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4권] 151회 - 달은 도둑
다시 마차가 출발하고 시간이 흐르자 컴컴한 마차의 짐칸 속으로 창문을 통해 달빛이 흘러들어왔다. 창가에는 어디에서도 본 적 없고 표현할 수가 없는 복잡한 색이 나는 가루가 들어있는 유리병이 끝에 매달려 달빛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달빛을 흡수하듯 그 색은 점점 스스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감시역으로 여태껏 눈을 부릅떴던 타티아나는 지금 레스의 무릎베개를 받고 골골거리며 졸고 있다. 루나는 마법으로 아주 작은 도깨비불을 띄워서 자신이 펼친 책장만 비춰 읽고 있었다. 레스는 자기 허벅지 위에 올려져 있는 타티아나의 머리에서 머리칼을 치워 과연 고양이 귀 말고도 사람 귀도 달려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으나 강철의 인내심으로 견뎌냈다.
루나는 타티아나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소리 내지 않으면서 조심스럽게 움직여 창가에 걸린 유리병을 도로 되찾았다. 그리고 바로 옆자리에 앉으면서 레스에게 속삭였다.
“망토를 주세요. 마법 부여에 쓸 재료가 준비됐어요.”
레스도 타티아나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소곤거렸다.
“부작용은 없겠죠?”
루나는 눈을 작게 뜨고 토라진 목소리를 냈다.
“제 입으로도 말하기 뭐하지만, 전 인간 세계에서 손꼽히는 마법사라고요.”
레스는 헛기침을 하고 자신의 폰초 망토를 벗어서 그녀에게 공손히 건넸다. 루나는 그의 망토를 펼치고 유리병의 뚜껑을 연 다음 손을 뚜껑에 살짝 대었다. 그러자 유리병에 든 가루들이 마치 점액처럼 그녀의 손끝에 달라붙어서 늘어졌고, 이내 루나가 망토에 손으로 적은 글자를 따라서 가루들이 스며들었다. 그녀가 글자를 하나 세길 때마다 시간이 몇 분씩 걸렸다. 그 광경을 구경하던 레스는 지루해지기도 했고 계속 쳐다보면 루나의 집중을 방해할 거 같다는 생각도 들어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밤이 깊어졌으나 행렬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행렬은 등불과 달빛에 의지해서 어둠 속을 천천히 나아갔다. 레스는 일단 타티아나의 머릿밑에 접은 모포를 베게 삼아 넣어주고 근처에서 말을 타고 같이 달리고 있는 피카니를 손짓으로 불렀다.
피카니가 타고 있는 말을 그쪽으로 가까이 몰면서 창가에 있는 레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이대로 밤을 새워서 행군하는 거야? 위험하지 않아?”
“지휘자 말로는 이 일대는 야영하는 게 훨씬 위험하니까 서둘러서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래.”
“하지만 이렇게 느린 행렬은 습격하기 좋잖아. 특히 저쪽의 언덕은 불길해 보여.”
레스가 가리킨 곳인 도로 바로 옆에는 높게 솟은 어둠이 있었다. 나무와 바위도 없이 그저 높게 솟은 검은색 윤곽이었다. 피카니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말했다.
“나도 걱정은 돼서 지휘자에게 물어봤는데 그래서 더욱 서두르는 거래. 오늘만 밤을 새우면 그 뒤는 비교적 안전하다더라. 그리고 보급을 서둘러야 하는데 여기에서 지체했다간 일정이 늘어진대.”
레스는 불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혹시 모르니까 마음속으로 대비는 해둬.”
“난 언제나 대비한다고.”
피카니는 자신 있는 목소리로 답하면서 멜빵을 잡아당겨 몸에 건 자신의 소총을 레스에게 보여줬다. 개머리판에는 공용어로 ‘딜러’라고 적혀있었다. 레스는 할 말 끝났다는 뜻으로 상대에게 손짓하고 자리에 앉았다.
루나는 여전히 자기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는 일에 탄력이 붙었는지 음정이 이상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노래에 잠이 깬 건지 어느 틈에 자세를 고쳐잡고 눈가를 비비적거렸다. 레스는 타티아나의 눌린 머리를 자세히 보면 사람 귀가 있는지 알 거 같아서 빤히 쳐다보다가 상대에게 시선을 들켰다. 타티아나가 그를 흘겨보다가 노려보았다.
“뭐?”
“아무것도.”
“허.”
그녀는 대충 투덜거리고 졸린 눈을 지으며 고양이 귀 뒤쪽을 긁었다. 그리고 자기가 왜 레스 바로 옆에 있는지 의문에 빠졌다. 그녀의 자리에는 칼이 꽂힌 허리띠가 마차의 진동에 맞춰 떨걱거렸다. 제대로 된 칼집을 당장 만드는 건 어려워서 지금은 칼을 권총처럼 손잡이 부분을 가죽으로 묶고 허리띠에 끈으로 연결한 상태다. 그녀는 왜 이렇게 됐는지 고민하다가 자기가 잠기운에 취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을 부릅떴다.
“내가 졸았나?”
레스가 대답했다.
“처음에는 루나 씨가 무릎베개를 해주셨고 그다음에는 나하고 교대했어.”
타티아나는 민망해져서 자신의 눈가를 한 손으로 감쌌다.
“머리가 굉장히 개운한데 내가 얼마나 잠든 거야?”
대답은 루나가 대신했다.
“전 다리가 저려서 1시간도 못 채우고 항복했는데 레스 씨는 한참이 지나도 괜찮대요. 유목민의 허벅지는 굉장하네요.”
“세상에….”
타티아나는 뇌까리면서 레스를 흘겨보았다. 그가 말했다.
“이제 원래 자리로 돌아가 줘. 여기에 셋이나 앉으니까 좁잖아.”
“싫어.”
그녀는 창피해하던 모습은 순식간에 감추고 뻔뻔하게 대꾸했다. 지금 와서 남의 말에 순순히 따라주면 체면이 구겨진다고 생각하는 건지, 단순한 심술인지 아니면 다른 생각인지. 레스는 속으로 알아내려다가 귀찮아져서 고개를 돌려 타티아나를 무시하기로 했다. 그리고 루나에게 물었다.
“마법에 대해서 항상 궁금한 게 있었는데 지금 괜찮을까요?”
“말씀하세요.”
루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왜 달이 마법에 그렇게 중요하죠? 지금 쓰시는 재료도 달빛으로 만드신 거고 만월에는 마법과 마족들의 힘이 강해지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아니면 그냥 그런 건가요?”
“왜 그런 생각이 드셨죠?”
루나는 자연스럽게 고상함과 거만함이 절묘하게 섞인 말투로 상대의 질문을 질문으로 받았다. 제자의 질문을 받은 교육자처럼. 레스는 장단에 맞춰주었다.
“달의 빛은 결국 태양으로부터 오는 거잖아요. 어차피 똑같은 빛인데 왜 유독 달의 주기와 달빛이 특별한 건지 궁금했어요.”
루나가 낭송하는 어조로 말했다.
“달은 그저 도둑이오, 그녀의 불꽃은 태양에게서 훔친 것.”
레스는 한 호흡 뜸을 들이고 말했다.
“예?”
“제가 지은 구절은 아니에요.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문호가 지은 거죠. 하여튼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누구도 알 수 없어요. 그럴싸한 추측만 있죠. 주님이 세상을 만든 순간, 아니면 세상이 저절로 태어난 순간부터 만물을 움직이는 힘은 언제나 규칙과 태양의 빛이었어요. 태양과 규칙. 이 둘이 자연의 힘이고 모든 것은 자연으로부터 태어나 생존하죠.”
“그렇긴 합니다만.”
레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깊이 듣는 자세를 취했다. 타티아나도 흥미가 생겨 귀를 기울였다.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마법의 힘은 세상의 규칙을 거스르죠. 자연으로부터 오지도 않고요. 세상에 속한 것도 아니에요. 마치 있어서는 안 되는데 어딘가에서 몰래 훔쳐온 것처럼 존재하죠. 그래서 앞서 말한 글귀처럼 태양의 빛을 훔친 달의 힘이 유독 특별할 거라는 추측이 있어요.”
레스는 작게 고개를 흔들다가 낮게 말했다.
“그럴싸하긴 한데, 그럼 달의 힘을 받는 마법사와 마족들이 마치 세상에 원래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처럼 들리잖아요. 라카키 같은 고대종족도 그렇고요. 너무 슬픈 추측 아닌가요?”
루나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이 주제는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논란으로 남아있죠. 괜히 마녀사냥이 일어나고 인간들 영토에서 멀쩡하게 살던 마족들과 마법사들이 차별당한 게 아니에요. 심지어 저조차도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 항상 고민에서 벗어나질 못하는걸요.”
“어떤 사람도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타티아나는 그의 말을 듣고 입가를 실룩거렸다. 루나는 입가를 손으로 가리면서 고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말했다.
“그렇죠.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 걸까요? 모든 사람은… 나그네죠. 사쿠라비들이 항상 강조하듯이. 그런데 마침 제가 질문을 받았으니 저도 질문 하나 던져도 될까요?”
“말씀하세요.”
루나가 레스의 망토를 펼쳐 보이면서 말했다.
“레스 씨의 망토에 이미 수 놓인 자수들 말인데요. 이거 자세히 보니까 마법 부여가 수월해지도록 누군가가 밑 작업을 한 거였어요. 단순한 장식이나 미신으로 놓은 게 아니라 마치 이렇게 될 줄 알고 누군가가 미리 내다본 것 같아요. 제 직감이 그렇게 속삭이는군요.”
별생각 없이 상대의 말을 기다렸던 레스는 루나의 말이 멎자 얼어붙었다. 레스는 눈에 티가 날 정도로 당황하다가 헛기침을 하고 얼버무렸다.
“그냥 우연의 일치입니다.”
루나가 거침없이 말했다.
“당신 예언자를 만났나요? 예언자가 계시를 내려줬나요? 그 예언자는 어디 있죠?”
레스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개를 젓고 침착하게 말했다.
“설령 제가 예언자에게서 계시를 받았다고 한들 저는 여전히 끼니를 한 번이라도 거르면 힘이 빠지는 흔한 사람입니다. 특별한 운명 덕분에 살아남은 적도 없고, 특별한 운명 때문에 이 길을 고르지도 않았습니다. 정말 그게 사실이라면 저 말고 다른 모든 사람의 노력과 희생은 부질없다는 소리잖아요. 그건 너무 비극 아닙니까?”
루나는 자신의 질문을 사과하듯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자수를 놔주신 분이 하려던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해서 그렇게 보였던 걸 수도 있겠죠. 죄송해요. 더는 함부로 과거를 짐작하거나 묻지 않을게요.”
그리고 그녀는 여태껏 손을 봤던 레스의 망토를 그에게 정중히 내밀었다. 타티아나는 그의 등 뒤에서 심상치 않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레스는 돌려받은 망토를 양손으로 들어 올려 빤히 바라보다가 망토를 내려 저 너머의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제 망토의 어떤 점이 달라진 거죠? 때가 덜 타나요?”
루나가 망토의 한가운데를 쿡 찌르면서 말했다.
“‘방패벽의 가호’를 새겼어요. 제가 손을 본 곳에 한해서는 그 어떤 물질도 관통 못 할 거예요. 당장은 가진 재료가 부족해서 심장 쪽만 막을 수 있지만요.”
타티아나가 레스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망토를 바라보며 물었다.
“전신 방탄 망토라. 암시장에서 고위 마법사가 만든 특수 보호구는 대단한 고가에 거래되죠. 하지만 지금 마법사님이 목표로 하는 물건에 견줄만한 것은 저도 매물을 본 적이 없습니다. 파스낙조차도 직접 만들려다가 힘들다면서 포기하고 그냥 방탄 직조된 비단을 따로 샀죠.”
레스가 신기해하는 눈으로 자신의 망토를 이리저리 살폈다.
“마법 부여라는 게 그렇게나 어려운 기술인 건가?”
타티아나가 말을 받았다.
“모든 힘은 기본적으로 가만히 있지 않아. 너 타오르는 불이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가만히 있는 거 본 적 있어?”
레스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마법 부여는 타오르는 불을 박제시키는 것과 비슷해. 싸울 때 쓰는 마법하고는 차원이 다른 섬세함이 필요해. 한번 쓰고 버리는 ‘마법 카드’는 비교적 만들기 쉽지만 이런 수제작 물품을 마법사에게 의뢰하려면 재료비와 의뢰비까지 합쳐서 단가가 천문학적이지.”
루나가 손을 들어 올리고 다급하게 말했다.
“저, 저기. 주의사항은 들어주세요. 먼저 그 망토는 매일 밤 안감과 바깥을 뒤집어서 달빛을 쬐어주셔야 해요. 정확히는 운석가루 염료에 달빛이 닿아야 해요. 다음 날 아침에는 바로 뒤집어서 안감이 햇빛에 안 닿도록 하세요. 햇빛과 달빛은 서로 상극이라 닿으면 충전된 힘이 사라져요.”
레스는 입을 열고 멍하니 말을 끌다가 눈동자만 옮겨서 루나를 바라보았다.
“잠깐, 빨래하고 햇빛에 널면요?”
“운석가루 염료가 씻겨나가거나 하진 않을 거예요. 다만 그 날은 ‘방패벽의 가호’를 포기하셔야 해요. 그리고 하나 더.”
루나가 정색한 표정으로 검지를 쳐들고 진지하게 말했다.
“제가 그 어떤 물질도 통과할 수 없다고 했었죠? 마법은 보장 못 해요. 반동과 충격도.”
“반동과 충격? 아.”
레스는 무슨 말을 하려는 지 감이 잡혀서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빡였다. 그가 재차 말했다.
“맞으면 아프겠군요.”
한편 피카니는 하딘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딘은 피카니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주변을 향해 외쳤다. 주위에 충분히 들리되 메아리가 퍼지지는 않을 정도로 조절해서.
“난 헨리 웨슬리 하딘 대위다. 저 언덕이 안전한지 확인해야 한다. 말을 탄 사람이 스무 명은 필요하다. 자원할 사람은 내게 와라.”
피카니는 저 앞으로 달려가서 보급 행렬을 맡은 지휘관을 설득시키고 있었다. 잠깐 대화를 나누고 지휘관은 모든 마차를 향해 움직이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다니며 상황을 알린 하딘의 주위로도 병사들이 모여갔다. 마부석에 있는 카르델과 아비투스는 손에서 고삐를 놓고 대신 각자 무기를 양손에 들어 경계 태세를 취했다. 카르델이 턱과 뺨에 난 수염을 벅벅 긁다가 하품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따분해.”
아비투스가 옆자리를 흘겨보면서 산탄총의 노리쇠를 시험 삼아 움직였다.
“따분한 게 좋은 거야. 계속 따분해야 해.”
레스는 창문을 끝까지 열고 윗몸을 바깥으로 내밀어서 상황을 보았다. 때마침 바람이 언덕을 타고 내려오는 참이다. 가을의 밤바람은 겨울 못지않게 싸늘했다. 척박한 땅에는 들짐승이나 벌레울음 소리도 없이 건조한 기후에서 자라는 앙상한 식물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심란했다. 레스는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코를 킁킁거렸다. 레스가 깜깜한 언덕을 바라보면서 혼잣말했다.
“사람 냄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