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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4화 〉[4권] 134회 - 아무렴 어때 (134/188)



〈 134화 〉[4권] 134회 - 아무렴 어때

캘러헬은 자신의 이마를 쓰다듬으면서 앞머리를 가다듬고 다시 점잖은 태도로 돌아왔다. 다른 손으로는 계속 떠들려는 라카키의 입을 가렸다. 분위기가 진정되자 그는 말했다.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지. 루나 씨. 제가 신분이 특이한지라 반려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살아온 세월은 제법 됩니다. 특별한 상담이 필요하시다면 조언을 드리겠습니다.”


루나는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쑥스러워하는 표정으로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말했다.

“아무래도 거절해야겠죠?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니까.”

캘러헬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 결정에 정말 마음속 깊은 곳까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습니까? 주변 사람을 위해서라며 자기 마음을 억누르는 거라면  마음이 재앙의 불씨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

루나는 말을 흐리다가 다시 고민에 빠졌다. 레스는 라카키의 옆으로 가서 구경하는 자세로 얌전히 서서 보았다. 캘러헬은 인내심 있게 상대가 입을  때까지 차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신 없는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갈피를 못 잡겠어요. 이 나이가 되도록 제대로 된 교제를 해본 적이 있어야 말이죠…. 남자하고 손도 거의 못 잡아봤어요.  말은, 은유적으로요.”


“뭐, 1주일간 누워있다가 막 깨어나신 참인데 당장 마음을 결정하는 건 당연히 무리죠. 여유를 갖고 명상하세요. 다들 그 정도 배려는 해줄 겁니다.”


루나는 시선을 내렸다가 살짝 더듬으면서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레스가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손짓을 하면서 운을 띄었다.


“이제 하실 얘기 다 끝난 건가요?”

“아니.”

캘러헬은 목울대 전체를 써서 중저음으로 단박에 대꾸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고 레스에게 던져서 건넸다.

“자네 토템. 아자리아 양하고 샤카자이아가 이런 상황에 대비해서 쓸만한  없냐고 부탁해서 내가 만드는 걸 조금 거들었지. 거기에는….”


“죄송한데 이건 제  덫이 아니라 뭔가 다른 물건인데요? 이거 군번줄이잖아?”

캘러헬은 레스의 말을 듣고 주머니에 들어있는 다른 물건을 꺼내서 확인했다. 레스가 들고 있는 건 동전만 한 크기의 철판이 꿰어 있는 목걸이였고 캘러헬이 들고 있는 건 가운데가 비어있는 톱니바퀴를 테두리 삼아서 만든 꿈 덫 목걸이였다. 그는 창피하다는 듯 입가를 씰룩이며 레스의 물건과 자신의 물건을 교환했다.

“미안. 그건  군번줄이었어. 이게 자네 토템이야.”

“문명 세계 출신이었군요? 피카니처럼 황무지 토박이신 줄 알았는데요.”


“그건 나중에 설명하지.  아씨께서 말씀하시기를 자네는 일행에게 위기가 닥칠 때마다 항상 무리하니까,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더라고. 그 토템은 두 아씨의 머리카락으로 엮은 거야.”

루나가 가까이 다가와서 거기에 관심을 보였다.


“와아. 고위 마족이, 심지어 여자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준다는 건 굉장히 의미가 각별해요. 친구들이 레스 씨를 정말 좋아하는군요.”

레스는 되찾은 목걸이를 자신의 목에 걸고 꿈 덫을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여기에 특별한 힘이 있나요?”


“해로운 기운을 감지할 수 있지. 갑자기 그 토템의 거미줄 장식에 물방울이 맺힌다면 주변에 사악한 무언가가 있다는 거야. 그리고 머리카락을 제공해준 사람들과 비 물질영역을 통해 이어질 연결고리이기도 하지.”


레스는 뜻을 이해하고 숨을 삼켰다.


“제 친구들을 쫓을 추적기가 되겠군요.”

“사실 그 토템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 아자리아와 샤카자이아가 그걸 만들 때 시간이 너무 촉박했었거든. 아직은 제 역할을 제대로 못 할 거야. 하지만 전문가에게 맡긴다면 그 전문가와 토템끼리 서로 요긴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지.”


그렇게 말하면서 캘러헬은 루나를 바라보았다. 루나는  자기한테 주목이 끌릴 줄은 예상하지 못해서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 루나 씨가 목걸이만 가져가면 아자리아는 붙잡히는 거 아닐까? 그렇지 않아. 엄연히 자네를 위해서 만들어진 토템이니까 자네가 없으면  토템은 그냥 장신구에 불과해. 친구들과 다시 만나려면 자네들이 서로 도와줘야 해.”

“어색하네요.”


루나가 레스의 옆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캘러헬은 계속 말했다.


“마녀와 총잡이가 폭풍의 눈에서 떠날 기미가 없군. 일종의 계시인가?”

“글쎄요.”

레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꿈 덫을 옷깃 속으로 넣었다. 그리고 라카키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앞서 말한 전문가에 대해서 말인데요. 루나 씨 대신 라카키가 맡을 수 있지 않나요?”

라카키는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캘러헬이 대답했다.

“페어리들의 규약 문제도 있고. 무엇보다 지금 라카키가 굉장히 약해졌어. 가능한 이 녀석이 위험에 처할 일은 피하고 싶어. 안 그래도 저번에 시간을 조종하는 짓을 벌이는 바람에 여러 가지 의미로 라카키는 난처한 상황이야.”

“우리 종족 사이에도 협회 같은 게 있거든. 난 저번 걸로 경고를 받았어.”

라카키가 발끝을 바닥에 비비적거리면서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루나가 무언가 깨닫고 눈을 가늘  떴다.


“잠깐만요. 지금 라카키 씨가 힘도 약해졌고, 육신을 가지고 있으니. 만일 지금 죽을 정도로 크게 다치면 어떻게 되죠?”

“죽어.”

라카키는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이 간결하게 대답했다. 레스와 루나는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다들 표정이  그래? 생명이란 원래 그런 건데.”

“그냥 일이 아니니까!”

“당장 완벽하게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셔야죠!”

레스와 루나는 호들갑을 떨었지만 라카키는 태연했다.


“난 필멸자로 지내는 것도 나름 마음에 들어. 특히 화장실 갈 때가 재밌더라.”

캘러헬은 라카키의 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리면서 일행을 진정시켰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줄 거야. 그리고 애도 날 지켜줄 거고.”


“그 자식한테 열 잔은 더 먹여야겠네요.”

레스가 목 안으로 그르렁 울었다. 캘러헬은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마지막으로 꺼낼 주제가 남았어. 루나 씨에 대한 겁니다.”

“또 있었나요?”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흐름에 익숙해져서 이제 일일이 놀라지 않았다.

“삼각관계만큼 심각한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언제까지 물고 늘어질 건가요? 그거.”

루나는 표정이 뚱해졌다.


“라카키도 버티지 못하는 불협화음에 당했으면서도 규격 외의 ‘한계 해제’를 해내셨다면서요.”


“아무리 물어보셔도 저는 그때의 기억이 잘 안 나요.”

“없지는 않다는 거군요.”

“윽….”

갑자기 루나는 표정이 굳었다.


“심문하는 거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로 본인도 모르는 건지 확인한 거니까.”

레스가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대체 뭘 하려고요?”

캘러헬이  손바닥을 펼치고 묘하게 귀여워 보이는 손짓을 하며 설명했다.

“왜 베르나르가 여기로 왔을까? 어떻게 루나 씨가 그런 걸 해냈을까? 이 사실들이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 그 두 밥맛이 가게에서 나간 뒤로 자네가 추리했던 거 나도 들었어. 바닥에 귀 바짝 대고. 마루가 차가웠지. 계속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나한테 짐작 가는  있어.”

루나는 눈꺼풀을 살짝 내렸다.


“그게 뭐죠?”


캘러헬이 그녀를 향해 정중히 손끝을 뻗었다.

“첫 번째로. 루나 씨는 라카키에게 허락을 해주셔야 합니다. 확실한지 알아봐야 해요.”

레스가 끼어들었다.

“그냥 무슨 생각인지 말해주시면 되잖아요?”

캘러헬이 고개를 저었다.

“안돼. 그냥 짐작만으로 입 밖에 꺼내기 너무 위험해.”

그 말을 듣고 루나와 레스는 의문에 빠져서 서로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불안해졌다. 캘러헬이 차분하게 계속 말했다.

“허락 여부는 루나 씨에게 맡기겠습니다. 물론 판단은 전적으로 존중해드릴 겁니다.”

라카키는 가만히 서서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루나는 잠깐 고민한 다음 마음을 굳히고 라카키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뻗쳤다. 라카키가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맞잡고 다른 손을 그녀의 명치로 뻗어서 부드럽게 대었다.

“눈을 감아요.”


루나는 라라키의 말에 따랐다. 뒤이어 라카키도 눈을 감고 집중했다. 잠시 후에 라카키는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루나는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벌써 끝났어요?”

라카키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캘러헬이 한쪽 무릎을 접고 귓가를 라카키에게 가까이 대자 라카키가 그에게 속삭였다. 캘러헬은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이런.”


레스가 재촉했다.


“대체 뭔데요?”

캘러헬은 땅이 꺼질 정도로 한숨을 거칠게 쉬고 루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양손을 모아 입가에 대고 루나의 귀에 속삭였다. 루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레스는 인상까지 써가며 당황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요?!”


캘러헬이 여태껏 보인 적 없는 심각한 태도로 대답했다.

“설명하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모르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아. 딱 하나 말해줄 수 있는   분이 제국으로 돌아가면 절대로 무사할  없다는 거야.”

“뭐라고요? 하지만 베르나르는 루나 씨를 죄인으로 끌고 가려는 게….”


“자세한  나중에 상황 봐서 말하겠네. 루나 씨도 아시죠? 결단코 그냥 말하면 안 됩니다.”

주저앉은 채로 루나가 얼이 나간 얼굴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스는 어떻게든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루나 씨가 저희랑 같이 여행하는 건 포기해야 합니까?”


“생각 중이야. 생각 중이야. 생각하는 중이야.”

캘러헬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제자리를 빙빙 맴돌았다. 루나는 자기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다가 어떻게든 기운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기 힘으로 일어나기에는 버거워 보여서 레스는 손을 뻗어서 그녀를 부축해주었다. 그때 레스는 촉각을 통해 상대의 두려움을 감지했다. 사정은 몰라도 그는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계속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던 캘러헬이 한쪽 무릎을 허리 높이로 올린  우뚝 굳었다. 그대로 절묘한 발목의 움직임과 균형감각으로 몸을 끼리리릭 레스를 향해 돌렸다.

“사쿠라비. 나 믿나?”

“당연하죠. 제가 의지할 사람이 달리 누가 있는데요?”


“오빠 믿지?”


“잘 못 들었습니다?”

캘러헬은 그대로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서 아까 빨래를  때 쓰던 장대를 손에 쥐고 땅으로 내려왔다.


“잠깐만 기다려.”

빨래 장대를 레스에게 쥐여주면서 캘러헬은 사다리를 타고 다락방으로 들어갔다. 레스는 미심쩍은 눈으로 캘러헬의 자취를 쫓아가다가 손에 든 빨래 장대를 관찰했다. 길이는 2m가량에 굵기는 레스 같은 성인 남성이 최대한 손을 벌려야 간신히 감싸  정도로 두툼했다. 그리고 금속제였다. 그는 자세히 볼수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금속의 질감이랑 색감이 묘하게 익숙한데….”

루나도 궁금해져서 같이 그 빨래 장대를 관찰하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 눈치였다. 뒷짐을 지고 둘을 향해 라카키가 말했다.

“그거 오리칼쿰제야.”

루나와 레스는 눈을 크게 뜨고 서로의 얼굴과 빨래 장대를 번갈아 보았다. 라카키가 뒤이어 설명했다.

“탐이 괴물 잡을 때 쓰던 거.”


당황한 레스는 어리바리하게 조금 멍청하게 들리는 말투로 물었다.


“이거 손에 쥐기만 해도 느껴지는 무게가 상당한데 몇 kg이에요?”


“23kg”

참고로 현대에서 벤치프레스용으로 사용하는 최대 규격 역기봉의 무게가 20kg대다. 라카키가 다시 말했다.

“이대로 휘둘러서 쿼터스태프로 다루거나 끝에 창날이나 무게추 같은  끼워서 다양한 장병기로 바꿔가며 싸웠어.”

루나가 물었다.

“왜 저번 싸움에는  쓰고 여태 여기에다가  거죠?”


“사람을 상대로 이런 건 의미가 없으니까. 총은 사람에게, 강철은 괴물에게. 괴물 사냥꾼들 사이에서는 상식이야.”


레스가 중얼거렸다.


“문제는 이게 아니라, 저 양반이 도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캘러헬이 다락방에서 다시 옥상으로 올라왔다. 그는 후줄근했던 구깃구깃한 상의를 빳빳한 와이셔츠로 갈아입고 밤색 조끼와 세련된 중절모로 한껏 꾸미고 왔다. 바지와 구두도 다른 거로 바꿔와서 아까와는 딴사람처럼 멀쑥하게 보였다. 소매는 팔을 움직이기 편하게 팔꿈치까지 걷어서 띠로 고정했다.

캘러헬이 레스에게서 철봉을 돌려받고 라카키에게 외쳤다.


“플랜 Z를 실행한다!”

“플랜 Z?”

레스가 그렇게 따라서 말하는 사이에 라카키는 순식간에 레스의 양손을 뒤로 낚아채고 수갑으로 채워버렸다.


“지금 무슨 짓입니까. 잠깐만 라카키? 이거 위해 행위 아니야?”

그는 당연히 정색하고 당황했지만 캘러헬과 라카키는 신경 쓰지 않고 그의 입에 물릴 손수건을 준비하고 있었다. 손수건을 활짝 펼치면서 매우 차분하게 캘러헬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 자네가 위험해질 일은 없어.”

“지금 제 꼴을 보고도 그 소리가 나와요?!”

레스가 자기 손목에 매인 수갑을 흔들어 소리 내며 외쳤다. 캘러헬은 그 말은 무시하고 라카키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시지?”

“그리니치 표준 시각으로 19시 38분 27초.”

“라카키, 여기에는 그리니치 천문대가 없어.”

“아무렴 어때.”

“어쨌든 시간에는 그럭저럭 맞출  있겠군.”

그는 활짝 펼친 손수건을 레스의 입에 물려서 재갈을 묶었다.

“웁?! 웁웁웁!”


보다 못한 루나가 레스를 대신해서 물었다.

“캘러헬 씨.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감도 안 잡히는데요.”


“그걸 설명하는  자체가 섹시하지 않네요.”


“밝히기 어려울 정도로 위험한 짓을 하려는 건가요?”


“아뇨. 딱히 복잡하진 않아요. 시크릿 서비스가 레스한테 줬던 기한이 12시간 맞지?”


레스는 재갈을 입에 문 채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웁웁웁웁. 캘러헬은 20kg이 넘는 철봉을 잔상이 보일 정도로 가볍게 휘두르면서 역수로 쥐어서 팔 뒤에 봉을 감췄다.

“뭐하러 저쪽이  때까지 기다려줘? 지금 당장 쳐들어간다.”

루나가 멍한 얼굴로 말했다.


“농담이죠?”

“아뇨. 진담입니다. 진짜로 쳐들어갈 거니까. 그렇기에 진담입니다.”

캘러헬은 점잔빼는 얼굴로 쓸데없이 무게 잡는 목소리로 말을 남기고 레스의 멱살을 잡아서 번쩍 들어 자신의 어깨에 짊었다. 그리고 냅다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그 뒤로 레스의 뭉개진 비명이 꼬리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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