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7화 〉[4권] 127화 - 까페 로얄 (127/188)



〈 127화 〉[4권] 127화 - 까페 로얄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죽든 경사가 일든 참사가 나든 세상 어딘가에는 사람들의 일상이 계속된다. 변두리에 있는 좁은 길목의 간판 없는 어느 술집의 점원은 영업 중지 간판을 걸고 있었다. 시각은 늦은 오후였다. 저녁이 되기 전은 휴식 겸 준비 시간이다.


점원은 중년 사내였는데 동공이 파충류처럼 갈라져 있었다. 단정하게 다림질된 바텐더 정장을 입었고 수염도 지저분하지 않게 모조리 쳐냈다. 올이 굵은 금발 머리칼도 마찬가지로 청결하게 숱을 짧게 쳤다.  벌어진 어깨와 곧게 펴진 등이 보기 좋았다. 이마에는 주름이 한 줄 깊게 그어져 있고 뺨에도 골이 파여서 보는 이들에게 삶의 상처를 짐작게 했다.  탄탄하고 균형 잡힌 체격에 고양이 눈과 살짝 험상궂은 외모가 섞여 입고 있는 바텐더 정장이 안 어울리면서도 동시에 어울려 보이는 기묘함을 자아냈다.

가게 안에는 피아노 소리가 흐르고 있다. 박자가 무척 빠르고 음이 경쾌했다. 사내는 영업 중지 간판을 걸고 나서는 칵테일 만드는 도구들을 설거지했다. 그가 설거지를 마치고 빗자루에 손을 뻗으려는데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브레이크 타임이라서 주문은 안 받습니다. 숙소 예약이라면….”

사내는 습관적으로 말하다가 상대들의 모습을 보고 표정과 몸이 굳었다. 둘이 들어왔는데 하나는 길게 기른 검은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서 짧은 꽁지를  황인 사내였다. 눈가와 미간에 칼자국처럼 날카로운 주름이 파였고 아몬드형 눈매도 거기에 못지않게 부리부리했다. 피부색은 살짝 까무잡잡하면서도 누리끼리했다. 입고 있는 검은색 정장은 균형 잡힌 몸매에  맞춰 재단한 덕에 갑옷처럼 보였고 목깃에 맨 파란색 넥타이가 눈에 확 띄었다.

다른 하나는 정말로 갑옷을 입은 누군가였다.  위를 통째로 덮는 양동이 같은 투구의 앞면에는 십자 모양의 틈만 살짝 나서 얼굴이 안 보였다. 신장 자체는 같이 들어온 사내와 비슷했지만 입고 있는 갑옷 때문에 덩치가 실제보다 훨씬 크게 느껴졌다. 면 갑옷, 가죽 갑옷, 철판 보호구로 온몸을 완전히 덮어서 맨살이 전혀  보였다. 왼팔에 낀 건틀렛에는 총구 비슷해 보이는 기계장치도 붙어있다. 등에는 종아리까지 늘어선 검은색 망토가 걸음마다 그림자처럼 나부꼈다.

황인 남성은 자기 마음대로 가게 문의 잠금장치를 걸어 잠갔다. 위쪽, 아래쪽, 빗장. 그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점원을 향해 말했다.


“스승을 불러라.”


갑옷을 입은 사람은 사내를 노려보았다. 표정도 없었고 눈도  보였지만 시선은 느껴졌다. 사내는 침을 꿀꺽 삼키고 바에 올려둔 종을 치면서 외쳤다. ‘칭!’


“마담!”


그 와중에 피아노 소리는 여전히 경쾌했다. 피아니스트는 무슨 일이 나든 상관없는 듯하다. 일상은 계속된다. 위층으로부터 구둣발 소리를 내면서 계단을 타고 바텐더 정장을 입은 나이 지긋한 여인이 내려왔다. 윤기 없는 은발은 묶어서 핀으로 정돈했고 주름진 얼굴에는 테두리가 예리한 금테 안경이 씌워 있다. 그리고 나이답지 않게 자세가 꼿꼿하고 체격도 훤칠하다. 신은 구두는 검은색으로 윤이 났다.


여인은 숙성된 연륜이 느껴지는 검은색 눈동자로 손님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모르스 요원은 고개만 뒤로 돌려서 여인을 바라보고는 몸을 돌려서 다른 바텐더를 바라보면서 불평하는 투로 말했다.

“다른 스승.”

여인이 바텐더가 있을 자리로 가고는 각진 얼굴로 정중히 말했다.


“오랜만에 보는군요. 모르스 리.”


모르스 요원은 한숨을 쉬면서 바에 한쪽 팔을 뻗어서 몸을 살짝 기댔다.

“만나서 반갑소, 케이트 와르네 맞지? 


“요즘은 마담 윈프리입니다.”


“그나저나 우리가 직접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오만. 오랜만이라고?”


윈프리는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1887년 5월 21일. 브라운 힐. 우리는 같은 곳에 있었죠. 서로 변장 중이었고.”

모르스는 한쪽 입가를 실룩였다.

“내게  방 먹였군. 흠. 지금은 완전히 은퇴한 건가 마담?”
“상황에 따라 다르죠.”

그는 말투를 유지하면서 매끄럽게 바로 물었다.

“‘준비된 새’는 어디 있지?”


“상황에 따라 다르죠. 그는 계속 움직이니까요.”

갑옷을 입은 사람이 말했다. 낮고 굵은 목소리가 투구 안에서 울렸다.

“허튼소리를 들으려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윈프리는 팔짱을 끼면서 갑옷을 입은 사람을 바라보았다.


“손님은 주인에게 예를 갖추라고 경전에 적혀있지 않던가요?”

분위기가 살벌해져 가는 와중에 피아노 연주는 끝날 기미가  보였다. 치고 있는 곡도 박자가 빨라서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이 얼얼해질 법도 한데 그는 음 하나 틀리지 않았다. 모르스는 일행의 말을 가로막듯이 서둘러서 먼저 말했다.

“캘러헬은 어디 있지?”


“멀지 않은 곳에.”

윈프리는 눈을 살짝 감으면서 날숨을 내쉬고 아직도 신명 나게 건반을 때리는 남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모르스가 저쪽을 자세히 보니 남자가 쓰고 있는 보울러 중절모 밑으로 흰색 머리카락이 살짝 드러나 있었다. 윈프리가 점원을 바라보고 말했다.

“히콕. 청소는 나중에 해.”

중년 사내는  말에 따르듯 바 안쪽으로 들어가 도망치듯 그녀의 곁으로 갔다. 모르스와 갑옷을 입은 사람은 저쪽으로 갔다. 그들은 뚜벅뚜벅 걸음에 체중을 실어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피아노 근처로 도착하자마자 모르스는 피아노에 걸려있는 악보를 다짜고짜 뺏었다. 피아니스트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연주했다.


악보를 바라보고는 모르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터키 행진곡. 모차르트. 처음 들어보는 곡에 들은  없는 작곡가라. 흠.”

피아니스트는 손목을 튕겨서 음을 하나 찍고 연주를 멈췄다. 그리고 뒤를 바라보며 모자를 벗었다. 하얀색 머리카락은 7대 3으로 곱게 빗었고 살짝 긴 머리카락 밑으로 깊게  눈두덩에는 그림자까지 고여있었는데 남자는 환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수염은 머리카락과 똑같이 하얀색을 띠었는데 관리되지 않아서 입 주변과 턱이 까슬까슬했다. 날렵한 턱선에 입매는 선명하고 얇게 찢어진 입술은 검붉어서 남성미가 강렬하다. 미소보다는 무표정이 더 근사할 외모였으나 남자의 표정은 눈이 부실 정도로 쾌활하다.


“좋은 곡이지. 안 그래?”


모르스는 악보를 돌려놓았다.

“핑커튼 4인방. 황야의 7인. 첫 번째 카우보이. 황야의 하얀 바람. 고독한 레인저. 별명 참 더럽게 많더군.”

남자는 순식간에 웃는 얼굴을 차가운 표정으로 바꿨다. 상대를 삿대질하며 그가 말했다.

“부럽지?”


그리고 남자는 의자를 손으로 밀어서 자기 엉덩이의 위치를 비틀어 삿대질하는 손의 방향을 바꿨다. 갑옷을 입은 사람을 가리키면서 그가 말했다.


“그쪽은 처음 보지만 누군지 알  같아. 백작이었던가 자작이었던가?”


갑옷을 입은 사람이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작위는 오래전에 반납했다.”

“당신네는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절대로 투구 안 벗는다는 거 사실이야?”

모르스가 둘 사이를 가로지르듯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일단 신사답게 같은 탁자에 앉는 게 어떻겠나. 미스터 캘러헬.”

캘러헬은 악보를 접어서 피아노 위에 올리고 건반 덮개를 닫았다. 윈프리와 같이 있는 히콕이 같은 탁자에 자리를 잡는 세 사람을 바라보면서 떠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체 이게 어떻게  일이랍니까? 그랜드 마스터 셋이 같은 자리에 모였잖습니까.”


“개척시대 이래부터 수십  동안 이런 일은 나도 처음 봐. 흥미롭군.”


“이제 어떡합니까?”


“자네는 설거지나 해.”

“아까 다 했는데요?”


“그래도 해.”

윈프리는 퉁명스럽게 히콕의 불만을 받아치고 바에 몸을 기대고 귀에 신경을 기울였다. 캘러헬이 등받이에 한쪽 팔을 걸고 삐딱하게 앉은 채 운을 떼는 참이었다.


“무슨 일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셨나.”


모르스는 안주머니에서 칼을 뽑는 것처럼 정확하고 예리한 손놀림으로 봉투를 꺼냈다. 캘러헬은 압착기에 들어갔다가 나온 거처럼 빳빳한 봉투를 받고 겉을 뜯어서 내용물을 꺼냈다. 안에 들어있던 접힌 종이를 펼쳐서 천천히  읽고는 그가 눈썹을 실룩였다.


“귀대 명령서? 이건 진짜 예상 밖인데.”

모르스가 감정이 사라진 사무적인 투로 술술 말했다.


“토마스 트로이 캘러헬. 쇼생 육군 기병대의 13연대 출신이자 인류 연방군 레인저 5기 소속. 실종되기 직전 계급은 준위에 병과는 용기병. 틀린 사실은 없을 텐데.”


캘러헬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수십 년이 지났는데 이제야 나한테 신경을 쓰신다? 흠.”


“정확히는 당신이 실종된  68년하고도 4개월 만이지. 사망처리 됐지만 멀쩡히 살아있는 게 확인됐으니 나머지 절차는 당연한 거 아니겠나.”

“군대 두 번 가는 게 당연하다면 말이지.”

갑옷을 입은 사람이 말했다.


“파스낙이 본격적으로 이곳에서 활개를 치게 된 계기가 너의 제자들이 널 변절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


“그랬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변명해봐라. 돌연변이.”

“제자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꼴이 났는지 말해보시지.”


갑옷을 입은 사람과 모르스가 차례대로 말했다. 캘러헬은 깍지 낀 손을 탁자 위로 올리고 손끝을 서로 살짝 부딪치면서 뜸을 들였다.

“난 제자들한테 예전에 분명히 말했어. 우리들의 시대는 지났다고. 야생으로 갈 사람은 떠나고 내 곁에 남으려면 각오하라고 했었지. 그런데 나와 함께 도시에 남은 제자들은 나한테 특별한 계획이 있는  알았던 모양이야. 녀석들은 나한테 실망했고 벌이가 확실한 새로운 주인을 찾아 떠났어. 그게 다야.”


모르스가 말했다.

“그럼 미련 없이 돌아가면 되겠군. 사냥할 괴물도 없는데 황무지에 남을 이유도 없지 않나.”


“그건 괴물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문제지. 요즘은 공산주의자들을 그렇게 취급하는 거 같더라고.”


모르스가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입가에 띄웠다.


“이제는 잡을  없어서 빨갱이를 사냥하시려고?”

“에이. 아무리  게 없어도 다른 사람 밥줄은 훔치지 않아.”

캘러헬은 싱긋 웃으면서 쥐고 있던 손의 검지와 엄지만 펴서 상대를 가리키는 손짓을 했다. 모르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고 갑옷을 입은 사람한테서 투구 안쪽으로부터 쿡쿡하고 웃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르스가 노골적으로 날이  눈초리로 옆 사람을 흘겨보았다.

“뭐가 웃겨?”


“똑같은 놈들끼리 서로 깎아내리는 꼴을 보고도 웃음을 참기란 어렵지.”

연극배우가 무대에서나 할 법한 고풍스러운 말투로 갑옷을 입은 사람이 말했다. 캘러헬은 소리 없이 입술만 살짝 벌려서 실실 웃고 있다. 모르스는 혀를 차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바에서는 커피 원두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커피를 내리려는 거 같다. 캘러헬은 삐딱하게 앉았던 자세를 제대로 고쳐잡고 팔꿈치를 탁자에 기댔다. 한숨을 쉬고 그가 말했다.

“돌려서 말하기도 이젠 귀찮군. 생각 있으면 한꺼번에 덤벼.”

갑자기 윈프리가 소리를 질렀다.


“싸울 거면 나가서 싸워! 도시 바깥에서!”

모르스는 고개를 돌리고 목소리를 높여서 대답했다.

“그런 야만적인 짓은  합니다! 저희는 문명인 아닙니까.”

높였던 어조를 원래대로 되돌리고 그가 캘러헬을 바라봤다.

“내일까지 짐 쌀 시간을 주지. 서로 신사답게 굴자고.”

“나한테 만약 쌀 짐도 없고 혹은 짐을 쌀 생각도 없으면 어쩌려고?”


“그럼 그랜드 마스터 둘이 여기에 온 이유 중 하나를 알게 되는 거지.”

캘러헬과 모르스는 눈싸움을 했다. 경직된 분위기가 한참 이어졌다. 갑옷을 입은 사람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침묵을 깼다.


“사실 그쪽을 만나게  때 꽤 기대했던 게 있었는데. 도통 모습을 안 보이는군.”

캘러헬이 한쪽 눈을 찡그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대했던 거라니?”

“듣기로는 파트너가 페어리라고 하던데. 과장된 소문이었나?”

갑옷을 입은 사람은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갑자기 그들에게 인기척이 다가왔다.

“까페 로얄 3잔 나왔습니다!”


어려 보이는 점원이 발랄한 목소리로 말하며 향긋한 김이 피어나는 커피를 쟁반에서 하나씩 탁자로 옮겼다. 몸집은 작았고 머리카락 색은 하얀데 결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솜털 같았다. 부드러운 하얀색 머리카락에 하얀 피부와 커다란 까만 눈동자가 합쳐지니 왠지 모르게 누에나방을 연상시켰다. 소녀 같기도 했고 소년 같기도 하다. 붉은 바리스타 앞치마가  어울렸다. 험상궂어 보이는 놈들만 앉아있는 탁자에 점원의 존재감은 어둠 속의 도깨비불에 비견되었다.


점원이 커피잔에 작은 숟갈을 걸쳐두는 동안 캘러헬은 시치미 뚝 뗀 표정을 지었다.


“난 그런 사람 몰라.”

커피잔에 걸쳐둔 숟갈 위에 각설탕을 올리고 점원이 브랜디 병의 뚜껑을 땄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각설탕을 브랜디로 적셨다. 갑옷을 입은 사람이 자기 앞에 놓인 각설탕이 브랜디에 젖어가는 걸 보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모르스는 점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우린 이거  시켰는데.”

점원이 양손으로 윈프리와 히콕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발랄하게 말했다.


“저쪽에 계시는 신사분들께서 보내주시는 겁니다!”

커피 내리는 도구를 정리하면서 윈프리가 말했다.


“손님 대접이 형편없었다는 소리는 듣기 싫으니까.”

점원이 이번에는 캘러헬을 향해 양손으로 가리키며 발랄하게 말했다.


“계산은 앞에 계시는 신사께서 하실 겁니다!”


캘러헬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점원은 그러거나 말거나 모른 척하고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성냥의 머리를 손톱으로 긁어서 활짝 웃으며 무법자처럼 불을 켰다. 그리고 브랜디를 적신 각설탕에 성냥불을 갖다 댔다. 타오르는 브랜디의 향과 설탕의 캐러멜 향, 그리고 커피 향이 한데 뒤섞여 황홀한 조화를 이루었다. 각설탕에 피어나는 푸른 불꽃도 운치를 더해주었다. 갑옷을 입은 사람이 팔짱을 낀 손에 힘을 잔뜩 주면서 고문을 버티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큭!”

점원이 성냥불을 들고 모르스에게 다가오자 그가 정중한 손짓으로 거절하며 말했다.


“내가 하지.”

모르스는 엄지와 검지를 맞대서 비비다가 검지 끝으로 각설탕을 건드렸다. 그러자 각설탕에 불이 붙었다. 점원은 놀랍다는 반응을 귀엽게 내주었다. 모르스는 향을 감상하며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 점원에게 건넸다.

“팁이다.”

점원은 활짝 웃으면서 팁을 받아들고 캘러헬에게 다가갔다. 성냥불을 붙여주다가 은근슬쩍 각설탕을 건드려서 커피에 빠트렸다. 캘러헬의 한쪽 입가와 뺨이 계속 꿈틀거렸다. 모르스가 불이 꺼지고 반쯤 캐러멜이 된 각설탕을 살짝 깨물고 상대를 비웃었다.

“네 까페 로얄은 생명을 잃었군. 안타깝도다. 그러고 보니 이거 쇼생 방식이지?”


점원은 캘러헬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안 하고 잽싸게 자리를 떠났다. 캘러헬은 각설탕이 들어간 커피를 홀짝이고 말했다.

“아예 마시지도 못하는 놈보다는 낫지.”


갑옷을 입은 사람은 가만히만 있었다. 모르스는 고소하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자기 옆 사람에게 보이도록 조금씩 각설탕을 깨작였다. 캘러헬도 이점에 한해서는 처음으로 상대와 뜻이 맞았다. 자기를 두고 커피를 즐기는 이들을 향해 갑옷을 입은 사람이 말했다.


“이교도의 음료일 뿐이다.”

저쪽을 가만히 구경하던 히콕이 윈프리에게 물었다.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는 분명 르바티아 출신이었죠?”

“맞아. 밥은 굶어도 커피는 못 거르는 족속들.”

윈프리는 방금 받은 팁을 자랑하는 어린 점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병원의 남자 화장실 안에서 카르델과 레스는 나란히 소변기 앞에 섰다. 둘은 바지춤을 내리고 볼일을 보았다. 그러다 카르델은 레스 쪽을 흘겨보고는 ‘훗’하고 소리 내서 웃었다. 당연히 레스는 신경 쓰여서 물었다.


“무슨 의미로 한 웃음이야 그거?”

“사쿠라비는 어떤 총을 갖고 있나 봤는데 솜씨만큼 별나지는 않구먼. 내가 이겼다.”


두 남자는 볼일을 다 보고 세면대로 향했다. 손을 씻으면서 레스가 말했다.

“중요한 건   자체가 아니야. 어떤 총잡이가 쓰느냐에 달린 거지.”

카르델이 손에 묻은 물기를 대충 옷에 문지르면서 능글맞게 말했다.

“좋아. 그럼 그 총 얼마나 써봤어?”

“수준하고는.”

레스가 불쾌해져서 인상을 찡그렸다. 화장실을 나오고 난 다음에는 레스가 앞장섰고 카르델이 뒤를 따랐다.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거야. 실전 경험은 중대 사항이라고.”

“계속 궁금해하시길.”


두 남자는 병실로 향했다. 병실 문을 열자마자 타티아나와 레스의 눈이 마주쳤다. 타티아나가 급한 표정을 지으며 다짜고짜 바깥으로 나오고는 레스의 멱살을 잡고 끌었다.


“뭐… 뭐야? 왜 그래?”


카르델이 묻자 타티아나는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넌 신경 쓸 필요 없어. 들어가.”

카르델은 안 들리는 목소리로 투덜거리면서 병실로 들어가고 문을 닫았다. 복도에 레스와 자기만 있게 되자 타티아나가 진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까 너희 둘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마법사님이 나한테 오셔서 속삭이시더라고.”

“그리고.”

“중요한 상담이 있으시대. 다른 사람에겐 못하고 나한테만 말할  있는 고민이시라는 거야.”

레스는 이 시점에서 안 좋은 예감을 느끼고 인상을 구겼다. 타티아나는 레스가 뭐라고 말하려고 하자 그의 말을 가로채고 일단 들으라는 듯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작게 쥐어짰다.

“나는 당연히 도울 수 있는 건 뭐든 도와드리겠다고 했지. 그런데 뭐라고 하셨는지 알아?”


“듣고 있어.”

타티아나는 루나의 목소리와 표정을 흉내 냈다. 고양이들이 평소에는 도도해 보여도 애교 부릴 때는 한 없이 귀여워지듯 타티아나도 인상이 확 바뀌었다. 그녀는 소심해 보이는 가녀린 목소리를 내고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피카니 씨가… 나 좋아한대…. 어쩌면 좋아요?”


레스는 입술이 하얘질 정도로 깨물다가 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야?”

“왜냐하면, 나도 어째야 할지 모르니까!  루나 씨가 위장 신분 만드는 방법이라도 알려달라는  줄 알았지! 연애 상담을 내가 어떻게 감당하라고!”


“똑같은 질문이지만.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는 건데….”

맥빠진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마법사님이랑 계속 대화해봤지. 좋아요. 상대 마음은 어떻게 확신하게 됐나요? 레스 씨 덕분에 어쩌다 보니…. 라고 하시더라?”

레스는 등이 식은땀으로 흥건해졌다. 그의 동공이 떨리는 걸 보고 타티아나는 이를 갈았다.


“설명하겠어?”

“일단 틀린 사실은 없긴 하다만…. 어흠. 그냥 피카니만 약 올릴 생각이었는데 루나 씨가  정도로 순수하실 줄은 몰랐지.”

“재앙 덩어리.”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 듣기 지겹다는 손짓을 했다.

“그저 연애 상담이잖아. 성별이 여자인  상대가 필요하신 걸 테니 자기 경험을 곁들여서 처리하면 되지 않겠어?”


타티아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레스는 자기가 너무 심한 말을 한 건가 싶어서 했던 말을 되짚어 봤으나 머릿속만 복잡해질 뿐이었다. 그의 날쌘 눈썰미로 기껏 눈치챈  ‘자기 경험을 곁들여서’라는 대목에서 상대의 반응이 커졌다는 거였다. 깊은 고민 끝에 레스는 잘못을 깨달았다.


“알았어. 내가 사태를 더 심각하게 만든 건 인정해.”

“부디 너의 협력이 이 난장판도 수습할 만한 가치가 있기를 절실히 기대한다.”

타티아나는 이제 화내기도 지친다는 듯 눈썹을 늘어트리고 그의 어깨를 붙잡고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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