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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3화 〉[4권] 133회 - 전쟁 범죄 (133/188)



〈 133화 〉[4권] 133회 - 전쟁 범죄

계단 다음에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나왔고, 다락방에서는 옥상으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또 나왔다. 레스와 루나는 안내를 따라 바깥으로 나왔다. 캘러헬은 장대에 걸린 마른 세탁물을 걷고 있었다. 레스는 주변을 한 번 훑어보고 전망에 대해서 적당히 감상평이나 말하려다가 상대가 걷은 세탁물의 정체를 깨닫고 눈을 부릅떴다.

“내 폰초!”

캘러헬은 팔 동작으로 가지런히 개킨 그의 망토를 양손으로 던져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레스는 자신의 폰초를 끌어안고 진심으로 감격에 젖어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다행이다! 영영 잃어버린  알았습니다! 다들 어디 갔는지 모른다고만 했는데!”


루나가 그의 망토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왠지 전에 봤을 때보다 색이 많이 밝아진  같은데? 회색이었는데 거의 희어졌네요.”


라카키는 캘러헬의 곁으로 달려갔다. 캘러헬은 라카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레스를 삿대질하며 물었다.

“솔직히 말해봐. 그거 마지막으로 언제 빨았어?”

레스는 대답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이제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어져서 레스는 그냥 대답을 포기했다. 루나가 굳은 표정으로 그에게서 슬금슬금 물러났다.

“유목민은 평생 세  씻는다던데 설마….”


레스는 애써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제게 무척 각별한 물건이거든요.  폰초는 성년이 됐을  제 총잡이 스승한테 선물로 받았던 겁니다.”

캘러헬이 실눈을 뜨면서 말했다.


“그 망토에  놓인 사쿠라비 특유의 섬세한 자수에는 여자의 손길이 느껴지던데.”

라카키와 루나가 그 말을 듣고 눈을 번쩍였다. 레스는 헛기침하면서 자세히 대답하지 않겠다고 은근히 몸짓으로 표현했다.

“그냥 아는 사람이 해준 거예요. 아는 사람이.”

루나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처럼 돌변하고 추궁하는 투로 물었다.


“하지만 사쿠라비에서 자수는 그냥 장식이 아니라 액막이용 부적도 의미할 텐데요? 그냥 아는 사람이 그렇게 정성 들여서 그냥 수를 놔줬다고요? 흐응?”

자기가 아는 지식이 활약할 때가 되니 루나는 영문모를 자신감이 폭발한 모양이었다. 레스는 어째선지 숨쉬기가 힘들어 목깃을 가다듬었다.

“그 아는 사람이… 마녀였어요. 원래 하던 중요한 주제로 돌아오면  될까요?”

라카키가 당돌한 태도로 말했다.


“그 아는 마녀가 혹시 알미트라? 전에 잠꼬대하면서 중얼거렸던 그 이름.”

“제발 다른 얘기 해주세요. 누구나 밝히기 싫은 과거가 있잖아요.”

캘러헬은 양손을 허공에 가볍게 흔들면서 입만 움직여서 소리 없이 웃었다.

“미안. 사실 안 미안해. 남의 연애사 캐는 것만큼 재밌는 게 없잖아.”


루나와 라카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끄덕 절도있게 움직였다.


“그런 형태로 누군가랑 사귄 적은 없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레스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면서 목소리를 조이고 있었다. 다시 괜히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그는 물었다.

“아까 제국으로 돌아가지는 않겠다고 하셨죠. 역시 정부로부터 뭔가 요구를 당한 겁니까?”

“솔직히 말해서 여기 전망은 별로지?”

레스는 말 돌리지 말라고 재촉하려다가 그냥 마음을 접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위에 더 높은 건물이 있어서 멀리까지 보이지도 않았고 보이는 생명체라고는 칙칙한 옷을 입은 사람들과 나뭇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가로수가 전부였다. 녹색은 없다. 레스는 위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하늘에 별조차 안 보이는군요.”

“유목민들은 이런 문명 세계를 어떻게 느끼나?”

“사람마다 다르죠.”
“그럼 자네는?”


레스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발전된 곳을 구경하면 재미있기는 하지만. 정을 붙일 생각은 잘 안 듭니다. 야생에서 살면 불편하고 위험한 점이 가득하지만, 그래도 바깥에서 이곳을 보면 사람들이 울타리에 갇힌 가축처럼 보이거든요.”


“그 울타리가 약자들의 철창이자 보호막이지. 문명이란 양날의 검이야. 개척시대는 이제 황혼기를 지났고 백인들이 부르는 소위 야만인들도 이젠 거의 다 사라졌네. 그 울타리는 온 세상을 천장처럼 덮게 될 거야. 어떻게 생각하나?”

갑자기 진지한 태도로 캘러헬의 얼굴빛이 변했다. 루나는 긴장하고 레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갑자기 왜 물으시죠?”

“사쿠라비에는 석유가 있어. 바다위윤도 이곳의 원주민들처럼 파멸을 피할 수 없을 거야.  알잖나. 그런데 왜 자기 부족을 구하기 위해서 싸우는 중이라고 계속 거짓말을 했나?”

“전에 말했잖습니까. 그곳이 제 고향이니까요.”


“난 자네가 자신을 속여가면서 허깨비 같은 희망을 붙잡는 사람이라고는 생각 안 하네.”

레스는 슬픈 눈으로 침묵했다. 캘러헬은 바로 죄책감을 느끼고 수습하듯 조심히 말했다.


“아니면 정말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이유가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건가?”

“한 번 절망했었죠, 예전에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기로 맹세했습니다.”

“자네하고 대화하면 맹세라는 단어가 참 많이 나와.”

“맹세 말고는 잃을 게 없으니까요. 아니, 잃을 게 없었죠.”

그가 그 말을 뱉는 순간 오른손이 경련을 일으켰다. 라카키가 양손으로 그의 오른손을 감싸주자 경련은 멎었다. 루나가 그 모습을 보며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왜 저희는 똑같이 좋은 세상을 바라는 데도 서로 싸워야만 하는 걸까요?”

“꿈을 현실로 만드는 수단은 언제나 양날의 검이니까요. 수단이 언제나 문제죠. 심지어 복수마저도 악순환만이 아니라 평화를 지키는 수단이라는 면이 있답니다.”

루나는 놀랐다.


“복수가 평화를 지키는 수단이라고요?”


“아무런 교훈이나 대가를 치르지 않고 이루어지는 용서는 미래의 죄악을 허용합니다. 정의가 실패한 곳에는 복수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어쩌다가 이런 얘기를 하고 있죠?”

레스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말투를 바꿔서 진중해지는 분위기를 흐렸다. 라카키가 콩콩 뛰면서 재촉했다.


“왜 멈췄어? 재밌었는데.”

“해야 할 급한 얘기가 있잖아요!”

캘러헬이 천천히 손짓해가며 그를 진정시키는 투로 말했다.


“워워. 미안. 그럼 원하는 대로 요점만 말하지. 자네 정말 인연이 1주일도  되는 자기 친구들을 위해서 목숨을 담보로 자기를 죽이려 했던 사람들을 도울 생각인 건가?”


레스는 입을 연 채로 굳었다가 떫은 표정으로 말했다.

“막상 남의 입으로 들으니 제가 얼마나 답도 없는 짓을 하는지 확 와닿네요.”


“제삼자의 눈으로 보면 너무 이상해서 무슨 꿍꿍인지 신경 쓰여서 참기 힘들 정도야. 이렇게 말하기 미안해서 말을 빙빙 돌렸던 건데, 시간 낭비해서 미안하네.”


“아자리도 예전에  배신한 피카니를  자리에서 쏴 죽이지 않고 무슨 속셈으로 봐주는 거냐며  추궁한 적이 있었죠. 제가 이상한 거니까 여러분들이 미안할 것까지야. 아자리는….”


“잠깐만 피카니가 자네를 배신했다고? 뭘 어떻게?”


정적. 레스는 그대로 굳어버렸고 루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다가 자신의 눈가를 감싸 쥐었다.

“대위님 죄송합니다.  보안 유실 사태가….”


레스는 어떻게든 둘러대려고 했다.

“아까 봤다시피 그놈이랑 저랑 사적으로 알던 사이인데….”

“자네가 진짜 마왕을 잡은 용사이거나 둘이서 같이 잡은 거지? 그렇지? 그래서 시크릿 서비스가 자네를 원하는 거고!”


“제기랄 눈치 더럽게 빠르네!”


레스는 다른 곳을 쳐다보면서 애꿎은 바닥을 향해 주먹질했다. 캘러헬은 연극 연기하는 배우처럼 바로 흥분을 가라앉히고 침착한 투로 말을 이었다.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난 자네가 위험한 여정을 하느니 시크릿 서비스에 들어가서 연방 보안관이 되라는 길을 진지하게 제안하려던 참이었어.”


“뭐요?”

레스는 목소리가 뒤집혔다.

“자네가 하려는 일의 현실성이 희박한 건 사실이잖아. 자신의 삶을 위해서 다른 선택지를 고르는  절대 나쁜 일이 아니야.”


“여차하면  술탄한테 넘겨버리겠다는 놈한테 고개 숙이는 게 어째서 좋은 선택인데요?”

“그놈 태도가 아니꼽기는 했지. 하지만 그랜드마스터는 싸움 실력만 좋다고 되는 자리가 아니야. 사람 다루는 법을 아니까 녀석도 그만한 자리에 오른 거야. 지금은 자네한테 밥맛없게 굴어도 막상 자기편이 되면 태도가 고슴도치 배처럼 부드러워질걸? 자네 같은 실력자라면 충분히 좋은 대접 받을 수 있어.”


머리가 너무 복잡해져서 말을 잃어버린 레스 대신 루나가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정말 진심으로 걱정해서 하시는 말씀이군요.”

“그는 이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올 자격이 있어. 자네 친구들은 우리가 책임져주겠네.”

레스는 간신히 조금 정신을 되찾고 그 말에 반응했다.


“어떻게요?”

“레오포드와 슌카와칸이 자네 친구들 흔적을 찾아냈다고 최근에 연락했어.”

“그걸  지금 말해-! 읍읍읍-! 읍?”

라카키는 흥분해서 발광하려던 레스의 입에 난데없이 식빵 덩어리를 쑤셔 넣었다. 어디서 꺼낸 건지는 바로 옆에서 보고 있던 루나도 알 수 없었다. 라카키가 목소리를 깔아서 말했다.


“고성방가.”

레스가 식빵을 입에서 격렬하게 뜯어내고 입안에 든 빵은 격렬하게 씹어서 삼킨 다음 캘러헬을 바라보았다.

“이미 저희하고는 상관없이 당신들만의 계획이 있었다고요?”

“기회 봐서 자네가 의식을 차리면 조용히 꺼내줄 궁리도 했지. 그런데 오늘 그놈들이 들이닥쳐서 차질이 생겼군.”


“무슨 이득이 있다고 저희 일행을 그렇게까지 도와주시는 겁니까?”

캘러헬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랑 그쪽 친구들은  도시를 구해줬어. 내가 의리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나?”

루나가 그 말에 자신의 말을 덧붙였다.


“아자리아 씨와 레스 씨는 저도 구해주셨었죠. 솔직히 저도 두 분에게는 아직도 은혜를 제대로 갚지 못했다는 앙금이 속에 남아있어서 마음이 불편해요.”


레스는 손에 든 식빵 덩어리에서 조각을 뜯어 입에 넣었다. 한숨을 쉬고 그는 말했다.


“이 사람 저 사람 다들 날 띄워주니까 속이 울렁거리네.”


라카키가 양손을 허리 뒤에 모으고 팔과 몸을 흔들면서 애교를 담아 말했다.

“그게 아까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떠들  내가 느끼던 기분이야.”

“흠.”

레스는 머릿속이 혼란한 와중에 라카키의 머리가  뻗으면 닿을 위치에 있어서 쓰다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리고 라카키는 바로 눈치챘다는 양 은근슬쩍 머리를 그쪽으로 기울여줬다. 신기하게도 사람의 마음이란 복잡해질수록 생각이 엉뚱해지는 법이다. 루나는 그가 솜털 같은 머릿결을 쓰다듬는 걸 보고 시샘이 났다.


긍정적인 신체접촉은 뇌에 옥시토신을 분비시켜서 마음을 따듯하게 만들어준다. 레스는 내킬 때까지 라카키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손을 떼고 겨우 생각을 전부 정리했다.

“좋아요. 진정됐어요. 조금 길어지겠지만 일단 계속 들어주세요. 일단 전 대단하지 않습니다. 타티아나는 파스낙을 쓰러트린 게 저라고 하던데. 아닙니다. 그놈하고 제가 결투할 수 있었던 건 다른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기회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모두의 희생 덕분이었죠. 캘러헬 씨가 아니었다면 피카니 일행이 수적으로 불리한 싸움을 뒤집을 기회도 없었을 거고, 피카니와 그 일행들, 그리고 제 친구들까지 달라붙어서 먼저 그놈의 힘을 빼주지 않았더라면 저한테는 기회조차 없었을 겁니다.”

한 호흡 쉬고 그는 말을 이었다.


“저에게 베풀어준 다른 사람들의 아주 사소한 도움이 하나라도 모자랐다면 이기지 못할 결투였습니다. 싸울 곳으로 향하는 와중에 쉴 곳을 찾아주고 따듯한 음료와 함께 위로를 건네준 친구의 배려 하나조차도 모자랐다면 전 분명 정신을 잃어버리고 마음이 꺾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마셨던 물약이 좀 독하더라고요.”


캘러헬은 일단 들었다는 반응을 조금 머뭇거리다가 드러내고 고개를 어색하게 흔들었다.


“제 친구들을 향한 마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고작 1주일도 안 된 인연이라고 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서로가 어떠한 사람인지 충분히 이해했고, 믿었으며, 그리고 실제로  결과 역경을 이겨냈습니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제 싸움과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고 마지막까지 수단을 가리지 않고 제가 만족할 수 있는 결말을 보고 말 겁니다. 운명이 결정된 저와는 달리 아자리와 샤키는 미래가 창창해요. 도와주고 싶습니다.”

그때 루나가 손을 들고 말했다.


“저기, 방금 운명이라고 하셨나요? 종교 없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그건 생략할게요. 전에 파스낙한테 설명해줬더니 순식간에 학을 떼더라고요.”


잠깐 묵직하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레스가 헛기침을 하고 다시 말했다.


“연방 보안관이 되고 싶은 욕심이라면, 사실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전 총 잘 쏘는 거 말고는 할 줄 아는  없는 인간이니까요. 이번이 다시는  올 기회겠죠. 하지만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하겠다고 이미 맹세해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뒤집는 건 죽는 것보다 싫습니다. 특히 연방 보안관이 돼서 해야 할 일이 제 친구들의 미래를 빼앗을 짓이라면 더욱 그렇죠. 이 정도 말했으면 저한테 꿍꿍이가 없다는 걸 이해해주시겠습니까?”

짝짝짝. 짝짝짝. 짝짝. 그들은 라카키의 박수 소리를 필두로 말없이 손뼉만 계속 쳤다. 라카키가 먼저 소감을 말했다.


“완벽하게 내 취향이야. 시대착오적인 낭만파 총잡이. 톰이랑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어.”


레스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서 말을 아끼고 떫은 표정만 지었다. 캘러헬이 이어서 말했다.


“그냥 자네가 나 대신에 그랜드마스터 하지 않을래?”

“진담은 아니죠?”

“물론 농담이지. 물려줄 게 있어야 칭호를 넘겨주는데. ‘카우보이’는 저번 싸움으로 이제 끝난 거나 마찬가지야. 자네가  같은 퇴물이라도 괜찮다면 나도 뱉은 말을 지켜보겠네.”


“이제 다른 카우보이들은 없는 겁니까? 그러니까, 지금 밑에 있는 히콕이랑 제가 제압했던 그 두 사람 빼고요.”

캘러헬은 목덜미를 긁적였다.


“없지는 않아. 핑커튼 사무소하고 프리랜서 계약을 맺기 전에 마지막으로 단원들에게 나와 남을 건지 결정권을 줬었거든. 구성원 대부분은 자기 길을 찾아 문명 바깥으로 흩어졌지.”


레스는 눈꺼풀을 살짝 내렸다.

“사실상 해산 선언이었군요.”

“지금 다시 만나더라도 날 윗사람으로 대우해줄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어. 부탁할 일이 생기면 명령은 고사하고 친분에 호소하는 게 고작이겠지. 우와. 내 입으로 직접 말하니까 그  사람에 비하면 나 지금 정말 초라하네.”


루나가 라카키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당신은 라카키가 있잖아요.”


“아. 그랬지.”

라카키가 그의 옆구리를 때리면서 외쳤다.


“흥!”

그러고는 루나의 뒤로 쪼르르 달려가서 몸을 숨기고는 혀를 삐죽 내밀었다. 캘러헬은 팔짱을 끼고 실실 웃었다. 루나도 분위기에 휩쓸려서 거기에 따라 미소를 지으려다가, 이상한 점을 느끼고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런데 저는 대체 여기 왜 왔어요? 저 혼자만 화제에서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데요.”


캘러헬이 팔짱을 풀고 가슴에 손을 올리면서 자세를 똑바로 잡았다.


“실례했습니다 레이디. 제가 워낙 정신이 산만한지라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군요. 아까 아래층에서 여러분들하고 떠들면서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는 미심쩍은 조짐을 느꼈습니다.”


레스는 상대가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짐작도 안 가서 숨죽이고 바짝 긴장했다. 캘러헬이 레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들한테서 삼각관계의 조짐이 느껴지던데 어떻게  건지 설명 좀 해봐.”

“예?”


루나의 목소리가 뒤집혔다. 레스는 너무 당황해서 머릿속이 잠깐 표백됐다. 그는 잠깐 뒤로 몸을 비틀거리다가 자세를 고쳐잡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삼각은 아닙니다.”

루나가 거칠게 외쳤다.


“지금 지적할 부분이 그거예요?!”


레스도 똑같은 어조로 반박했다.

“그거밖에 없죠! 진짜로 그렇다면 완전 재앙이라고요!”


캘러헬이 진지하게 물었다.

“정말로 삼각이 아니야?”


“그냥 직선 구간입니다! 피카니가 마법사님을 좋아해요. 저하고 루나 씨는 접점이 아예 없고요. 저희 둘이 제대로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길게 나누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라고요.”


캘러헬이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삼각이 아니었다고? 제기랄 탐정도  직함에서 빼버려야겠군.”

루나가 새빨개진 얼굴로 가늘게 외쳤다.


“이딴 주제 가지고 심각하게 굴지 마세요!”

캘러헬이 정색하고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딴 주제라니! 얼마나 중요한데! 장래가 유망했던 수많은 모험가 파티들이 분열했던 원인 1순위가 뭔지 아십니까?”


갑자기 자기를 바라보면서 말하기에 레스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돈 문제?”

캘러헬이 고개를 좌우로 격렬하게 젓고 격렬한 삿대질로 루나를 가리키자 그녀도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념 차이?”


“치정 싸움이다!”


캘러헬의 목소리에 맞춰서 라카키가 어느 틈엔가 원형 통계 그래프가 그려져 있는 팻말을 자신의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레스와 루나는 어쩔 수 없이 팻말에 그려진 그래프를 보았다. 2위는 도박. 3위는 응원하는 스포츠팀의 우승. 4위부터는 기타 사항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연애 감정이란 더할 나위 없이 위험한 양날의 검! 특히 위험한 순간을 오가는 모험가 파티의 경우 흔들다리 효과 덕분에 연애 감정이 쉽게 발생하지. 그리고 쉽게 맺어진 인연은 깨지기도 쉽다! 치정 싸움은 손익 갈등보다 더 심각해!”

루나는 폭풍에 맞은 얼굴 그대로 얼이 나갔다가 뒤늦게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말이 맞아요. 이대로면 다른 사람들도 눈치채고 불편해하겠죠.”

“그런데 미스터 홀리데이의 레이디를 향한 연정을 왜 레스가 알고 있는 것인지요?”

루나가 고자질하는 투로 털어놓았다.

“생각이 복잡해서 잠깐 몰래 숨어있었는데. 레스 씨가 그때 피카니 씨가 충동적인 발언을 꺼내도록 부추겼어요. 레스 씨는 그 자리에서 제가 듣고 있는  다 알면서도 그랬었고요.”

침묵이 흐르는 동안 캘러헬과 라카키는 싸늘한 시선으로 레스를 째려보았다.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느끼면서 그는 물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시는 건데요?”

“자네에게 굉장히 실망했네.”

“사람 마음을 가지고 놀다니!”


캘러헬과 라카키가 차례대로 말했다.

“아무리 상대에게 악감정이 쌓여있어도 지켜야  도리라는  있어!”

“전쟁 범죄!”

“그딴 수작이나 부리니 연애를  하지!”

“인간쓰레기!”

루나는 점잖게 가만히 있으려 했지만  사람의 악담 세례 덕에 내심 분이 풀리는지 그녀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고 있었다. 레스는 정말, 정말로 자기 친구들이 다시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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