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4권] 130회 - 더 커졌잖아
일행이 목적지로 둔 곳이 바로 앞에 보였다. 간판도 없고 이름도 없는 건물. 문에는 영업 준비를 알리는 문패가 걸려있었다. 평소라면 가게 내부를 환히 드러냈을 유리창에는 커튼이 드리워졌다. 루나가 일행에게 물었다.
“지금이 가장 사람이 몰릴 시간인데 왜 영업을 안 하고 있을까요?”
타티아나가 말을 받았다.
“손님을 받을 수 없는 사정이 생긴 거겠죠.”
레스는 문손잡이에 손을 뻗기만 하고 잡는 걸 머뭇거리다가 고민 끝에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잠겨있지는 않았다. 일행은 안으로 들어갔다. 술집에 들어가면 보통 먼저 손님들이 앉는 좌석이 보이고, 그 너머로 바텐더가 자리를 잡는 바가 나온다. 일행들은 시선이 손님들이 있는 곳으로 시선이 쏠렸다. 웬 갑옷을 걸친 사람이 그곳에 앉아있었으니까.
갑옷을 입은 사람이 자리 잡은 탁자에는 정장을 입은 황인도 같이 있었다. 위치상 방금 들어온 일행에겐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그의 등과 짧게 꽁지를 튼 뒤통수만 보였다. 황인은 유리잔을 높게 들어 거울처럼 써서 뒤를 보았다. 잔에 비친 레스의 얼굴을 보고 황인은 뒤도 안 돌아본 채 말했다.
“드디어 왔군.”
피카니가 자리에 앉은 상대들을 향해 가시 돋은 목소리로 외쳤다.
“당신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갑옷을 입은 사람이 낮게 깔린 어조로 말했다. 투구 때문에 발음이 텁텁하게 들렸다.
“오래 있지는 않을 거다. 너희를 기다리느라 시간을 너무 썼으니.”
루나는 갑옷을 입은 사람을 알아보고는 몸을 움츠렸다.
“베르나르 경!”
갑옷을 입은 사람도 루나를 알아보고는 계속 기다리느라 흐트러졌던 자세를 갑자기 곧게 잡았다. 레스는 그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황인이 다리를 뻗어서 탁자에 놓인 다른 의자를 바깥쪽으로 끌고는 말했다.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지 않는 채.
“앉아. 사쿠라비.”
레스는 딱딱하게 말했다.
“사쿠라비는 정체를 밝히지도 않는 사람과는 같은 자리에 앉지 않을 것이다.”
황인은 코웃음을 치고 탁자를 팔꿈치로 밀면서 몸과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황인 특유의 아몬드형 눈매 속에서 작고 검은 눈동자가 레스를 흘겼다.
“내 이름은 모르스. 성은 리. 시크릿 서비스의 그랜드 마스터다.”
“그랜드 마스터? 당신이 제일 높은 사람이야?”
“현장에 뛰는 사람 중에서라면 말이지. 내 맞은편에 있는 저 갑옷은 베르나르. 성은 없어.”
레스가 베르나르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당신도 그랜드 마스터야? 루나 센델자레를 데리러 온 사람?”
“앉아. 이교도.”
베르나르의 어조에는 위협과 경멸이 낮게 깔려있었다. 레스는 덤덤한 얼굴로 자신의 일행들을 엄지로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나만 앉으라고? 다른 사람들은 어쩌고?”
모르스가 말을 받았다.
“우린 지금 너한테만 용건이 있어.”
“그럼 같이 앉아도 크게 상관없겠군. 일행들과 같이 앉을 수 없다면 이대로 돌아가겠어.”
레스의 으름장을 듣고 베르나르가 한숨을 쉬자 갑옷 속에서부터 거친 바람 소리가 났다.
“좋을 대로 하라고 해. 괜한 거로 시간 버리기는 싫어.”
모르스는 한쪽 입가를 삐죽 잡아당겼다가 탁자를 손등으로 두드렸다.
“좀 더 큰 탁자로 옮기지. 의자는 알아서들 가져오시게.”
가게에 들어온 일행은 자리를 잡으면서 뒤늦게 바 쪽을 의식했다. 긴장으로 표정이 굳은 히콕이 애써 이쪽을 의식하지 않으며 잔을 손수건으로 닦았고 근처에는 몸집이 작고 어린 점원이 다리를 바깥쪽으로 내놓고 바에 걸터앉았다. 레스는 처음 보면서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어린 점원을 보고는 생각에 깊이 빠져 잠깐 동작이 멈췄다. 갑자기 레스는 무언가를 깨닫고 눈을 부릅뜨며 입을 쩍 벌렸다. 피카니가 레스의 자리를 잡아주면서 재촉했다.
“뭐 하고 있어? 다들 기다리잖아.”
어린 점원이 작게 손짓해서 레스에게 인사했다. 레스는 저쪽을 향해 살짝 고갯짓하고 자리로 갔다. 루나는 타티아나와 바싹 붙어서 앉았다. 레스와 피카니 맞은 편에 모르스와 베르나르가 탁자에 손을 올리고 엄숙히 있었다. 레스는 마른 침을 삼키고 운을 떼었다.
“당신 바다 건너 사람이군.”
모르스는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불만인가?”
“시크릿 서비스는 연방 보안관을 담당하는 곳이지? 연방 보안관은 제국 귀족만 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바다 건너 사람이 어떻게 그런 조직의 그랜드 마스터가 됐지?”
“그 질문에 대답하려면 이야기가 길어져.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다고만 말해두지.”
베르나르가 말했다.
“난 아직도 저 이교도가 우리하고 무슨 상관인지 이해가 안 되는데.”
베르나르의 말에 모르스가 대답했다.
“무슨 상관이냐고? 모든 면에서 관련이 있지. 안 그러나 홀리데이 경?”
피카니는 말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레스는 베르나르가 쓰고 있는 투구 너머로 시선을 느꼈다. 베르나르가 숨을 길게 내쉬고 말했다.
“저 이교도가 재림한 용사라는 말을 나더러 정녕 믿으라는 건가?”
레스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섰다.
“아까부터 날 이교도라고 부르시는데 난 종교 없어! 그만해! 돼지고기 먹는다고!”
루나하고 타티아나가 입술을 필사적으로 깨물다가 슬쩍 고개를 돌리고 피식 웃었다. 모르스가 레스를 바라보면서 나직이 말했다.
“내 일행의 무례에는 내가 대신 사과하지. 그리고 용사와 마왕 같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는 이 탁자에서 거론되지 않을 것이야. 뭐, 차기 마왕에 대한 주제는 피할 길이 없겠지만.”
레스는 혀와 턱에 힘을 주고 한 글자씩 또렷하게 제일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원하는 게 뭐야?”
모르스는 탁자 위에 올려놨던 손을 들고 손가락 마디를 소리가 나게 꺾었다. 자신의 손을 노려보면서 사색하는 투로 그가 대답했다.
“서로 원하는 것을 주고받는 행위. 거래라는 단어로도 부르지. 일단 나는 자네가 우리한테 협조해줬으면 좋겠어. 할 수 있으면 당장 오늘 거기 일행하고는 작별하고.”
“어떠한 것에 대한 협조를 원하는 건데?”
그는 고개를 오른쪽 위로 올리면서 은근슬쩍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상대를 보았다.
“자신한테 얽힌 관계들이 얼마나 특이한지는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레스는 탁자를 한번 바라보고 시선을 들어 올렸다.
“내가 이쪽 일행하고는 작별했다 치고. 내 협조가 만족스럽지 못하면 난 어떻게 되지?”
명랑한 어조로 모르스는 대답했다.
“이것도 일일이 설명하면 입 아프지. 하기 나름에 달렸어.”
“그럼 최악의 경우만 말해봐. 그건 반드시 들어보자고.”
모르스는 미소와 무표정 사이에 있는 오묘한 얼굴로 점잖게 말했다.
“널 술탄에게 보낼 수 있지.”
레스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너무 세게 깨물어서 그의 턱이 떨리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자리에 있는 일동들은 레스의 반응과 생뚱맞은 화제 때문에 술렁였다. 여태껏 침묵을 지켰던 루나가 말을 꺼냈다.
“술탄하고 하자르 씨랑 무슨 관계가 있는데요?”
모르스는 연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시원하게 대답해드리고 싶지만 일단 기밀이고, 무엇보다 미스터 하자르가 싫어할 겁니다.”
레스는 이빨 사이로 날숨을 뱉고 진정을 되찾았다.
“내가 당신들이 싫다고 한다면? 차라리 날 배신한 놈하고 같이 있겠다고 한다면?”
모르스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자네한테 12시간을 주지. 12시간 동안 잘 생각해봐.”
“이상한 곳에서 친절하군. 당장 날 끌고 갈 수도 있을 텐데.”
레스는 눈을 독수리처럼 부릅떴다. 상대는 자신의 턱을 엄지손톱으로 긁었다.
“자기 의지로 찾아오는 게 제일 효율이 높으니까. 억지로 끌고 가면 우리가 자네한테서 뭘 얻겠어? 레스 알 하자르는 겨우 그런 식으로 낭비되기에는 너무 아까운 존재야.”
모르스는 말을 하다말고 자기 자리 근처에 놓아둔 서류가방에 손을 뻗었다. 그는 가방을 열고는 뒤집어서 내용물을 탁자에 떨어트렸다. 그건 파스낙 리차트라가 쓰던 지팡이였다. 일행은 다들 놀랐고 타티아나의 입에서는 탄식 비슷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태껏 팔짱을 끼고 가만히 있던 베르나르가 지팡이에 손을 뻗었다. 베르나르의 손에 잡힌 지팡이에서 전깃불이 튀기 시작했다. 마치 지팡이가 그를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듯 저항하는 거 같았다. 베르나르는 아픈 기색 하나 없이 불꽃이 튀는 지팡이를 손에 쥔 채 차분히 관찰했다. 장갑 타는 냄새가 지독했다. 투구에 번갯불이 반사돼서 탁자 주변이 조금 밝아졌다.
“마녀사냥 시대 때 만들어진 거다. 익숙한 문장이 박혀있군. 그 오랜 세월이 흐르고도 아직 살아있는 ‘언령베기’가 그놈 손에 있었다니.”
베르나르는 지팡이의 끝부분을 잡고 비틀어서 잡아당겨 봤다. 하지만 지팡이는 꿈쩍도 안 했다. 그는 지팡이에서 손을 떼고 탁자에 되돌려놓았다. 되돌려놓을 때 그는 만에 하나 번갯불이 루나에게 튀지 않도록 손길에 신경을 썼고 레스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지팡이에서 튀던 번갯불이 멎자 베르나르가 레스에게 권유하는 듯한 손짓을 했다.
“봤다시피. 이런 유서 깊은 강력한 물건들은 그냥 손에 들어왔다고 해도 누구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사쿠라비. 칼을 뽑아봐라.”
“뭐? 싫어!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레스는 질색했다. 루나가 난데없이 적극적으로 끼어들었다.
“어서 뽑아봐요. 손 다치시면 바로 고쳐드릴게요.”
“별로 위로가 안 됩니다만….”
베르나르는 말없이 눈을 반짝이는 루나를 바라보았다. 투구를 쓴 그의 얼굴에서는 아무 감정도 읽을 수 없었지만 동시에 많은 해석을 떠올리게 했다. 레스는 조심해서 지팡이를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이상한 반응은 없다. 제대로 쥐었다. 아무 일 없다. 대충 감으로 칼자루와 지팡이를 잡고 비튼 다음 잡아당기자, 세검의 칼날이 칼집을 긁는 사늘한 소리가 났다. 레스는 혀를 찼다.
“허.”
굳이 끝까지 뽑아서 칼을 구경할 생각은 없었기에 레스는 반쯤 뽑고 다시 돌려놓았다. 그가 지팡이를 탁자에 놓자 메마른 소리가 울렸다. 레스가 모두에게 들리도록 자신한테 질문했다.
“어째서 내가 이 칼의 주인이 됐지?”
타티아나가 대답했다.
“그 녀석에게 결정타를 먹인 게 너였잖아. 저 칼이 자기 주인을 쓰러트린 자를 새로운 주인으로 정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파스낙이 변덕으로 너에게 양도해줬을지도 모르겠군.”
모르스가 이어서 말했다.
“파스낙 리차트라는 마법사를 죽이는 마법사이자 암살자를 죽이는 암살자라고 불렸던 위험인물이었다. 오랜 세월 우리는 옷자락 한번 못 잡아봤었어. 놈을 쓰러트린 게 자네라는 사실은 대위의 보고서로 읽었지만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는데, 정말 해냈군.”
“당신들 일 처리를 보면 그놈 옷자락 한번 못 잡아봤다는 게 썩 놀랍지도 않아.”
레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빈정거렸다. 모르스는 눈을 살짝 감았다.
“아, 헨리 플러머 말하는 건가? 내부의 적이 가장 무서운 법이지. 곧 수습될 거야.”
“수습하면 끝인가.”
레스는 더 나오려는 말을 아끼려고 입가를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지팡이는 서류가방으로 돌아갔다. 타티아나가 그걸 보고 외쳤다.
“그 칼은 주인이 정해졌어. 주인에게 돌려줘.”
상대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주인은 아직 이쪽으로 오지 않았는걸. 그냥 줄 수는 없지.”
레스가 상대를 한심하게 여기는 말투로 말했다.
“그런 거로 유혹하는 거야? 정말?”
“그야 자네는 덜 물질적인 걸 원하겠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모르스가 책 읽는 투로 술술 말했다.
“자네가 인간들의 땅에 첫발을 디딘 기념비적인 날에 이런 기록이 생겼더군. 레스 알 하자르라는 이름의 남루한 이방인이 이미 잡힌 마왕을 쫓으러 떠날 원정대에 자원했다. 진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자 귀족만이 할 수 있는 연방 보안관이 되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레스는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안 떠올랐다. 상대는 계속 말했다.
“다음날, 그 동네 보안관이 난민촌에 숨어있는 아자리아를 찾기 위해서 주민을 협박하자 주민을 구하기 위해서 레스 알 하자르는 괜히 무리해서 나섰지. 보안관을 상대로 총알이 없는 총으로 결투를 하다가 결국에는 아자리아와 함께 붙잡혔고.”
레스는 상대의 말을 끊었다.
“그만! 요지가 뭐야?”
그 와중에 피카니와 루나, 타티아나는 관심 가득한 얼굴로 그의 사연을 듣고 있었다.
“연방 보안관이 되고 싶지? 정식으로 임명해주겠다. 그럼 자신의 신조를 지키면서 명예로운 총잡이로 살 수 있다. 난 그랜드 마스터야. 이방인이라도 임의에 따라 보안관으로 임명할 권한 정도는 당연히 있어.”
레스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당신 부하가 되라는 소리잖아.”
“하지만 옆에 있는 일행들이 너에게 약속할 수 있는 보답이 뭐가 있는데?”
“사쿠라비는 보답 때문에 싸우지 않는다.”
“저편에 있는 너의 친구들. 너의 친구들이 약속할 수 있는 보답이 뭐가 있지? 아무 세력도 없는 차기 마왕과 엘프 야만족이라니. 그들은 어떤 보답도 보장해주지 못해. 반면 나는 이 자리에서 당장 제국의 이름을 걸고 서명할 수 있는 계약서도 준비해왔다.”
“다른 말로는 종이로 만든 목줄이지.”
“차기 마왕의 가장 든든한 친구. 숨겨진 진짜 용사. 그리고 술탄에게 쫓기는 추방자. 방랑자여. 무법자여. 총잡이여.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이 상태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거 같아?”
레스는 대답하지 않고 눈가만 움찔거렸다. 베르나르가 모르스에게 말했다.
“그만 가지. 대답은 따로 알아서 12시간 뒤에 듣던가 해. 나하고는 관계없는 일에 시간을 너무 많이 썼어.”
“당신한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레스가 베르나르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자기한테 말을 돌릴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지 베르나르는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표정은 안 보였지만.
“뭐냐.”
“왜 투구를 안 벗어? 답답하지도 않아?”
“규칙이다. 다른 사람 앞에서 투구를 벗는 건 기사의 수치다.”
“설마 일상생활할 때도 내내 쓰고 다니는 건 아니지?”
“일하지 않는 동안에는 물론… 됐다. 상대해준 내가 멍청이지.”
베르나르는 의자를 뒤로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레스가 예고 없이 입을 열었다.
“당신들 루나 씨의 ‘기적’에 대해서 미리 알고 왔다고 했지.”
레스는 기적이라고 말할 때 일부러 힘줘서 강조했다. 베르나르의 움직임이 멈췄다. 순간 전시용 갑옷처럼 보였다. 갑옷을 입고 있는 탓에 오히려 동요가 감춰지지 않았다. 당황한 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정말 뜬금없는 주제였으니까. 레스가 이어서 피카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피카니. 두 사람 중 ‘기적’이라는 단어를 꺼낸 사람이 어느 쪽이야?”
“뭐? 몰라! 그런 사소한 거 일일이 기억나겠냐!”
피카니는 진심으로 놀라서 고개를 내저었다. 레스의 눈빛은 지극히 진지했다. 레스는 바로 시선을 저쪽을 향해 돌렸다.
“그럼 직접 말을 했던 본인들이라면 기억나겠지.”
모르스가 대답했다.
“그런 자잘한 거에 무슨 의미가 있지?”
“당신이 언급했나? 기적이라고?”
모르스는 콧방귀를 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안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고 다른 손으로 가리키면서 점잖게 말했다.
“12시간 뒤. 잊지 말라고.”
두 사람은 바깥으로 향했다. 나무 바닥 삐걱거리는 소리가 고막에 닿았다. 레스는 저쪽을 바라보지 않은 채 저쪽을 향해 말을 던졌다.
“파스낙한테 안부 전해줘. 난 괜찮다고.”
모르스는 레스의 뒤통수를 노려보면서 혀를 찼다. 마지막으로 일행을 향해 눈짓만 남기고 그는 가게를 나왔다. 루나는 계속 긴장하느라 힘들었는지 팔을 탁자에 올리고 바로 엎드렸다. 엎드린 채로 루나가 말했다. 목소리가 탁자에 부딪혀서 웅얼거리는 발음으로 들렸다.
“‘기적’에 대한 얘긴 왜 꺼낸 거예요? 갑자기 제 얘기가 나오니까 엄청 놀랐다고요.”
“애들아. 좋은 소식이랑 나쁜 소식이 섞였어.”
레스는 눈가를 부여잡고 등받이에 체중을 실으며 몸을 축 늘어트렸다. 타티아나가 물었다.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우리도 이해할 수 있게 말해봐.”
“일단, 저 베르나르라는 사람은 루나 씨한테 벌을 내리려고 온 게 아니야. 루나 씨가 나하고 내 친구들 편을 들어준 거 때문에 교회가 벌을 내리려는 생각은 없는 게 확실해.”
피카니가 미심쩍다는 눈치로 그를 보았다.
“무슨 근거로?”
“베르나르는 루나 씨한테만 태도가 깍듯했어. 둘이 서로를 알아보았을 때 갑자기 자세를 고쳐잡기도 했고, 아까 번갯불이 튀던 지팡이를 탁자에 돌려놨을 때도 루나 씨한테 불이 안 튀게 세심히 신경 쓰더라고.”
타티아나는 그의 주장이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그냥 루나 씨처럼 연약한 사람한테는 정중하게 구는 부류일지도 모르지. 일단은 기사잖아.”
“베르나르는 규율에 엄격한 인간이야. 상식적으로 이런 장소에서 투구 정도는 벗어도 큰 문제는 없는데 규칙이라며 정말로 지키잖아. 그런 사람이 루나 씨처럼 맹세를 어긴 사람한테 정중한 태도를 지킬까? 나한테 이교도라면서 깔보는 태도로 대하던 거로 봐서는 종교적인 신념도 굉장히 강한 사람인데.”
피카니는 그럴싸하다고 생각할 뻔했다. 하지만 바로 침착해졌다.
“네 말은 어디까지나 베르나르 개인의 성격에 대한 거잖아. 그가 맡은 일이 어떠한 건지 확정할 근거로 이어지지는 않아.”
“하고 많은 사람 중에서도 왜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가 직접 여기까지 루나 씨 때문에 행차해왔을까? 이미 시크릿 서비스의 그랜드 마스터가 있는데?”
“너, 파스낙. 루나 씨. 그리고 분명 캘러헬과 핑커튼 사람들 문제도 있지. 이걸 감당하기 위해 제국이 그랜드 마스터를 둘이나 보낸 건 충분히 이해가 가.”
“베르나르는 나한테 전혀 관심이 없었어. 너도 아까 들었잖아.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 때문에 여기서 시간을 낭비했다고. 그럼 베르나르는 순전히 루나 씨 때문에 도시로 왔다는 거야. 그랜드 마스터가 죄인 하나 이송하려고 직접 움직일까? 상식적으로 그냥 자기 부하를 보내지 않겠어? 내가 봤을 때는 루나 씨에게 벌을 내리려는 게 아니라 뭔가 다른 사정이 있어서 그랜드 마스터가 나타난 게 확실해.”
루나는 엎드렸던 몸을 일으키고 레스를 빤히 보고 있었다. 타티아나가 말을 받았다.
“그럼, 대체 그자는 무슨 용건으로 온 거야?”
“지금 그걸 어떻게 알겠어. 루나 씨를 죄인으로 끌고 가려는 게 아니란 건 확실해. 그래도 내 경험상으로는 이럴 때 좋은 일이 저절로 생긴 적은 한 번도 없었어.”
피카니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알 수 없는 미지의 더 커다란 위기란 말이지. 끝내주네.”
일행들의 주목이 루나에게 쏠렸다. 루나는 조금 생각한 다음 말했다.
“처음에 했던 질문인데, ‘기적’이라는 단어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이유가 뭔가요?”
레스는 눈동자를 아래쪽으로 깔았다.
“종교적인 어휘잖아요. 마법사들은 학자이자 성직자라면서요. 종교재판을 받으려는 사람이 기적을 행했다는 말을 떠올리니까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직감에 따라서 기습해봤던 거고. 아니나 다를까 그놈들은 대답을 피하더군요.”
타티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때는 나도 미심쩍은 걸 느꼈어.”
루나는 팔을 쭉 뻗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너무 피곤해요. 커피 생각이 간절하네요.”
그때 어린 종업원이 쟁반 위에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잔들을 올리고 근처로 왔다. 마법처럼 순식간에 인기척이 갑자기 나타나서 다들 조금 놀랐다. 잔을 탁자로 옮겨주면서 날쌘 말투로 종업원이 설명해주었다.
“카푸치노 나왔습니다! 저쪽에 계시는 신사께서 보내주시는 겁니다!”
어린 종업원은 큼직한 눈으로 일행을 바라보면서 손짓으로 바를 가리켰다. 바에는 히콕말고도 어느 틈엔가 마담 윈프리가 나타나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하얀 모자에게 경의를.”
레스가 손을 들어 보이며 감사를 표했다. 한편 피카니는 어린 종업원의 인상착의를 보고는 신경 쓰인다는 기색을 보이며 더욱 빤히 쳐다보았다. 종업원이 말했다. 표정 없이 싸늘하게.
“참고로 당신 몫은 없어.”
피카니는 그제야 깨닫고 외쳤다.
“세상에 더 커졌잖아!”
라카키는 햇살처럼 환하게 웃으며 레스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