젠 자유롭지 못한 떠돌이가 됐어. 게다가 제국주의의 앞잡이 노릇까지 하고 있고. 마법사님만이라도 무사하게 해주지 못하면 죄책감 때문에  영혼이 흔적없이 증발해 버릴  같아.”

레스는 그때 상대의 마음에 빈틈이 생긴  감지했다.


“그리고 사랑에 빠졌으니까.”

레스의 짓궂은 말투를 듣고 가뜩이나 참고 있던 게 많았던 피카니는 성질이 확 끓어올랐다.

“그래 좋아한다! 내가 여태껏 봤던 사람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순수하고 상냥하신 분이다!”

그때 종이 찢어지는  같은 이상한 소리와 함께 루나가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입을 가리고 벽까지 물러서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레스는 자기 앞에 있는 피카니의 얼어버린 모습을 감상하다가 몸을 돌려 루나를 보았다. 루나의 새빨개진 얼굴을 보고 레스는 의아해하는 반응을 보였다.

“여태껏 눈치  챘어요? 연륜도 있으시면서.”

피카니가 대체 무슨 소리냐고 말하는  표정을 찡그렸다.

“연륜이라니?”

“겉으로는 저렇게 보여도 사실은….”

레스는 일부러 말꼬리를 늘렸다.


“말하지 마!”


루나가 용광로처럼 빨간 얼굴로 버럭 외치자 두 남자는 보이지 않는 힘에 밀려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와장창하는 신나는 소리와 함께 한참 바닥을 구르다가 레스와 피카니는 눈알만 돌려서 이상한 자세로 벽과 가구 사이에 낀 서로를 보았다.


피카니가 아픔에 신음하면서 말했다.

“네가 끼어들면 어째선지 항상 엉망이 된다는 거 알아?”

“이번에는 내가 의도한 거야. 나도 준비해둔 말이 있었는데 이제 꺼내도 될까?”


루나가 두 남자에게 다가왔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두 남자는 루나의 부축을 거절하고 자기 힘으로 어떻게든 일어났다. 그리고 목과 어깨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관절 꺾는소리를 내었다. 피카니와 루나는 서로 곁눈질로 눈이 마주쳤다가 얼굴을 붉히면서 시선을 피하고 레스를 노려보았다. 피카니가 물었다.


“준비해둔 말이 뭐야?”

“협력할게.”

덤덤히 그렇게 말하고 레스는 오른 손목을 조심스럽게 돌리면서 침대에 앉았다. 피카니와 루나는 정색하고 표정이 굳었다. 피카니가 진지하게 말했다.

“너…. 그게 뭘 의미하는지 제대로 알고 말한 거 맞지?”

“마음에 안 드는 곳으로만 향하는 갈림길이 나타났다면 그나마 덜 나쁜 방향을 고르는 대신 길을 새로 만들어야지. 이대로 가만히 너한테  운명을 맡기고 버티기만 하느니 이편이 낫다고 난 판단했어.”

“그래도 우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아자리아를 잡아서 인간들의 땅으로 끌고 가는 거야. 모르는 건 아닐 텐데.”

“마계에 파스낙만큼 위험한 놈이 셋이나  있어.”

레스는 혀를 찼다. 피카니하고 루나는 그가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계에 가까워질수록 만날 확률이 필연이라고 녀석이 그러더군. 아자리하고 샤키는 어지간한 놈들 상대로 자기 몸은 지키겠지만 그놈들과 만나게 되면 위험할 거야. 수단 가리지 않고 애들하고 다시 만나야겠어.”


피카니는 흡족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일단 가까워져야 우리한테서 탈출할 의미가 생기니까.”

레스는 피카니의 말투를 흉내 냈다.

“그건 대답할 의무가 없는 질문이야. 그리고 조건도 하나 걸게.”


“무슨 조건?”


“루나 씨도 데려가. 어차피 여정에 필요하잖아.”

루나가 자신을 가리키며 화들짝 놀랬다.

“하지만… 전….”


레스는 루나의 더듬은 말을 대신 보충해주듯 술술 매끄럽게 말했다.

“방법은 만들면 되는 겁니다.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잖아요.”

말을 마치고 레스는 오른손을 피카니에게 내밀었다. 피카니는 표정이 심각해지다가 각오에 찬 눈빛으로 레스와 마주 보았다. 레스가 말했다.


“허리에 총을 찼으면 죽든 살든 일단 뽑고 봐야지. 그게 무법자의 삶이잖아.”

“무법자들에게 경의를.”

피카니는 결연히 중얼거리며 레스의 오른손을 소리 나게 힘껏 잡았다.


“아야!”

레스가 방정맞게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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