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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8화 〉[4권] 148회 - 스승의 이름으로 (148/188)



〈 148화 〉[4권] 148회 - 스승의 이름으로



계속 눈을 감고 가만히 있던 레스는 마차의 흔들림이 멈춘 걸 느끼고 눈을 떴다. 짐칸에는 타티아나의 무릎베개를 받으며 졸고 있는 루나와 레스를 노려보는 타티아나가 있고, 마부석에는 카르델과 아비투스가 마차를 끌고 있었다. 창을 열고 바깥을 보니 하딘과 피카니가 각자 자신의 말을 타고 근처에서 같이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행렬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파란 하늘과 누런 지평선이 선명하게 갈라진 평원 한복판에 그들이 있었다. 앞뒤로 다른 마차들이 빼곡하고 그에 맞춰서 말을 탄 병사들이 주변에서 마차를 지켰다.


피카니가 일행이  마차 쪽으로 말을 가까이 끌고 창가에 있는 레스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마시는 시간이야.”


레스가 곧바로 고개를 돌려서 타티아나에게 말했다.


“그렇대.”

타티아나는 자신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있는 루나를 부드럽게 흔들어서 깨웠다. 루나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또 잠을 잤는데도 나른한지 눈빛이 물에 젖은 그림처럼 흐물거렸다. 레스와 타티아나는 루나의 양어깨를 잡아서 부축해주며 바깥으로 나왔다. 루나가 기지개를 켜면서 몇 번째인지 모를 하품을 터트리자 타티아나가 피곤한 눈으로 레스를 봤다.


“어이.”

타티아나가 진지한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왜?”


레스도 거기에 맞춰서 목소리를 줄였다.

“허벅지에서 쥐가 나. 교대하지 않을래?”


“어째 점점 내가 생각하던 포로 생활하고 멀어져가는데.”


“난 심각해. 마법사의 베개 역할을 하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레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의 행렬들은 전부 멈춰 있었다. 물통에 물을 채워서 말에게 물을 먹이고 사람들도 물을 마셨다. 마부석에 있던 두 명과 하딘도 이쪽으로 모이고 먹을거리를 짐에서 꺼내 나눠주었다. 레스는 돌로 만든 접시처럼 큼직한 건빵을 이리저리 살펴서 고고학자 같은 눈길로 관찰했다. 사족으로 당연히 20세기 초에 지급된 건빵들은 별사탕 따위와 같이 지급되지 않았다. 아비투스는 오일 버너와 냄비를 꺼내다가 건빵을 깨물려던 레스를 말렸다.

“그대로 먹으면 이빨 부러져. 차 끓일 테니까 기다려.”

일행은 한데 모여앉아 아비투스가  끓이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쉬었다. 하딘이 지도를 펼치면서 헛기침으로 시선을 끌고 말했다.


“지금 당장 우리는 보급 행렬하고 움직이는 중이다. 마침 시기가 겹쳤어.”


피카니가 손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한동안 같이 다니게  거 같아. 이편이 눈에도 덜 띄니까 손해  일도 없고.”

레스가 물었다.

“이 행렬은 전선으로 향하는 건가?”


하딘이 대답했다.


“그래. 탄약, 식량, 붕대, 그리고 신병들이 마차에 실려있지.”

“아까 보니까 열일곱 즈음 되는 꼬맹이도 보이더군요.”

레스가 낮게 깐 목소리로 말하자 하딘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난 예전에도 더 어린 녀석을 봤어.”


“그렇게 어린 애들이 죽이지 않으면 죽는 곳으로 간단 말입니까.”


하딘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비투스가 다 끓인 차를 일행들의 잔에 각자 채워주었다. 레스는 잔에 차가 담겨 있건 말건 건빵을 그대로 깨물었다. 돌조각 부스러지는 소리를 내면서 입안에서 바스락거리는 건빵은 침을 완전히 빨아들이고도 여전히 모래 같았다. 아비투스가 구겨진 그의 표정을 보면서 고개를 작게 저었다.


“내가 말했잖아.”

카르델이 차를 마시고 입꼬리를 한쪽만 올리면서 말했다.


“천하의 유목민도 시멘트 케이크에는  당하는구먼.”


레스는 겨우 씹어서 건빵을 삼켰다. 하딘은 벌써 건빵을 다 먹어가는 참이었다. 레스가 경의에 찬 눈으로 자신을 보자 하딘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유목민들은 열다섯 즈음부터 성년으로 취급하지 않던가? 자네는 열일곱을 어리다고 말하는군?”

루나가 찻잔에 가라앉힌 건빵 조각이 불어가는 걸 바라보다가 끼어들었다.

“특히 바다위윤은 조혼시기도 빠른 편이고요.”

레스는 눈을 질끈 감더니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들고 있던 잔이 흔들려서 차가 살짝 넘쳤다. 다들 왜 저러나 싶어서 말없이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레스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제게 가치관을 알려준 사람은 문명인이었으니까요.”


건빵을 자신의 단검으로 작게 도려내고 있던 타티아나가 반응했다.

“그거, 네 총잡이 스승 말하는 거지?”

“그래.”

“너 고아라고 했지. 그럼 네 총잡이 스승이 가치관을 알려줬으니 의부나 마찬가지네?”

레스는 땅이 꺼지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의부? 뭐, 그래. 그렇긴 하구나.”


타티아나가 그에게 삿대질했다.

“스승이란 고귀한 존재야. 대체 뭔 일이 있었길래 스승을 그런 식으로 대하는 거야?”

피카니가 손바닥에 턱을 괸 채 대신 대답했다.


“모든 스승과 제자가 이상적인 관계로 맺어지진 않거든. 가족도 그렇듯.”

타티아나가 피카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떤 사람인지 알아?”


“이야기만 하나 들어봤을 뿐이야. 레스. 레모니 양이 어지간히도 네 이야기가 듣고 싶은 모양인데 지금 말  하면 여행 내내 캐물을 테니 그냥 말해줘.”


타티아나가 당황했다.

“따, 딱히 그런 거 아니거든?”

카르델이 끼어들었다.

“나도 궁금한데.”

아비투스와 하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몸짓을 보였다. 루나도 관심 가득한 얼굴에 눈빛이 반짝거렸다. 레스는 차를 마셔서 매이는 목을 게우고 뜸을 들이다가 운을 띄었다.

“그 양반하고는 열두 살에 처음 만났어.  스승이 우리 부족에 귀의한 첫날이기도 하고. 그 양반이 탈주한 예니체리라고 내가 말했던가?”


루나가 말을 받았다.

“예.”

레스는 기분이 복잡해졌는지 표정이 묘했다. 얼굴에 그리움과 분노가 섞였다.

“자잘한 얘기는 생략하고. 제가 받았던 수업에 대해서만 말하죠. 여기처럼 황량한 공터에서 저랑 그 양반만 덩그러니 섰습니다. 저한테 조약돌을 모아오라고 하더군요.”

주변 사람들이 고개를 이쪽으로 기울여가며 그의 말에 바짝 집중했다.

“저는 양손에 들  있을 만큼 돌을 가득 모았습니다. 조약돌을 주니까 거리를 벌리라고 했죠. 뒤로 물러나자 그 인간은 돌을 저한테 던졌습니다. 인정사정없이 힘을 실어서.”

타티아나가 코웃음을 쳤다.


“뭐야 고작 그걸 가지고 특훈이라고.”


루나는 측은히 여기는 말투로 말했다.


“열두 살짜리 아이한테 돌을 던졌다고요?”

레스는 손짓으로 대충 답하고 계속 말했다.


“전 당연히 돌을 맞아가면서 화를 냈죠. 이게 무슨 짓이야. 당신 미쳤냐. 뭐 이런 식으로 외치면서요. 그러자 제 스승이 말하는데….”

피카니가 나이든 남자처럼 목소리를 바꾸고 끼어들었다.


“돌을 피할 수 없으면 총알도 피할 수 없어!”

레스가 피카니의 성대모사에 맞장구치듯 목소리에 감정을 담아서 말했다.


“아니 대체 총알을 왜 피해야 하는 건데!  같으면 총알을 피할 수 있겠냐고!”


피카니가 말투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다시 말했다.

“호오? 그럼 총알을 피할 이유가 없다는 소리냐?”


“그리고 권총을 꺼내서….”


레스가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그는 총을 쏘는 시늉을 했다.







그의 스승이 옆구리를 부여잡고 땅을 굴러다니는 어린 레스를 내려다보며 총을 휘릭 돌려 총집에 도로 넣고는 덤덤하게 말했다.

“22구경. 가장 약한 총알이다. 맞아 보니까 아프지?”

“까아아아악!”


“총을 쏘려면 자기도 맞을 각오도 해야 한다. 그 아픔을 절대로 잊지 마라. 왜 총알을 피해야 하는지도 알겠지? 맞으면 아프잖아.”


“닥쳐어어어어어어어!”









“그게 내가 받았던 첫 번째 가르침이었어.”


타티아나는 얼굴이 멍해졌다. 사람들이 말을 잃은 가운데 루나가 간신히 손을 들고 물었다.

“흉터를 볼 수 있을까요?”

레스가 옷자락을 들어내서 자기 옆구리의 맨살을 보여주자 오래된 동그란 흉터가 보였다. 그리고 그것만 있는  아니라 오래된 것, 비교적 최근에 생긴 것까지 그의 몸은 흉진 곳으로 폐허의 벽에 자란 이끼처럼 덮이다시피 했다. 레스는 다시 옷자락을 바지 안에 집어넣었다. 피카니가 그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이건 오래전부터 묻고 싶었던 거다만.”


“뭔데.”

“네가 생각하기에는 네 실력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해?”


“자신감을 가질 정도는 되지만 자랑할 마음은 없어. 세상은 넓잖아.”

레스는 하찮은  묻는다는 듯 눈을 게슴츠레 뜨고 고개를 저었다. 피카니가 재차 물었다.

“내 말은, 사쿠라비에서 네가 가장 뛰어난 총잡이였는지 알고 싶은 거야.”

“그런 질문이라면 답하기 쉽지. 일단 그 양반이 있으니까.”

“알기 쉽게 예를 말해봐.”


“내 스승은 날아오는 총알을 맞출 수 있어.”

“뭐?”

피카니의 목소리가 뒤집히고 주변 사람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레스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직접 봤어. 우리 부족이 이동 중에 공격받은 적이 있었는데  스승이 솔선해서 저격수들을 모조리 쫓아냈어. 놈들이 달아났는지 확실하게 알아보려고 나와 스승이 같이 추적했는데 도중에 총알과 총알이 부딪쳐서 떨어진 납덩어리가 곳곳에 있더라고. 놈들도 그걸 알아보고 괜히 건드렸다간 망하겠다고 생각해서 달아난 거고.”


그들은 더 묻지 않고 건빵과 차를 먹었다. 앞쪽에서 쉬는 시간이 끝났다는 걸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행은 각자 자리로 갔고 행렬은 다시 움직였다. 레스가 루나에게 물었다.


“피곤하시면 제가 무릎 베게 해드릴게요.”

루나는 그의 얼굴과 몸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너무 잠만 자면 몸이 축나니까요.”


그리고 이어나갈 얘깃거리가 없어서 루나는 입을 다물었다. 레스는 그러려니 하고 터번을 잡아당겨서 눈가를 가리고 팔짱을 끼며 눈을 감아서 명상에 빠지려 했다. 하지만 루나는 이런 상황이 어색하다고 느꼈는지 필사적으로 화제를 찾았다. 그러다 그녀는 타티아나한테 시선이 멎었다. 타티아나는 명상에 빠진 레스를 멍하니 노려보고 있었다. 루나가 상대에게 속삭였다.

“무슨 생각 하세요?”


타티아나는 루나가 자기한테 상관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대답을 많이 머뭇거렸다.

“아뇨. 그냥. 아무것도. 감시하는 중입니다.”


루나가 아주 작게 속삭였다.

“혹시 저 쪽에게 관심 있으세요?”


타티아나는 그 말을 듣고 하늘이 무너졌다는 소식이라도 들은 양 크게 정색하며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른 질문으로 되받아쳤다.


“그러고 보니 루나 씨는 피카니 경에 대해서 지금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그 말을 듣고 레스는 감았던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질문에 당황한 루나는 명상에서 깬 레스가 이쪽을 보는 걸 알아채고 더욱 혼란에 빠졌다. 긴 고민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남자로는 전혀  보여요. 아무리 노력해도 남동생처럼 여기는  최선이에요.”


레스가 입가에 손을 댔다가 차분히 말했다.

“녀석은 나이 차이는 신경 안 쓸 겁니다.”

“전 처음부터 피카니 씨를 남자로 의식하지 않으려 했어요.  말은…. 그 용사하고 같이 몸을 붙이고 말을 타고 다녔으니 어쩔  없이 신경 쓰이고 가슴이 두근거리기는 했어요. 생리적으로 어쩔 수가 없잖아요. 객관적으로 미남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어떻게 감히 제가 불경하게 그런 상상을 품겠어요? 그런데 이제는 진실을 알게 됐고. 피카니 씨의 본모습으로 한 꺼풀 다가갈수록 있던 정나미가 한없이 떨어져 나가네요.”


루나의 말투에 흥분한 기색이 느껴졌다. 타티아나는 애써 입가를 주먹으로 눌러 웃음을 참느라 몸이 떨렸다. 레스는 고개를 숙여서 한쪽 눈가를 손바닥에 괴고 신음을 흘렸다.


“그 점에 대해선 할 말이 없군요….”


“대체 레스 씨와 피카니 씨는 서로 어떤 점을 보고 친구가 된 건가요?”

레스는 머리를 숙이면서 눈가를 감싸 쥐었다.


“골치 아프네요. 첫 만남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이야기가 좀….”

타티아나가 끼어들었다.

“너희 둘이 어떻게 만났는지는 장본인에게 이미 직접 들었어.”


레스는 고개를 들고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 얘기를 녀석이 직접 말했다고?”

타티아나가 팔짱을 끼면서 손가락으로 까닥까닥 자신의 팔을 두드렸다.

“네 노잣돈하고 말을 도둑질한 피카니를 붙잡은 다음에는 어떻게 됐어?”

레스는 고개를 젓고 손짓까지 해가며 주제를 돌렸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그 얘기를 루나 씨가 보는 앞에서 말했단 말이야? 상식적으로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 앞에서 그런 과거를 누가 뭐하러 솔직하게 말해?”

타티아나는 레스에게 더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고 또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도 없었다. 루나와 타티아나는 마주 보면서 생각에 빠졌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 바닥을 바라보면서 무릎에 팔꿈치를 댄 채 깊게 고민하다가  손목을 붙이고 양손 끝을 붙였다 떼었다 반복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러면서 레스는 운을 뗐다.


“루나 마법사님. 제가 그 녀석을 옹호해주는 게 굉장히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그래도 사람 대 사람으로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피카니가 자기 과거를 부끄러워하지 않아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과거를 말했을까요? 방금 저희 둘의 첫 만남에 대한 것 말고도 시크릿 서비스와 용사에 관한 진실을 털어놨던 일도 마찬가지로요.”

루나가 말을 조금 더듬으면서 대답했다.

“피카니 씨가…. 뉘우치는 중이라고요?”

“녀석이 아직 지저분하게 살던 과거에 매여있고 또한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녀석은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타티아나가 말을 받았다.


“무엇을 위한 노력인데? 적어도 구애는 물 건너간 건 확실하고.”

“몰라. 내가 녀석이 마음에 들었던 점은 삶의 방식이 혼란하면서도 나름의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야. 비겁하게 살면서도 이상한 곳에서는 바보처럼 정직하지. 피카니는 그걸 자각 못 하고 있어. 그런 모습이 남  같지 않아서 신경 써주다 보니 결국 우리는 여기까지 와버렸지.”


타티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넌지시 물었다.

“혹시 너 동성애자야?”

“아냐. 그놈이 제대로 여장했을 때는 종종 헷갈리지만.”

레스는 듣는 사람들이 농담으로 받아주기를 바랐으나 여자들의 반응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진지했다. 레스는 불안해져서 설명을 덧붙이고 말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농담이라고!”


타티아나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한 부정은 어떻게 들리는지는 말 안 해도 알지?”


“설령 내가 그렇더라도 배신한 놈을 그런 식으로 볼까 보냐.”


루나가 이마를 감싸 쥐고 뇌까렸다.

“어쨌든 저는 그런 감정이 안 느껴져요. 아니, 모르겠어요. 설명할 수가 없네요.”

레스가 손짓하며 말을 받았다.

“잡혔던 루나 씨를 구하려고 했던 건 가식 없는 헌신이 맞으니까요. 그럴 수도 있죠.”


그녀가 고개를 들고 양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레스 씨. 저희 일행이 모이기 직전에 피카니 씨와 결투했었다면서요?”

“그랬죠. 그리고 그 직전에 피카니는 저한테 사실들을 솔직하게 털어놨습니다. 그때 녀석이 괜히 말 안 했으면 전 영영 몰랐을 겁니다.”

타티아나가 그 말을 듣고 눈가를 찡그리며 신음했다.


“세상에.”

루나는 표정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얼굴이 밝아졌다. 마치 보이지 않았던 희망을 찾아낸 사람의 얼굴이었다. 동시에 풀어야 할 어려운 수수께끼도 만나서 고민에 빠진 표정도 보였다. 하지만 그 고민은 마냥 어둡지만은 않아 보였다. 그녀가 물었다.

“레스 씨. 꼭 묻고 싶었던 게 있어요. 왜 아무도 죽이지 않기로 맹세하셨나요? 살인은 나쁘다는 이유만이 아니라 사연과 신조가 있어서 아닌가요?”

“왜 갑자기 화제가 그쪽으로 흘러가는 건지 이유를 도통….”

“당장 배신당했다는 말을 듣고도 레스 씨는  결투에서 피카니 씨를 안 죽였잖아요. 그 뒤로도 몇 번이고 기회가 있었는데 마땅한 복수도 안 하셨죠. 첫 만남 때도 마땅한 복수를 안 하셨죠. 맹세는 수단이에요. 그냥 살인이 싫어서, 혹은 맹세를 깨기 싫어서 복수하지 않은  아니라 명확한 신조가 있으셔서 실천하셨죠. 제가 듣고 싶은   신조예요.”


레스는 관자놀이를 긁적이다가 눈을 몇  깜빡이고 입을 먼저 열었다가 뜸을 들여 말했다.


“전 죄는 생명으로 갚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응징 자체에는 의미가 없어요. 그중에서도 죽음과 살인이 제일 불합리하죠.”

타티아나가 끼어들었다.

“그때도 비슷한 소리를 했었지. 너 정말로 사람이 변할  있다고 생각해?”

레스는 시선을 저쪽으로 돌렸다.

“모든 것은 변해. 그리고 진정으로 사라지는 것은 없지. 좋은 것과 나쁜  모두 변하고, 모두 남아. 그래서 사람은 끝까지 살아남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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