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4권] 149회 - 땅에게 맡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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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한 어둠 속에서 아자리가 낭랑한 목소리로 외치며 지팡이를 땅에 두드렸다.
“리카인.”
그녀가 손에 든 지팡이의 끝부분이 전구처럼 밝게 빛났다. 그리고 빛이 어둠을 밝혀가는 동안 목소리와 땅을 두드린 소리도 넓게 퍼져나갔다가 메아리를 쳤다. 주변이 제대로 보이게 되자 아자리는 감탄했다.
아자리의 곁에 선 단테도 감탄했다. 마치 베틀에서 흘러내린 듯 하얗고 가느다란 수백 개의 종유석으로 이루어진 석회의 장막과 비석처럼 솟은 석순들이 마법의 빛을 받아 우윳빛으로 번들거렸다. 그들은 자연이 만들어낸 신전에 들어와 있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정말 멋진 석회 동굴이야. 관광지가 되면 금방 명소가 되겠어.”
두 사람 사이에 서 있는 샤카자이아도 입을 작게 벌리고 한껏 장관에 취했다.
“신성한 곳이다. 이리 아름다운 곳이 무뢰배들의 소굴로 쓰였다니.”
불빛을 들고 있는 아자리는 앞장서서 나아가다가 종유석과 석순들이 부서진 걸 봤다. 주변에는 침낭과 보관함 같은 잡다한 생활용품이 늘어져 있었다. 아자리는 표정을 구겨질 정도로 크게 외쳤다.
“세상에! 저거 좀 봐요! 고작 누울 자리 만들겠다고 이곳을 망쳤어! 전부 태초의 유물인데!”
단테가 자기 발밑에 굴러다니는 종유석 중 하나를 집으면서 말했다.
“종유석은 수집가들에게 인기가 좋아서 도굴되는 일도 잦죠.”
아자리는 분이 쉽게 풀리질 않아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쑤카 블리얏(сука блять). 전 예술을 망치는 놈들이 제일 싫어요.”
샤카자이아가 그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수카 불라?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아자리는 헛기침했다.
“죄송해요. 방금 욕했어요. 신성한 곳에서 이러면 안 되는 건데.”
“빨리 살피고 나가자. 너무 오래 있으면 정령들에게 민폐야.”
사족으로 종유석의 성장 속도는 동굴마다 차이가 크며 지형 변화로 동굴의 성장이 멈춰버린 곳도 많아서 평균값을 낼 수가 없다고 한다. 그중에 성장 속도가 빠른 곳은 박쥐의 사체가 부패하기 전에 그 위로 석회가 덮여서 화석으로 변한 것이 발견된다고도 한다.
동굴 바깥에는 꽁꽁 묶인 불친절한 손님들이 봇짐들과 함께 방치되어 있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틈에 그들은 어떻게든 포박을 풀려고 애를 쓰다가 동굴 안으로부터 기척이 들리자 그들은 순식간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원래대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
동굴 안에서 큼직한 기계가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마치 투석기에 날려진 돌덩이처럼 기계는 묶여있는 남자들 근처로 떨어져 큰 충격을 일으키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망가졌다. 남자들이 놀라서 각자 호들갑을 떠는 동안 일행들이 동굴을 나왔다.
샤카자이아가 자신의 양손을 털면서 기계를 바라보며 단테에게 물었다.
“저게 뭐야? 난생처음 맡아보는 이상한 냄새가 나.”
단테가 기계의 근처로 다가가고는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지금 나는 냄새는 잉크 냄새고, 이건 인쇄기에요. 위폐를 만드는.”
아자리는 졸부처럼 지폐를 양손에 가득 쥐어서 부채처럼 펼치고 남자들 앞에서 흔들었다. 그리고 대단히 거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이 오빠들. 이 위폐들 정말 감쪽같은데 동판을 어디서 구했어요?”
남자들이 계속 입을 다물자 아자리는 샤카자이아에게 눈짓을 보냈다.
“크릉.”
샤카자이아가 동물이 낼 법한 울음소리를 흉내 내자 남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난동을 부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남자들이 사람의 말로 말했다.
“암시장에서 어떤 마족이 우리한테 제안했어! 아주 예전 일이야!”
“정기적으로 위폐를 제작해서 마음대로 쓰라고 했어!”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 얼굴도 가렸고 이름도 안 알려줬어! 아는 건 이게 다야!”
“제발 먹지 말아주세요! 자수할게!”
남자들의 말이 끝나자 일행은 서로 눈빛을 나눴다. 아직 물어볼 게 남았다고 생각한 단테가 앞으로 나서서 그들에게 물었다.
“동판을 준 사람이 마족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얼굴을 가렸다며?”
“고양이 귀에 고양이 눈이었으니까!”
샤카자이아가 그 말에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검은색 털에 귀 끝부분은 하얗고 눈은 금화 같았나?”
남자들은 놀라서 서로의 얼굴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래도 정곡을 찌른 모양이다. 아자리가 친구들을 향해 말했다.
“일단 저 오빠들의 혐의를 세어볼까요. 강도 미수, 정황상 살인 미수, 그리고 나하고 언니를 향해 보냈던 음흉한 시선을 보아 입에 담기도 싫은 행위도 미수, 제정신인가?”
단테가 아자리의 말을 잇듯이 자연스럽게 말했다.
“위폐 제조는 형량을 사형까지 받을 수 있죠. 인간들의 제국은 그걸 단속하기 위해서 특별한 조직까지 만들었다는데.”
다시 아자리가 자신의 차례를 받았다.
“그리고 저 멋진 석회 동굴도 망가트리셨지. 흔적들을 보니까 굵은 종유석이나 석순이 있던 자리들은 금강석 톱으로 자른 듯 깔끔하더라? 얼마나 받았어?”
단테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아는 사람이 언젠가 말하길. ‘아무 교훈이나 대가도 없이 치러지는 용서는 미래의 죄악을 허용한다’라고 하더라. 너희들을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자리가 팔짱을 끼며 단테를 바라보았다.
“자기들 입으로는 자수하겠다고 했지만 여기서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 걸어서 며칠은 걸리죠?”
“우리가 붙잡아서 넘기고 싶어도 가는 내내 먹이고 재워주고 지켜주기는 싫고요.”
단테가 샤카자이아를 향해 눈짓하자 그녀의 얼굴에 귀찮아하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크앙.”
샤카자이아는 또 동물 울음을 흉내 냈다. 남자들은 지겨워하지도 않고 다시 호들갑을 떨었다.
그로부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아자리는 펼친 수첩을 석양에 비춰가며 일지를 적었다.
[오늘은 큰 수확이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지도에 없는 마을이 있다. 그곳에서 놈들이 돈을 세탁하고 생필품을 구했다고 한다. 또 교훈도 있었다. 아무리 부패한 문명 세계라도 그마저도 없으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아자리는 한 번 기지개를 켜고 크게 하품을 했다. 근처에는 샤카자이아가 불침번을 하느라 부족한 잠을 쪽잠으로 보충하고 있었고 단테가 단발총을 쥐고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연필을 들면서 그 순간을 떠올렸다.
꽁꽁 묶여있는 불친절한 손님들 앞에서 단테가 샤카자이아에게 물었다.
“샤키. 생각 있어요?”
샤카자이아가 지저분한 남자들을 보다가 찡그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딱히.”
“부족에서는 죄인을 어떻게 처리하나요?”
“죄인 주변으로 사람들이 원형으로 둘러싸서 의견을 모으지. 그때는 이야기 막대라는 걸 쓰는데, 이야기 막대를 들고 있는 사람이 말을 할 때는 아무도 끼어들지 말고 들어줘야 해. 말을 다 했으면 이야기 막대를 옆으로 넘겨서 차례대로 말하지.”
아자리는 그 말을 듣고 몸에 맨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바로 끼적였다.
[미개척 지대의 원주민들조차 재판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단테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뭐. 제 생각에는 죽어 마땅한 놈들이에요.”
그리고 단테가 아자리에게 무언가를 넘기는 시늉을 했다. 아자리는 잠시 생각하고 말했다. 묶여있는 남자들은 그 와중에 제발 자비를 베풀어달라며 아우성을 쳤다.
“그냥 풀어줄 수는 없어요. 언젠가 똑같은 짓을 저지를 거예요.”
아자리가 이번에는 샤카자이아에게 무언가를 넘기는 시늉을 하자 샤카자이아가 바로 말했다.
“최소한의 물건만 남겨주고 풀어주자.”
단테가 못마땅하다는 반응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관대하지 않아요?”
“우리는 큰 죄를 지은 자들에게는 최소한의 물건만 쥐여주고 외딴곳으로 고립시켜. 땅의 은혜는 무한하지만 게으른 놈들에게는 가차 없으니까 살아남으려면 간사한 마음가짐으로는 어림도 없어. 죄인의 운명을 와칸탕카와 땅에게 맡기는 거지. 정해진 기한을 채우면 돌아올 자격이 생기고 보통은 그 과정에서 마음을 고쳐먹어.”
아자리가 말했다.
“하지만 외딴곳에서도 누군가에게 나쁜 짓을 저지를 수 있지 않아요?”
샤카자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보내기 전에 낙인을 찍지. 죄의 무게에 따라 코, 귀, 손가락 같은 몸의 일부를 잘라. 누가 봐도 수상쩍다는 걸 알 수 있게.”
[언니는 그렇게 말했으나 그래도 막상 그놈들 몸에 손대는 걸 꺼리는 눈치였다. 우리는 고민했다. 그 머저리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나와 샤키 언니는 같은 기억을 떠올렸다. 우리는 그 발상을 실천했으며 그 방법은 제법 괜찮았다.]
레스의 단발총을 들고 망을 보던 단테가 일지를 적고 있는 아자리에게 말을 걸었다.
“바지와 신발을 벗기고 야생에 던져놓다니. 레스가 아니었으면 그렇게나 자비로우면서도 잔인하고 망측한 짓은 상상도 못 했을 거예요. 농담 아니고 바지가 없으면 밤에 얼어 죽어요. 윗도리는 없어도 어떻게든 팔로 체온을 지킬 수 있는데 아랫도리는 그렇지가 않으니.”
아자리는 수첩을 닫고 뺨을 긁적였다.
“아무리 못된 놈들이라도 역시 직접 죽이는 건 싫잖아요. 당장 먹을 식량으로 사슴 다리도 두 개나 남겨줬고 언니가 사슴 가죽으로 모카신 신발을 만드는 방법까지 시범을 보여줬으니 자비는 베풀 만큼 베풀었어요. 이제 놈들이 죄를 뉘우치거나 살아남을지는 언니 말대로 와칸탕카에게 맡기는 수밖에요. 제가 보기에는 얼마 못 갈 거 같지만.”
“방금 만든 모카신을 샤키가 그놈들 발에 신겨줄 때는 표정들이 어찌나 가관인지 강림한 천사라도 보는 거 같더라고요. 마침 말이 나와서 말인데 아자리 양은 종교가 있나요?”
아자리는 한쪽 손에 턱을 괴었다.
“전 불가지론자예요. 물론 마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부모님 빼고 당당하게 말 못 해요. 일단 왕족이니까 신실한 척을 해야 해서.”
“고귀한 삶이란 골치 아프군요.”
“그쪽은요? 교회 다녔어요?”
단테는 눈썹을 실룩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렇고 그놈들한테 동판을 넘겼다는 마족은 분명 그 사람이 분명하겠죠?”
아자리는 시선을 위로 들어 올렸다.
“이름이 뭐였더라. 그때 저희 앞에서 통성명했었는데 기억이 안 나네. 티타이나? 티타늄? 티타니야? 귀찮으니까 티티라고 부르죠. 적국의 경제체계를 혼란 시키기 위해서 위조 화폐를 뿌리는 건 유서 깊은 공작 활동이죠.”
“제가 걱정하는 건 황무지의 암시장에 마족 공작원이 나타났다는 점이에요. 별로 놀랄 일도 아니지만,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아자리는 목소리를 살짝 높였다.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어요?”
“황무지의 뒷거래 업계는 ‘상회’라는 조직이 지배하고 있어요. 같은 업계에 경쟁할 상대가 없다는 걸 과시하려고 그냥 상회라고 간단하게 자칭하죠. 실제로도 그렇고요. 마족이든 인간이든 소속이나 종족 구분 없이 거래와 계약만 성사되면 그 안에서 뭐든 팔고 살 수 있어요. 전에 제가 말한 적 있죠? 마계와 인간계 사이에는 이름 없는 국가가 있다고.”
“듣고 나니 생각나네요. 개척 시대 때 두 문명으로부터 온갖 사람이 황무지에 모였으니 그런 조직도 당연히 생기겠죠. 사람 사는 곳 다 똑같으니.”
“상회는 철저하게 중립을 내세우고 있어요. 표면적으로는요. 저희가 마계에 도착하려면 상회가 제공하는 혜택을 구매하는 게 확실한 방법이었는데 역시 안심할 수 없었군요.”
“구체적으로 어떤 혜택을 말하는 건가요?”
단테가 평평한 길을 손짓으로 표현했다.
“그들이 자체적으로 관리하는 철도와 열차가 있어요. 상회가 흡수한 조직 중에 ‘지하철도 연맹’이 있었거든요. 표를 구하는 조건이 워낙 까다로워서 저도 이용한 적은 없습니다만.”
아자리가 가방에서 위폐 동판을 꺼내며 말했다.
“애도 하필이면 우리 손에 들어오다니. 신세 참 골치 아파졌네요.”
“우리한테 얽혀서 안 그런 게 있나.”
단테는 소총에 달린 끈을 고쳐매고 다시 망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