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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2화 〉[4권] 132회 - 바람에서 폭풍으로 (132/188)



〈 132화 〉[4권] 132회 - 바람에서 폭풍으로

그들은 시간을 들여서 주변을 수습하고 자리를 정리했다. 레스는 원래 앉았던 자리로 돌아갔고, 캘러헬은 라카키의 옆으로 갔고, 정신을 차릴 기미가 없는 피카니는 근처 탁자에 고이 눕혀놓았다. 주변이  정리되자 타티아나는 바에 팔꿈치를 대고 캘러헬을 바라봤다.


“몸은 괜찮으신지요? 심각한 중상을 입으셨는데도 병원에 안 오셨더군요.”


“병원비가 없었거든.”

캘러헬은 아직도 잠기운에 취한 표정을 지은  머리를 좌우로 기울여 기지개를 켰다.


지나치게 간결한 대답에 사람들이 말을 잃자 라카키가 캘러헬을 올려다보며 그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톡톡 찔렀다.


“그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


“즉사로 이어질 치명상만 아니면 난 아무리 다쳐도 안 죽어. 출혈 과다만 조심하면 돼.”


이번에는 레스가 말을 꺼냈다.


“운 좋게 여기서 만났군요. 두 분은 그 은신처에 계실  알았는데.”

라카키가 콩콩 뛰면서 대답했다.


“우리  타버렸어.”


상대의 해맑은 목소리에 레스의 표정이 굳었다.


라카키가 자기 몸에 두른 앞치마를 펼쳐 보였다.


“나 열심히 밥값 하고 있어.”

캘러헬은 자기 목덜미를 새끼손가락으로 긁적였다.

“요즘은 여기서 신세 지는 중이야. 나 평소에는 피아노 친다?”


루나가 살며시 손을 들어 올리고 물었다.


“전에 뵀을 때보다 얼굴이 많이 삭으셨네요. 역시 아직도 몸이 성치 않으신 거죠?”

그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안단시움에 당했었지요. 당장 목숨에는 지장 없습니다. 더 묻고 싶은 거 있는 사람?”

레스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말했다.

“캘러헬 씨도  두 사람하고 얘기했습니까?”

그는 바지의 주머니에 손을 찌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피곤해 보였다.


“깡통 쓴 쪽은 처음 봤고 양복 입은 쪽은 구면이야. 내 애긴 여기까지. 용건은?”


기어코 가장 중요한 대목을 앞에 두고 일행은 누가 먼저 말할지 서로 눈치를 봤다. 레스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타티아나가 그의 팔꿈치를 살짝 잡으면서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태가 아주 위급합니다. 이에 대해 상담하고자 합니다.”

캘러헬은 눈을 몇  껌뻑거리고 말했다.

“참고로 레오포드는 여기에 없어. 원래는  친구 때문에 여기 왔지?”

몇 단계나 건너뛴 상대의 대답에 일행은 조금 당황했다. 타티아나는 바로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서 말을 받았다.

“예, 지금 추적꾼의 도움이 가장 절실한 상황입니다. 그 일행을 쫓아야 합니다.”

캘러헬은 레스를 노려보았다. 추궁하는 투로 그가 말했다.


“사로잡힌 신세치고는 자기 적들과 사이좋게 지내는군. 하얀 모자.”

“다른 선택지도 있었지만 제 신조에는 이게 최선입니다.”

레스는 경직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캘러헬은 갑자기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서둘리 말했다.

“잠깐만. 뱉은 말 다시 삼켜야겠어.”

그는 정색하다가 갑자기 쾌활한 표정을 지으며 유쾌히 양손을 써서 레스를 가리켰다.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역시 자네야! 누구하고든 잘 어울리는군! 무사히 탈출했으면 좋았겠지만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 이것도 일종의 인연이겠지! 자. 삼킨 말 다시 뱉었어. 나쁜 의도 없었다는 거 부디 이해하고 용서해주게나.”

“어….”


그는 잠깐 넋이 나갔다.

“물론 나름대로 고민하고 결론을 내린 결과가 지금 이곳이겠지. 손은 괜찮나?”


완전히 상대의 기세에 휘둘리고 말았다. 묘한 표정을 짓는 일행과는 달리 레스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오른 손목을 돌리면서 손을 쥐었다 폈다. 침을 삼켜서 목을 가다듬고 그가 말했다.

“아프지는 않은 데 종종 손이 말을 안 들어요.”

라카키가 한쪽 팔을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내가 들여다 봐도 될까?”

레스는 놀라서 잠깐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반응했다.


“뭘 들여다본다는 거지?”


캘러헬이 대신 대답했다.

“자네의 마음. 톤토에게서 자네가 겪는 심리적 외상이 심하다고 들었어. 라카키라면 해결할 단서를 찾아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함부로 들여다보는 건 위해를 가하는 일이지. 그래서 지금 라카키가 자네의 허락을 구하는 거고.”

“싫으면 안 할게~”

라카키가 들어 올린 팔을 휘적휘적 흔들면서 명랑하게 말했다. 레스는 겸연쩍게 웃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제 문제가 뭔지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안 할게~”


라카키는 명랑하게 말하고 팔을 내렸다. 때마침 피카니가 정신을 차렸는지 레스는 뒤에서 사람이 몸을 움직이는 기척을 느꼈다. 그는 뒤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상대에게 말을 걸었다.


“일어나세요 용사여.”


피카니는 몽롱한 눈으로 마주 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지? 숯을 씹은 것처럼 입안이 메케하고 엄청나게 씁쓸한데. 머릿속이 아프면서도 동시에 정신이 아주 맑아. 정말 이상하군.”

루나는 경악에 질려서 굳은 표정으로 작게 말했다.


“기억이 사라졌어.”

피카니의 몽롱한 눈에 초점이 돌아오더니 레스를 바라보는 눈초리에 증오가 서렸다. 루나가 다시 말했다.


“기억이 돌아왔다.”

레스는 먼저 말을 꺼내서 할 말 많아 보이는 상대의 입을 막았다.


“듣기로는 독한 커피가 정력에 좋다더라.”

“참 고맙다.”

참고로 커피가 남성의 성 능력에 도움을 준다는 낭설은 역사는 깊으나 정확한 검증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캘러헬은 턱을 손에 괴고 생각에 빠져있다가 말했다.

“앗, 미안. 나 때문에 중요한 얘기가  곳으로 새버렸네. 무슨  하고 있었지?”

조금 떨어져서 보고만 있던 윈프리는 이마에 손을 대며 한숨을 쉬었다.


“너희 둘은 일단 말하지 말고 먼저 듣는  낫겠어.”


라카키와 캘러헬은 같은 순간에 팔짱을 끼며 입가를 쏙 오므렸다. 타티아나가 아직도 탁자에서 내려올 기미 없이 넋 놓고 있는 피카니의 발목을 잡고 신경질적으로 끌어내리자, 피카니는 바닥에 떨어질 뻔했다.

가게에 들어온 일행이 다시 자리를 잡고 나서 잠시 후. 계속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던 윈프리가 눈을 뜨면서 입을 열었다.

“차례대로 정리하면, 그쪽 일행들은 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황무지로 계속 나아가는 걸 전제로 계획을 짜는 중인데, 하얀 모자의 친구들을 추적하려면 우리 도움이 필요하다고?”

피카니가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륙의 운명이 걸린 일입니다. 아자리아가 다른 놈들에게 잡히는 사태를 막아야 합니다. 루나 마법사님하고 레스도 놈들에게 넘기기 싫고요.”


윈프리는 자신의 머릿결을 쓸어서 가다듬었다.

“무슨 명분으로 우리가 끼어야 하지? 우린 자원봉사자가 아니야.”


“물론 빈손으로 도와달라는 건 아닙니다.”

피카니는 품속에서 종이를 두 장 꺼냈다. 한 장은 서류였고 다른  장은 수표였다. 윈프리는 수표에 적힌 액수보다도 서류를 먼저 들어서 적힌 것을 읽었다. 그녀의 눈길이 종이 아랫부분까지 닿자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종이가 조금 구겨졌다.


“제국이 여태껏 이곳을 내버려 둔 이유가 자금이 집중되기를 기다렸다가 쓸어 담기 위해서였나! 바뀌지를 않는군. 언제나 이득은 소수의 강자가 독점하고 희생은 나머지가 치르지!”

“그 서류는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저희가 서명한 물건입니다. 위조한 건….”

“개척시대 당시 전성기의 핑커튼은 정부의 녹을 받았어. 공문서라면 충분히 많이 봤고 직접 위조도 해봤어. 이 서류를 의심하지는 않아.”


윈프리는 치솟는 화를 식히고 눈길을 수표로 돌렸다. 라카키가 주먹을 허공에 휘두르면서 피카니에게 외쳤다.

“네 이놈! 우리를 돈으로 살 생각이냐!”


윈프리는 안경을 벗고 눈을 비빈 다음 다시 숫자를 확인했다.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수표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줬다. 액수를 보고 다들 비슷한 표정이 됐다. 물론 라카키도. 캘러헬이 눈썹을 실룩이면서 넌지시 말했다.


“오. 단박에 거절하기에는 금액이 심하게 높은데. 이게 뭐지?”

피카니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저의 재산 대부분. 여정에 필요한 경비만 빼고 전부 긁었습니다. 액수는 시크릿 서비스가 이 도시에서 빼앗아간 돈의 절반 정도 될 겁니다. 받으신 선금을 어떻게 쓰실지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윈프리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선금?!”

루나가 이어서 말했다.

“저도 나름대로 여태껏 모아둔 저금이 제법 돼요. 의뢰를 받으시면 상황이 안정될 때 저하고 하딘 대위님이 같이 모아서 나머지 몫을 입금하겠습니다. 빼앗긴 예산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겨울이 오기 직전에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거예요.”

핑커튼의 탐정들은 표정이 매우 심각해졌다. 고민에 빠진 윈프리에게 캘러헬이 말을 걸었다.

“케이트. 길게 고민할 이유가 없어.”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토마스. 들키면 우리는 정부를 적으로 돌리게 돼.”


윈프리는 안경을 벗고 눈가를 감싸 쥐었다. 캘러헬이 단호하게 말했다.

“겨울이 오면 가장 약한 사람들부터 굶어 죽을 거야. 레오포드와 톤토의 부족 사람들이. 여기서 번 돈을 보호구역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는 부족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잖아.”
윈프리는 벗었던 안경을 쓰고 몸을 웅크렸다.


“이런 소용돌이에는 손가락 하나만 담가도 몸까지 통째로 끌려가기 마련이야. 아까도 말했지만 간단하지가 않아.”


“참고로 네 결정이 어떠하든 난 저쪽이랑 같이 할 거야.”

“뭐?”

윈프리는 놀랐다. 캘러헬은 구석으로 자리를 비켰던 히콕을 보고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이 도시를 떠나게 되면 이곳은 너한테 맡긴다.  제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히콕은 입술을 한번 깨물고 자신의 왼쪽 가슴에 오른손을 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윈프리는 팔짱을  손에 힘을 힘껏 주면서 말했다.

“이제는 라카키도  도와줄 수 없잖아. 위험해!”


“그래서 더욱 잘 된 거지. 저쪽이랑 나하고 향하는 방향이 같잖아. 하얀 모자도 있고. 하얀 모자가 같은 편이라면 든든하잖아?”


캘러헬은 마음을 돌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윈프리는 상대와 서로 흔들림 없는 눈으로 마주 보다가 팔짱을 풀고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렀다. 그리고 피카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의뢰의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구두 계약으로 때워야겠는데. 괜찮겠어? 계약서 같은 증거물이 있으면 아무래도 뒤탈이 생기니까.”


“좋은 판단입니다.”


피카니가 말했다. 윈프리는 자신의 턱을 우아하게 쓰다듬었다.


“그런데 이만한 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주다니. 총각 다시 봤어. 배포가 크네.”


피카니는 작게 날숨을 뱉었다.

“어차피 쓸 일도 없는걸요. 지금 와서 화려한 생활 따위 관심을 잃었고. 쓸 일이 없는 돈은 사회로 돌려보내는 게 도리겠죠.  필요한 사람에게요.”


루나의 마음속에 감동의 파문이 일었다. 입을 살짝 벌린 채 자기 가슴팍에 손을 꼭 모으고 있어서 특별히 눈치가 빠르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였다. 정작 피카니만 다른 생각에 빠지느라 혼자 눈치 못 챘다. 레스와 타티아나는  둘을 관찰하다가 어쩌다 서로 눈이 마주쳐서 바로 시선을 교환했다. 서로 생각이 전달되기는 했는데 당연히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서로  턱이 없으니 레스와 타티아나는 목덜미를 긁적였다.

윈프리는 그 모습을 못 본 척 시치미를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말도 없이 자리를 비웠다. 어디론가 사라지다가 곧 자기 자리로 돌아오고는 바에 검은색 가죽으로 만들어진 표지가 둘린 얇은 수첩을 올려놓고 그것을 손끝으로 슬그머니 밀었다. 피카니가 물었다.

“뭡니까?”

“지역 각지에 내 정보원들이 숨어있는 장소와 접선용 암호를 적어놨어. 암호는 요일마다 달라지니까 자세한  직접 봐둬. 가는 길에 짬이  때마다 만나봐. 최근에 퍼진 소문이나 정보를 알 수 있을 거야. 전보 시설도 다 갖춰놨으니 서로 연락도  수 있을 거고.”

피카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첩을 집었다. 잠깐 고민 끝에 그는 옆자리에 앉은 타티아나에게 수첩을 건넸다.


“일단 당신이 맡아둬. 시크릿 서비스는 계속 날 주시하고 있어. 전직 공작원이니 이런 건 나보다는 당신이   관리하겠지.”


“빼앗기거나 잃었다간 큰일이니까.”


타티아나는 받은 수첩을 바로 품에 넣었다. 피카니가 말했다.

“수표는 나중에 상황을 봐서 쓰셔야 합니다. 시크릿 서비스는….”


“돈의 흐름도 항상 주시하고 있는 놈들이지. 나도 알고 있어. 자네가 대량의 금액을 찾아간  보고 이미 낌새를 눈치챘을지도 모르지.”

그녀는 상대의 말허리를 자르고 수표를 주머니에 넣었다. 캘러헬이 라카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레스는 케이트한테 야속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네. 이해해줘.”


“이해합니다.”


레스는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윈프리는 레스의 앞으로 다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도 세상의 흐름이 심상치 않다는 낌새는 느끼고 있었어. 바람이 대륙을 쓸고 있네. 그 바람은 이제 폭풍이 될 거야. 그리고 중심에는 자네들이 있지. 나는 폭풍이 지나간 뒤의 세상에 대해 무시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도망칠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그 폭풍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도록 노력해보겠네.”


“감사합니다.”
그는 경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캘러헬이 박수를  번 크게  쳐서 이목을 끌었다.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그가 왼손으로 루나를 가리켰다.


“숙녀와….”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레스를 가리켰다.


“신사께서는 나랑 같이 옥상으로 가서 얘기 좀 하자고.”

루나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저희끼리만 옥상으로 가는 거죠?”

“전망이 좋으니까.”


그는 건성으로 대꾸하고 자리를 떠나 계단으로 먼저 갔다. 라카키가  뒤를 따라가면서 아직 자리에 남아있는 두 사람을 향해 어서 오라는  손을 흔들었다. 타티아나가 레스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빨리 가. 다른 사람한테는 들려주기 싫은 얘기를 하고 싶은 거겠지.”


그는 구레나룻을 긁으면서 중얼거렸다.


“높은 곳은 싫은데.”

레스와 루나는 라카키를 따라서 계단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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