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화 〉[5권] 160회 - 늑대와 티타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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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카자이아를 앞에 세우고 아자리와 봇짐을 든 단테는 그녀의 뒤를 따라 시튼의 집으로 향했다. 지나가는 길에 일행을 본 마을 주민들은 관심과 무관심이 절반씩 섞인 반응을 보였다. 언덕을 오르면서 시야가 넓어지니 마을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밭, 목장, 식당, 그리고 커다란 건물이 3개 보였다. 샤카자이아가 말했다.
“저 건물은 우리 마을의 하데노사우(공동 주택)하고 비슷하네.”
아자리는 샤카자이아가 가리킨 건물의 오른쪽에 있는 건물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건 수도원처럼 생겼고요. 구운 벽돌과 기와로 짓고 석회로 잘 마감했네요.”
단테가 두 건물의 뒤에 있는 마지막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군대는 안 가봤어도 저건 군바리들 생활관이 분명해요.”
아자리가 지팡이를 땅에 살짝 찍으며 마을을 다시 둘러보았다.
“재침례교, 보호구역에서 나온 원주민, 그리고 침략하러 왔다가 귀농 생활을 즐기고 있는 땅개들이라. 제가 쓸 수 있는 모든 마법과 지혜, 그리고 의심까지 모두 끌어모아 온 사방을 살폈는데 지금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은 도저히 알 수가 없네요. 이제 시튼 씨만 남았어요.”
샤카자이아가 아자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시튼 씨는 좋은 사람으로 보였어. 주민들도 선생님이라 부르고.”
아자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알아요. 제가 보기에도 그랬어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저희는 쫓기는 처지인걸요. 긴장을 풀고 쉬기에는 아직 일러요. 그 에일은 심하게 맛있었지만.”
단테와 샤카자이아는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기준으로 맥주 중에는 인디언 페일 에일이라는 이름으로 분류되는 것도 있는데, 이건 아메리카 원주민하고는 관계없는 명칭이다. 영국에서 인도로 맥주를 수출할 때 긴 운송 과정 도중 맛이 변하는 걸 막기 위해 도수를 높게 잡고 홉을 많이 넣었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통칭 IPA라고 부른다.
어쨌든 마을 경치를 구경하며 떠들던 그들을 향해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거기서 뭐 해?”
남성의 중저음 목소리였다. 일행이 뒤를 돌아서 보니 체격이 건장한 원주민 청년이 서 있었다. 갈색 피부에 깊게 파인 눈매와 조금 큰 코, 그리고 붓처럼 힘껏 위로 솟은 눈썹이 인상적이었다. 소매를 걷은 와이셔츠 위에 청조끼를 입었고 가죽바지와 부츠는 튼튼해 보였다. 머리카락은 앞부분과 양옆을 쳐내고 윗부분만 길게 길러서 뒤로 땋아 목까지 늘어트렸다. 눈가와 이마에는 푸른색과 붉은색 염료로 기하학적 무늬로 문신이 박혔고 턱부터 구레나룻에는 수염이 나 있었다.
예상 못 한 인물의 등장에 일행은 잠깐 당황했다. 아자리가 나서서 상대의 물음에 답했다.
“시튼 씨의 댁에 방문하려던 참이었어요. 저희는 오늘 마을에 처음 왔고요.”
청년은 경계하는 태도를 거두고 고개를 절묘하게 기울이며 이쪽을 보는 방향을 바꿨다.
“처음 온 사람이라는 건 보면 알아. 선생님에게서 손님이 왔다는 말은 들었다.”
일행은 청년을 따라서 언덕을 올랐다. 시튼의 오두막 앞에 도착하자 청년이 일행을 바라보며 공손한 말투로 말했다.
“나는 네르바의 사탄타. 하얀 곰이라는 의미다.”
샤카자이아도 자세를 갖추고 말했다.
“나는 슈슈니의 카나라티타케. 이름의 뜻은….”
사탄타가 그녀의 말을 도중에 끊으면서 이쪽을 삿대질했다.
“아주 오래전에 너희 숲에 방문한 적 있었지. 인상이 익은데. 혹시 우리 만난 적 있나?”
그녀는 굳은 얼굴로 대답을 잠깐 머뭇거렸다.
“난 당신 처음 봐. 내 기억에는 그쪽 부족이 방문한 적도 없었고.”
“뭐. 나도 엘프는 자주 볼 일이 없었으니 그냥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 익숙하지 않은 종족은 인상이 다 비슷하게 느껴지니까. 참고로 시튼 선생님께서는 중요한 사람들하고 대화 중이셔. 좀 기다려야 될 거야.”
단테가 짊어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으면서 안도의 숨을 쉬고 물었다.
“누구하고요?”
“우리 부족 추장님 투슈가쿡. 가브리엘 신부님. 그리고 코랏 원사. 이 시튼 빌리지를 이루는 각 집단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시튼 선생님은 이 마을의 중개자이자 보안관이고.”
이번에는 아자리가 물었다.
“사탄타 씨는 무슨 일을 하시죠?”
그가 아자리의 질문에 조금 황당해하는 반응을 보였다.
“나? 그냥 여기서 살고 있지. 그게 다야. 왜?”
아자리가 근처에 놓여 있는 물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무기들은 그쪽 물건 아닌가요?”
하나는 코끼리 같은 대형 짐승을 잡을 때나 쓰는 대구경 소총이고, 다른 하나는 던지기에 좋아 보이는 창이고, 마지막 하나는 샤카자이아가 지참하고 다니는 것보다 3배는 커 보이는 토마호크였다. 그리고 어째선지 토마호크의 손잡이는 안이 비어있었다. 저래서는 휘두를 때 무게중심이 안 맞아서 다루기 어려워질 뿐이다. 사탄타는 일상적인 말투로 대꾸했다.
“여긴 무법지대잖아. 왜?”
아자리는 더 캐물으려고 하다가 단테가 그만하라고 눈치를 주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일행은 기다리는 손님들을 위해 설치된 통나무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쉬었고 사탄타는 근처 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며 하품을 뱉었다. 일행들이 입을 다무니까 오히려 자기가 더 심심해졌는지 사탄타가 이쪽을 향해 말을 걸었다.
“생각해봤는데, 우리 마을에 이렇게까지 오래 지낸 손님은 그쪽이 처음이야.”
단테는 일부러 생각하는 척 시늉으로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땠는데요?”
“보통 여기 온 사람들은 최소한의 볼일만 보고 바로 나가거든. 내 입으로도 말하기 뭣 한데, 여기가 굉장히 수상쩍어 보이니까 그렇겠지.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깡촌에서 잔혹한 사건이 일어나는 건 클리셰잖아.”
아자리는 그 말에 자기도 모르게 단말마를 냈다.
“예?”
샤카자이아도 놀랬다가 일행에게 물었다.
“전에 비슷한 말을 들어… 우읍?!”
단테가 그녀의 입을 가리면서 급하게 말했다.
“저희가 시튼 씨의 팬이거든요. 기왕 만난 김에 같이 차라도 한잔하고 싶어서요.”
“교양있는 여행자들이시군.”
사탄타가 팔짱을 풀면서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그들이 수다를 마칠 때 오두막에서 사람들이 와르르 나왔다. 얼굴에 검버섯이 가득하고 백발이 수북한 노인이 원주민 청년의 부축을 받으면서 나왔고 그 뒤를 따라 군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여자 고블린이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마지막으로 아자리 일행하고는 이미 면식이 있는 가브리엘 신부가 뒤뚱거리며 나왔다.
여자 고블린은 남자 고블린들에 비해 귀가 훨씬 넓적했고 얼굴과 코가 무척 조그마했다. 반면 눈은 큼직하다. 체격은 단테보다 한 뼘 작고 6등신이었다. 그러다 보니 인간들의 미적 기준으로는 어린아이 같은 인상이 들었다. 여자 고블린은 검은색 단발을 손으로 한번 쓸고 군모를 머리에 덮고 사탄타와 서로 손짓으로 인사를 주고받은 다음 언덕을 내려갔다. 아자리 일행에게는 관심이 전혀 없는지 눈길 한번 없었다.
아자리는 노인을 한번 보고 아직도 가만히 있는 사탄타에게 물었다.
“추장님을 안 따라가시나요?”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 자리는 여기야.”
가브리엘 신부가 총총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오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탄타 형제님은 시튼 선생님의 조수이자 경호원이랍니다. 식사는 마음에 들었나요?”
샤카자이아가 말했다.
“에일이 맛있었어요.”
신부는 껄껄 웃었다.
“그거 정말 다행이네요. 언젠가는 포도나무도 심어서 포도주도 담가보고 싶답니다. 묵을 곳이 정해지지 않았다면 저희 쪽으로 오세요. 코골이가 심한 형제자매가 많은 게 흠인 거 빼면 지내기에는 따듯하답니다.”
아자리는 미소를 지어주며 이야기를 듣다가 소극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 신부님. 거동이 불편해 보이시는데 몸이 안 좋으신가요? 다른 뜻은 아니고 몸 문제라면 제가 도울 수 있을지 신경 쓰여서요.”
신부는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슬프게 웃었다.
“몸 문제는 맞는데. 자매님이 도와줄 수는 없을 거예요.”
그가 한쪽 신발을 벗어서 발을 보이자 일행은 놀라서 숨을 삼켰다. 그의 발은 발가락이 모조리 사라진 상태였다. 신부는 도로 신발을 신고 말했다.
“전 노예였답니다. 그렇게 태어났죠. 예전에 도망치려다가 이렇게 됐어요. 그래도 지금은 매일 주님의 은혜를 느끼고, 또 그 은혜를 남에게 베풀면서 살고 있답니다. 행운이죠.”
사탄타가 신부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정중하게 물었다.
“신부님의 댁까지 모셔다드릴까요?”
“아뇨. 아니요. 제 발로 걷겠습니다.”
가브리엘 신부는 그의 도움을 정중히 거절하며 마지막까지 일행들에게 공손히 고갯짓으로 작별 인사를 고하고 언덕을 내려갔다. 사탄타가 신부의 뒷모습을 한숨을 푹 쉬면서 쳐다보다가 아자리 일행을 바라보며 자기 뒤를 엄지로 가리켰다.
“선생님의 집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무기들은 나한테 맡겼으면 좋겠어. 시튼 선생님은 우리 마을에 매우 중요하신 분이거든. 다른 개척촌에서도 술집에 들어가려면 총기류를 미리 맡겨놔야 들어갈 수 있는 거 알지? 이해 부탁해.”
일행은 잠깐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아자리가 자신의 지팡이를 들어 보이면서 물었다.
“제 지팡이도요?”
“지팡이는 괜찮아. 총이랑 날붙이만 맡겨놔. 마지막으로 하나. 상식적으로 처신해. 내가 계속 지켜볼 테니까.”
사탄타는 무게 잡는 목소리로 그들에게 경고했다. 단테가 허리춤에서 권총집이 달린 허리띠를 풀면서 넉살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는 야만인이 아니에요. 여부가 있겠나요.”
상대의 요구대로 일행들이 불필요한 물건들을 구석에 두고 그의 앞을 지나가려는데 사탄타가 갑자기 아자리의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만.”
사탄타가 자신의 옷깃에 들어있던 걸 꺼냈다. 그건 진동하고 있는 꿈 덫 목걸이였다. 진동하는 꿈 덫의 거미줄 장식에 걸린 빛들이 이슬처럼 방울져서 아래로 흘러내려 깜박이다가 허공에서 사라졌다. 아자리는 상대의 제지에 놀랐고 꿈 덫의 형태를 알아보고 두 번 놀랐다. 사탄타가 심각한 어투로 물었다.
“내 토템이 반응하는군. 너 누구야?”
“에반젤린 양에게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겁주지 마세요. 사탄타 씨.”
피로에 찌든 얼굴을 한 시튼이 어느 틈엔가 그들 앞에 나타나 있었다. 사탄타가 뭐라 항변하기도 전에 시튼이 먼저 말해서 그의 말을 막았다.
“여태껏 기다려준 손님에게 실례잖아요. 괜찮으니까 물러나세요.”
“시튼 선생님. 제 토템은 사악하거나 강력한 힘에만 반응합니다. 이 고위 마족은 상당한 실력의 마녀가 틀림없습니다.”
시튼은 과장된 몸짓을 한 번 짓고 눈을 크게 떴다가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사라는 이유로 손님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법이 있습니까? 진정하세요. 저쪽은 용기를 갖고 저를 믿어줬는데 왜 우리는 반대로 해야 합니까?”
마지못해서 사탄타는 아자리에게서 손을 뗐고 시튼은 서둘러서 일행을 오두막 안쪽으로 들여보냈다. 일행은 크게 긴장한 상태였으나 이내 나무 냄새와 아늑한 온기, 갓 피어오른 약초 차의 향기가 그들의 마음을 달랬다. 시튼이 잰걸음으로 먼저 들어갔던 일행을 앞지르고 손님방을 안내해줬다. 방은 나무와 모피로 만든 큼직한 소파와 원주민 전통 무늬가 수 놓인 깔개가 덮인 탁자로 꾸며져 있었다. 일행과 같이 자리에 앉으면서 시튼은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잠시 신음하며 숨을 골랐다. 어지간히 많이 지친 모양이었다. 이내 그가 아자리를 향해 말했다.
“사탄타 씨에게 악의는 없었답니다.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아주세요. 매사에 지나칠 정도로 철저한 사람이라서 그런 거예요.”
“황무지에서는 그게 정상이죠. 저희를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자리가 공손한 목소리로 말하고 상대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샤카자이아는 방안을 구경하느라 바빴고 단테는 검지만 움직여서 자신의 팔을 두드리며 초조해하는 티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은근슬쩍 단테가 아자리의 옆구리를 손으로 찌르고 속삭였다.
“그쪽한테 맡길 테니 신중하게 말해요.”
아자리는 팔꿈치로 단테를 한 번 건드리고 목을 가다듬었다가 말문을 텄다.
“묻고 싶은 점이 대단히 많은데 핵심부터 말할게요.”
그리고 아자리는 자신의 몸에 맨 작은 배낭에서 넓적한 동판을 2개 꺼냈다.
“걸어서 이틀 정도 걸리는 곳에서 이 동판으로 위폐를 만들던 놈들을 봤어요. 그놈들은 저희에게 정당방위를 당했죠. 죽이진 않았어요. 어쨌든 그놈들이 위폐를 세탁하거나 보급을 했다는 곳이 바로 여기인데. 신부님의 말에 따르면 이 마을은 돈이 오가지 않는다고 하시더군요. 제 말을 듣고 짐작 가는 점은 없으시나요?”
“제가 여기 상회 지부의 책임자입니다.”
시튼은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고민 없이 대답했다. 당황해서 생각을 정리하느라 입을 다문 일행을 대신해서 시튼이 이어서 말했다.
“구성원은 저 하나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결백해요. 제 정체에 대해서 아는 주민은 없습니다. 아니면 다들 짐작은 하면서도 모르는 척해주는 거겠죠. 그리고…. 후하아아암.”
시튼은 말하다가 입을 가리면서 용이 포효하듯 길게 하품했다.
“실례합니다. 그놈의 늑대 때문에 온 마을이 난리거든요. 아까 회의하느라 너무 피곤했어요. 겨울을 대비해야 하는데 잃은 가축이 백 마리가 넘었답니다. 서둘러서 해결해야 하는데 쉽게 풀릴 기미가 안 보여요. 어디까지 얘기했죠?”
단테가 입을 열었다.
“이미 저희 정체는 다 알고 계셨군요?”
“네. 단테 팡랑 씨. 아자리아 비온 라프라스 양. 슈슈니의 샤카자이아 양. 굉장한 액수가 걸리셨더군요. 참고로 액수 말고 여러분에 대한 정보는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믿거나 말거나 전 여러분의 목에 걸린 돈에는 관심 없습니다. 전 현상금 사냥꾼이 아니에요. 여러분을 이길 거 같다는 생각도 안 들고요.”
이번에는 아자리가 말했다.
“온 마을 사람을 동원하면 저희를 잡을 수 있을 텐데요.”
시튼은 자신의 눈썹을 문지르며 새빨간 눈으로 아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돈 때문에 이곳의 평화를 깨야 합니까? 게다가 여기 주민들은 지극히 정상적인 이성과 교양, 그리고 자유의지를 갖춘 사람들이에요. 어떻게 제가 이래라저래라 조종하겠어요?”
샤카자이아가 말했다.
“저희가 현상범인 걸 알면서 왜 마을로 들여 보내셨나요?”
“저도 똑같은 질문을 할 수 있어요. 왜 수상쩍은 구석이 넘쳐나는 이 마을을 아직도 벗어나지 않고 저하고 차를 마시러 오셨나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내 정신 좀 봐라, 차 내오는 걸 깜빡했네요. 사탄타 씨?!”
사탄타가 방문을 열고 손님방 안으로 불쑥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네 선생님.”
“차 좀 내주세요. 제 몫은 홍차 진하게 부탁합니다. 손님들은 필요하신 거 있나요? 커피만 빼고 우려낼 수 있는 물질은 대부분 있답니다. 카모마일, 라벤더, 박하, 그리고 신선한 레몬.”
시튼이 손가락을 하나씩 펼치면서 말했다. 일행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단테는 고개를 저었고 아자리와 샤카자이아는 공손히 손을 들었다. 두 사람이 차례대로 주문했다.
“레몬에 설탕이나 꿀 넣어주세요.”
“홍차.”
단테는 배신당한 사람처럼 억울해하는 눈으로 일행을 곁눈질했다. 사탄타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면서 방문을 닫았다. 정적이 감돌기 전에 아자리가 말했다.
“시튼 씨의 물음에 답하면 이곳이 궁금해서요. 오랜만에 지붕 아래에서 자고도 싶고.”
“그리고 목욕도.”
샤카자이아가 뒤따라 말했다. 단테는 먼저 검지를 들고 자기가 말하겠다는 뜻을 보인 채 뜸을 들이다가 생각을 마치고 감았던 눈을 뜨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시튼 씨는 완전히 중립이시군요.”
“제가 정당방위를 할 필요가 없다면 그렇죠.”
“하지만 그냥 보기 드문 손님이라는 이유로 여기에 저희를 안내해주시지는 않았겠죠. 저희에게 부탁할 일이 있으신 거죠? 아닙니까?”
시튼은 멋쩍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뇨. 카나라티타케… 가 아니라 샤카자이아 양을 보고 반가워했던 거는 진심입니다. 여러분들에 대한 정보는 나중에 떠올랐어요.”
일행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단테가 일행을 향해 속삭였다.
“어떻게 하죠?”
아자리가 말했다.
“우리가 나쁜 일 당할 예정이었으면 이미 당했어요.”
단테가 도로 시선을 상대 쪽으로 되돌리면서 아무 일 없었다는 양 시치미를 뚝 뗐다.
“그럼 장사꾼 대 장사꾼으로서 이야기해볼까요. 그쪽의 요구사항은 정말로 없는 건가요?”
시튼이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꼬부랑거리는 콧수염을 잡아당겼다.
“사실, 이럴 예정은 아니었는데 방금 그쪽이 말을 꺼낸 덕에 제 곤경을 도와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양손을 모아서 턱을 괴고 있던 샤카자이아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 늑대 말이죠.”
“네, 그 늑대요. 잡으려면 실력과 경험을 갖춘 사람이 필요해요. 그리고 보통 황무지의 정보망에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사람들은 대부분 그 두 가지를 갖추고 있죠. 도와주시면 넉넉하게 보답해드리겠습니다. 거절하신다면 어쩔 수 없고요. 참고로 어느 쪽을 고르시던 전 여러분에 관한 이야기는 퍼트리지 않을 겁니다.”
단테가 말했다.
“왜요?”
“그랬다간 현상금 사냥꾼이 여기로 몰려들 테니까요. 주민들을 불편하게 하긴 싫어요.”
단테가 일행에게 의견을 묻기 전에 아자리가 먼저 말했다.
“대체 어떤 늑대이기에 곤란해하시죠? 늑대 왕도 사냥하셨다면서요?”
시튼이 양 손끝을 모으고 눈을 질끈 감으며 가늘게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힘겨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늑대 왕이… 로보가 다시 나타났어요.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되살아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