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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화 〉[5권] 159회 - 옛날 옛적 모닥불에서 (159/188)



〈 159화 〉[5권] 159회 - 옛날 옛적 모닥불에서

잠시 후 일행은 붉게 취한 얼굴로 나란히 분업해서 산더미처럼 쌓인 주방일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쌓인 설거지들을 세척, 헹굼, 식기 정돈 순으로 셋이서 분담해서 처리하는 중이다. 샤카자이아는 에일을 너무 마신 탓에 수세미 질을 하면서 내내 계속 딸꾹거렸다. 일꾼이 생긴 덕에 한시름 던 험상궂은 주방 직원들은 부대 자루에 앉아서 살날 다 간 늙은이 같은 고즈넉하고 느긋한 표정으로 쉬었다. 애꾸 고블린이 아자리를 보면서 물었다.


“너 험한  하면서 산 거 같지는 않은데 되게 부지런하다?”

젖은 손을 흔들어 물기를 털면서 그녀가 대꾸했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그냥 분위기로. 손도 곱고. 꽤 좋은 집에서 자랐지?”


“그랬죠.”


혹시 자신들을 심문하는 건가 싶어서 단테는 바짝 긴장하고 귀를 쫑긋 세웠다. 아자리는 침착하게 평상적인 어투로 화제를 이었다.

“블러디아에서 왔어요. 전쟁이 터지고 나라가 시끄러워서 이곳으로 도망 왔는데 인간 놈들이 우리 가족을 안 받아줬어요. 그리고 여러  있었죠.”

“그 여러  때문에 가족들하고 떨어진 거니?”

“그랬죠. 그래도 여기 제 친구들은 가족 못지않게 좋은 사람들이에요.”

애꾸 고블린이 동정하는 눈짓을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여기 생활은 부족한 거 없이 행복하지만, 집에 있는 식구들은 항상 생각나. 전쟁이 끝나면 빨리 만나고 싶어. 마왕도 잡혔는데 왜 윗대가리들은   건지겠다고 종전이나 휴전 협정에 서명 안 하고 튕겨대는 건지. 엿 같아.”


일행들이 노동을 마쳐갈 즈음 아자리가 주방장 오크에게 물었다.


“여러분들은 무슨 사연으로 여기 오셨나요?”


“흠.”


오크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목울대 울리는 소리만 냈다. 아자리가 상대의 심기를 건드렸나 싶어서 잠깐 겁먹었는데 애꾸 고블린이 급하게 말했다.

“우리 형님은 공용어로 말할 줄 몰라. 바다 건너 출신이거든. 알아들을 수는 있지만.”


“그렇군요.”


“그런 시시한 이야기보다도, 급한 일 없으면  따라와 봐. 내가 좋은 거 보여줄게.”


일행 셋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아자리가 당돌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엄마가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랬는데요.”


애꾸 고블린이 엄지로 자기 뒤를 가리키면서 한쪽 눈가를 실룩거렸다.


“바로 저기 있거든?  못 믿겠으면 다 같이 따라와도 돼.”


“보여주시려는 게 뭔데요?”

“미리 말하면 하나도 재미없잖아. 설명이 필요한 농담이 재밌는 거 봤어? 싫으면 말던가.”

“흠.”

오크가 후렴을 넣듯 목울대를 울렸다. 일행은 행주로 손을 닦으면서 눈짓과 고갯짓으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괜찮을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도 아자리는 따라가기 전에 자신의 지팡이를 챙겼고 단테는 허리에 찬 권총에 신경을 기울였다. 긴장한 티를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일행은 상대의 안내를 따라 식당 뒤로 나왔는데 안내가 바로 거기서 끊어졌다.


“이것 봐라! 예쁘지?”

고블린이 거창한 말투와 몸짓으로 자랑한 것은 레몬 나무였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색도 진하고 큼직한 레몬이 주렁주렁 맺혀 있었는데 그런 나무가 세 그루 있었다. 샤카자이아가 얼굴을 가까이 대고 레몬의 향을 맡고는 감탄했다. 고블린이  모습을 보며 사악하게 웃었다.

“고향에서 먹고 주머니에 버려놨던 씨앗으로 시작해서 내가 여기까지 길러냈지. 제대로 된 수확을 기다리는 건 올해가 처음이야. 이놈들의 껍질과 속을 모조리 파내고 쥐어짜서 커스타드와 마멀레이드로 만들어주겠어. 그거 알아? 레몬 하나에는 무려 레몬 하나만큼의 비타민이 있다는 거! 이번 겨울에는 내가 만든 마멀레이드로 주민들이 비타민을 먹을 수 있겠지, 신부님에게도 나눠줄 거고. 후후후후후. 레몬 맥주! 큭큭큭큭큭.”


“후후후후.”

어느 틈에 따라왔는지 주방장 오크까지 근처에 나타나서 사악한 후렴을 넣었다. 할 말을 잃은 일행을 대신해서 단테가 그들에게 물었다.


“레몬이 씨앗부터 시작해서 열매를 맺으려면 최소 3년 이상은 걸리죠. 1899년, 4년 전에 전쟁이 났으니. 설마 여러분들은 전쟁이 나자마자 여기에 도착해서 줄곧 생활하신 겁니까?”

말을 마치면서 단테의 얼굴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두 마왕군 병사는 어깨를 으쓱거리고 실실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난 전쟁이 끝나면 고향의 가족들을 여기로 데려올 거야. 여기서 살면 세금 거두러 올 사람도 없고. 돈 쓸 일도 없고. 예비군 훈련도 없을 거니까. 이곳은 정말이지 기회의 땅이야. 우리 부대의 형제   놈은 여기 원주민하고 눈맞아서 애까지 생겼다니까?”


‘연극이나 소설에서 그런 대사 치는 사람은 대부분 나중에 죽던데.’ 아자리는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려던 자기 생각을 억누르고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정말이지. 여기는 인상적인 곳이네요. 그러고 보니 이곳에 이름은 있나요? 지도에는 없는 마을이라는 거 알지만 여러분끼리 부르는 명칭은 있을 거 같아서.”


“당연히 있고말고.”


애꾸 고블린이 뭐 그런 하찮은 걸 묻느냐는  가소로워하는 표정으로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시튼 빌리지?”


파란 하늘 아래, 벌판 위. 멈춘 사두마차 옆에서 중년 남성이 불붙인 파이프 담뱃대를 입에서 떼고 자기 앞에 있는 여인에게 의문형으로 말했다. 그는 백인이었는데 왼쪽 뺨과 눈가에는 화상 자국이 진했고 윗입술에 기병대식으로 다듬은 콧수염은 오랜 야외 생활 탓에 관리가 안 되어 다른 수염들과 점점 섞여가고 있었다. 남성이 모서리가 닳은 기병대 모자를 벗고 머리를 긁자 비대칭으로 가르마를 탄 검은색 머리칼 사이로 자라난 새치가 눈에 띄었다. 얼굴에는 바람과 햇빛을 맞은 흔적이 고스란히 잔주름으로 남았고 눈동자는 화석처럼 그윽한 회색이었다. 그가 재차 물었다.


“그 시튼?”

강의하는 교수처럼 부드럽고 전달력이 분명한 목소리였다. 중년 남성의 맞은편에 찻잔을 쥐고 자리를 잡은 여인이 대답했다.


“예. 그 시튼이요.”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면서도 발음이 선명했다. 젊다 못해 어려 보일 정도로 체형은 날카롭게 깎은 연필의 끝부분으로 그린 밑그림처럼 가늘었고 검은색 머리카락은 검은색 종이처럼 윤기 없이 부스스했다. 여인은 제법 자란 머리카락을 끈으로 묶어서 뒤통수에 짧은 꽁지를 틀어 정돈했다. 정수리 양옆에 고양이 귀가 삐죽 솟아 있었는데 끝부분과 안쪽은 하얗다. 바늘처럼 길고 올이 곧은 속눈썹 속의 눈동자는 갓 용광로에서 나온 금화처럼 선명한 노란색이었다. 연필로 거칠게 그은 듯한 날렵한 눈매에 낀 눈곱을 주먹으로 비벼서 떼고 그녀는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듯 고개를 숙였다.


“물론 시튼 본인이 그렇게 이름을 지은 건 아닙니다.”

“그 이야기는 넘어가고. 요즘 사쿠라비는 어떤가?”

“그는 건강합니다. 대위님.”

대위는 한숨을  쉬고 상대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타티아나 소위. 무슨 얘기 하는 건지 자네도 알잖나.”

타티아나는 숨을  번 크게 들이쉬고 눈을 굴렸다.

“그 전투 이후로 이틀이 지났는데 하루에  마디 이상 말하는 걸 못 들었습니다. 화장실 가야 한다는 용건을 말할 때가 가장 많이 떠들 때죠. 제가 말을 걸면 들은 척도 안 합니다.”


대위는 파이프 담뱃대를 입에 물고 연기를 마셨다가 불었다.


“자기 친구들과 다시 만날 때까지 내내 꽁해 있겠군. 저런 모습을 아자리아에게 보여주면 곤란한데.”

“전 지금 당장 대위님이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뭐?”


하딘은 담뱃대를 깨문 채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타티아나가 진지하고 침착한 말투로 차근차근 말했다.

“대위님은 삶 대부분을 군인으로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전 군인들이나 유목민들처럼 지킬 것이 있는 전사들의 길은 모릅니다. 자객의 길만 걸었으니까요. 그리고 레스 알 하자르 같은 남자는 저보단 대위님 같은 분에게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연기를 뻐끔뻐끔 뿜어내면서 잠자코 그 말을 듣다가 대위는 담뱃대를 입에서 뗐다.

“그러니까. 우리가  친구와 유대 관계를 맺으려면. 내가 직접 나서는 편이 나을 거라고?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나?”


“하딘 대위님은 부하들이 정신적으로 지쳤거나 혼란에 빠졌을 때 솔선해서 위로하거나 상황을 수습해본 경험도 많았을 테니까요.”

“포로의 마음을 보듬어준 적은 없어. 그리고  포로는 날 싫어하지.”


대화는 끝났다는 의미로 하딘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담뱃대를 뒤집어서 불씨를 발로 비벼껐다. 두 사람은 마차 반대편으로 향했다. 나머지 일행들이 그곳에 자리를 잡고 쉬고 있었다. 하딘이 마차의 말들을 솔질해주고 있는 금발 머리 청년에게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피카니 경.”

청년이 솔질을 멈추고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상대를 마주 보았다. 여자처럼 올이 가늘고 윤기가 흐르는 금빛 머리칼은 먼지와 머릿기름으로 범벅이 됐는데도 봐줄 만했고 눈매와 눈빛에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 때문에 독사를 연상시키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체격은 늘씬했고 치수에 맞춰서 재단된 군용 외투 위로는 자동 권총과 탄창이 꽂힌 군장이 매여 있었다. 피카니가 솔을 잡은 손을 허리에 대면서 하딘에게 물었다.

“웬일로 저를 애물단지가 아니라 이름으로 부르십니까?”


“우리 중에서 사쿠라비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자네야. 그의 심리 상태에 따라서 우리 여정의 운명이 결정돼. 뭐든 좋으니까 지금 상황을 타개할 방법 없나?”

“글쎄요. 레스는 절 싫어합니다. 제가 할 게 있을까요? 그나마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녀석이랑 친해진 사람은 루나 마법사님뿐인데 그분도 절 안 좋아합니다.”


“자각은 있었군.”

하딘의 말을 듣고 피카니가 한쪽 어깨를 으쓱이며 냉소적인 눈웃음을 지었다.

“비열하거나 치사한 놈이란 욕은 자주 들었어도 멍청하다는 욕은 안 듣습니다.”

“그건 네 생각이지.”

하딘 근처에 있던 타티아나가 불쑥 끼어들자 피카니의 냉소적인 눈웃음이 노골적인 불쾌함으로 일그러졌다.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네가 모든 것의 원흉이나 마찬가지야. 말 돌리지 말고 성심껏 생각해.”


피카니는 하딘과 타티아나의 원망 담긴 시선을 받으면서 불만과 착잡함이 섞인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헝클어트렸다. 잠시 후에 그는 심호흡으로 숨을 고르면서 말한테 솔질을 해주던 솔로 자신의 머리를 빗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죠. 동정심이 심하게 쌔요.”


하딘이 팔짱을 끼면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자세하게 말해봐.”

“제가 녀석하고 처음 만났을 당시 저희는 어쩔  없이 같이 다니던 사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어쩌다가 품질 좋은 버번을 한  얻었죠. 그놈은 술을 싫어해서 맛도 안 봤지만  취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룻밤 만에 한 병을 해치워버렸고 술기운 때문에 평소라면  할 말부터 할 말까지 다 꺼냈죠. 그때의 기억은 애매하지만  개는 확실하게 생각납니다. 하나는 술맛이 참 좋았다는 거고. 그리고 술맛이 정말 좋았던 이유는 비싼 술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제 이야기들을 누군가가 진지하게 들어줬기 때문이라는 거요.”


피카니는 잠깐 목을 가다듬고 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다음 날 아침 레스는 완전히 변했습니다. 어떻게 변했냐면, 말이 많아졌죠. 저는 다음 마을에 도착하면 보안관에게 넘겨질 예정이었는데 레스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절 봐주는 대신 인간들의 문명 세계까지 안내할 길잡이가 되라고 했죠. 아무리 이유를 캐물어도 그저 마음이 바뀌었다는 게 대답의 전부였고요. 시간이 흘렀고. 도중에 갈라졌다가, 지금 여기에 있죠. 그리고 지금의 레스는 처음 만났던 시절의 모습을 연상시키는군요. 말도 없고 무섭던 그 모습이.”

두 사람은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긴 생각에 빠졌다. 타티아나가 검지를 들고 넌지시 물었다.

“술김에 넋두리  했더니 자신을 강도질하려던 놈에게 마음을 열어줬다고?”

“황당하지. 나도 알아. 어쨌든….”

피카니는 자신의 머리를 탁탁 쳐서 빗질한 머릿결에서 먼지를 털어냈다.

“난 이제 그놈한테 털어놓을 과거가 없으니, 누군가가 해야 한다면 당신들 차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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