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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7화 〉[4권] 137회 - 야옹아 멍멍해봐 (137/188)



〈 137화 〉[4권] 137회 - 야옹아 멍멍해봐

릴리는 발바닥이 땅에서 거의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듯이 보폭을 조심히 옮겼다. 상반신은 거목처럼 흔들리질 않았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그 절도 넘치는 몸동작으로부터 큰 인상을 받았다. 라카키도 아까와는 달리 입을 다물고 조용히 숨을 죽여서 광경을 보았다.

두 걸음 더 가까워졌다. 캘러헬이 대각선으로 뒤로 걷자 상대가 발뒤꿈치를 들었다. 릴리는 칼집과 손잡이를 양손으로 단단히 쥐고 호각 소리 같은 괴이쩍은 기합을 내질렀다. 그 소리가 퍼지는 순간 릴리의 몸이 잔상으로 변했다.


마치 새의 날갯짓처럼 순식간에 둘의 거리가 좁혀졌다. 그녀는 검집에 꽃은 검을 짧은 봉처럼 쥐어서 캘러헬이 내민 봉을 옆으로 걷어내었다. 칼집과 철봉이 맞닿는 마찰음이 거칠게 났다. 계속 걷어내면서 앞으로 다가가며 릴리는 캘러헬의 철봉이 땅에 닿을 때까지 억눌렀다. 그대로 칼집과 칼 손잡이를 서로 반대 방향으로 잡아당기면서 횡으로 칼을 휘둘렀다. 그 직전에 캘러헬은 바닥으로 쪼그리듯이 주저앉아서 피했다. 그의 머리 위로 칼이 지나갔다.

릴리가   칼을 휘두르느라 생긴 빈틈을 노려서 캘러헬이 쪼그리면서 목덜미와 어깨에 걸친 철봉으로 땅을 훑었다. 그녀는 짧게 뛰어서 피하고 뒤로 물러났다. 캘러헬은 쪼그리면서 철봉을 길게 뻗은 채로 계속 자세를 지켰다. 그다음은 둘이 서로 노려보면서 대치했다.

루나가 얼이 빠진 목소리로 타티아나에게 물었다.

“방금 저 사람 분명 축지법 썼죠?!”

“저보다는 미숙하지만 맞습니다. 역시 무공 사용자였나. 그 정도로 다른 대륙의 무술에 심취한 게 아니고서야 우치가타나를  리가 없지.”

릴리는 자세를 낮춰서 칼집을 소리 안 나게 땅에 놓고 양손으로 칼을 쥐었다. 캘러헬이 벌떡 일어나면서 저쪽으로 거리를 좁히고 철봉을 어깨에 걸친 채로 자신의 목덜미를 지렛대 삼아 잽싸게 연속으로 휘둘렀다. 릴리는 눈을 번쩍 뜨고 거칠게 기합을 지르며 전부 쳐냈다.


“찻! 핫! 핫! 이얏!”

금속과 금속이 맞닿는 울음소리가 거리 구석까지 퍼졌다. 캘러헬이 공격을 멈추고 무기를 거두는 순간 릴리가 갑자기 허리를 숙이고 칼을 한 손으로 들었다. 왼손을 땅에 대고 오른손에 쥔 칼을 거꾸로 돌려 잡고 그녀가 기합을 질렀다. 마치 땅을 깔고 나는 제비처럼 릴리는 순식간에 움직였다. 신경이 고조된 사람만이 느끼는 느려진 시간 속에서 상대가 자기 앞에 보이자 그녀는 오른팔을 자기 몸에 감싸듯이 휘둘러 거꾸로 쥔 칼로 그를 베었다.


칼이 벤 것은 땅에 단단히 박힌 철봉이었다. 땅에는 상대의 발이 안 보였다. 릴리는 찰나의 순간 그가 어디로 갔는지 영문을 몰라 당황하다가 머리에 발길질을 맞고 뒤로 3m나 나가떨어졌다. 캘러헬은 릴리가 공격하려는 순간에 철봉을 땅에 박으면서 철봉을 붙잡고 봉춤을 추듯이 원심력을 살려서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돌려 반격했다.


타티아나가 계속 땅에 쓰러져있는 릴리에게 다가가서 살폈다. 그녀는 상대의 상태를 계속 살피다가 릴리의 목 옆부분을 손끝으로 꾹 찔렀다. 그러자 기절했던 릴리는 정신을 차리고 기침을 터트렸다.


캘러헬이 그녀에게 걱정하는 목소리로 급하게 말했다.


“어이! 괜찮아?! 나도 모르게  조절을 실수했어! 미안하다!”


“힘 조절을 실수했다니?”


릴리가 황당해하자 마침 그녀가 날아간 곳 근처에 있는 모르스가 설명했다.

“사실이다. 저놈은 여태껏 대련하면서 계속 힘을 조절했다.”


그녀가 캘러헬을 향해 거칠게 외쳤다.


“제대로 힘을 다하지 않고도 우리를 가지고 놀 수 있다는 겁니까?! 무례하게!”

모르스가 한숨을 쉬고 캘러헬을 변호해줬다.


“너  철봉 무게가 얼마짜린지 아냐? 20kg 남짓이다.”


“예?”

릴리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물에 적신 손수건으로 릴리의 얼굴에 묻은 흙을 닦아주었다.

“아무리 무기로 대련을 할 때 힘보다 중요한 게 기술이라지만, 이 정도로 체급 차이가 심하게 나면 승부가 되겠느냐.”


라카키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탐이 작정하고 힘껏 내리쳤으면 어지간한 강화 인간도 몸이 두 토막 나.”

“라카키, 그런 소리 하면 내가 예전에 진짜로 그런  한 것처럼 들리잖아.”


“음. 실제로 그런 적은 없어. 실제로는.”

캘러헬과 라카키의 말이 끝나자 타티아나가 릴리에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규칙대로라면 아직 기회가 두 번 남았습니다만.”

“당연히 계속한다! 사부의 명예가 걸렸어!”

그녀는 자신의 뺨을 찰싹 때리고 일어났다. 모르스는 그 모습을 걱정하는 눈으로 보았다. 타티아나가 원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면서 혼잣말했다.


“허이고야 강호의 도리가 이런 곳에 지켜질 줄이야.”

릴리가  모습을 보고 불만스럽다는 투로 물었다.


“지금 뭐라고?”

“아뇨. 아무것도.”


타티아나는 시치미를 뚝 뗐으나 가뜩이나 화가 났던 릴리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어이 마족. 은근슬쩍 우리 실력을 품평하면서 훈수를 두던데 그게 예의라고 생각해?”

“죄송합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침착하게 그녀는 대꾸했다. 릴리는 칼을 고쳐 잡으면서 말했다.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면 성의를 보여. 내 대련이 끝나면 너도 저 남자하고 붙어라!”


타티아나는 한 박자 늦게 눈을 크게 뜨고 캘러헬과 릴리를 번갈아 보았다. 캘러헬이 말했다.


“저 아씨는 무기를 안 가져왔는데.”

“무기가 필요하다면 제 것을 빌려주지요. 어떠냐 마족! 싫다면 무릎 꿇고 조아려라!”


“대련하지 뭐.”


타티아나가 단박에 대답했다. 너무 간단한 반응에 릴리는 얼굴이 굳었다. 심지어 주변의 일행도 그것 때문에 놀랐다. 캘러헬은 목덜미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본인들이 서로 동의했다면 딱히 내가 말릴 이유가 없지. 아무튼, 다시 해볼까.”

“그럼.”


릴리는 감정을 추스르고 양손으로 다시 칼을 쥐었다.  사람이 각자 자리로 가자 타티아나가 손을 위로 올렸다가 내렸다. 한편 모르스는 찜통에 남아있던 마지막 음식을 입에 넣고 손에 들고 있는 젓가락을 유심히 쳐다봤다. 쇠젓가락이다. 그가 노점의 주인에게 물었다.

“이 젓가락 내가 살  있겠소?”

오크가 되물었다.

“상관없지만 그딴 걸 어디에 쓰려고?”


어쨌든 저쪽에서는 다시 대련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캘러헬이 먼저 보폭을 적극적으로 좁혀왔다. 릴리는 계속 발을 미끄러트리는 듯한 보법으로 계속 상대와 거리를 유지했다. 구경하면서 입이 근질거려진 피카니가 타티아나에게 물었다.


“왜 저렇게 발을 땅에 질질 끄는 거지?”

“다리를 덜 움직여야 칼과 몸이  흔들리니까. 게다가 카타나는 외날 검이어서 동작이 다소 정해져 있거든. 동작 대부분이 아랫배와 등에 힘을 줘서 몸을 곧게 편 자세에서 출발하지. 무게중심도 안정되도록 앞걸음과 뒷걸음의 움직임을 항상 통일시키고.”

“비효율적이지 않나? 우리 검술은 보법이 넓고 자유롭잖아.”


“단순하고 정해진 동작일수록 반응이 빠르고 강력해. 게다가 카타나는 묵직하고 탄성이 없어서 베는 위력이 강해. 최소한으로 움직여서 최대한의 효율을 낸다. 모든 근접전투 무술이 추구하는 방식이지. 모든 무술은 자신의 문화 속에서 나름의 과정을 통해 발전했어.  검술도 그 발전의 갈래를 드러낸 모습 중 하나인 거지.”


루나가 끼어들었다.


“그나저나 레모니 씨. 정말로 싸워도 괜찮겠어요? 오늘 붕대를 푸셨는데.”

“훈수를 뒀으면 나름의 실력을 보여야 도리니까요. 저도 무술가인데 예의는 지켜야죠.”


캘러헬이 자세를 확 낮추더니, 갑자기 위로 펄쩍 뛰어오르면서  손으로 봉을 창처럼 뻗었다. 릴리는 걷어내면서 피하려다가 자세가 무너져서 뒤로 주춤거렸다. 물러난 곳에 마침 구경하던 피카니가 있었다. 그는 어쩌다가 뒤로 넘어지려던 릴리를 안아서 받아줬다.


두 사람은 서로 어색하게 입을 다물고 눈을 마주쳤다. 피카니는 다시 앞으로 돌려보냈다. 라카키가 타티아나에게 물었다.

“방금 것은 유효타인가요?”

“장외 판정은 규칙에 없었으니 경기 속행.”

캘러헬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주변을 계속 돌아다녔다. 도중에 춤동작처럼 몸을 돌려가면서 발을 놀리기도 했는데 그것 하나하나가 일종의 준비 같아서 릴리는 정신이 사나워졌다. 그녀가 앞발을 내밀면서 머리를 노려서 휘두르자 캘러헬은 몸을 뒤로   젖혀서 피하고 팔만 앞으로  뻗었다. 공격이 닿기 직전 릴리가 기합을 지르자 그녀의 몸이 갑자기 바람에 맞은 것처럼 뒤로 밀려났다. 그녀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캘러헬은 계속 경쾌하게 뛰어다녔다. 대치가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루나가 말했다.

“아! 캘러헬 씨가 지금 ‘칸 드 콩바’를 쓰시는군요.”

피카니가 말을 받았다.


“‘칸 드 콩바’?”


“19세기 쇼생에서 만들어진 신사용 지팡이 호신술이에요. 격렬한 동작이 특징이죠. 원래는 아주 가벼운 지팡이로 다루는 유파인데, 저분에겐 아무래도 상관없겠죠.”


릴리는 심호흡을 하고 기합을 내지르며 칼을 높이 들었다.


“바람의 검, 제2형!”

캘러헬은 그 소리를 듣고 ‘엥?’하고 중얼거리며 놀라서 발놀림이 멎었다.


“칼날 족제비!”


릴리가 그 자리에서 십자 베기를 하자 캘러헬을 향해 거친 바람이 불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방어 자세를 잡았다. 바람이 멎었다. 캘러헬의 걷은 소매 아래로 팔뚝에 할퀸 자국 같은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릴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기술 이름을 외치면서 공격한 거야?”

릴리는 숨이 차올라서 호흡마다 몸이 들썩거렸다. 라카키가 타티아나를 올려보았다.

“해설 부탁드립니다.”

“일단 방금 기술 이름을 외치면서 공격한 까닭은…. 굳이 비유하자면 마법사들이 마법을 부릴 때 주문을 외치는 것과 비슷한 이유고. 방금 것은 득점이라고 쳐주기가 좀 모호한데.”


릴리가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무효라고 쳐도 상관없어.  상처도 살짝 긁힌 수준이고 나도 사실상 반칙을  거나 마찬가지니. 아까는 급해서 나도 모르게 어쩌다가 저지른 거야.”

타티아나는 턱에 손을 대고 생각하고 결론을 냈다.


“그럼 절반 득점한 거로. 실전 대련이니 반칙도 없고, 캘러헬 씨는 충분히 직전에 피하거나 상대가 빈틈을 보인 순간 공격할 기회가 있었는데 방심해서 그대로 맞아줬으니까요.”


캘러헬은 철봉을 한쪽 어깨에 올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분명 내 실책이지. 인정하겠어. 불만 없음.”


모르스가 릴리의 뒤에서 말을 걸었다.


“나 밥  먹었으니까 그만 내가 나서서 정리하고자 한다만.”

“절반 득점했습니다! 조금만 더 하면 됩니다!”

정열 가득한 대답에 기가 질려 모르스는 말을 잃었다. 캘러헬이 철봉으로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정 끝까지 가고 싶으시다면 나도 제대로 가주지.”

“덤비시죠!”


릴리가 자세를 잡고 앞발을 땅에 찍으면서 기합을 질렀다. 캘러헬의 철봉을 양손으로 회전을 시켰다. 휘두르는 철봉에서 탈곡기 소리가 났다. 점점 가속이 붙자 철봉의 회전에서는 공장에서나 쓰일 법한 분쇄기를 연상시키는 압박이 느껴졌다. 캘러헬이 험악한 목소리로 질렀다.


“카우보이 1형! 풍차 돌리기!”

그는 계속 붕붕 돌리면서 다가왔다. 릴리는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 뒤로 물러났다. 캘러헬이 회전으로 축적된 힘이 담긴 철봉을 땅에 내려치자 지축이 흔들렸다.


“카우보이 2형! 그냥 때리기!”

“꺄악!”

릴리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연재해를 향해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캘러헬이 봉의 중간을 쥐고 그녀를 향해 회전을 실어서 봉의 양쪽 끝부분으로 연타했다. 릴리는 어떻게든 숙련된 자세로 연타를 계속 쳐냈으나 기세에 점점 밀려 발이 계속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의 얼굴도 창백해져 갔다. 그는 자세가 완전히 무너진 릴리를 발로 차서 넘어트렸다. 그리고 봉을 크게 한 바퀴 돌리고 손바닥을 앞으로 뻗었다. 동시에 원숭이 같은 괴이쩍은 기합도 질렀다.

“끼요오오오옷! 카우보이 3형! 정치적 올바름!”

라카키가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호루라기를 입에 대고 힘껏 불었다. ‘삐이이이이익!’

“뭐 하는 짓이야! 다 큰 어른이 창피하지도 않아?!”

캘러헬이 머리를 긁적이며 라카키에게 고개를 굽실거렸다. 그가 머쓱한 투로 말했다.


“하지만, 기술 이름을 말하면서 공격한다니. 그 개념이 너무 멋있어서 참을 수가 없었어.”

피카니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뜬금없이 정치적 올바름이  나와?”

“웁웁웁웁웁웁웁웁웁웁웁웁웁.”

“남자, 여자 안 가리고 골고루 패겠다는 의미로 정치적 올바름이겠지. 라고 레스가 말함.”


라카키의 말을 듣고 일행은 다 같이 한숨을 쉬고 얼굴을 한 손으로 감쌌다. 타티아나가 탄식을 뱉고 릴리에게 다가가 물었다.


“계속할 건가?”

“다.. 당연하지! 아직 기회 한 번 남았으니까!”


그 투지에 감격하여 타티아나는 진심으로 상대에게 경의를 담아서 손을 뻗어 부축해주었다. 릴리는 바로 원래 자리로 돌아가 자세를 잡았다. 타티아나가 다시 대련을 시작하라고 손짓을 하자 릴리가 자신의 칼을 상대를 향해 냅다 집어 던졌다.


“읏?!”


캘러헬은 그 행동에 놀라서 잠깐 당황하면서도 날라온 칼을 봉으로 쳐냈다. 릴리는 순식간에 봉에 달라붙어서는 그걸 빼앗으려 했다. 타티아나가 말했다.


“아, 과연. 무기 뺏기로 전략을 바꾼 건가. 장병기에 대처하는 대표적인 방법이기는 하지.”

“끄응! 끙! 으아으으으읍!”

릴리는 안간힘을 써가며 캘러헬에게서 봉을 빼앗으려고 했으나 상대는 꿈쩍도  했다. 난감하다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대로 있다가 캘러헬이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 철봉에서  손을 뗐는데도 힘 싸움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아씨. 내가 여태껏 힘을 조절하면서 대련을 하고 있었거든. 이걸 어쩌지?”


“뭐가 문제입니까?”


“내가 지금 무기를 뺏겨줘야 정정당당한 걸까? 아니면 버티는 게? 애매하잖아.”


“지금 실전 대련 중이니 무기를 뺏겼다면 엄연히 저쪽의 득점이 됩니다.”

라카키가 빙긋이 웃으면서 레스를 바라보자 그가 울부짖었다. 릴리는 힘이 빠져서 봉에서 손만 떼지 않은 채 숨을 골랐다. 타티아나가 자신의 턱 밑을 긁고 다시 말했다.


“아니, 방금 저쪽이 자기 무기를 집어 던지고 비무장 상태에서 공격을 시도했으니 무기를 잃었다고 해서 패배라고 판정할 수는 없겠군요.”

“좋아. 그럼…. 으아아아 갑자기 내 팔에서 힘이….”

캘러헬은 기운 없는 목소리를 내면서 봉에서 손을 놓았다. 릴리는 멍한 표정으로 갑자기 손에 들린 묵직한 철봉을 받아들이고 한 박자 늦게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휘둘렀다.


“읏. 으앗! 으아앗!”

과연 그녀도 엄연한 강화 인간답게 20kg짜리 철봉의 무게를 그럭저럭 감당했다. 하지만 역시 원래 주인이 쓰던 만큼 날렵하게 휘두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미 기력도 잔뜩 빠진 상태다. 캘러헬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바닥으로 철봉을 옆으로 걷어내고 상대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명중.”


타티아나가 냉정하게 말했다. 릴리는 혼이 빠져나간 표정을 지으면서 철봉을 돌려줬다. 노점을 향해 터덜터덜 돌아가는 그녀에게 타티아나가 칼집에 꽂힌 우치가타나를 내밀었다.

“중요한 물건인데 잊으면  되지.”


릴리는 정신을 차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어, 그래. 그러고 보니 이제 그쪽 차례였지. 내 카타나 빌려줄까?”

그녀는 고개를 젓고 양손으로 정중히 칼을 전했다.


“아니. 난 맨손이 더 편해.”


“뭐? 맨손으로 저걸?!”

상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타티아나는 상대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노점 방향으로 밀었다.


“당신 훌륭하게 싸웠어. 그럼.”


릴리는 동료들의 환대를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금발 머리 청년이 수저를 차려주면서 말했다.

“여기 덤플링 맛있더라. 너도 어서 먹어.”

“평소 그렇게나 열심히 수련했는데 한 대도 못 때리다니….”


머리를  청년이 그녀의 잔에 물을 따라주면서 어깨를 두드려줬다.

“그렇게 침울해할 거 없잖아. 우리는 너처럼 합 한  제대로 주고받지도 못했어.”


모르스가 천에 감싼 자신의 무기를 들면서 릴리에게 말했다.


“수고했다.”

“사부….”


“밥 먹는 자리에 쳐들어오는 저 야만인에게는 내가 응당한 심판을 내려주마.”

모르스가 천을 벗겨내자 광택이 선명한 금속제 활이 드러났다. 그의 부하들이 그걸 보고 기겁했다.

그동안 타티아나는 소매를 가지런히 접어서 움직이기 편하게 팔꿈치까지 걷었다. 캘러헬은 그녀가 약간의 준비운동을 마칠 때까지 땅에 꽂아둔 철봉에 기댄  기다렸다. 상대가 준비를 마치고 자리에 서자 캘러헬은 팔짱을 풀고 땅에서 철봉을 뽑았다.


루나가 타티아나를 향해 말했다.


“정말 괜찮겠어요?”

타티아나는 루나를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캘러헬을 바라보았다.


“규칙은 그대로 하면 되겠습니까? 제가 한 번 득점하면 그쪽이 패배한 거로 치는 거요.”


“그대로 해야 공평하겠지.”


그녀가 주먹 쥔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싸면서 들어 올리고 살짝 흔들었다.

“그럼.”

캘러헬이 손을 들고 급하게 외쳤다.


“아냐. 잠깐만 기다려봐.”

“무슨 문제이신지요.”


“그냥 하는 건 긴장감이 없잖아. 뭔가 내기를 걸고 대결하지 않겠어?”

타티아나는 자기도 모르게 눈가에 힘을 줬다.


“일단 무슨 생각이신지 듣겠습니다.”


“내가 이기면, 야옹아! 멍멍해봐.”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 표정이 굳었다. 타티아나는 간신히 평정심을 되찾았다.

“제가 싫어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고양이 농담입니다.”

“그러니까 벌칙이지.”


캘러헬이 입꼬리를 올렸다.

“제가 이기면 제 앞에서 고양이 농담은 영원히 하지 마세요.”

그의 얼굴이 바로 경악으로 가득 찼다.

“뭣! 그건 너무 하잖아! 영원히 금지라고?!”

“저 방금 기분 확 상했으니까 받아들이지 않겠으면 그냥 관두겠습니다.”

“젠장 알았어! 받아들인다!”

노점에서는 릴리가 음식을 입안에 넣고 씹다가 뜨거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모르스가 말했다.


“그거 안에 수프 들어있는 거다. ‘샤오룽빠오’라고 부르는 건데 조심해서 먹어.”

“하후 하후 하후. 맛있습니다. 그나저나  그랜드 마스터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군요.”

“인류를 위해서라도 개척시대  죽였어야 했는데 말이다.  잘못이다.”

“저 여자 분명 이쪽으로 전향한 공작원이라고 했었죠. 무공에 대해서  아는 눈치였습니다.”

“레모니 타티아나의 사부는 ‘사파’로 낙인이 찍혀서 추방당한 오크라고 약력에 적혀있더군.”

캘러헬과 타티아나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계속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캘러헬이 그녀에게 보이도록 입을 뻐끔뻐끔 움직였다. 타티아나가 의아해하는 눈짓을 보내자 캘러헬이 한쪽 눈을 찡긋 깜빡였다.

그가 빛살처럼 타티아나를 향해 봉을 찔렀다. 타티아나는 고갯짓만으로 봉을 피하고 그대로 뻗어 나온 봉을 붙잡고 디딤대 삼아서 뛰어올랐다. 캘러헬의 얼굴에 타티아나의 이단 옆차기가 정통으로 들어갔다. 타티아나는 그대로 우아하게 공중제비를 돌면서 착지했다.

캘러헬이 얼굴에 묻은 흙을 손으로 만지면서 우울하게 말했다.

“내가 졌단 말인가?”

“명중.”


“안 돼에에에! 고양이한테 고양이 농담을 못 하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

무릎 꿇고 주저앉으면서 내지르는 그의 통곡을 뒤로하고 타티아나는 일행에게 돌아갔다. 레스가 바로 타티아나를 바라보면서 뭐라 말했다.

“웁웁웁웁웁 웁웁웁웁웁?”

“짜고 친  아니냐고 묻고 있어.”


라카키의 번역을 통해서 레스의 말을 듣고 타티아나가 새침 떠는 얼굴로 말했다.


“과연 눈썰미는 기가 막히는군.”

피카니가 그녀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건데?”

“캘러헬 씨가 대치하는 동안 나한테 입 모양으로 어떻게 공격할 건지 알려줬어. 나 독순술  줄 알거든.”

루나가 조금 안도하는 투로 말했다.


“이쪽의 품위를 위해서 캘러헬 씨가 일부러 져주셨군요. 신사적이시네요.”

그때 피카니는 의문이 생겼다.

“하지만 당신이 캘러헬의 신호를 의심했다면 승패가 불분명해지지 않나?”

“당연히 내가 졌을 수도 있지. 그래서 저토록 비통하게 진심으로 우는 거겠지.”

“저 아씨도 머리에 식빵 씌우면 고장 나는지 확인하고 싶었는데에에에!”

라카키가 캘러헬의 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려주면서 위로했다. 그때 레스가 필사적으로 근처의 전봇대에 얼굴을 비벼서 자기 힘으로 입에 물린 재갈을 뱉었다.


“푸하! 이 인정머리 없는 놈들아!”

피카니가 반응했다.

“오 용케도 혼자서 해냈네.”


“그보다 저쪽 보라고 저쪽!”


레스의 말을 듣고 일행은 노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르스가 캘러헬을 쇠로 만든 활로 겨누고 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와 활이 부르는 울음이 어찌나 묵직한지  부러지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활 가운데와 시위 사이에 반으로 쪼갠 대롱 같은 물체가 덧대어 있었다. 화살은 그 반으로 쪼갠 대롱 속에서 시위에 끼워진 듯했다. 아마 반으로 쪼갠 대롱을 일종의 활로로 삼아 화살의 속도를 가속 시키는 구조 같았다.


라카키가 잽싸게 자리를 피하자 캘러헬이 철봉을 지팡이 삼아서 다시 일어났다. 모르스가 이쪽으로 활을 겨누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눈치였다. 상대가 시위에서 손을 놓자 망치가 모루를 때리는 듯한 격한 소리가 울렸다. 캘러헬은 철봉을 휘둘러서 화살을 쳐내려다가 실패했다. 그의 이마 한복판에 길쭉한 무언가가 정확하게 꽂혔다.

릴리가 아직도 멀쩡히 움직이는 상대를 보고 경악했다.


“세상에. 사부가 쏜 아기 화살을 머리에 맞고도 살아있다니.”

모르스가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내가  건 화살이 아니다.”

피카니가 캘러헬의 머리에 꽂힌 걸 보고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젓가락?”

캘러헬은 자기 이마에 꽂힌 쇠젓가락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어…. 이거 어쩌지, 이대로 뽑으면 육즙 흘러나오겠는데.”

루나는 기겁했다.


“아니, 아니, 잠깐만요. 뇌수 말하는 거죠?! 두개골이 뚫렸는데 괜찮으세요?!”

“더한 경우도 많이 겪어봤어요. 괜찮겠지 뭐.”

레스가 말했다.

“신종 유니콘이군.”

모르스가 활을 내려놓고 다른 무기를 들면서 이쪽을 향해 외쳤다.


“밥 먹는 곳에 쳐들어오는 싹수없는 새끼! 오늘에야말로 종지부를 지어주마!”

“남의 머리에 수저 꽂는 놈한테 듣기는 싫거든!”

캘러헬이 젓가락을 뽑고 구멍  곳을 살살 어루만지자 상처가 금방 아물었다.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모르스는 칼 두 자루를 양손에 하나씩 거꾸로 쥐어서 다가왔다.

모르스가  칼은 릴리가 쓰던 우치가타나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전체적으로 크기가 조금 작았고 칼이 직선으로 곧게 뻗어있었다. 손잡이에는 툭 튀어나온 부분이 있었는데 모르스가 그 부분을 누르자 칼집의 잠금장치가 풀리면서 상어 가죽으로 장식된 칼집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가 손목 동작으로 거꾸로 쥔 칼을 고쳐잡고 칼을 들었다. 타티아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환도 쌍검술인가!”

모르스가 살기 서린 눈으로 자리에 섰다.


“총은 사람에게. 강철은 괴물에게. 그게 철칙이었을 터. 그런데 네가 오늘 말했었지. 괴물을 정의하는 건 관점에 따라서 달라지는 법이라고. 그걸 들고 나한테 왔다는 건 날 죽일 각오로 왔다는 거냐?”


캘러헬이 굳은 표정으로 철봉을 단단히 쥐고 저쪽을 향해 한 손으로 쳐들었다.

“사실 가져올 만한 게 이거밖에 없었어. 집에 있던 장비들은 화재로 잃어버렸다. 이것만은 케이트의 가게에 빨래 장대로 쓰고 있어서 무사했거든.”


모르스는 인상을 구기고 잇몸이 보일 정도로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


“너 같은 놈의 손에 죽으면 분명 저승에 가고도 끔찍할 거 같다.”

“언젠가는 직접 소감을 들을 수 있겠지. 그럼.”

캘러헬이 봉을 한 번 휘두르면서 고쳐잡고 고개를 숙이자 모르스도 앞에 둔 칼을 거꾸로 쥐고 허리에 대면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두 남자는 말 없이 대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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