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4권] 140회 - 두 마리의 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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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리는 모닥불의 빛에 수첩을 펼치고 끼적였다.
[많은 나쁜 것들을 보았다. 나쁜 것들이 세상에 너무 많다. 문명 세계는 모든 사람을 먹여 살릴 힘을 가지게 되었으나 강자와 약자의 간격은 더욱 멀어졌다. 그 힘은 식민지의 약자들에게서 빨아들인 힘이고 이제 변화의 흐름은 어머니 자연을 향하고 있다. 자기 몸을 갉아 먹을 행위를 사람들은 참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발전이라고 부른다.
단테가 예전 이야기를 해주었다. 골드러시가 일어나기 직전에 이 근방에는 15만 명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으나 이제는 3만 명으로 줄었다고. 인간들은 원주민들의 머리 가죽에 현상금을 매겼고 직업이 없는 원주민들을 부랑자로 취급해서 경매에 부쳐 강제 노역을 시켰다고 한다. 또 원주민 어린이와 자신이 ‘친구’라는 관계를 증명만 할 수 있으면 18살이 될 때까지 노예로 부릴 수 있었다고 했다.
우리가 약자들에게 사죄하고 보상을 해줄 날이 오기는 할까? 그들이 우리를 용서해줄 수 있을까? 이 미쳐가는 세상을 어떻게 해야 진정시킬 수 있을까? 두 문명의 충돌을 막는 게 정말로 의미가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기는 한 걸까?]
단테는 모포에 몸을 누이고 곯아떨어져 있었다. 활을 들고 불침번을 서고 있던 샤카자이아가 일지를 침울한 표정으로 적고 있는 아자리에게 말을 걸었다.
“어서 자둬. 내일도 부지런히 걸어야 하잖아.”
그녀의 공용어 실력은 부쩍 늘어서 어수룩한 어투는 거의 줄었고 목소리에 나긋하고 다정한 기운이 제대로 실려 있었다. 아자리는 눈을 한 번 비비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언니, 동화 좋아하세요?”
“좋아해.”
“옛이야기들은 항상 선이 악을 이기는 결말을 보여주죠.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고요.”
“많이 불안한가 보구나.”
샤카자이아가 부드럽게 말했다.
“악을 물리칠 수 없으면 우리가 선을 추구해야 할 이유가 대체 뭘까요.”
“네 말을 들으니 이야기가 하나 떠오르네. 들을래?”
아자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샤카자이아가 잔잔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었다.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한 번쯤은 들려주는 이야기야. 우리 마음속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살고 있단다. 한 늑대는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또 오만한데, 이 늑대는 너 자신이기도 하단다. 그러나 다른 늑대는 겸손하고, 친절하고, 자비를 베풀 줄 알지. 이 늑대는 신념이란다. 두 늑대는 계속 서로 싸우지, 내 마음에서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의 내면에서도.”
아자리가 물었다.
“그리고요?”
“이즈음에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묻거나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물어. 어떤 늑대가 이길 거 같니? 아니면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라고.”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아자리가 맑은 목소리로 묻자 샤카자이아는 아늑함이 느껴지는 투로 답했다.
“네가 먹이를 더 많이 주는 쪽이.”
아자리는 눈을 감고 고개를 천천히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녀는 수첩을 닫고 잠자리에 누웠다. 누운 채로 그녀가 말했다.
“강해지고 싶어요. 제가 강했더라면 부모님들을 코앞에서 잃어버릴 일은 없었을 거예요. 힘이 있어야 불의를 보고도 참지 않아도 되겠죠.”
샤카자이아도 말했다.
“나도 그래. 나는 여태껏 속으로 내가 완성된 전사이자 사냥꾼이라고 자만했어. 하지만 바깥세상은 나보다 뛰어난 강자가 넘쳐났지. 나한테는 내 몸 하나 지킬 힘조차 없었어.”
“레스가 너무 보고 싶어요. 하루가 지날 때마다 기억이 멀어져가요. 기억을 더듬어서 얼굴을 그려보려고 했는데 눈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안 나요. 내가 강했더라면 누군가가 날 위해 대신 희생해줄 일도 없었을 텐데.”
“포기하면 안 돼. 레스가 항상 말했잖아. 포기하지 마.”
“그렇죠.”
아자리는 눈을 감고 피로에 몸을 맡겼다. 샤카자이아는 숨을 고르고 손에 쥔 활과 귓가에 신경을 집중하여 다시 경계태세로 돌아갔다. 잠시 후 그녀는 눈에 맺힌 물기를 손으로 훔쳤다.
모닥불은 밝게 타들어 갔다.
◆
다음 날 아침. 레스는 일어났다. 공기에는 병실의 소독약 냄새와 다른 사람들의 낯선 체취가 풍겼고 시야에는 석고 천장이 보였다. 귀로는 방 안에 메아리를 칠 정도로 기운찬 루나의 코골이가 그의 고막을 때렸다. 레스는 눈곱 낀 눈으로 오른손을 들어서 바라보며 어색하게 쥐었다 펴보았다. 손목을 돌리자 우두둑하는 소리가 몸속만이 아니라 귀로도 들렸다.
윗몸을 일으키고 보니 낯이 익은 금발 머리 남자가 기미 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서 뒤로 넘겼고 얼굴은 늑대나 여우 같은 동물을 연상시키는 인상을 줬다. 레스는 가래 낀 목을 가다듬고 상대를 가리키며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쪽 이름이 뭐였더라?”
“카르델. 카르델 캐시디.”
“화장실 가고 싶은데.”
“일어나.”
카르델이 위쪽을 향해 손짓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스는 상대와 같이 복도로 나왔다. 레스가 졸린 얼굴로 길게 하품을 하고는 카르델에게 물었다.
“루나 씨가 평소에도 코골이가 심한 편이신가? 내가 용케도 잠에서 안 깼구나 싶을 정도네.”
“너네는 코골이 하는 사람이 없었나 보다?”
“없어. 다들 천사처럼 잤지.”
두 남자는 화장실로 들어가서 같이 소변기 앞에서 바지춤을 내리고 볼일을 보았다. 레스는 계속 잡담을 이어갔다.
“댁들은 군인이니까 코골이 정도는 신경 안 쓰겠지?”
“사실 그런 사태에 대비한 특별한 조치가 있지.”
“특별한 조치?”
레스가 바지춤을 올리면서 상대를 바라보았다. 카르델이 말했다.
“방법 하나. 코골이가 심하다면 베개의 위치를 바꿔준다. 하지만 효과가 잠깐으로 끝날 수도 있지. 방법 둘. 입에다가 깨끗한 양말이나 손수건을 쑤셔 박는다. 이건 효과가 확실해.”
“그 말인즉슨 당신들…. 어. 본인에게는 말 안 했지?”
“참고로 이 방법은 우리 애물단지. 그러니까 용사 나리가 시작한 거야. 앞으로 마법사님을 포함해서 우리와 같이 지낼 시간을 생각하면 괜한 짓 하지 말라고.”
“명심하지.”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레스는 말했다. 다시 복도를 걷다가 레스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잠깐만, 듣기로는 당신 예전에 무법자였다며? 그것도 커다란 조직의 간부급 인물.”
“그랬지. 왜?”
“당신을 체포한 게 핑커튼 맞지? 4인방 말이야. 실제로는 3인방에 비중이 큰 조수 둘이지만.”
“다들 이미 아는 사실이잖아. 묻고 싶은 게 뭐야.”
“듣기로는 캘러헬과 라카키가 댁을 직접 붙잡고 심문을 했었다던데. 혹시 심문을 당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한테 댁의 성별을 바꿔버리겠다고 위협당한 적 있어?”
카르델은 그 말을 듣고 눈을 질끈 감으며 인상을 확 구겼다.
“아, 썩을. 겨우 마음속에 묻어놨는데 떠올랐잖아.”
레스는 그 반응을 보고 이해해버렸다.
“정말?”
“한 달. 생리가 어떤 건지 체험하기 위한 한 달.”
레스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카르델이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그의 어깨에 손을 턱 얹으면서.
“너 말이다. 지금 와서 더 내려갈 바닥도 없겠지만 그래도 진심 어린 조언 해준다. 절대, 절대, 캘러헬을 적으로 돌리는 일은 피해라. 죽음을 초월한 체험이 뭔지 알 수 있어.”
“강제적 일시 성전환 말고도 당한 게 또 있었단 말이야?”
“페어리는 누군가에게 해를 가할 수 없지. 하지만 장난은 칠 수 있거든. 그리고 해를 가하는 것과 장난질의 경계는 모호해. 페어리가 순전히 장난으로 자신의 아이와 인간의 아이를 바꿔치기한다는 전설 들어본 적 있지?”
“체인질링. 들어봤어. 하지만, 그건 그냥 전설이잖아? 게다가 페어리는 스스로 태어나고.”
“페어리 같은 고대종족들의 윤리적 기준이 우리랑 비슷할 거리라 생각하지 마라. 그나마 라카키는 인간의 기준을 이해하는 편이지만, 내 말뜻 알지?”
레스는 표정이 굳었다.
“캘러헬 씨가 어쩌다 라카키하고 만난 건지 알아?”
“알고 싶지 않아. 쳐다보기도 싫고. 두 명 모두!”
둘은 다시 복도를 걷다가 병실로 들어가기 전에 누군가와 마주쳤다. 덩치가 큰 흑인이었다. 두툼한 입술과 길고 얇은 눈썹이 인상적이었다. 그가 레스에게 정중한 투로 물었다.
“지난밤 괜찮았나? 보시다시피 마법사님의 코골이가 심한 편인데.”
루나의 코 고는 소리가 병실의 벽과 문을 뚫고 이곳까지 퍼지고 있었다. 레스가 손짓을 하며 대답했다.
“난 잘 잤어. 그거 내 물건들이네?”
흑인의 품에는 레스의 소지품들이 한 아름 들려있었다. 장갑, 탄입대, 탄띠 벨트, 검은색 조끼, 바지, 셔츠, 부츠, 그리고 폰초 망토.
“그래. 그쪽 오늘 퇴원하잖아.”
“여기서 갈아입어도 될까? 딱히 보는 눈도 없고.”
이른 아침 병원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흑인은 상관없다는 듯 물건을 건네주었다. 레스는 환자복을 훌렁 벗고 옷을 갈아입으면서 말을 걸었다.
“그쪽 이름이 뭐였지?”
“아비투스. 아비투스 오리온.”
“오리온? 르바티아 왕국 출신인가?”
“엄밀히 따지면 르바티아의 식민지인 작은 섬 동네 출신이야. 앞으로 잘 부탁하지 사쿠라비.”
아비투스는 계속 가식 없는 정중한 태도를 지켰다. 레스는 셔츠에 단추를 채우면서 화답했다.
“그래.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난 사쿠라비의 레스야. 잘 부탁해.”
레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악수를 청하려다가 손을 거두면서 허둥거렸다.
“가만, 내 터번하고 낙타 털 머리띠가 안 보이는데.”
아비투스가 대답했다.
“그건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더라고. 현장에 있던 물건은 빠짐없이 다 회수했어.”
레스는 잠깐 기억을 더듬고 탄식했다.
“생각났다. 파스낙을 지혈해주는 데에 써버렸지. 이렇게 잃어버릴 줄이야.”
카르델이 레스를 삐딱하게 바라보면서 물었다.
“사연이 각별한 물건이었나?”
“그랬지.”
레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셔츠 위에 검은색 조끼를 채우고 폰초를 몸에 걸쳤다. 곧 타티아나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루나의 소지품으로 보이는 여성용 의류와 물건들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레스가 망토의 자락을 다듬으면서 그녀에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
“일찍 일어났네? 과연 유목민이야.”
타티아나는 새침하게 대꾸하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곧 루나의 코골이가 끊어졌다. 남자들이 복도에서 한데 모여 벽에 기대어 멍하니 기다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하딘이 계단을 올라 그곳에 나타났다. 카르델과 아비투스가 그를 향해 바로 깍듯한 자세로 경례했고 레스가 뒤이어서 어색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 벌써 갈아입었군? 일찍 일어난 건가 아니면 잠을 못 잔 건가?”
“전 잘 잤습니다. 루나 씨는 지금 갈아입는 중이고요.”
“어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 높으신 분들이 돌변했는지 전혀 이해가 안 가지만 그쪽 덕분에 귀찮은 절차들이 싹 해결됐어. 자네가 이 말을 좋아할 거 같지는 않지만, 정말 잘했네.”
레스는 조금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묻게.”
“저나 마법사님은 내버려 두고 댁들끼리 자기 길 갈 수도 있었는데 왜 위험을 감수하고 저희를 저쪽으로 넘기지 않았습니까?”
하딘은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자네 어떤 전쟁을 겪어봤나?”
레스는 말귀를 알아듣고 단어를 신중히 골랐다.
“싸움은 많이 했죠. 하지만 그쪽이 겪어봤을 법한 일은 없었습니다.”
“난 스물이 되기 전부터 사관학교에 입학해서 삶 대부분을 군인으로 살아왔네. 자네 같은 소수 민족이 보기에는 내가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보인다는 거 알아.”
“제 입으로 딱히 그런 말은 한 적 없는데요.”
“그랬나? 아무튼, 난 여러 차례 죽을 뻔했네. 부하들은 죽고 난 살았지. 자네가 우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자네 마음이야. 그래도 나 또한 처지가 다를 뿐 그쪽처럼 세상의 운명을 걱정하는 사람이라고 나는 말하고자 하네. 고작 자기 안위만 걱정하는 사람이나 되고 싶어서 나는 생존한 게 아니네. 그런 사람이나 되려고 여기 젊은이들이 내 부하가 된 것도 아니지.”
레스는 말을 다 듣고 나서도 아무 말이 없었고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들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기다릴 만큼 기다리자 원래의 복장으로 갈아입은 루나와 타티아나가 병실을 나왔다. 루나의 옷차림은 별 장식도 없는 검은색 원피스 드레스에 허리 주변만 띠로 간단히 묶어서 정돈했을 뿐인데도 레스는 쳐다보기가 곤란했다. 샤카자이아와 같이 있을 때와는 다른 의미로 눈 둘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타티아나가 병실 안에서 무슨 수를 쓴 건지 루나의 부스스했던 머릿결은 제법 정돈되어서 표정만 빼면 막 자다 깬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루나가 입을 가리면서 크게 하품을 하고는 새어 나온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저희 밥은 먹고 출발하는 거죠?”
“밥도 먹고, 떠나기 전에 몸도 풀어야죠.”
타티아나가 말을 받으며 그녀를 부축해주었다. 같이 걸어가면서 루나가 다시 물었다.
“몸을 풀다뇨?”
“떠나기 전에 주둔지에 들러야 합니다.”
루나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윽. 거기는 또 왜요?”
카르델이 한가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왜긴요. 아무리 급해도 총이랑 총알은 챙기고 떠나야 할 거 아닙니까. 저번 싸움에서 저희 모두 총이 망가졌거나 총을 잃었습니다.”
아비투스가 말을 이었다.
“듣기로는 제법 귀한 분이 거기에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레스가 그 말을 듣고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귀하신 분이 나타난다는 거야? 귀찮아질 예감만 들어.”
하딘이 말을 받았다.
“아마 자네도 만나보면 마음에 들 거야. 그 귀하신 분이 건스미스거든.”
“건스미스?”
“조나단 모세스 브라우닝. 총기개발 희대의 천재이자 독실한 신자시지. 우리 애물단지가 들고 다니는 자동권총을 만든 것도 그분이시다.”
레스는 한 박자 늦게 뜸을 들이고 대답했다.
“무슨 총이 새로 나오든 난 항상 싱글 액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