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4권] 131회 - 달임 커피의 격식
여자들은 라카키의 정체를 알게 되자 처음에는 놀랬다가 이윽고 다른 무언가 때문에 속이 근질거리는 눈치였다. 제각기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쌓아가는 티가 얼굴로 드러났다. 말이 없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자 라카키가 바 쪽을 양손으로 가리키며 정중히 말했다.
“손님들께서는 괜찮으시다면 바의 스톨로 자리를 옮겨주시겠습니까?”
자그마한 몸집에 절도 잡힌 동작으로 일행을 접대해주는 라카키의 모습은 심히 앙증맞았다. 바에서 마담 윈프리가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카푸치노를 받은 사람은 잔 받침에 대고 들어서 바로 향했다. 물론 피카니는 빈손이었다.
일행이 각자 자리에 앉자 윈프리가 빙긋 웃으면서 한 사람씩 눈짓을 교환했다. 그리고 레스를 바라보면서 몸을 꼿꼿이 세우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건강하다니 정말 다행이야. 정말 걱정했어.”
레스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보내주신 초콜릿은 잘 받았습니다. 다만 일어났을 때는 속이 안 좋아서 못 먹겠더라고요.”
루나가 얼굴을 붉히면서 조심스레 손을 들고 말했다.
“제가 맛있게 먹었습니다.”
라카키는 어느 틈엔가 바 건너편으로 다람쥐처럼 움직이고는 윈프리의 곁으로 갔다. 그리고 바에다가 팔을 올리고 턱을 얹었다. 히콕은 뒷전으로 물러나서 불편한 표정으로 상자에 대충 걸터앉아있다. 그는 레스하고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라카키가 타티아나와 레스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낮에 고양이하고 레스가 같이 목인장 옮기던 거 봤어.”
변성기가 아직 안 온 소년처럼 저음과 고음이 오묘하게 섞인 중성적인 음색이 났다. 타티아나는 창피해서 표정 관리가 안 되는 얼굴을 커피잔과 잔 받침으로 가리면서 음료를 마셨다. 레스는 이미 잃을 체면 따위 오래전에 바닥나서 반응이 담백하기만 했다.
“윈프리 씨도 봤어요?”
그녀는 끄덕였다.
“아는 척하려다가 그만뒀어. 거리 한복판에서 그러면 상황이 복잡해질 거 같아서. 나중에 용건이 생기면 알아서 우리한테 찾아오겠거니 싶었지.”
“예. 뭐. 예상하신 대로 이렇게 왔습니다. 서로 풀어야 할 이야기가 엄청 많은 거 같은데. 어떤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까요.”
윈프리는 침착한 표정을 지키면서 말했다.
“급하게 돌아갈 이유 있어?”
“아뇨. 빨리 돌아간다고 거기서 따로 할 일도 없어요.”
“그럼 느긋하게 고민하고 털어놔.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지. 바는 무법자들의 안식처. 어떤 손님이든 평등하게 쉬어갈 자격이 있어. 그리고 여기는 내 가게야.”
레스는 배려에 감사하다는 뜻으로 눈을 지그시 감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라카키를 바라보면서 조금 서두르는 말투로 물었다.
“일단 중요한 이야기부터 하고 싶은데 그쪽이 너무 신경 쓰여서 못 참겠어요. 그날 그 순간에 당신이 죽은 줄 알고 엄청 걱정했는데… 커졌네요?”
라카키가 턱을 팔 위에 올린 채 대답한 탓에 발음마다 머리가 들썩거렸다.
“굳이 존칭 안 써도 돼. 나한테 상하관계나 나이 같은 개념은 의미가 없어. 아, 대답해야지. 난 지금 완전히 이쪽의 물질세계에 머무르는 상태야. 물질세계에 머무르려면 거기에 맞는 형태를 가질 필요가 있어. 그래서 지금 이런 모습이야.”
“죄송합니다만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레스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편 루나는 라카키의 말을 듣고 굉장히 흥분해있었다.
“나, 나도 그 쪽에게 편하게 말해도 돼요?”
“응.”
라카키는 팔에 턱을 얹은 채로 머리를 양옆으로 데굴데굴 천천히 흔들었다.
“꺄아! 고대종족하고 친구가 될 줄은 몰랐어! 역시 사람은 여행해야 해!”
팔을 안쪽으로 움츠리며 신이 난 루나를 레스하고 피카니는 나란히 무표정한 얼굴과 감정 없는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마침 카푸치노를 다 마신 타티아나가 입술에 묻은 우유 거품을 다 핥고 두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커피가 입에 맞았는지 그녀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내가 대신 설명할까?”
레스하고 피카니는 말없이 고개를 1cm 정도 움직였다. 타티아나는 방금 자기가 다 마신 커피잔을 가리키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레스는 낮에 톤토한테 이야기를 들어봤으니까 다양한 차원이 존재한다는 건 아직 기억하고 있겠지?”
“내가 금붕어냐.”
그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타티아나는 매끄럽게 말을 이었다.
“이 커피잔을 하나의 차원이라고 가정하지. 잔에 담긴 커피는 우주 공간이다. 그리고 커피를 이루는 성분들은 그 차원에 들어있는 생물, 무생물, 공간, 시간 등 모든 것에 해당하지.”
“왠지 길어질 거 같구먼.”
피카니는 레스한테만 들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페어리는…. 대체 페어리를 뭐에 비유해야 하지?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가장 정확한 표현이 뭐가 있지?”
타티아나는 말하다가 고민에 빠졌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루나를 흘겨보면서 그녀는 눈빛으로 도움을 청했다. 타티아나는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했다. 마시던 카푸치노를 삼키고 루나가 말했다.
“커피잔을 커피로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레스는 바에 한쪽 팔꿈치를 데고 턱을 손바닥에 괴고 있다가 질문을 받자마자 바로 대답했다.
“커피를 만들어야죠. 사쿠라비는 물에 원두 가루를 붓고 끓입니다. 유목민들은 가루를 거르거나 가라앉히지 않고 마시다가 뱉거나 씹어먹지요.”
루나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어서 눈을 감고 미소를 지으며 검지를 들어 올렸다.
“달임 추출법이군요. 가장 기초적인 커피 제조법이죠. 어쨌든 페어리는 바로 이 커피 제조법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어요.”
“우와!!”
레스와 피카니가 눈을 부릅뜨고 라카키를 보면서 입을 모아 경악했다. 둘이 감탄하는 소리가 천장까지 닿았다. 루나가 왠지 자기 자랑처럼 으스대는 투로 말했다.
“제조법 그 자체로는 커피가 만들어지지 않아도 커피의 운명을 결정하는 요소임은 틀림없죠. 그리고 커피잔에 있어야만 하는 실체도 아니니까 다른 커피잔에도 끼어들 여지가 있죠. 완벽한 비유는 아니지만 얼마나 위상이 높은 존재인지 이제 체감이 되나요?”
라카키는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우리는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야. 조건과 환경이 갖춰지면 어느 틈에 생겨나는 미물에 불과해. 장마철 창고 구석에 자라나는 곰팡이처럼. 그런 존재가 아득한 세월을 거쳐서 진화하면 나처럼 말도 하고 권능도 조금 부리게 되는 거지.”
레스가 말했다.
“페어리들은 스스로 태어나는 겁니까? 부모 없이?”
“주변 환경과 차원에 존재하는 규칙 그 자체가 우리들의 부모라고 할 수 있겠네. 그래도 난 캘러헬하고 오래 지낸 덕에 필멸자들에게 혈연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이해하고 있어.”
레스는 입을 벌린 채 조금 고민하고 말했다.
“이건 정말 실례되는 질문이겠지만…. 대체 몇 살이에요?”
얌전히 듣고 있던 윈프리의 눈꺼풀이 올라갔다.
“어머. 그건 나도 못 들었는데.”
라카키의 동공이 수축했다. 그리고 눈동자와 눈자위의 색이 서로 교체됐다. 흰자위는 검게. 눈동자는 하얗게. 몸은 꿈쩍도 안 했다. 골몰히 생각에 빠진 거 같았다. 상대의 모습과 근처의 분위기가 확 바뀐 게 피부로 느껴졌다. 지금 모습을 보니 전에 봤던 누에나방을 연상시키는 인상에 훨씬 가까워진 느낌도 들었다. 레스는 잔뜩 겁먹고 잠자코 대답을 기다렸다. 라카키의 눈이 순식간에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오더니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솜털 같은 하얀 머리칼을 헝클었다.
“말하기가 어렵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을 되짚어본 건 이번이 처음이야. 살면서 도중에 다른 차원에도 몇 번 들락거리다가 시간대를 뛰어넘은 적도 있어서 당신들의 시간 개념으로 표현하기가 까다로워.”
“엄청 무리한 부탁을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레스의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해서 셔츠가 등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긴장한 건 마찬가지라 편한 표정들은 아니었다. 라카키는 눈치 못 챈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신경을 안 쓰는 건지 다시 골몰히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 손가락을 튕겼다.
“맞다. 레스. 당신 단발 소총의 개머리판에 뭐라 새겨져 있지 않았어?”
“비나예 아하니. 샤키가 들려준 옛날이야기에서 나온 종족의 이름을 땄어요. 시선만으로 상대를 죽일 수 있는 존재들이랬나. 그 이야기가 총잡이한테 어울리는 거 같아서.”
루나가 끼어들었다.
“어? 그 전설이라면 비나예 아하니는 악령이나 악신이라고 들었는데요? 슈슈니 족만 유난히 차이가 크네?”
레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튼, 그게 왜요?”
라카키가 엎드렸던 몸을 펴고 자세를 똑바로 잡으면서 말했다.
“그놈들은 괴물이 아니야. 비나예 아하니는 사람이었고 또 나쁜 힘을 남용해서 세력을 키운 예전 시대의 집단이었어. 규모는 부족보다는 크고 도시보다는 작았지. 난 그놈들이 자멸해가는 과정을 일부 봤어. 이 정도면 대충이나마 짐작하는 데에 도움이 될까?”
한 박자 늦게 레스가 창백해진 얼굴로 쉰 목소리를 내서 대답했다.
“예. 도움이 됩니다.”
뒤늦게 그의 머릿속에서 저번에 캘러헬과 이야기를 하던 도중 그 주제가 나왔을 때 라카키가 웃었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다행이다 그럼.”
라카키는 상대의 반응에 만족해하고 다시 엎드려서 겹친 팔 위에 턱을 올리고 구슬 같은 눈으로 이쪽을 올려보았다. 공기가 어색하다. 마담 윈프리조차 안경을 고쳐잡는 손길이 흔들렸다. 피카니하고 타티아나는 당장 자신들에게 제일 급한 일에 집중하려고 방금 들은 걸 머리 한구석으로 치워버렸다. 그리고 루나는 머리카락이 솟구친 채 굳어버렸다. 석고상처럼 속눈썹 하나 꿈쩍 안 했다. 아무리 봐도 숨을 쉬는 거 같지가 않아서 타티아나가 서둘러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자 루나가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제정신으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걸릴 듯하다.
“어쨌든 지금 상태는 불협화음 오르골에 당해서 그런 겁니까?”
루나가 말하기 전에 타티아나가 급하게 먼저 말했다. 라카키는 머리를 좌우로 기우뚱거렸다.
“그 순간 모든 힘을 잃어버리고 이쪽 차원에서 잠깐 사라져버렸어. 다행히 비슷한 일을 몇 번 겪은 덕에 경험을 살려 어떻게든 이쪽 차원으로 다시 돌아올 수는 있었어. 캘러헬을 죽이려는 사람은 다들 대책을 준비해왔었으니까 나도 종종 휘말렸거든. 이번만큼 심했던 적은 없지만.”
피카니가 손을 들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그때….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라카키가 당돌하게 도리어 물었다.
“당신 어떤 커피가 좋아? 카페오레? 에스프레소? 아니면 얼음 넣은 거?”
피카니는 고문관에게 비밀을 토로하는 죄수처럼 비굴하게 말했다.
“블랙은 절대 못 먹습니다. 그것만 아니면 상관없습니다.”
“흠.”
라카키는 엎드렸던 몸을 똑바로 펴고 한 호흡 뜸을 가다듬다가 레스를 향해 목을 휙 돌렸다.
“레스!”
“네.”
레스는 자기가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정말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 자식을 사쿠라비식 커피 형에 처한다! 본고장의 맛이 필요하다! 이쪽으로 넘어와!”
레스는 어쩌다 보니 난생처음 술집에서 바텐더들이 일하는 곳에 들어가게 됐다. 윈프리와 히콕이 어느샌가 손으로 돌리는 커피콩 분쇄기와 원두, 그리고 물 끓일 준비까지 커피 만들기에 필요한 것들을 척척 차려놓고 있었다. 레스는 분쇄기에 원두를 넣으면서 손님 좌석에 있는 일행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좀 많기는 한데. 원두가 갈리는 정도는 이 부분을 돌려서 조정하면 되는 건가? 잠깐만…. 됐다. 나도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겠다만. 지금 당장은 머리를 비우고 쉴 시간을 가지는 게 좋을 거 같아. 분위기가 심하게 엉망이잖아.”
아직도 충격에서 회복될 기미가 없는 루나를 챙기느라 바빴던 타티아나가 이쪽을 보았다.
“확실히 지금 상태로는 진지한 이야기를 못 하겠군. 누구 때문일까.”
분쇄기의 손잡이를 쥐면서 레스가 물었다.
“너도 커피 마실래?”
“아니, 난 두 잔 이상 마시면 잠 못 자. 그리고 무인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해.”
“루나 씨는요?”
반응이 없다. 그냥 사람이었다.
“저놈 몫만 끓여야겠군. 젠장! 이거 왜 이렇게 뻑뻑해!”
레스는 분쇄기의 손잡이를 돌리지 못하고 낑낑거렸다. 근처에서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던 히콕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자세를 보니 내가 보기에는 형씨의 팔에 힘이 안 들어가서 그런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낮에 그 빌어먹을 통나무 옮기느라 생긴 근육통이 지금 찾아오는 거 같아.”
그 말을 불평으로 듣고 타티아나는 발끈하고 움직였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팔을 뻗어서 그녀는 레스한테 원두가 들어있는 분쇄기를 빼앗았다.
“이리 내놔! 내가 하면 되잖아! 내가 하면!”
윈프리는 멀찍이 떨어져서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서 부지런히 닦고 있었다. 아마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명상하는 중이리라. 라카키는 어느 틈에 바 위에 올라타서 다리를 허공에 흔들며 이쪽을 구경하고 있다. 타티아나가 전투적으로 분쇄기의 손잡이를 돌리는 동안 레스와 히콕은 어색하게 나란히 오일 버너로 물을 끓였다. 히콕이 침묵을 깼다.
“너희 일행한테 사적인 감정은 없었어. 그냥 현상범인 줄 알았지.”
“뭐? 아. 그래. 그랬었지. 당신은 완전히 까먹고 있었어.”
“까먹었다고?!”
히콕은 그 말에 상처 입었다. 레스는 떫은 표정을 지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가는 곳과 겪는 일마다 정신이 하나도 없거든. 그래서 미워해야 할 일과 미워해야 할 사람을 일일이 속에 담아둘 수가 없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애매하군.”
“공격한 입장에서 이런 말 하면 안 되겠지만 형씨 진짜 고생이 많아 보여.”
불 위에 올린 냄비의 바닥에서 물방울이 하나 떠올랐다. 끓기 시작한 거리라. 레스가 말했다.
“물론 댁이 샤키를 잡아간 걸 떠올리면 당연히 화는 나.”
냄비에서 물이 부글거렸다. 히콕은 침을 삼켰다. 뒤에 더 따라오는 말이 없자 히콕이 말했다.
“난 그쪽 일행을 해코지한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 형씨랑 그쪽 친구들이 나하고 가까운 사람을 둘이나 구해줬고. 또 댁들은 좋은 사람이니까.”
“사과하는 거야?”
레스는 멍하니 물이 끓는 걸 바라만 보았다.
“어떻게 사죄해야 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이대로 넘어가기는 싫어서 꺼내는 말이야.”
타티아나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분쇄기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다 갈았다. 물도 그 정도로 끓였으면 충분해 보이는데.”
“수고했어. 고마워.”
레스는 타티아나에게서 분쇄기를 돌려받고 안에서 곱게 갈린 원두 가루를 꺼내 냄비에 부었다. 펄펄 끓는 물이 순식간에 검게 물들어갔다. 긴 나무 수저로 냄비를 휘휘 저으며 레스가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종교도 없고, 또 부족으로부터 추방당했지만, 신조는 지키는 사람이야. 원래라면 내 아버지의 이름을 걸어야 하지만 난 그런 거 없으니 그냥 나의 이름으로 그대의 진심을 담은 사죄를 받아들이고 용서하도록 하지.”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침통한 얼굴로 가만히 있던 피카니가 끼어들었다.
“나나와떼 하는 거냐?”
레스는 냄비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나나와떼는 위험에 처한 사람이 도움을 청하면 도와줘야 하는 의무에 관한 맹세야. 보편적인 용서하고는 경우가 다르지. 보편적인 용서에 대한 건 규율에 없어. 보편적인 용서에는 언어가 필요 없으니까. 또한, 그래야만 하지.”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각자의 마음속에서 나름의 파문이 이는 걸 느꼈다. 대부분은 숙연해졌고 히콕은 쓴웃음을 지었다. 레스는 오일 버너의 불을 끄고 냄비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열전도율이 아주 뛰어난 금속제 머그잔을 골라서 거기에 냄비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것이 너를 위한 보편적이지 않은 정령의 복수다. 받으시죠 용사님.”
냄비에 남은 검은색 액체의 마지막 한 방울이 단두대처럼 떨어져 잔에 굵은 파문을 일으켰다. 머그잔에 담긴 어둠을 닮은 액체의 일렁이는 모습은 물의 파도가 아니라 반쯤 녹은 기름의 파동에 가까워 보였다. 빛을 흡수하는 동시에 완벽하게 빛을 반사하는 어둠의 소용돌이 안에서 고운 입자들이 쉬지 않고 태초의 혼돈처럼 쉬지 않고 꿈틀거렸다. 어찌나 뜨거운지 피어오르는 김은 먼 곳에서 바라보는 화재 현장의 연기 같았고 향도 화재 현장 같았다.
피카니는 자기 앞에 놓인 커피를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야. 이거 바닥에 부으면 마루에 구멍 날 거 같은데.”
“난 먹는 거로 장난 안 친다. 마셔도 돼.”
“일단 왜 금속 머그잔에 따른 거야. 손을 댈 수가 없잖아.”
“음료는 온도가 생명이다. 지금은 지나치게 뜨거운 거 같으니 식을 동안 자잘한 이야기나 좀 들려주마. 사쿠라비에는 두 가지 민족이 있다. 사막과 평원을 방랑하는 사람들을 바다위, 바드운, 바다위윤 등으로 부르고.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은 하다르라고 부른다. 하다르들은 나 같은 바다위하고는 인종적으로도 차이가 있어서 ‘투르크’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제정신을 차린 루나가 레스의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외부에서 나타난 투르크 사람에게 정착하고 살만한 땅을 모조리 빼앗기고 내몰린 사람들이 지금의 바다위윤이라는 설이 유력해요. 유목하는 민족들에게는 흔하게 공통되는 사연이죠. 그런데 저 커피 진짜 마실 수 있는 거예요? 제가 대학의 마녀들 사이에서도 커피를 독하게 마시는 편인데 저건 좀… 심한데요. 달임 커피는 실물로 보니까 장난 아니군요.”
타티아나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저걸 보고 있자니 바다 건너에서 행하는 사약이라는 형벌이 생각나는군.”
레스는 루나에게 해명했다.
“저희는 원두를 폭이 좁고 길쭉한 절구에 빻아서 커피를 만듭니다. 아무래도 분쇄기가 절구보다 성능이 더 좋으니까 맛이 평소보다 효과적으로 우러나오기는 했을 겁니다.”
피카니가 외쳤다.
“이 화학적 재앙은 기술적 진보 때문에 탄생한 게 아니라 비율부터 잘못됐어. 내가 무법자로 지내는 동안 어쩌다가 카우보이 커피도 마셔본 적 있는데 이건 그것보다 심해.”
레스는 시선을 히콕에게 돌렸다.
“카우보이들은 어떻게 끓이는데?”
히콕은 설명했다.
“원리는 똑같은 달임 커피야. 비율은 물과 원두가 15대 1. 굳이 비법이랄 게 있다면 달걀 껍데기를 조금 섞는 것 정도지.”
“달걀 껍데기?”
“거기에서 나온 성분이 응고제가 돼서 커피 가루들이 뭉치게 되거든. 그럼 주전자나 냄비에서 커피를 따를 때 가루가 덜 나와. 그 외에는 두께가 얇은 양말이나 스타킹을 거름망으로 쓰기도 하지. 따르기 직전에 커피 가루가 좀처럼 바닥에 가라앉질 않는다면 찬물을 살짝 부어서 대류 현상을 일으키면 도움이 돼.”
얌전히 구경만 하고 있던 윈프리가 레스의 어깨를 툭툭치고 말을 걸었다.
“하얀 모자. 비율을 어떻게 잡았어?”
“그냥 감각으로. 전 그런 거 할 때 세밀하게 계산 안 하는 부류입니다.”
윈프리는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나. 성격이 그런 사람은 먹을 거 다루면 안 되는데.”
“전 그렇게 먹고 살았어요.”
피카니가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잔을 가리키며 절규했다.
“야! 아직도 안 식잖아! 오히려 점점 진해지는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너 여기에 가루까지 통째로 넣었지! 사쿠라비에서는 진짜 가루까지 통째로 먹는 거 맞아?!”
“우리는 그걸 조리해서 전병에 발라먹거나 볶은 원두를 동물성 지방으로 뭉쳐서 보존식품으로도 만들어서 먹어.”
피카니는 상상만 해도 견딜 수가 없었는지 사람이 없는 방향으로 헛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네 기준으로 만들어서 이런 게 나오는 거구나!”
“됐으니까 그냥 마셔! 이런 바보 같은 대화 언제까지 할 건데!”
라카키는 대화의 지적 수준이 낮아질수록 표정에 즐거움이 진해지고 있었다. 레스가 뒤늦게 이어서 말했다.
“사실 우리도 커피는 잔에 따르기 직전에 가능한 가루가 나오지 않도록 시간을 들여서 가라앉히거나 주둥이가 길쭉한 주전자를 이용하기도 한다. 섞이면 먹기 불편하니까.”
“역시 통째로 안 먹잖아!”
피카니가 바를 주먹으로 거칠게 내리쳤다. 타티아나와 루나는 피카니가 지금만큼 이성을 잃은 모습은 처음 봤다고 느꼈다. 레스도 그에 질세라 언성을 높였다.
“어리광부리지 마! 이곳이 우아한 살롱이 아니라 야생동물과 도적 떼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야생이라고 생각해! 무법자가 느긋하게 가루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시겠어?! 앙!”
히콕이 조심스럽게 참견했다.
“보통 5분 정도 기다리면 가루는 대부분 밑으로 가라앉아.”
“그래! 지금쯤이면 다 가라앉았겠네! 이제 마시면 되겠다!”
계속 언성 높이기도 지겨워져서 피카니는 결국 잔의 손잡이에 손가락을 걸었다. 잔이 자신의 입가에 가까워질수록 라카키의 표정이 밝아졌고 피카니는 동시에 자신의 운명을 확신했다. 눈을 질끈 감고 한 모금 들이키고는 피카니는 입가를 주먹으로 막으면서 계속 기침했다. 중병에 걸린 사람이 각혈하는 거에 맞먹는 기세다. 잔뜩 쉰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내가 무법자로 살았을 때 대마초도 빨아본 적 있는 데 이런 건 겪어본 적이 없었어. 진짜 이 정도 비율로 만든 걸 일상적으로 마신다고?”
“야, 루나 씨 옆에 있다.”
피카니는 1초나 걸려서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의료용 대마초!”
“마시기나 해.”
“밑으로 갈수록 더 진해진다고! 게다가 실시간으로 이 가루에서 성분이 우러나잖아! 에스프레소 만들 때 왜 소량으로 추출하겠어! 대량으로 추출하면 불필요하고 몸에 나쁜 성분이 나와서 그런 거라고!”
“담배도 피우는 새끼가 뭔 건강 걱정이야! 마셔!”
“담배는 너도 피우잖아!”
“끊었어! 갑자기 왜 딴 곳으로 얘기가 새는 건데! 마셔!”
타티아나가 윈프리에게 속삭였다.
“커피로 저렇게 흥분하던 손님을 보신 적 있으신지요?”
윈프리는 냉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확실한 건. 저 둘이 친구 사이가 맞긴 하네.”
수준 낮은 말싸움도 지쳤다. 피카니는 다음 잔을 마실 용기가 생겼다. 사실 용기보다는 낙담과 포기에 가까웠다. 자신을 향해서 그는 중얼거렸다.
“구리로 만든 잔이라서 아직도 뜨거워. 시간을 끌수록 더 진해지겠지.”
사족으로 구리는 가장 열전도율이 높은 금속이다. 그리고 액체는 농도가 진할수록 온도가 오래 유지된다. 피카니는 두 번째 모금을 들이켰다. 입에서 잔을 떼고 놓고는 그는 죽은 듯이 말이 없었다. 레스가 신경 쓰지 않고 태평하게 말을 꺼냈다.
“우리들의 예법에 대해서도 짤막하게 이야기해주마. 먼저 커피의 첫 잔은 조용히 따르는데 이것을 알 헤이프라고 불러. 이건 커피를 만들어서 대접해주는 측이 손님 앞에서 마신다. 손님 앞에서 이 커피가 정상적인지 알려주기 위해서지.”
“그런데 넌 하지 않았잖아.”
피카니가 산채로 묻히고도 자기 힘으로 기어 나온 사람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레스는 당당했다.
“지금 네가 내 손님이더냐? 너한테 잡힌 신세지.”
“언젠가 이 일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둘째 잔은 알 케이프라고 부른다. 이 두 번째 잔을 손님이 맛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손님은 커피를 거절할 수 있어.”
“그런데 왜 나한테는 그럴 기회가 없었지?”
상대는 매우 진지했으나 레스는 무시하고 계속 말했다.
“세 번째 잔은 알 뎨히프. 차례 요리로 치면 주요리에 해당하지. 여기서부터 손님이 커피를 더 마시고 싶으면 주인에게 잔을 내밀면 돼. 그리고 마지막 한 방울은 마시지 않도록 주의할 것. 커피 가루까지 먹게 되니까.”
정적. 적당히 뜸을 들이다가 레스는 피카니를 양손으로 삿대질하면서 사악하게 웃었다.
“와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사막의 전사. 차기 마왕의 가장 든든한 친구. 숨겨진 진정한 용사. 고독한 추방자. 그럴싸한 별명을 있는 대로 다 가져다 붙일 수 있는 사나이는 꼴사납게 온몸과 표정으로 상대를 조롱했다. 타티아나는 기껏 생기려던 정나미가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 들어 그를 바라보는 표정에 경멸이 가득했다. 루나가 중얼거렸다.
“와. 정말 혼자 보기 아깝다. 아자리아 씨도 이걸 봐야 하는데.”
무감정한 얼굴로 가만히 있던 피카니는 홧김에 마지막 액체를, 아니 액체와 비슷한 걸쭉한 무언가를 입안에 머금고 씹었다. 석유에 절인 모래 같았다. 차마 이것은 삼킬 수가 없어서 잔에 도로 뱉고 피카니는 바를 손으로 밀면서 일어났다.
“나와! 총 줄 테니까 바깥으로 나와! 이 빌어먹을….”
피카니는 욕을 더 이어나가려다가 도중에 눈을 까뒤집고 비틀거렸다. 곧, 탑이 무너지듯 그 자리에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루나가 신중한 손길로 피카니의 목덜미에 손을 대고 사람들에게 알렸다.
“살아는 있어요. 세상에. 커피를 마시고 기절하다니. 도시 전설이라고 생각했는데.”
타티아나가 냉정하게 말했다.
“먹은 것도 문제지만 그냥 너무 열 받아서 쓰러진 거 같습니다.”
레스는 아직도 뜨듯한 구리 머그잔을 돌려받고 피카니를 향해 선고를 내리듯이 말했다.
“보편적인 복수도 규율에 적혀있지 않단다. 보편적인 복수에 언어는 필요 없고. 또한, 그래야만 하니까! 화는 충분히 풀렸어 라카키?”
라카키는 아주 환하게 웃었다. 말하면서 그는 다리를 앞뒤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아주 싱거운 처벌인데도 기대 이상으로 엄청 즐거웠어.”
그때 위쪽으로부터 인기척이 들렸다. 발소리가 걸음마다 묵직했다. 아래층에 있는 사람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으며 계단을 타고 하얀 머리칼의 사내가 이쪽으로 내려왔다. 셔츠 밑으로 손을 집어넣고 자기 배를 벅벅 긁으면서 반쯤 감은 눈으로 레스를 바라보며 사내는 말했다.
“나타나는 곳이면 어디든 엉망이 되는군 사쿠라비. 위층까지 다 들렸다고.”
레스는 목소리와 전체적인 인상을 통해 상대를 알아보았으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이상한 점을 느꼈다.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리며 그는 말했다.
“캘러헬 씨? 못 본 사이에 수염이 되게 멋지게 자랐네요. 나이도 좀 드셨고.”
“그리고 자네는 면도하니까 인물이 훨씬 나아졌어. 앞으로도 꼬박꼬박 깎고 살아.”
레스는 그 말에는 다소 못마땅해하는 반응이었다. 캘러헬은 계속 누워있다가 왔는지 뒷머리가 폭삭 눌려있었다. 루나는 오랜만에 만난 캘러헬에게 당황한 눈치였다. 그가 정중한 목소리로 루나에게 인사했다.
“봉쥬르. 아가씨와 대면하는 건 전차에서 마주친 뒤로 오랜만이군요.”
듣는 사람이 저절로 차분해지는 온화한 말투였다. 루나도 예를 갖춰서 말을 받았다.
“당신이 카우보이의 그랜드 마스터죠? 저번 싸움에서 크게 고생하셨다고 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