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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6화 〉[4권] 156회 - 문명과 야만의 차이 (156/188)



〈 156화 〉[4권] 156회 - 문명과 야만의 차이

운은 모르스가 떼었다.

“우리가 따라왔을 거라고는 어떻게 확신했지?”


“확신하지 않았어. 예상만 했지.”

모르스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어렴풋한 예상 따위에 목숨을 내던졌나. 보통 사람들은 무모하게 도전하다가 개죽음으로 끝나는데 그쪽은 능력이 되니까  머리 아프군. 과연 재림하신 용사는 뭔가 달라.”

레스는 상대의 비꼬는 소리는 신경 쓰지 않고 할 말만 골랐다.

“난 당신이나 당신의 부하들이 나타날  알았어.  베르나르가 여기 있지?”

그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손목을 움직여 손바닥을 보였다.


“난 돌려보냈다고는 한마디도 안 했어. 꼼수가 있다고만 했지. 그 방법이 좀….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만 결과적으로 그는 지금 우리 편이야. 참고로  방법은 캘러헬이 생각해냈고 지극히 민감한 이야기라서 설명 못 해. 언젠가 비밀을 알게 되면. 너도 이해가  거야.”


레스는 눈가의 밑에 힘을 줬다.

“루나 씨하고 관련됐다는 건 알고 있어.”


“그래? 어떻게 알았어? 아, 맞아 녀석도 언급했었지. 깜빡했군.”

“단서 하나라도 줘봐.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짐작이라도 해보게.”


모르스는 입가를 히죽 올리고 레스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베르나르처럼 미친놈이 충성을 맹세할 만한 대상이 세상에 뭐가 있을까?”

“신앙이잖아.”

“틀린 말은 아닌데 반만 맞았어. 훨씬 더 구체적인 무언가가 더  동기를 만들지 않을까? 말 나온 김에 자매님에게  안부도 전해줘.”

레스는 어차피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듣느니만 못하군.  차례야. 무슨 생각으로 그쪽이  직접 맡지 않고 이쪽에 뒀지? 난 진지하게 묻는 거야.”

모르스는 팔짱을 끼고 눈썹을 실룩였다.


“나한테 선택지가 없었다고 한다면, 믿어주겠나?”

“조직의 수장이 그딴 소리를 하면 내가 믿을 거 같아?”

그는 화가 난다는  땅을 향해 한숨을 훅 불었다.

“난 수장이 아니야. 행동대장이지. 진짜 수장은 따로 있고 그 수장 위에 또 높으신 분들이 웨딩케이크처럼 쌓여있다고. 난 목줄에 묶인 개야. 종종 늑대로 사는 캘러헬이 부럽기도 해. 왜냐면 높으신 분들이 나한테 세상을 정복하라고 질리지도 않고 계속 닦달하거든.”


레스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이야기가 헛돌잖아.”

“핵심은.  바쁜 사람이야. 너희와 만나기 전에 이미 맡은 일이 더럽게 많고 전부 중대해. 이야기가 따분해졌으니까 해야만 하는 일들을 술 마시기 게임으로 비유하지. 지금  앞으로 마셔야 할 술이 아주 다양해. 위스키, 버번, 럼, 보드카 등등 하나 같이 도수가 푸짐하지. 보통 사람이라면 소화해내기 어렵겠지만 나는 간이 튼튼해서 상관없어. 일단 그렇다고 칠게. 하여튼 이것들을 한 아름 들고 기차를 타서 여기로 왔는데….”

그가 자기 앞에 있는 레스를 엉터리 약장수처럼 과장된 손짓으로 가리켰다.

“여기 오니까 난데없이 내 앞으로 ‘스피리터스 렉떠삐꼬바너’가 든 228리터짜리 참나무통이 떡 나타난 거지. 심지어 해적들이 처먹던 것처럼 화약까지 섞여 있더군.”

레스는 실눈을 떴다.

“스피리터스 뭐?”


“97도짜리 증류주. 참고로 마계의 특산품이다. 넌 그런 존재야. 어중간한 곳에 두면  되는 극히 위험한 물건인데 직접 떠맡기에는 더 싫은 물건. 그나마 나 대신 널 맡을 수 있는 곳이 저 일행들이었지. 오늘 그 활약을 실시간으로 보니까 곁에 두기 더욱 싫어졌어.”


레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까먹어버렸다. 모르스가 말을 이었다.


“원래는 정말 싫지만 어떻게든 겉으로 무게 잡으면서 널 직접 맡으려고 했는데 캘러헬까지 끌고 와서  밑에서 벗어나겠다잖아. 이야기를 들어보니 명분도 그럭저럭 앞뒤가 맞는 편이고 말이지. 이것이 네가 그렇게 궁금해하는 나의 사악한 음모다. 만족스럽냐?”

조금 뜸을 들이고 레스가 찌푸린 인상을 지키면서 말했다.

“날 속이거나 놀리려는 생각이라면 내가 들어본 것 중에서 가장 멍청한 소리였고 거짓 없는 진솔한 이야기였다면 당신은 얼간이야. 그딴 농으로 분위기 흐릴 생각하지 마.”


“좋을 대로 생각해. 욕 받기도 철밥통의 업무니까.”


“난 진지해! 당신들 덕에 우리가 싸움에서 살아남고 이기기는 했어.  점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아. 하지만 당신, 당신은 충분히 싸움을 미리 막을 힘이 있었잖아. 어쩌면 처음부터 다 알았을 수도 있고! 죽음을 막을 수 있었는데 막지 않으면 살인하고 뭐가 달라!”


“살인자를 미리 죽이지 않았다고  살인자라고 부르는군. 하지만 넌 살인자들을 살려줬지. 앞으로 살인할 놈들을 풀어준 네가 나하고 무슨 차이가 있지? 내가 보기엔 넌 광신을 맹세로 포장하면서 책임을 피하고 있어.”


레스는 언성을 높였다. 심지어 거리를 벌린 다른 일행에게도 들릴 만큼.


“내가 책임을 피한다고?! 난 죽을 날까지 짊어질 거고 최선을 다해 생존할 거다! 그럴 각오도 없었으면 방랑의  대신 고향에서 독수리 밥이 되는 쪽을 골랐겠지!”


이성을 거의 잃기 직전까지 흥분해서 외친 레스의 목소리가 근처의 언덕까지 메아리가 쳤다. 근처에서 거리를 두고 기다리고 있던 일행들은 그의 극한까지 감정에 복받친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그의 분노를 표정 없는 얼굴로 덤덤히 받아내고 모르스는 말했다.

“광신자라고 한  진심이 아니었어. 기분은 풀렸나? 아직도 내 사과를 받고 싶나?”

레스는 지친 표정으로 숨을 고르고 자신의 눈가를 움켜쥐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자신의 선택 때문에 사람들의 생명이 오갔는데?”

“금방 익숙해지거든.”


모르스는 양 손바닥을 위로 펼치고 저울질하는 시늉을 했다.

“무엇이 더 낫고 무엇이 나쁜가? 명백한 악행 대신 돌아가는 악행이라고 선행이 되는가? 나 또한 많은 것을 저울질해봤고 많은 갈림길에 서봤지. 답이 없는 문제라는 걸 이미 알면서도 우리는 해결하려고 영원히 노력해야 해. 내 결론은 가책이란 공허한 거야. 무시가 해결책은 아니지만 쓸만한 방법이지. 어떻게 생각하나?”

“그건 타협이야!”


레스의 호통을 듣고 모르스는 입술을 닫은  히죽 웃었다.

“그래. 타협이지. 그리고 타협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 뭔지 알아? 문명. 인간은 야생을 거부하기 위해서 문명을 만든 게 아니라 자신들에게 편리한 세상을 만들어서 타협했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인간은 신이 만든 세상에서 살아야 하거든.”

“요점이 뭐야?”

레스는 조금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난 그냥 현실만 바라보는 사람일 뿐이야. 넌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고 규칙을 세웠는데 그러려면 주변에서 일어날 살인도 막아야 해. 하지만 너도 절박해지니까 타협하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살인에 간접적으로나마 거들었잖아. 네가 직접 방아쇠를 당긴 총이 머리를 뚫지 않았다고 피할 수 있는 맹점이 아니란 거지. 대체 규칙이 뭔데?”


레스는 시선을 땅에 두고 입가를 질끈 잡아당겼다.

“내 말은 우리 모두 같은 신세라는 거야. 네가 생각하기에는 저기 있는 군인들이나 원주민들, 그리고 마족들이 원해서 서로를 죽였을  같아? 모든 사람이 궁지에 몰리기 전에는 나름 선을 넘지 않으려고 해. 너도 결국에는 고집을 꺾고 하나씩 타협하게 될 거야. 그리고 점점 가속이 붙겠지. 그러니까 그냥 받아들여. 자기 기준으로 일일이 점수 매기지 말고.”

한동안 침묵이 둘 사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모르스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상대가 입을 열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렸다. 레스는 심호흡을 하고 힘겹게 입을 뗐다.

“당신, 정말로 내 마음을 사로잡을 생각이 정말 없군.”

“난 친해져야 할 사람에게는 솔직하게 대하거든.”

“효과는 있고?”


모르스는 몸짓까지 더해가며 뭐라 말하려 했다. 그의 눈빛과 표정이 불 꺼진 촛불처럼 얼굴에서 자취를 감추더니 곧 모습도 레스의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그 직후 레스는 총성과 함께 어디선가 난 비명을 들었다. 비명은 자신들의 일행이 있는 곳에서 났다.


“꺄악!”

루나의 목소리다. 레스는 다급하게 그쪽으로 방향을 돌렸고 모르스가 루나를 감싸듯이 넘어트리고 몸으로 덮은 것을 보았다. 그의 몸에 핏자국이 나 있었다. 반사적으로 레스는 총성이 난 방향을 외쳤다.

“저격수다!”

또 다른 총성이 터지자 그들이 근처에 꿇려놨던 시에라의 발라팡이 탄환에 맞고 뒤로 쓰러졌다. 땅에 누워있던 루나는 모르스의 겨드랑이 너머로 그가 죽어가는 걸 보고 반사적으로 안타까워하는 신음을 냈다.

검은 옷으로 온몸을 감고 언덕의 어둠 속에 숨은 저격수는 조준경 너머로 포로의 숨이 완전히 끊어진 걸 확인하고 다시 조준을 처음 향했던 대상으로 옮겼다. 어렴풋한 달빛 아래로 저쪽 일행이 그녀를 감싸면서 움직이는 게 보였다. 저격수는 반사적으로 그들의 머릿수를 세다가 이상한 점을 깨닫고 눈살을 찌푸렸다.

“하나가 어디로 갔지?”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인기척과 함께 칼날이 저격수의 목을 향해 찌르기 직전까지 다가왔다. 엎드려 있는 저격수에게 모르스가 말했다.

“누구의 지휘로 움직이나?”


저격수는 온몸에서 식은땀을 뿜어내며 굳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500m는 됐을 텐데.”

“총에서 손을 떼.”

모르스는 핏자국으로 옷이 축축해지는 느낌을 무시하며 상대의 목을 칼끝으로 살짝 눌렀다. 저격수가 총에서 손을 떼자 그는 칼을 살짝 거두고 다시 물었다.


“다시 묻지 않겠다. 누가 너의 주인이냐?”


저격수가 자기 몸 밑에 깔아둔 수류탄에서 핀을 뽑고 자기 몸 위로 던졌다. 자폭할 생각이었다. 저격수가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숫자를 세며 각오한 순간을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 순간은 오질 않았다. 눈을 뜨고 보니 자신이 던졌던 수류탄은 폭약이 들어있는 몸통과 도화선이 있는 윗부분이 칼에 잘려서 깔끔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모르스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달라진 건 더 넓어진 옷의 핏자국뿐이다.

이번에는 저격수가 양손을 허리춤으로 뻗어서 작은 권총을 쥐었다. 모르스가 재빨리 칼로 상대의 권총을  오른손을 찔러서 땅에 꽂았다.  와중에 저격수는 왼손에 든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기어코 자살에 성공해버린 상대를 향해 모르스는 혀를 차고 칼을 도로 허리춤으로 되돌렸다.






고요한 밤. 바람은 안 불었고 가을철 벌레 소리만 시끄러웠다. 아자리는 모닥불을 벗 삼아 홀로 불침번을 서다가 수첩을 펼치고 종이에 생각을 정리했다.






[단테 씨에게 물어봤다. 살면서 타의든 자의든 누군가를 죽이신 적 있나요? 그는 그렇다고 했다. 황무지에서는 맞서 싸우지 않으면 죽는 게 당연한 곳이라며. 나는 무례라는  알면서도 물었다.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게 되면 정말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는지에 대해서. 단테는  그렇지만은 않다고 가볍게 대답했다. 그러나 한동안 서로 실없는 소리를 마치고 난 다음에는 나하고 샤카자이아 언니는 부디 같은 체험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문득 헤리엇 리퍼 씨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더러운 것을 닦으려면 걸레가 필요한 법이라고 했었지. 누군가가 깨끗하게 살려면 누군가가 대신 더러워져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선을 넘지 않으려면 다른 누군가가 대신 선을 넘어서 그들을 지켜줘야 한다. 오로지 노예와 전사만이 이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전사와 노예. 이것만큼 세계의 발전을 요약할 게 뭐가 있을까? 역설적인 점은 이 둘의 차이가 승자와 패자라는 사실이다. 승리가 곧 발전이고, 패배가 야만이다. 아주 간단하고 직관적인 진실 같지만 그럼 대체 문명과 야생의 차이가 무엇이란 말인가? 더욱 간단하고 직관적인 진실은 모든 사람은 여전히 짐승이고 착각에 빠졌다는 거다. 파스낙은 확실히 틀린 말을 하진 않았다. 마족과 인간은 똑같이 쓰레기니까 평등하다.]





아자리는 근처에 놓아둔 레스의 리볼버 권총을 흘깃 바라보고 눈가를 비볐다. 권총의 손잡이는 자작나무를 재료로 그럭저럭 고쳐져 있었다.



[우리 가문의 영지 안에서 우리 가족이 후원해주는 예술가들에게 어리광을 부리면서 자랐던 시절이 불현듯이 떠오른다.  내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운 시대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벨 에포크’. 학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쳤지.  그 단어가 인간들의 땅에서 나왔다는 것조차 그때는 몰랐다. 사용하는 단어조차 뒤처져서 그 사실을 감추는 조국이 부끄럽다. 내가 먹는 빵의 밀을 재배하는 농노들이 하루에 18시간 이상을 혹사당한다는 것도 몰랐지.]



샤카자이아가 아자리의 등을 툭툭 건드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자리? 왜 그래? 얼굴이 굉장히 슬퍼 보여.”


아자리는 눈가를 소매로 비비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시작이에요. 마음이 약해져요. 우리가 하려는 일이 가능하다는 희망이 도저히 안 들어요. 어떻게 우리가 시작할 수 있었는지조차 모르겠어요.”


“이리와.”


그녀는 샤카자이아의 오른쪽 팔에 감싸 안겨 품속에서 한동안 소리 없이, 눈물 없이 흐느꼈다. 샤카자이아는 아자리의 머리와 등을 손으로 쓸어주면서 말없이 곁에 있어 주었다. 마침내 아자리가 침묵을 깼다.


“저희가 과연 손을 더럽히지 않고도 가족들을 되찾을  있을까요? 살인자가 되는 길을 피하면서 세상을 구할  있는 걸까요? 지금처럼 전례 없이 승자가 약자를 당연히 잡아먹는 이 야만적인 시대 속에서요. 전 아무것도 아닌데.”

샤카자이아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용기를 가져. 희망은 물려받는 불씨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직접 키워야 해.”


“용기. 제가 신을 믿는 사람이었다면 쉽게 용기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생각해보니 왜 사람들이 신앙을 갖는지 이해가 되네요. 언니도 ‘와칸탕카’와 정령들을 향한 믿음을 통해서 용기를 얻나요?”


샤카자이아는 고개를 저었다.

“믿는 게 아니야. 그냥 아는 거지. ‘와칸탕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했던가?”

아자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말했다.


“‘와칸탕카’는 너희식으로 표현하면 ‘거대한 수수께끼’라는 뜻이야. 그리고 ‘와칸탕카’는 그 자체로 존재할 뿐이야. 쓰러트리거나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각하던 세상은 그대로지. 그러니까 오히려 우리가 세상을 다르게 받아들인다면 세상도 바꿀 수 있어. 적어도 세상을 바꾼 와시추나 문명인들도 그런 방법으로 세상을 바꿨을 거야. 의도나 결과는 별개로.”


“언니 정말로 저보다 연하 맞아요? 사실은 백 살 정도 숨긴 거 아니에요?”


샤카자이아는 쑥스럽다는 듯이 웃다가 뒤늦게 말귀를 알아먹고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그냥 추장님 흉내 내봤어.”

아자리는 기운을 차리고 샤카자이아의 품에서 나와 수첩을 펼쳐서 전에 적어둔 장을 펼쳤다.


“밤은 태양에게 패배한다. 띄고. 밤은 태양이 자리를 떠나면 자신이 이겼다고 착각한다. 과연 레스는  글귀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대체 그는 무엇을 계기로 사람을 죽였고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고 결심했을까요?”

샤카자이아는 아자리의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집어넣고 가볍게 번쩍 들어 올려서 모포에다가 내려놓았다.


“나중에 직접 실컷 물어보면 돼. 교대하자.”

아자리는 지친 표정으로 숨을 한 번 들이쉬다가 몸을 담요로 덮고 눈을 감았다. 샤카자이아는 모닥불을 나뭇가지로 쑤셔서 재가 된 장작을 바깥으로 꺼내고 새로운 불쏘시개를 안에 넣었다. 그리고 몸에  활을 손에 쥐고 망을 보았다. 망을 보는 내내 그녀는 똑같은 구절을 중얼거리며 잠을 쫓았다.

“산만이 영원하리, 바위만이 영원하리.”








[Vip 전용]이라고 적힌 방문이 끼익 열리더니 안에서 누군가가 바깥으로 나와 복도를 걸었다. 턱선이 뾰족한 얼굴에 테가 동그랗고 작은 검은색 단안경이 뾰족한  위와 눈두덩에 끼워져서 한쪽 눈을 가렸다. 단안경에 가려지지 않은 반대쪽 눈은 백내장으로 흐려져 있었다. 피부는 흙빛에 아랫입술에서 송곳니가 살짝 튀어나와 윗입술을 눌렀다. 평범한 몸집에는 훈장으로 가득한 정복을 걸쳤는데, 정복에 달린 훈장이 얼마나 많은지  합쳐서 녹이면 짧은 칼도 만들 수 있었다. 머리엔 뾰족한 캡이 달린 군모를 쓰고 있었다.

누군가는 벽지와 양탄자로 아늑하게 꾸며진 복도를 걸어서 안내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서 있는 접수처로 향했다. 직원은 세련된 정장으로 차려입은 흑인이었다.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빗어서 포마드를 발라 뒤로 넘겼다. 직원이 누군가를 향해 친근한 시선을 보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누군가는 자신의 품속에서 청동색 회중시계를 꺼내서 뚜껑을 열고는 직원에게 물었다.

“지금이  시인지요?”

아주 점잖고 맑은 중년 남자의 목소리였다. 직원의 뒤에 걸린 벽시계를 바라보면서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0시하고도 27분입니다. 장군님. 혹시 싶어서 미리 말씀드리자면 시계의 상태는 완벽합니다.”


장군의 검은색 단안경에 가려진 눈은 여전히 자신의 회중시계를 바라보고 있다.

“제 시계도 정확합니다. 바로 그게 문제죠. 20분으로부터 7분이 지났는데도  방에 아무 소식이 없었거든요.”

직원이 정중한 목소리로 말하며 몸을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행정실에 연락하는 걸 권유해도 되겠습니까?”

“예. 그렇게 해주십시오.”

직원은 바로 자신의 자리에 놓여있는 전화기의 다이얼을 돌리고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곧 직원은 수화기 너머의 상대와 작은 목소리로 몇 마디를 주고받은 다음 수화기를 내렸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장군님. 이 이상의 접대에는 추가 요금이 불가피하실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 예상해야 합니까?”


“장군님만을 위해서 특별히 구체적 상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장군님께서 입양하신 평범한 사람 200명을 포함해서 진행 시켰던 출장 업무의 결과는 살아있는 사람의 힘으로는 알 수 없게 됐다고 합니다. 이상의 정보는 규율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장군은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단안경이 끼워진 쪽의 눈썹을 실룩 움직이고 말했다.


“페어리의 속삭임까지 부탁드립니다.”


직원은 자신의 자리 밑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바로 상대에게서 서명을 받았다. 서명을 다 받은 직원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나처럼 상회를 이용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 쪽에서 드리는 사소한 친절의 뜻으로 방에 다과를 보내드리고자 하는데 원하는 사항이 있으십니까?”


장군은 턱을 쓰다듬으며 잠깐 생각하고 자세를 깍듯하게 바로 잡으며 넌지시 물었다.


“사쿠라비 음식도 있습니까?”








모르스는 윗도리를 벗고 총에 맞았던 곳을 스스로 살폈다. 루나가 가까이 와서 그를 도와주려고 하자 그가 바로 손을 들고는 손바닥을 보여서 오지 말라는 손짓을 했다.

“필요 없소. 총알은 관통했고 구멍 난 곳만 꿰매면 끝이니까.”

“몸 상태가 안 좋아 보이시는데.”

“내 몸은 내 마음대로 고칠 거요.”


그는 입으로 소염제가 들어있는 종이봉투를 뜯고 상처가 난 곳에 뿌렸다. 모르스가 이를 갈면서 말없이 통증을 견뎌내는 동안 레스와 타티아나는 그의 근처에서 멀뚱거렸다. 자기 손으로 상처 난 곳을 꿰매는 모르스를 향해 레스가 물었다.

“강화 인간들은 물약을 마시면 그 정도 상처는 금방 낫는 줄 알았는데.

모르스가 바늘을 자기 살에 찔러넣으면서 대꾸했다.

“시크릿 서비스는 그런  안 마셔. 그리고 난 강화 인간이 아니다.”


레스는 놀랐다. 타티아나는 큰 반응 없이 눈만 살짝 감았다.

“그럼 당신 정체가 뭔데?”

바느질로 상처를 꿰매면서 그가 대꾸했다.


“어떤 힘이든 극한으로 연마하면 체질도 자연스럽게 변한다. 일정한 경지에 오른 마법사들이 장수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봤겠지? 이쪽 업계도 마찬가지야. 참고로 난 올해로 89살이다.”

레스와 타티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모르스는 상처의 실밥을 정리하고 덧붙였다.

“그리고 캘러헬은 백  정도 살았어. 서로 나이를 밝힌 뒤로 한동안 녀석이 날 아랫사람 취급했었지. 생각해보니 지금도 다를 게 없군, 쌍놈의 새끼.”

레스가 말을 잃고 한심해하는 듯한 오묘한 표정만 짓고 있기에 타티아나가 눈치를 보고 대신 화제를 이었다.

“베르나르는요?”

“알아서 좋을 거 없어.   자식이 중세시대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거다.”


“모릅니까?”


“옆 동네 아저씨한테 내가 뭐하러 관심을 가질까. 정정. 그 갑옷에 들어있는 게 사람이 맞긴 한 건지도 잘 모르겠어. 솔직히 그쪽도 그렇게 생각하지?”

“어쩌면….”

타티아나는 자기도 모르게 그리 중얼거리다가 뱉은 말을 주워 담듯 자기 입을 가렸다. 모르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피 묻은 셔츠를 다시 걸치면서 투덜거렸다.


“젠장 아직도 축축하네. 왜 거기 멀뚱히 있어?  말 남았나?”

아직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두 사람을 향해 그가 말했다. 타티아나가 어색하게 말했다.

“전  녀석 때문에 여기에 있는 거라서.”

레스는 눈을 한번 깜빡이고 모르스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판단이 옳았군.”


“뭐가?”


“상태를 지켜보다가 필요한 순간에만 나타나기로 한 판단 말이야. 지금처럼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 밖의 일은 얼마든지 일어나니까. 만약 당신들이 서둘렀다가 다쳤다면 더 큰 손실로 이어졌을 수도 있었겠지.”


모르스는 피 묻은 셔츠 위로 재킷과 군장을 걸쳤다.


“그만. 전부 결과론이야. 세상에 정답 같은 건 없어. 원래 모든 것은 정당화할 수 있어.  행동도 정당화할  있고. 저놈들의 행동도 그렇고. 자네의 행동도 그렇지. 다 그런 거야.”


레스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부 정당화할 수 있다고?”

“모든 것이 변한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야. 난 이제 다른 일을 하러 떠난다. 어디로 가냐고는 묻지 마. 확실히 해둘 점은 앞으로도 위험에 처할 때마다 우리가 척척 나타나 주리라고 기대하지는 마. 난 너희들의 주님이 아니거든.”


“피카니를 대신해서, 동시에 나의 의지로. 루나 씨를 구해줘서 고마워.”

레스는 상대가 떠나기 전에 용건을 마치려고 서둘러서 말했다. 모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그의 말을 듣고 한쪽 뺨을 긁적였다. 잠깐 뜸을 들이고 팔짱을 끼며 그는 레스와 마주 섰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어디까지 얘기했다가 말이 끊어졌는지 기억하나?”


“당신은 친하게 지낼 사람한테만 솔직해진다고 했었지.”


“그랬지.  별로 특별하게 의미를 담고 한 말은 아니었어. 어차피  누구하고도 친해지지 못하거든. 그보다 말이야. 그때 자네는 하고 싶었던 말이 혀끝에서 맴도는데 눈치 보여서 꾹꾹 눌러 담던 게 훤히 보였어. 미련 안 남게 지금 말해놔.”

레스는 한숨만 깊이 내쉬고 눈을 감은 채 읊조렸다.


“보안관에게 경의를(All hail to law bringer).”

모르스는 코웃음을 한번치고 그들을 지나 터덜터덜 팔을 흔들며 어두운 저편으로 사라졌다. 주변 일대에는 병사들이 마차에 실린 화물을 내리고 야영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단 하나의 마차만이 이곳을 떠날 예정이었다. 레스와 타티아나는 병사와 포로들로 득실거리는 텐트를 지나다니며 자신들의 마차로 향했다. 타티아나가 침울해 있는 레스의 옆얼굴을 계속 흘겨보다가 마차에 도착하기 직전에 그녀가 멈춰섰다.

“너희 둘이 다투는 소리가 워낙 커서 그때 다 들렸어. 난 귀가 좋아서 어쩌다 보니 대부분 엿들었지. 뭐 좀 묻자.”

“무슨 일이야?”


“모르스가 너의 맹세를 조롱했잖아. 왜 반박  했어?”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모르스는 그런 짓 안 했어. 사실을 말했지.”


“그렇다 쳐도 저놈들이 안심하고 나타날  있었던  네 덕이었어. 저쪽도 너에게 경의를 표할 의무가 있었잖아. 적어도 베르나르는 했어.”

레스는 입가에 하얀 김을 피어 올리고 떨면서 숨을 쉬었다.


“그냥 포로답게 가만히 있을래.”

마차로 들어가는 그의 모습을 타티아나는 찡그린 눈으로 흘겨보다가 자신의 칼을 노려보았다.






[Vip 전용]이라고 적혀있는 방 내부로 직원이 간식과 음료가 든 쟁반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장군을 비롯한 다양한 종족의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정복을 차려입은 장군과는 달리 전투용 군복을 입은 사람도 있었고, 망토를 걸친 사람도 있었고, 가면을 쓴 사람도, 그리고 터번을 깊게 눌러쓴 사람도 있었다. 직원은 호화롭게 꾸며진 방의 거대한 원탁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장군의 앞에 종이 다발을 놓고 자리를 떠났다. 장군은 종이 다발 옆에 같이 놓인 병을 들고 살짝 흔들어서 내용물이 찰랑거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대추야자 술이라. 이런 것도 있었나. 동무들은 착석 하시오.”


사람들이 탁자에 제각기 다른 자세와 태도로 자리를 잡았다. 일동이 자리에 앉을 동안 장군은 종이 다발을 한 장씩 속독하면서 넘겼다. 의자 끄는 소리가 멎었을 때 장군도 두툼한 종이들을 모조리 읽었다.

“이미 아는 사실이겠지만 지난주에 보가티에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이자 우리 위대한 수령의 마하라자(사천왕)를 담당했던 리차트라 동지가 서방의 제국주의자들에게 굴복했소. 놀랍게도 생포됐지. 리차트라 동무가 붙잡힌 이유 중 하나는 그 불여우가, 정정. 고양이의 ‘의절’도 있었지만 이게 결정적인 원인이 아니라는 게 놀라운 점이지. 내부 정보와 외부 정보를 모두 종합한 결과. 이것들이 결정적인 원인이오.”

장군은 원탁 가운데로 사진들을 던졌다. 사진을 보지도 않고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어차피 조국의 안위에는 관심 없던 놈인데 그딴 놈이 사라진들 무슨 상관인지.”


장군은 자리의 격식에 걸맞지 않은 상대의 태도에 개의치 않고 계속 자신의 말투를 유지했다.

“리차트라 동무는 뛰어난 전사이기도 했지, 하지만 우리에게 당면한 진짜 문제는 전사의 손실이 아니라 그가 비축해둔 비자금의 손실이오. 조국의 혈세가 서방으로 고스란히 넘어갈 위기에 처했으니 내 좌측에 앉은 동무들이 돈을 되찾을 것이오. 정확히 48분 전에 심각한 지출이 있었으니 시급한 일로 분류하겠소. 지출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지.”


사람들은 사진을 돌려가며 살펴보았다. 사진들은 다 합쳐서 넉 장이었는데 레스, 아자리, 샤카자이아, 단테의 얼굴이 찍혀있었다. 다만 하늘에서 누군가가 자리를 잡고 사진기로 찍은  가까우면서도 멀게 느껴지는 구도였다. 절대 땅에서 찍으면 나올 수 없는 각도였다. 사진을  가면을  여자가 아자리를 보고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 년이 실존하기는 했었어?  왕당파가 꾸며낸 인물인 줄 알았는데.”

군복을 입은 인간 남성이 말을 받았다. 태도가 진지하고 목소리도 곧았다.


“이제 우리의 최우선 목표입니까?”


“그래. 그렇지. 온건한 접촉에 성공한다면 회유하는 건 썩 어렵지도 않을 거라고 다수가 예측하더군. 조국에 있는 그녀의 가족들이 그 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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