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4권] 152화 - 같은 피를 흘리며
루나가 그 소리를 듣고 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죠?”
“사람 체취가 코끝을 스친 거 같습니다.”
타티아나가 눈을 찡그리면서 미심쩍어하는 투로 말했다.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뜻이야?”
그는 고개를 저었다. 레스는 계속 창밖에 몸을 내밀고 언덕을 바라보았다.
“감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정말로 냄새가 났어. 분명 뭔가 일어날 거야.”
루나가 타티아나를 바라보면서 작게 말했다.
“그게 정말로 가능할까요?”
타티아나도 자신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야생에서 오래 지낼수록 감각이 예리해진다는 말은 들었지만. 글쎄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천장에 달린 도르래 손잡이를 돌렸다. 그러자 네모난 철판이 옆으로 젖혀지면서 천장에 사람이 드나 들만한 구멍이 생겼다. 타티아나는 자신의 장비들을 챙기고 펄쩍 뛰어서 천장의 구멍을 통해 날렵하게 바깥으로 나왔다.
마부석에 있는 두 남자는 뒤를 돌아보고 갑자기 나타난 타티아나를 향해 눈짓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녀가 말했다. 달밤의 바람 속에서 입김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레스의 말로는 저쪽으로부터 사람 냄새가 난다는군. 그쪽 생각은 어때?”
좌석에 한쪽 다리를 올리고 구부정한 자세로 있던 카르델은 그 말을 듣고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뺨을 살짝 깨물었다.
“끝내주네. 긴장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당신들도 그게 느껴져? 개도 아니고.”
아비투스가 그녀의 물음에 카르델과 교대하듯 말을 받았다.
“도시처럼 냄새로 가득한 환경에서는 와닿지 않는 사실인데 냄새라는 건 멀리 퍼져. 예시로 불붙인 담배처럼 강렬한 것은 수백 미터나 퍼지니까 작전 중에는 절대 금연이지. 나도 지금 묘하게 익숙한 맛과 냄새가 느껴지고 있어.”
타티아나도 온몸의 감각에 신경을 기울여서 무언가를 느껴보려고 했으나 얻어낸 결실이라고는 오갈 데 없는 불안함 뿐이었다. 그러나 타티아나도 자기가 걱정을 사서 하는 것은 아니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다가 몸을 떨었다.
“짠 내가 나는 것 같아.”
아비투스가 말했다.
“큰 싸움이 일어나기 직전마다 이걸 느낄 수 있어. 잔뜩 모인 사람만큼 냄새가 진동하는 생물은 없잖아. 사쿠라비는 사막에서 왔으니까 유난히 이런 징후에 예민한 걸지도 몰라.”
“사막은 냄새가 안 나니까.”
두 남자는 작게 고갯짓했다. 타티아나가 자기가 올라와 있는 짐칸을 탕탕 두들기고 방금 자기가 나왔던 구멍을 통해 루나에게 외쳤다.
“창문 닫으세요. 안전해질 때까지 숨어계시고요.”
타티아나는 창밖으로 몸을 꺼내고 있던 레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하자 레스는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얌전히 지시에 따랐다. 카르델이 허리에 맨 탄띠에서 총알을 꺼내 소총의 약실에 한 땀 한 땀 집어넣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의 짐칸 지붕으로 기어오르고 언덕을 향해 엎드렸다. 타티아나도 근처에 나란히 엎드렸다.
카르델이 쌍안경을 꺼내서 저쪽을 향하자 말을 탄 병사들과 그들을 이끄는 하딘의 모습이 달빛을 통해 흐릿하게 보였다. 기병대는 언덕 자락에 닿았을 때 잠시 멈췄다. 하딘은 멈추라는 의미의 수신호로 활짝 펼쳐서 들어 올린 손으로 다른 수신호를 보냈다. 말을 탄 병사들은 하딘의 뒤를 따라 일렬로 나란히 섰다. 그는 진열이 갖춰지자 조명탄 권총을 꺼내어 언덕을 향해 겨누고 쏘았다. 불붙은 마그네슘 덩어리가 밤의 어둠을 가르며 작은 유성처럼 날아갔다. 조명탄은 땅에 떨어질 때까지 캄캄한 언덕을 잠깐 비췄다. 아주 잠깐, 그 순간 어둠 속에 숨어있던 사람의 윤곽이 그 빛 속에서 잠시 스쳐 지나갔다.
“썅.”
조명탄의 빛을 따라 쌍안경의 방향을 바꿨던 카르델은 욕을 뱉으며 쌍안경을 내리고 소총을 들었다. 행렬을 이끄는 지휘관은 바삐 움직이며 마차에 있는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투 준비! 방어 태세! 절대 자리를 벗어나지 마라! 반복한다! 자리를 지켜라!”
마차 쪽에 있던 병사들은 바깥으로 나와 자리를 잡고 각자 제식 소총으로 언덕을 향해 겨누었다. 하딘과 기병대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듯 가만히 있었다. 하딘이 자기 근처에 있는 나팔수를 향해 말했다.
“힘껏 불어.”
나팔수가 내는 소리가 짐칸에 숨어있는 레스와 루나한테까지 들렸다. 루나가 그 소리를 듣고 잔뜩 겁먹었다.
“공격 신호가 떨어졌나 봐요.”
레스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직은 아니에요. 총성이 안 들려요.”
카르델은 언덕의 정상을 주시했다. 힘차게 울려 퍼지던 기병대의 나팔소리가 멎자 그곳으로 사람들의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곧 제대로 된 불빛 없이도 언덕 위로 범상치 않은 숫자를 짐작할 수 있는 그림자 무리가 나란히 진을 쳤다. 그림자의 머리가 높았다. 저쪽도 마찬가지로 말을 탔고 당장이라도 이쪽을 향해 돌격해올 것처럼 기세가 흉흉했다.
타티아나가 그에게 물었다.
“저쪽의 수가 얼마나 돼?”
“당장 보이는 것만으로 어림잡아서 쉰. 뒤에 더 있겠지.”
타티아나는 속으로 수를 세었다.
“우리 쪽은 당장 나간 기병이 스물에 마차가 스무 대. 마차마다 사람이 넷씩 있다고 치면 다 합쳐서 백 명가량이군. 저쪽이 덤벼올 거 같아?”
“저쪽이 나팔 소리를 듣고도 물러나지 않고 모습을 드러냈으니 일어날 일은 뻔하지.”
카르델은 눈가를 비비고 오만상을 쓰면서 조준경에 댄 눈으로 온 신경을 기울였다. 언덕 위로 그림자들이 점점 늘어났다. 상대의 수가 점점 늘어나자 하딘의 근처에 있던 기병이 불안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뒤로 물러나서 본대와 합류해야 합니다. 맞붙기엔 수적으로 너무….”
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늦었어. 지금 등을 돌리면 다 죽는다. 우리가 최대한 시간을 번다. 지시가 떨어지기 전에는 열에서 벗어나지 마라.”
이번 일을 가벼운 수색으로 여겼던 병사들은 설마 목숨을 내던지게 될 줄은 몰라 다들 신에게 기도하거나 목에 건 묵주를 떠는 손으로 꺼내 입을 맞췄다. 달을 스치는 구름이 완전히 지나가자 일대가 환해졌다. 곧 습격자들의 모습이 온 세상에 완전히 드러났다. 무리의 한가운데에 있는 우두머리가 소총의 몸통을 잡고 위로 쳐들면서 함성을 질렀다. 뒤를 이어서 모든 자가 따라서 외쳤다.
[와라라라라라라라! 아우! 아우! 아우! 아아! 우! 후! 후! 후! 후! 후!]
백 명은 넘을 사람들의 야만적인 함성이 모두의 말초신경을 건드렸다. 카르델이 습격자들의 옷차림새와 외모, 그리고 우두머리가 머리에 꽂은 깃털 장식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이만한 규모는 오랜만인데.”
타티아나가 물었다.
“지금 우두머리를 맞출 수 있겠어?”
“너무 멀어. 바람도 강해. 그리고 말 안 해도 맞출 테니까 재촉하지 마.”
“우두머리가 쓰러지면 안 좋은 징조로 여기고 사기가 떨어질 거야.”
“말 안 해도 안다니까.”
카르델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하고 자세를 고쳐잡았다. 하딘은 공포나 흥분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냉정한 태도로 지시를 내렸다.
“저쪽이 움직이면 우리도 움직인다! 반드시 내 뒤를 따라서 열을 지켜라!”
겁먹었던 병사들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용기를 냈다. 행렬에 있는 지휘관도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을 관리하느라 부단히 애를 썼다. 긴장의 실이 타들어 간다. 실이 더는 당겨지지 못할 정도로 팽팽해지다가 지금 끊어졌다.
습격자들을 이끄는 우두머리는 자신들의 진열이 완전히 갖춰진 걸 파악하고 돌격의 함성을 지르며 말의 배를 걷어찼다. 발굽이 땅을 때리는 소리가 사람들의 발밑을 울렸다. 그 광경을 맞이하며 하딘도 소리쳤다.
“나팔을 불어라!”
나팔수가 얼굴이 붉어지라 나팔을 불자 하딘이 말의 앞발을 들어 올리면서 고함을 질렀다.
“조국과 주님을 위해! 우리가! 간다!”
하딘은 힘껏 달렸다. 병사들은 그의 우려와는 달리 제대로 따라와 주었다. 하지만 스물 밖에 안 되는 기병들의 일렬종대는 백 명은 넘을 습격자들의 기세에 비하면 폭풍 앞의 바늘 같았다. 횡으로 나란히 퍼져서 달려오는 습격자들이 그들을 향해 마구잡이로 총과 활을 쏘자 하딘은 몸을 수그리면서 외쳤다.
“열에서 벗어나지 마라! 노출되는 면적을 줄여야 한다! 열에서 벗어나면 위험하다!”
그의 말을 들은 병사가 따라 외치면서 뒤로 지시를 전달했다. 한편 행렬에 있는 병사 중 한 명이 참지 못하고 발포하다가 근처의 부사관이 호통을 쳤다. 나란히 몰려오는 습격자들은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서서히 삼각뿔 형태로 진이 변했다. 기병대와 습격자들이 맞닥뜨리기 직전, 하딘은 달리는 방향을 왼쪽으로 틀고 오른손으로 권총을 뽑았다.
기병들은 그를 따라서 방향을 틀다가 하딘이 총을 쏘는 걸 보고 다들 권총을 꺼내 쏘았다. 그들 코앞에서 스쳐 지나가는 원주민 습격자들이 총성마다 말에서 떨어졌다. 기병대는 일렬로 나란히 달린 덕에 방향을 틀기가 수월했으나 저쪽은 아니었다. 기병들은 삼각뿔 형태로 몰려오는 습격자 무리를 그대로 흘려보내면서 언덕 위로 향했다.
언덕을 달려 내려가면서 가속도까지 감당해야 했던 습격자들은 양손으로 고삐를 쥐거나 오른손으로 고삐를 잡았기에 왼손으로 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하딘이 습격자들의 오른쪽을 향해 달려가는 바람에 왼손으로 무기를 들고 있던 무리는 제대로 맞서 쏘지도 못하고 상대를 흘려보내고 말았다. 어느새 두 집단은 순식간에 거리가 벌어져 하딘의 기병대가 습격자들의 뒤를 잡아버렸다.
습격자들의 우두머리는 지금 상황에서 지휘를 바꿀 수는 없었기에 함성을 지르며 계속 달렸다. 그는 총을 위로 쳐들면서 마차 행렬을 향해 박차를 가하다가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에 맞고 말에서 떨어졌다. 타티아나가 카르델에게 말했다.
“명중.”
카르델은 노리쇠를 잡아당기고 계속 쐈다. 우두머리가 쓰러지면서 일어난 혼란은 순식간에 습격자 모두에게 퍼져나갔다. 행렬 쪽에 있는 지휘관이 외쳤다.
“지금 쏴라! 쏴! 저 야만인 새끼들 죽여버려!”
언덕 위로 올라가서 습격자들의 뒤를 잡았던 하딘도 외쳤다.
“말에서 내려! 카빈을 꺼내라!”
하딘이 앞장서서 레버 액션 소총을 꺼내고 멋들어지게 스핀 로딩을 선보여주자 기병들은 가슴속이 타오르는 기분을 느끼며 그를 따랐다. 하딘이 쓰는 소총의 레버는 어느샌가 스핀 로딩에 편리하도록 넓게 펴져 있었다. 말에서 내려온 기병들은 전열 보병처럼 나란히 앉아 쏴 자세로 진을 쳤다.
“신이여 여왕을 지켜주소서!”
하딘의 함성과 총성을 신호로 기병들은 일제히 쐈다. 습격자들은 혼란에 빠진 채 공격을 앞뒤로 받았다. 전세가 기울었으나 그래도 수가 너무 많다. 우두머리가 쓰러진 모습을 보고 말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이들도 상당했다. 화살과 총알이 밤공기 속에서 하루살이처럼 날아다녔고 습격자들은 피투성이가 되면서까지 곤봉과 토마호크를 쥐고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아비투스는 마부석에서 나와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원주민들을 향해 방아쇠를 힘껏 잡아당겼다. 반자동 산탄총으로부터 나온 불의 세례를 받은 원주민들이 파편으로 변하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솔선해서 싸우는 그의 모습을 보고 주변의 병사들이 흥분으로 달아오른 함성을 외치자 아비투스는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캄캄한 짐칸 속에서 루나는 양손을 움켜쥐고 눈을 감은 채 기도만 하고 있었다. 누구를 향해, 무엇을 위한 기도인지 레스는 굳이 묻지 않았다. 피 냄새와 화약 냄새가 그들에게까지 흘러들어왔다. 함성과 비명이 누구의 것인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레스도 루나처럼 기도했다.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었으며 동시에 모두를 위한 기도였다.
타티아나는 혼란 속에서도 마차에 위협이 될만한 상대만 구분해서 상대했다. 그녀는 소음기가 달리지 않은 나강 리볼버로 달려드는 상대를 쫓아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타티아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부터 영문모를 기척이 느껴졌다.
카르델도 비슷한 감각을 느끼고 조준경에서 머리를 떼고 고개를 돌렸다. 여태껏 싸움이 터지던 곳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부터 무언가가 어둠 속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카르델은 목이 터질 정도로 외쳤다.
“양동이다! 우리 측면이 털린다!”
카르델의 목소리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코앞의 상대와 싸우거나 대치하느라 바빴던 병사들은 듣고 싶어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 말을 제대로 들은 사람은 그 마차에 있는 사람들뿐이다. 레스는 성냥을 손톱으로 켜서 천장에 달아둔 등에 불을 붙이고 짐칸을 열심히 뒤졌다.
하늘로 군용 조명탄들이 솟아올랐다. 별과 태양보다도 밝게 타오르는 섬광이 희끄무레한 빛과 어둠에 감춰졌던 참상을 비췄다. 전방으로 갈 예정이었던 어떤 신병은 피와 오물로 흥건한 광경을 보고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조명탄이 솟아오르는 걸 보고 하딘은 당황했다.
“저건 우리가 쏜 게 아니야.”
“군용 조명탄입니다! 저것들 그냥 야만인 패거리가 아닙니다!”
하딘의 근처에 있는 기병이 말했다. 하딘이 서둘러서 말에 올라타면서 외쳤다.
“돌격한다! 검을 뽑아라! 우리 행렬을 통과해서 서둘러서 측면을 사수한다!”
타티아나는 자신의 권총에 총알을 넣으면서 카르델이 쏘고 있는 방향을 봤다. 조명탄으로 밝혀진 황야 속에서 백 명 남짓한 무리가 달려왔다. 그들은 말을 타지 않고 여태껏 땅을 기면서 어둠에 숨어 계속 다가온 거였다. 그들 사이로 짐승 무리도 보였다. 카르델은 짐승을 향해 일단 쏘면서도 뒤늦게 그 정체를 보고는 경악했다.
“뭐, 뭐야 이건?!”
카르델은 자신이 쏜 짐승이 그저 덩치가 큰 개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짐승은 온몸의 털이 다 빠졌고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근육이 온몸을 덮고 있었다. 얼굴은 찰흙처럼 뭉개져서 입부터 안구의 위치까지 엉망으로 뒤틀려 있다. 카르델은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 탄창을 약실에 꽂는 도중 총탄에 맞고 마차의 짐칸 지붕으로부터 비틀거리다가 땅으로 떨어졌다.
“카르델! 안돼!”
아비투스가 그렇게 외치자 마차의 짐칸 문이 벌컥 열리더니 루나와 레스가 밖으로 뛰쳐 나왔다. 타티아나가 두 사람에게 달려가 외쳤다.
“위험하니까 안으로 들어가세요!”
루나는 들은 체도 안 하고 쓰러진 카르델에게 향했다. 레스는 자신의 권총이 들어있는 상자를 그녀에게 말없이 내밀었다. 타티아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허리춤에서 열쇠를 꺼냈다.
하딘의 기병대가 일대를 휘저으면서 처음 싸움이 벌어진 곳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기병들은 서둘렀으나 시간에 맞추지 못하고 행렬의 측면을 빼앗기고 말았다. 하딘은 자신의 일행이 있는 마차로 어떻게든 가고 싶어도 보통 혼란이 아니었다. 싸움은 백병전으로 변모했다. 기병들은 땅으로 내려와 검으로 싸웠고 나머지는 돌이라도 주울 수 있으면 운이 좋았다. 마차를 끌던 말들은 죽어갔고 마차에는 불이 붙었다. 서로 찔러 죽이고 서로 쏘아 죽였다.
측면을 빼앗은 무리는 돌격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유지한 채 꾸준히 총과 화살로 공격했다. 타티아나는 레스와 같이 마차의 짐칸에 기대서 숨은 채 열쇠로 자물쇠를 풀었다. 레스는 안에서 ‘오쓰 키퍼’를 꺼내고 허리에 찬 탄띠로부터 빠르게 권총탄을 옮겨 넣었다.
그가 총알을 장전하던 도중 기이하게 생긴 짐승이 나타나서 달려들자 타티아나는 순식간에 칼을 휘둘러 짐승의 벌어진 입부터 목 아래까지 가운데를 깔끔하게 잘라서 머리와 몸을 해체해버렸다. 역수로 쥔 칼을 고쳐잡으면서 피를 땅으로 털어내고 그녀가 말했다.
“나대지 말고 주변만 지켜.”
그녀는 레스한테서 답변도 듣지 않고 바로 자리를 떴다. 온 사방에 짐승 무리가 나타나서 이쪽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짐승들은 심지어 적군과 아군 구별 없이 피가 흐르고 살점이 있는 상대는 보이는 대로 물어뜯고 있었다.
다리를 짐승에게 물려서 무릎 아래가 뜯어져 나가려던 병사는 바짓단을 잡아당기며 울부짖다가 갑자기 짐승의 머리와 몸통이 정육점의 고기처럼 깔끔하게 분리되는 광경을 보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얼었다. 타티아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칼에 묻은 피를 다시 땅으로 털어냈다. 그리고 권총을 집어넣고 단검을 뽑았다.
그녀가 혀 차는 소리를 내자 타티아나는 그 자리에서 흐릿하게 사라졌다. 한참 먼 곳에 무리를 지어 움직이던 짐승들이 깔끔하게 이리저리 토막 나더니 타티아나는 한 박자 늦게 그 자리에 나타났다. 하늘로 솟아올랐던 조명탄이 거의 꺼져갔다. 그녀는 장막처럼 내리 앉는 어둠을 몸에 걸치며 양손에 든 단검과 장검을 이리저리 휘둘러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리고 저쪽으로부터 날아오는 총격을 피해 달렸다. 마침 숨기 좋은 작은 바위 뒤로 들어갔다가 타티아나는 누군가와 마주했다. 피카니가 이미 그곳에 있었다. 몸 곳곳이 피 얼룩으로 범벅이다. 그가 방금 마주친 타티아나를 향해 자기 입술에 검지를 대었다. 타티아나가 피카니에게 속삭였다.
“저 안에 짐승들을 조종하는 놈이 있어. 그놈을 처리하지 못하면 상황을 못 뒤집어.”
피카니가 눈썹에 달라붙은 마른 피를 뜯어내면서 작게 말했다.
“조종하는 놈을 알아볼 수는 있고?”
“날 알아보고 달아나려고 하는 놈이 있으면 그놈이겠지.”
“그거 말 되네.”
피카니는 자신의 자동소총에 탄창을 끼우고 노리쇠를 당겼다. 타티아나도 자신의 권총에 총알을 채우다가 고개를 들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넌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측면이 위험하다기에 왔는데 나 혼자더라고. 지금은 저것 중 절반이 이쪽을 노리는 중이고.”
다른 조명탄이 박격포로 하늘을 향해 발사됐다. 피카니는 주변이 다시 환해지자 고개만 조금 내밀어서 저쪽을 살피다가 총알 세례를 받고 도로 숨었다. 바위에 총알이 박히면서 불똥이 튀었다. 그가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봤지?”
그녀가 다시 속삭였다.
“당신이 시선을 끌면 내가 측면으로 파고들 수 있어.”
“얼마나 멀리 뛸 수 있는데?”
타티아나는 심호흡하고 바깥을 슬쩍 보았다.
“지금 내 체력으로는 단숨에 저기까지 닿을 수 있어. 돌아오는 건 어렵겠지만.”
“남은 탄약만큼 쏴죽일 수 있으니까 엄호라면 걱정하지 마. 준비되면 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