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4권] 139회 - 이해가 일치하다
일행은 먼저 앉은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고 자리를 잡았다. 곧 일행이 앉은 탁자로 오크가 높게 쌓인 찜통의 탑을 들고 왔다. 따끈한 수증기가 오르는 찜통을 대단한 거라도 되는 양 그들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크가 말했다.
“모둠 하나씩. 양념은 기호에 따라서.”
“맛있겠다. 잘 먹을게요.”
루나가 그렇게 말하고 수저통에 손을 뻗다가 주춤하고 손을 멈췄다. 수저통에는 젓가락밖에 없었다. 옆에 앉은 타티아나는 허공에 능숙한 젓가락질을 하다가 루나에게 물었다.
“쓸 줄 모르십니까?”
“예. 요령을 알려주시겠어요?”
타티아나가 루나의 손에 젓가락을 들려주면서 쓰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동안 피카니와 레스는 찜통의 뚜껑을 열고 솟아오르는 군침을 삼켰다. 레스가 근처에 서 있는 모르스에게 말했다.
“루나 씨 말대로 먹을 것에는 죄가 없지. 감사히 먹지요.”
“천천히 먹어.”
그 말만 남기고 모르스는 자신의 부하들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라카키와 캘러헬은 일행과 함께하지 않고 그를 따라서 갔다. 느긋하게 밥이나 먹을 때인지 속으로 당연한 의문도 들었으나 그들은 배가 고팠고 식사는 따듯했다. 피카니는 어색하게 젓가락을 들고 어떻게든 다뤄보려고 애를 썼다. 반면 레스는 멀쩡히 젓가락을 쥐었다. 피카니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야. 너 젓가락질 할 줄 알아?”
“알지.”
레스는 덤플링을 한 점 집어서 입으로 한 번 불어서 식힌 다음 잘근잘근 씹어서 맛을 보았다.
“다진 돼지고기와 채소인가. 향신료가 누린내를 잡아줘서 맛있네.”
어떻게든 젓가락질을 시도하려다가 귀찮아진 피카니는 젓가락을 송곳처럼 쥐어서 그대로 음식을 찍어버렸다. 타티아나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피카니는 그 반응이 거슬려서 젓가락에 찍힌 음식을 먹지도 않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이게 그렇게 놀릴 일이야?”
“역설적이어서 참을 수가 없었어.”
“뭐가 역설적인데?”
“문명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이 그렇게 먹으니까 야만인 같잖아.”
레스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일일이 그런 거로 화내지 마. 속 좁아 보인다고.”
피카니는 음식에 찍힌 젓가락을 거두고 허리춤에서 나이프를 뽑아 덤플링을 반으로 갈라 맨손으로 집어서 먹었다. 그는 차근히 씹다가 맛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스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넌지시 말했다.
“이런 말 하기는 미안한데 그렇게 먹는 게 더 야만스러워 보여.”
“한 번만 더 내 성질 건드리면 진짜 야만인이 뭔지 알게 될 줄 알아.”
한편 루나는 젓가락질을 배우는 데에 성공했다. 그녀는 일행 중에서 가장 먹을 것에 감사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오물오물 씹었다. 잠깐 서로 말없이 음식만 먹다가 타티아나가 탁자 건너편에 있는 레스에게 말을 걸었다.
“젓가락 쓰는 법은 어떻게 배웠지?”
“내 총잡이 스승한테서.”
타티아나는 흥미를 느꼈다.
“어떤 사람인데?”
“설명하려면 길어져. 알고 싶어?”
레스는 불만이 담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냥 알아둬서 나쁠 거 없잖아. 닳는 것도 아니고.”
“난 오늘 의식을 차리자마자 손목에 수갑을 두 번 찼고, 중노동도 했고, 성별이 바뀌는 위기도 겪었어. 긴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야.”
타티아나는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피카니가 나이프에 꽂힌 고기 경단을 사냥감처럼 바라보면서 말했다.
“모르스 요원 말이다. 가게에서 만났을 때와 지금 모습이 딴판이잖아. 어느 쪽이 진짜 같아?”
“싸우면서 가짜 성격까지 연기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지금 모습이 진짜겠지.”
“말인즉슨 네가 저쪽으로 넘어간다면 의외로 좋은 대접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뜻인데.”
“이미 끝난 얘기야. 여러 이유로 난 너희들하고 같이 간다.”
“그러냐.”
피카니는 입가를 단단히 다물고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레스는 자신의 몫을 다 비우고 숨을 골랐다. 저쪽을 보니 캘러헬과 라카키는 시크릿 서비스 사람들하고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타티아나도 따라서 일어나기에 그는 따라오지 말라는 의미로 그녀를 향해 손바닥을 보였다.
“혼자 가게 해줘. 중요한 대화 전에 저쪽의 제안을 거절해두고 싶어.”
“좋으실 대로.”
타티아나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은근슬쩍 어느 틈에 자기 몫을 다 비운 루나가 타티아나의 몫을 곁눈질로 탐내고 있기에 그녀는 눈치껏 서둘러서 먹었다.
레스는 걸었다. 그 와중에 캘러헬과 모르스가 말하는 내용을 조금 엿들었다. 캘러헬이 말했다.
“공소시효가 나한테도 적용된단 말이야?”
모르스가 칼 한 자루를 땅에 세우고 손잡이 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 말했다.
“상관살해 혐의로 놈들이 널 법정에 세울 수는 없겠지만 계속 걸고넘어지기는 할 거다.”
“문명 세계란.”
레스가 일부러 기척을 내면서 걸었다. 두 남자는 레스의 기척을 느끼고 바라보았다.
“중요한 얘기 중에 죄송합니다.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서요.”
캘러헬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괜찮아. 이제 난 물러나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레스를 위해 자기가 섰던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모르스는 표정 없는 얼굴로 상대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레스는 목을 가다듬고 말을 꺼냈다.
“연방 보안관은 되지 않겠어.”
“그래? 아직 생각할 시간이 더 있는데도 확실한가?”
모르스는 덤덤하게 말했다.
“이편이 서로에게 더 좋을 거야. 당신들은 아자리를 온전한 상태로 붙잡고 싶지? 아자리를 비롯한 내 친구들은 나뿐만 아니라 피카니 일행하고도 면식이 생겼어. 평화롭게 설득시켜서 데려오려면 내가 저쪽하고 같이 행동하는 편이 나을 거야. 하지만 내가 당신들하고 같이 가면 경계를 사겠지.”
모르스는 말없이 듣는 자세를 지켰다. 레스는 다시 목을 가다듬고 설명을 이었다. 말하면서 그는 옷깃에 넣어둔 꿈 덫을 드러냈다.
“그리고 친구들이 남겨준 토템이 있어. 친구들의 머리카락으로 엮었지. 내가 갖고 있어야만 유효하고 또 마법사의 도움도 필요해. 루나와 내가 같이 다녀야 그들을 쫓을 가망이 있어.”
“그 꿈 덫이 무슨 물건인지는 나도 알아. 카우보이들이 지참하고 다니지. 캘러헬과 라카키가 만드는 걸 도와줬겠군.”
말하면서 모르스가 캘러헬을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자. 이제 숨겨둔 진짜 속내를 드러내시지.”
레스가 의아해하는 투로 물었다.
“진짜 속내?”
모르스가 짧게 날숨을 뱉고 대답했다.
“좋아. 원래는 기한이 끝나기 직전에 꺼낼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촉박한 건 피차 마찬가지니 그냥 지금 하지. 무게 잡는 것도 물 건너갔고.”
레스가 언성을 높여서 다시 물었다.
“그런 게 있으면 진즉에 말하지 뭐 하러 뜸을 들여?”
“시간을 두고 연달아서 공격해야 상대방의 심리가 흔들리거든. 다른 사람 괴롭힐 일이 있으면 참고해둬. 어쨌든, 말한다.”
레스는 긴장하고 집중했다. 모르스는 레스의 어깨를 잡으면서 캘러헬에게 멀리 가라는 손짓을 했다. 모르스는 아무도 대화를 엿들을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레스를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레스는 초조해져서 심장이 뛰었다. 마침내 모르스가 입을 열었다.
“먼저 우리들의 이해가 일치한다는 걸 말해두지. 저쪽이랑 같이 행동해도 좋아.”
레스는 안도와 함께 의심과 불안을 느꼈다.
“이렇게 쉽게?”
“어쨌든. 자네는 제국이 아자리아를 확보하면 그 뒤에 어떻게 될지 생각해본 적 있나?”
그는 마음을 정리하고 일단 지금의 주제에 집중했다.
“물론 생각 정도야 많이 해봤지. 하지만 구체적인 걸 어떻게 짐작하겠어.”
“지금 대륙에는 거대한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두 문명이 세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게임이. 서로 장대한 계획을 구상했고 그 계획은 유동적으로 진행되는 중이야. 그리고 우리들의 계획은 자네의 활약으로 거대한 전환점을 갖게 됐어.”
“물론 그렇겠지.”
레스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다시 물어본다. 우리가 아자리아가 손에 넣게 되면 어떤 일을 할 거 같아?”
레스는 대답하지 않고 상대를 노려만 보았다. 모르스는 입가를 한 번 잡아당기고 말했다.
“아자리아를 마왕으로 만들 거야.”
그는 자기가 들은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
“다시 말한다. 인류는 아자리아가 마왕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
모르스는 침착하게 기다려서 상대가 이해할 시간을 주었다. 레스는 눈가를 부여잡다가 떨리는 손으로 팔짱을 꼈다.
“아자리아를 직접 옥좌에 앉혀서 꼭두각시로 쓰겠다는 거야?”
“표현이 다소 노골적이지만 맞아.”
“세상에 맙소사.”
레스는 현기증을 느끼고 힘겹게 숨을 쉬었다. 모르스는 다시 침착하게 기다렸다. 레스가 조금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들 진지하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물론 이건 우선순위가 한참 밑에 있었던 계획이야.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자네의 활약 덕에 우리의 계획이 거대한 전환점을 갖게 됐어. 아자리아가 진심으로 마음을 열어줬을 만한 인간이 우리 손에 있다는 것. 그게 핵심이지.”
그는 머릿속이 핑핑 돌았지만 어떻게든 말의 뜻을 이해했다.
“아자리가 마왕이 되도록 내가 설득하라고?”
“자네의 존재와 활약은 인류에게 있어서 하늘이 내려준 기회야. 자네 괜찮나?”
“이런 맙소사.”
레스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엉덩이를 땅에 대고 팔을 세운 무릎에 얹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모르스가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그에게 작게 말했다.
“인류에게 우호적인 세력으로 마계의 정권을 바꾼다. 그럼 전쟁은 확실하게 끝나고 평화가 온다. 그게 진정한 용사인 자네에게 맡겨진 진정한 소임일지도 모르지.”
“당신들은, 당신들은 이 도시를 굶겨 죽이려 했잖아. 그쪽은 신뢰할 수 없어!”
눈가를 움켜쥐면서 그는 말했다. 흥분하는 와중에 레스는 언성을 낮췄다. 모르스는 차분히 대꾸했다.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안다. 하지만 우리가 가져간 돈의 목적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 없지? 그 돈은 전선의 병사들에게 보낼 보급품이야. 나나 인류 제국을 욕하는 건 자유지만 그 돈이 없으면 결국 다른 곳의 누군가가 희생하게 된다는 건 알아둬라.”
레스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왕이 잡혔어. 전쟁은 우리가 이기고 있다며?”
모르스가 미간을 구기고 날이 선 말투를 썼다.
“이길 수 있는 전쟁은 없어. 언젠가 끝날 전쟁만 있지. 확실히 저쪽은 핵심을 잃고 혼란에 빠진 상태야. 그렇다고 전선에 있는 병사들이 저절로 사라지지는 않아. 우리는 병력을 전진시킬 힘도 없고 그렇다고 병력을 물릴 수도 없어. 물론 자네가 마왕을 붙잡은 덕에 이렇게나마 대치라도 가능해진 거지. 자네의 활약은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준 기회가 맞아.”
레스는 호흡을 가다듬고 입술을 깨물었다.
“잠깐 숨 좀 돌릴래.”
“얼마든지.”
“그러고 보니 항상 궁금했던 게 있어. 어쩌다 내가 지나갔던 자리에 마침 마왕이 있었던 건지 말이야. 혹시 당신들은 알아?”
“짐작 가는 구석은 있다.”
“그럼 무슨 목적으로 마왕이 거기에 있었던 거지?”
“설명이 매우 길어져. 그리고 매우 중요한 기밀이지.”
“하나 마나 한 질문을 해버렸네.”
레스는 자신의 이마를 부여잡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당신들하고 손을 잡아야 나를 보내주는 건가?”
“그뿐만이 아니고 그림자 속에서 등을 밀어줄 거다. 목적을 이룰 때까지 계속.”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모르스는 매끄럽게 말했다.
“성공한다면 세상에 평화가 오는 건 확실한 거야?”
“적어도 지금 전쟁은 확실하게 끝난다. 그리고 당분간은 전쟁이 없겠지. 레스 알 하자르. 넌 누구 편이야?”
레스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한 줌 피어올랐다.
“아자리는 마왕이 되고 싶다고 한 적 없었어.”
“같이 다녀봤으니까 이건 자네가 확실하게 답할 수 있겠지. 자네 눈에 아자리아는 어떤 사람이지? 권력에 취해서 금방 타락할 거 같나? 아니면 균형과 평화를 추구할 거 같나?”
“내가 봐온 바로는 좋은 쪽으로 최대한 노력할 녀석이야.”
“끝났군. 우리 모두 평화를 원하고 그쪽은 도움이 필요하잖아. 선택의 여지가 있나?”
레스는 어떻게든 자세를 추스르고 한참을 눈꺼풀을 닫은 채로 고뇌에 빠졌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면서 상대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모르스가 그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천천히 흔들면서 말했다.
“명심해라. 행동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걸. 실수라도 하게 되는 순간 자네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위험해진다는 거 잊지 마라.”
“알고 있어.”
레스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손을 놓으면서 그는 지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믿을 만한 사람이라도 발설해선 안 되는 계획인가?”
“상식에 맡기지. 마음대로 하고 싶다면 해봐. 행동의 결과를 순식간에 알 수 있을 테니. 더 알고 싶은 건?”
“나는 그렇다 치고 루나 씨는 어쩌지?”
“루나 센델자레 말이지. 가게에서 자네가 지적했듯이 우리는 그분이 일으킨 기적에 대해서 주목을 하고 온 게 맞아. 베르나르는 융통성이 없어서 자기 일을 끝까지 마치려 들 거야.”
“그렇게 되면 곤란한데.”
모르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한테도 곤란하지. 힘든 여정이 될 테니 자네들은 마법사가 필요하잖아. 그 토템으로 아자리아를 추적하기 위해서도 필요하고. 실력 좋은 마법사는 쉽게 구할 수도 없고.”
“당신 권력으로는 어떻게 안 돼?”
“놈은 교회의 기사다. 신앙은 권력으로는 맞설 수 없어.”
“그럼 몰래 데리고 가는 방법밖에 없나. 들키면 싸울 각오로.”
“참고로 베르나르는 나하고 캘러헬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어. 놈은 용살자(드래곤 슬레이어)다.”
“용살자? 용을 죽였다고? 그거 지금 세상에 아직도 있는 거였어?!”
“그 얘기는 넘어가고 방법이 없다고는 아직 말 안 했어. 캘러헬이 묘안을 냈지. 꼼수를 부려서 그놈을 방해할 거야. 계획이란 항상 바뀌기 마련이거든. 거기까진 자네가 알 필요 없어.”
“그러고 보니 캘러헬 씨는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리하고 같이 하기로 했는데.”
“안타깝게도 한동안 떨어져야 할 거야. 서로의 사정을 확인해보니 일이 복잡해졌거든.”
“그를 제국으로 끌고 가는 건가?”
“아냐. 애초에 지금 나한테 제국으로 돌아갈 여유가 있을 거 같나?”
“하긴.”
사태가 일각을 다투고 있다. 상대방의 처지에서 궁리해봐도 이용할 수 있는 패는 서둘러서 써야 할 판이니 그런 식으로 낭비할 시간은 없을 터다. 레스는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캘러헬 씨의 사정은 내가 물어봐도 어차피 대답해줄 수 없지?”
“그래. 저 앞 어딘가에서 다시 만날 수는 있을 거다.”
“나하고 루나 씨가 저쪽 일행하고 같이 내 친구를 쫓으러 갈 수 있다. 이건 확실하고?”
“내일 출발한다. 아침 든든히 먹고, 보급받고, 가.”
“맥 빠지는데. 우리는 댁들을 장애물로 여겼거든.”
모르스는 표정 변화 없이 입을 닫은 채로 헛웃음을 냈다. 그리고 레스의 어깨를 두드려주면서 점잖게 말했다.
“무법자에게 경의를.”
모르스와 레스는 몰래 대화하던 구석진 곳에서 노점으로 돌아왔다.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마침 모르스가 다뤘던 활을 들고 살피고 있었다. 릴리는 근처에서 함부로 손대지 말라며 뺏으려 했다. 타티아나는 마침 자리에 온 모르스를 보자마자 들고 있는 활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이 활 장력이 대체 얼마나 됩니까? 제 근력으로는 꿈쩍도 안 하는군요.”
모르스가 양손을 뻗어서 그녀에게서 활을 돌려받고 시위를 잡았다. 당기지는 않았다.
“보통 사람이 쓰는 활보다 장력을 3배로 늘렸지. 내 고향에서는 물소의 뿔로 활을 만드는데 그것의 장력이 150파운드니까 3배인 450파운드를 kg로 환산하면…. 약 180㎏이군.”
타티아나 근처에서 그걸 구경하던 루나가 입을 뜨악하고 벌렸다.
“그 정도 위력이면 지렛대로 작동하는 쇠뇌랑 맞먹는데요.”
이번에는 타티아나가 반으로 쪼갠 대롱 같은 물건을 들어 보였다.
“아까 이걸 활에 덧대서 쓰시던데요. 이게 뭐죠?”
모르스는 그것도 돌려받으며 활 위에 겹쳤다.
“‘통아’라고 부르는 거다. 이걸 이용하면 쇠뇌에 쓸법한 작고 단단한 화살도 시위로 당겨서 쏠 수 있다. 그냥 화살은 물론이고 젓가락도 쏠 수 있지. 무기에 관심이 많나?”
“저도 일단은 무공을 다루는 사람이니까요. 무림에 속하지는 않습니다만.”
모르스가 한쪽 눈썹을 까딱거렸다.
“자네 무슨 유파지?”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동작만 골라서 씁니다.”
“그럼 자기만의 유파를 만든 건가?”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습니다. 이름은 형태를 구속하니까요. 사부는 제게 그리 가르치셨죠.”
모르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런 생각을 하니 자네 사부가 강호에서 ‘사파’라고 낙인을 찍힌 거야. 근본이 없잖아.”
“근본보다는 실리가 중요합니다.”
“그래. 실리가 중요하지. 근본 따지던 강호의 귀인들은 의화단 사태 때 총 맞고 죽었거든.”
모르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 탁자에 앉아서 라카키와 함께 식사하던 캘러헬이 한쪽 팔꿈치를 탁자에 대고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거창한 활과 쌍검은 실리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물론 나도 권총은 차고 다닌다. 다만 우리한테는 실력이나 공훈이 있다면 제식무기 말고도 자기 취향의 장비를 골라도 되는 관습이 있거든.”
레스가 물었다.
“당신이 만든 거 아냐? 당신이 그랜드 마스터인데.”
“고향 멀리서 애꿎은 철밥통 노릇을 하는데 이런 낙이라도 누려야지. 이만 간다.”
모르스가 그리 말하자 릴리가 대련할 때 쓰던 무기들을 봇짐에 집어넣고 떠날 준비를 마쳤다. 잠자코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피카니가 상대를 불러서 멈춰 세웠다.
“잠깐만, 아직 우리하고는 얘기 안 끝났잖아.”
“얘기는 끝났어. 나머지는 사쿠라비에게 들어. 그리고 어차피 내일 또 볼 거야. 안녕히.”
시크릿 서비스 일행은 노점의 주인인 오크에게 다 같이 잘 먹었다는 인사를 하고 장소를 떠났다. 일동의 주목이 레스에게 집중됐다. 캘러헬과 라카키는 묵묵히 밥만 먹었다. 피카니가 먼저 운을 뗐다.
“어떻게 된 거야?”
“내일 당장이라도 출발할 수 있대. 나는 물론 루나 씨도 함께.”
일동은 다들 감정을 추스르느라 잠시 말을 잃었다. 타티아나가 말했다.
“저놈들 대체 무슨 속셈이지?”
피카니가 이어서 말했다.
“아무리 봐도 뭔가 이상하잖아.”
“이야기를 나눈 결과 서로 이해가 맞아떨어지더라. 일단은 그렇게 넘어가게 됐어.”
애써 침착하게 말하는 레스의 태도를 보고 피카니가 무언가 눈치를 챘다.
“우리한테도 말할 수 없는 게 있는 거냐?”
“말하려면 말할 수 있지만 이건 정말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나아. 진상을 도저히 모르겠어.”
루나가 걱정하는 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마음의 짐이 많이 늘어나셨군요. 표정이 매우 어두우세요.”
레스는 입을 다물었다. 곧, 그들은 병원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