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0화 〉[4권] 150회 - 진통 (150/188)



〈 150화 〉[4권] 150회 - 진통



해가 저물어가자 행렬은 멈추고 불을 피웠다. 흙이 바람에 긁히고 이파리가 거친 수풀이 흔들린다. 하늘은 검푸르고 석양은 구름을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레스는 자기 손에 들린 단단한 고체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또 건빵이야?”

일행은 물이 끓는 냄비를 둘러싸서 자리 잡고 있었다. 레스는 걸쳤던 망토를 접어서 방석으로 삼아 깔고 앉아있었다. 카르델이 한심해하는 눈으로 그를 흘겨보고 삐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원래는 제철 재료로 만들어진 요리와 아이스크림이 88년산 백포도주와 함께 제공될 예정이었는데 주방장의 솜씨가 미천하여 모조리 건빵으로 변하고 말았답니다.”


“하다못해 페미컨이라도 없어?”


바로 옆에 있는 피카니가 피곤한 얼굴로 입만 움직여서 말을 받았다.


“페미컨이 뭔데.”


레스는 최선을 다해 페미컨을 만드는 방법과 먹었던 느낌을 설명했다. 루나는 무슨 물건인지 이미 아는 눈치였고 대부분은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하딘이 말했다. 그는 상자를 가져와서 걸터앉아있다.

“고기를 보존식으로 만드는  육포나 통조림으로도 충분해. 이미 만들어진 육포를 빻아서 다시 가공하는  내가 보기엔 시간 낭비야.”

피카니가 이어서 말했다.


“어제 먹었던 그 초콜릿이라도 줄까?”

“됐어.”


레스는 마음을 접고 조각낸 건빵을 머그잔에다가 침수시켰다. 건빵이 바닥에 떨어지자 충격이 손으로 전해졌다. 아비투스가 레스에게 말을 걸었다.

“베이컨이랑 고기 통조림에서 흘러나온 기름으로 튀기고 커피랑 같이 먹으면 건빵도 맛있어. 하지만 그것들은 아껴야 하거든.”

레스는 한숨을 쉬고 머그잔을 흔들어서 내용물을 휘휘 돌렸다.

“겸허히 먹을 것에 감사하지. 원래 밥투정  하는데 도시에 너무 오래 있었나 봐.”

하딘이 모자에 묻은 먼지를 털고 레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헤어진 지 9일이 지났지만 걱정한 만큼 아주 멀리는  갔을 거다. 저쪽은 들키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방향을 틀은 데다가 야생은 길도 험하고 먹을 것도 일일이 구해야 하지. 하지만 우리는 도로를 통해서 움직이는 데다 건빵이 있잖아. 만나면 친구들에게 뭐라고 말할 건가?”


“내 의지가 어떤지는 댁한테 의미 없잖아.”

하딘은 레스의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개의치 않고 할 말만 했다.

“시크릿 서비스와 자네가 대체 무슨 조건으로 서로 합의를 봤지?”


레스는 표정 없이 고갯짓도 안 하고 입만 움직였다.

“말  해. 몇 번을 물어도 어쩔  없어.”

“말할 수 없고. 또 말하기도 싫은 거로군. 좋아.”


 뒤로 일행은 식사 내내 말이 없었다. 레스와 루나는 마차의 짐칸으로 들어가서 드러누웠다. 타티아나는 짐칸으로 들어가려다가 하딘에게 불려 세워졌다. 그녀는 대위와 그의 부하들과 함께 누군가가 엿듣지 못할 인적 없는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두 사람이 있는 짐칸은 피카니가 바깥에서 자리를 잡고 지켜보았다.


하딘이 타티아나에게 물었다.


“저 둘하고 금방 친해진 거 같더군. 곁에서 지켜보니 어떻던가?”


타티아나는 직업 특유의 냉철한 마음가짐으로 돌아와서 침착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사쿠라비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일단 위험한 생각은 안 하는 거로 보입니다. 어쩌면 생각이 아예 없는 걸지도.”


타티아나는 자기가 아주 냉정한 표정을 짓는 중이라고 생각했으나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그녀의 속눈썹이 빗물 맞은 솔잎처럼 늘어진 게 훤히 보였다. 하딘은 한번 끄덕였다.

“마법사님 상태는 어떤가?”

“건강은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다.  짐칸에서 사소한 토론이 있었는데 마법사님과 사쿠라비의 가치관이 닮았더군요. 그걸 계기로 둘이 많이 가까워진  같습니다. 대위님께서 그 둘을 통제하고 싶으시다면 저희도 그들과 유대를 가질 필요가 있을 겁니다.”

카르델이 말했다.

“친해지라고? 그건 말처럼 쉬운  아닌데.”


아비투스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우리한테는 힘들지. 저쪽에서 먼저 마음을 여는 게 아니고서야.”

하딘은 눈가를 손으로 문질렀다.


“넘어가고. 내통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만약 우리 정보 조직의 수장이 저쪽 편이라면 많은 것이 설명돼. 공작원들의 연락이 끊어진 것. 우리들의 원정 목표부터 피카니를 무리하게 우리와 합류시킨 것까지 누군가 손을 쓴 게 틀림없어.”

타티아나는 팔짱을 끼고 목소리를 낮췄다.

“모르스 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지?”


“그는 그랜드 마스터죠. 그만한 거물을 반란파는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가 첩자라면 기득 세력인 왕당파의 손길이 닿았을 텐데, 그렇다면 피카니가 마왕을 인간들에게 넘겼을 때 그가 손을 썼을 겁니다. 마계에 벌어진 쿠데타를 진정시키려면 원래 마왕을 구해오는 게 최고의 방법이죠. 하지만 저와 파스낙은 그에 대한 계획은 전혀 못 들었습니다.”

하딘이 명치 높이로 손을 들어 올리면서 물었다.

“모르스 리가 순수하게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나?”

“정황만으로 그런 질문을 책임지고 답하기란 무리입니다.”

아비투스가 중얼거렸다.

“지금은 까라는 대로 까야겠죠.”


하딘이 품에서 지도를 꺼내 펼치면서 대답했다.

“슬프게도 말이다. 향후 계획 검토나 해볼까. 참고로 출발 전에 핑커튼으로부터 받은 정보에 의하면 레오포드는 지금 경로 B에 있는 마을에서 정비 중이라고 한다.”

카르델이 실눈을 떴다.

“왜 계속 쫓질 않고 노닥거리고 있답니까?”

“그  이후로 1주일 넘게 제대로 자거나 쉬지도 않고 종일 살폈다는군. 그래도 목적지를 특정할 만큼은 충분히 추적했어. 그들은 경로 A에 있는 게 확실하다. 빈센트는 경로 B에서 레오포드와 캘러헬하고 합류할 거야. 소령도 그렇고.”

아비투스가 말했다.


“소령이 합류한다니 믿기지 않는군요. 저희와 바로 만날 수는 없는 겁니까?”

“포로수용소가 저쪽하고  가까우니 별수 없지. 빈센트가 잘 해줘야  텐데.”


타티아나가 지도에 손가락을 대고 그어둔 길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레스의 친구들이 숲을 뚫고 언덕과 산을 넘는  야생을 헤쳐가는 광경이 지도의 지리에 맞춰서 떠올랐다. 타티아나는 손을 멈추고 그곳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인간 쪽 원주민 보호구역. 흠.”


하딘이 말을 이었다.


“인간 쪽? 옳은 표현은 아니야. 그들은 우리를 같은 편이라고 생각 안 하니까. 척박하고 지리적 이점도 없어서 연방이 최소한의 병력만 경계용으로 세워놨지. 저쪽 일행이 목표로 삼기에는 최적의 장소야. 우리가 이대로 순풍을 타듯 계속 도로를 탄다면 거의 따라잡거나 앞지를 수도 있을 거다.”


타티아나가 자신의 고양이 귀를 매만지면서 말했다.

“거기서 상회도 한 번 들러야겠군요. 회수해야 할 물건이 생각났습니다.”

“상회?”

하딘이 의문형으로 말했고 카르델은 그녀를 향해 넌지시 물었다.


“무슨 물건인데?”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는 물건입니다. 길어지니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하겠습니다.”


하딘이 다시 말했다.

“대체 상회가 뭐지?”

“황무지에서 가장 큰 암거래 조직입니다. 원주민 보호구역에는 상회가 연방의 관리가 소홀한 점을 눈여겨보고 지부를 세워놨습니다. 제 업무 특징상 예전에 자주 들렀죠.”


아비투스가 카르델을 쳐다봤다.

“너 그런 게 있는지 알았냐?”

“소문만 들어봤고 이용한 적은 없어. 값을 매길 수 있으면 뭐든 거래할 수 있다더라.”

하딘은 지도를 접으면서 떠나자는 손짓을 했다.


“나중에 얘기하지. 해산.”

그들은 각자 갈 길로 흩어졌다. 하딘은 근처에 있는 다른 장교나 병사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고 카르델과 아비투스는 마차로 돌아와서 마부석에 기대어 눈을 붙였다. 타티아나는 근처에 설치된 화장실로 향했다가 도중에 마주친 병사들의 마족을 향한 복잡한 시선을 받았다. 그 시선에 신기해하는 감정이 담긴 건 물론 원초적인 감상도 있었다. 여자로 태어난 이상 군대 같은 남성 위주의 사회에 있으면 자연스레 겪는 일이기는 하나 아무리 적응하려고 해도 타티아나는 기분이 가라앉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마차 짐칸 쪽으로 향하니 피카니와 레스, 루나가 한데 모여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들은 루나의 지팡이에서 칼을 꺼내 칼날과 손잡이를 분해하고 있었다. 피카니가 마침 나타난 타티아나를 보고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타티아나가 그들에게 물었다.


“지금  하는 거야?”

피카니가 공구로 나무토막을 다듬으면서 대답했다.

“칼날은 네가 쓰기로 했다며. 지금 칼날에  새 손잡이를 만들어야 하니까 손을 보여줘.”

그렇게 말하며 피카니는 그녀에게 나무토막을 내밀었다. 타티아나가 그것을 손에 쥐자 피카니는 그녀의 손에 맞춰서 눈금을 표시하고 토막을 돌려받았다. 루나는 칼집으로 쓰이던 지팡이의 빈속에 특이한 빛이 나는 가루로 안을 채워 넣고 있었다. 그걸 보며 레스가 물었다.

“뭘 넣는 건가요?”

“운석가루요. 우주로부터 땅에 떨어진 물질은 각종 원소에 노출되기 때문에 마법의 힘이 잘 깃들죠. 그중에서도 철질 운석에서는 오리칼쿰이 나와요. 톤토 씨에게서 선물 받았어요.”


“칼이 없으면 그냥 막대기가 될 거 같아서 신경 쓰였는데 다행이네요.”

루나가 감정사 같은 세심한 눈길로 자신의 물건을 들어 올려 이리저리 살폈다.

“원래 따로 만들어졌던 물건들을 파스낙 씨가 손수 개조해서 합친 거 같아요. 칼집으로 개조된 이 지팡이도 자체만으로 굉장히 좋은 물건이에요.”


피카니가 눈살을 찌푸리며 놀랐다. 타티아나와 레스도 눈을 크게 떴다.


“파스낙 ‘씨’? 아직도 잠에서 덜 깨셨습니까? 그놈이 마법사님에게 무슨 짓을 했는데!”

루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어. 그러네. 잊을 뻔했네요.”

“살해당할 뻔했는데 잊을 뻔하다니요?!”


레스가 끼어들어서 피카니가 흥분하려는 걸 말렸다.


“됐으니까 하던 일이나 마저 해. 쟤가 기다리잖아.”

그 말을 듣고 타티아나가 허리에 한 손을 대면서 레스를 삐딱하게 내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태껏 날 이름으로 안 불렀지?”


레스는 무슨 의도로 꺼낸 말인지 알 수가 없어서 마음이 긴장됐다.


“왜? 내가  잘못했어?”

“내 이름을 기억은 하는지 신경 쓰여서. 여태껏 나를 건성으로 불렀지?”


피카니와 루나는 왠지 모르게 강 건너 불구경하는 기분으로 이 상황이 즐거워졌다. 레스는 손바닥에 땀이 차는 걸 느끼면서 필사적으로 기억을 되살렸다.

“티타니아였던가?”

어리바리한 말투로 레스가 답하자 루나는 입가를 소매로 누르며 키득거렸고 피카니는 한심해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뱉었다. 분위기를 읽은 레스는 자기도 모르게 화가 버럭 치밀었다.


“몸이 반쯤 박살 나다시피 한 상태에서 통성명한 뒤로 1주일이 넘게 지났다고! 게다가 배때기에 칼까지 박히고 열차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너라면 그날 있었던 일들이 기억나겠냐?!”

타티아나가 게슴츠레 눈을 감고 그를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칼은 네가 네 몸에 박았잖아!  그렇게까지 깊게 찌를 생각 없었어!”


“깊냐 얕냐 문제가 아니잖아! 아니 확실히 내가 자해를 하긴 했는데 문제는 그게 아니고…. 대체 우리  이딴 얘기를 하고 있지? 그래서 처음의 요점이 뭐야?”

그녀는 눈가를 부여잡고 이를 갈면서 성질을 삭힌 다음 말했다.

“이름으로 불러. 내 이름은 타티아나야! 어이, 거기, 너, 쟤가 아니라!”

레스는 떨떠름한 얼굴로 목을 한번 가다듬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타티아나. 앞으로 신경 쓸게.”

분위기가 대단히 어색해졌다. 피카니와 루나가 묘한 의심이 담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타티아나가 급하게 둘러댔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죠. 이름으로 불릴 권리는 당연한 거잖아요.”

피카니는 한쪽 입가를 살짝 실룩이면서 그동안 손질했던 나무토막에 칼날을 끼우고 뚫어놓은 구멍에 못을 끼운 다음 가죽으로 감쌌다. 손잡이의 모양새는 그저 그랬지만 얼추  손으로 휘두를 수 있는 칼이 만들어졌다. 피카니가 칼을 조심스럽게 거꾸로 잡아서 손잡이가 상대를 향하도록 내밀자 타티아나는 받아서 쥐었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고 손목의 힘과 반동으로 칼을 이리저리 화려하게 돌렸다. 검법 동작보다는 춤을 출  쥐는 부채를 다루는 모습 같았다. 타티아나는 칼춤을 추려고 자세를 잡다가 주변의 눈치 때문에 자세를 거두고 칼끝을 땅에 대었다. 그녀가 담백하게 감상을 말했다.

“나쁘지 않아.”

레스가 말했다.

“파스낙은 그 칼로 전봇대도 갈라버리던데 평범한 칼집으로 보관이 될지 걱정되는데.”

타티아나가 칼을 손목 힘으로 허공에 휘두르면서 말했다.

“이것 자체로는 그저 평범하게 좋은 칼이야. 마법을  수 있는  빼고. 진짜 위력은 마법사가 써야 나와. 이 칼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고 싶어?”


“베르나르가 분명 마녀사냥 시대의 물건이라고 했었지.”

“그 말대로 이건 마녀사냥 시기에 교회에 소속된 기사들이 마법사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만든 거야. 마족 마법사들은 물론 인간 세상의 마법사도 포함해서. 약 300년 전 일이지.”


루나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술쟁이를 살려두어서는 안 되니라’. 종교 재판은 미개했던 암흑시대의 중세보다도 걸출한 철학자들의 등장으로 계몽운동이 성행했던 근세에 절정을 찍었죠. 그리고 기사들도 교회에 소속됐을 뿐 사실은 다들 마법의 힘을 썼고요. 오늘날의 저처럼요.”

피카니는 공구를 정리하면서 시선만 그녀 쪽으로 돌렸다.

“교회는 그 사실을 어떻게 변명했답니까?”

“신에게 선택받은 자들의 특권이라고요. 어쨌든 교황청은 그 역사를 수치로 여기고 그때 만들어진 것들을 회수해서 없애고 있어요. 이제는 명분상의 문제도 있고 가성비도 떨어져서 더 생산되고 있지 않아요.”


레스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과 다른 사람들이 일원으로 인정받으려면 아픔을 피할 수가 없죠.”


루나는 슬픈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앞에서 출발하자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