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5권] 163회 - 늑대왕
식사시간이 끝나자 일행은 시간을 자유로이 보냈다. 아무것도 없는 횅한 벌판이어도 할 일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타티아나는 소매를 가지런히 한 단씩 접어서 팔꿈치까지 걷었고 맞은편에는 아비투스와 카르델이 차림을 가볍게 하고 몸을 풀고 있었다. 카르델이 부목을 풀고 웃통까지 벗자 루나가 걱정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제가 안심하기 전까지는 풀지 말라고 했잖아요.”
타티아나가 유연하게 다리를 수직으로 쭉 뻗으면서 꽉 붙잡은 채 루나를 향해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서로 직접 때리는 일 없이 조절할 겁니다.”
레스와 피카니는 나란히 앉아서 따분해하는 표정으로 근처에 앉아 있었다. 두 남자와 타티아나가 서로 마주 섰다. 그녀가 펼친 양 손바닥을 앞으로 비스듬하게 세우며 경건하게 말했다.
“그럼.”
두 남자가 양쪽에서 동시에 덮쳐와도 그녀는 머리카락 한 올 흩트리지 않고 순식간에 빠져 나왔고 날아오는 주먹질마다 체중도 싣지 않은 손짓과 팔짓으로 모조리 걷어냈다. 싸움의 결과에는 관심 없다는 듯 피카니와 레스는 대련에 집중하지 않고 손톱깎이로 손톱이나 깎았다. 타티아나가 아비투스의 가슴팍을 가볍게 손으로 밀치면서 물러나고는 훈수하는 투로 말했다.
“당신은 보폭을 옮길 때 팔을 몸에 너무 바짝 붙였어, 겨드랑이가 닫히지 않게 해. 그쪽은 어깨에 너무 힘을 줬어. 긴장을 풀어야 손이 빨라져.”
이런 식으로 남자들은 타티아나로부터 훈수를 받으며 몸을 움직이고 손을 섞었다. 루나가 레스와 피카니 근처로 다가오면서 말을 걸었다.
“혹시 레모니 양의 출신이 어딘지 아시나요?”
피카니와 레스는 같이 고개를 저었다. 피카니가 물었다.
“왜요?”
“제가 물어봤을 때는 대답을 피하더라고요. 혹시 그쪽이라면 아나 싶어서.”
피카니는 한창 바삐 움직이는 현장 쪽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바다 건너 출신 아니었나? 넌 알아?”
“물어본 적 없어.”
레스는 무뚝뚝하게 대꾸하고 줄로 손톱을 갈았다. 그러다 오른손이 경련을 일으키는 바람에 손가락의 굳은살에 거칠한 자국이 났다. 레스가 손을 쥐락펴락하면서 인상을 쓰며 자기 손을 쳐다보았다. 루나는 피카니 옆에 깃털처럼 살포시 앉았고, 피카니는 루나의 존재는 눈치채지 못한 채 레스를 향해 넌지시 물었다.
“시도라도 해보는 건 어때? 네가 물어본다면 저 까칠이도 대답해줄걸.”
“왜?”
“무슨 말 하는지 알잖아.”
“웃기시네.”
“요즘 너한테 대놓고 관심을 보이잖아. 눈치 못 챈 척하는 거 집어치워.”
“뱉는 말에 신경 써라. 타티아나는 귀가 엄청나게 밝아.”
아주 한순간이었지만 그때 타티아나의 동작이 멈칫거려서 아비투스의 주먹이 정말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아비투스와 카르델 둘 다 깜짝 놀라서 자세를 거두고 걱정하는 목소리로 괜찮냐고 물었다. 타티아나는 얼버무리고 접었던 소매를 도로 펼쳤다.
“오늘은 여기까지, 어울려줘서 고마워.”
아비투스와 카르델은 손짓으로 인사를 받아주고 흘린 땀을 닦으며 자리를 비켰다. 타티아나는 조용하면서도 빠른 걸음으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시선이 아직도 자기 손을 주무르고 있는 레스의 손에 멎었다.
“지압 필요해?”
“아니. 마음만 받을게. 이참에 말하는 건데 난 여자 손길이 엄청나게 부담스러워. 네가 싫다는 의미는 아니고 사쿠라비가 어떤 곳인지 알잖아. 난 아직도 적응이 덜 됐어.”
루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전 무슨 느낌인지 알 거 같아요. 제가 출가하고 나서 들어갔던 수도원은 남자가 금지된 장소였어요. 그래서 저는 학창시절 내내 남자라고는 사진과 그림으로만 봤었죠.”
피카니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세상에 그렇게나 오래?! 바깥 공기를 마신 게 정말 최근이시군요!”
루나와 타티아나, 레스는 한순간 납덩어리 같은 침묵과 서늘한 긴장감이 담긴 눈빛을 교환했다. 루나가 기적적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둘러댔다. 적어도 말투는 그러했다.
“그래도 주변의 동년배 남성분들이 제게 다들 신사적이셔서 다행이지 뭔가요, 오호호.”
피카니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저도 포함하는 건가요? 영광이네요!”
타티아나와 레스는 자기들끼리 쑥덕였다. 그녀가 먼저 속삭였다. ‘동년배?’ 레스가 중얼거렸다. ‘호호호?’ 타티아나는 한숨을 쉬었다.
대화를 이어나갈 밑천이 떨어져서 레스는 머리를 비우고 멍하니 있었는데 루나가 그의 손목을 쿡 찌르면서 말을 걸었다.
“사실 마침 재활에 도움이 될만한 무언가를 제안하려던 참이었어요. 섬세한 작업을 반복하면 마음도 진정되고 손의 감각도 예리해지죠. 떠오르는 거 없나요?”
피카니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 눈썹을 크게 들어 올리며 레스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고 보니 너 현악기 잘 쳤잖아. 류트, 밴조, 기타. 픽 없이 핑거스타일로. 재활훈련으로는 딱 좋아 보이는데?”
타티아나가 눈을 부릅뜨고 깜짝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기타 칠 줄 안다고?!”
레스는 질겁하고 몸이 뒤로 밀려났다. 그가 투덜거렸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피카니가 끼어들었다.
“말과 낙타, 총, 그리고 악기는 바다위들의 필수품이라고 네가 전에 말했었지. 전에 쓰던 기타는 어떻게 됐어? 헤어지기 전까지는 가지고 다녔었잖아.”
“습기 때문에 울림통이 망가져서 땔감으로 썼어. 거기 늪이 좀 많았거든.”
레스가 귀찮아하는 티를 팍팍 내며 대답했다. 루나가 양손을 불끈 쥐면서 기대에 찬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노래도 부를 줄 아시나요?”
레스가 계속 입을 다물자 피카니가 대신 답했다. 레스의 목소리와 말투까지 흉내 내면서.
“꽤 잘 부릅니다.”
“작작 좀 하지?”
그들은 레스의 불평을 흘려보냈다. 타티아나와 루나가 입을 모아서 외쳤다. “불러봐”, “불러봐요.” 그는 내키지 않아 하는 티를 드러내며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로?”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분위기가 되자 레스는 뭘 더 잃겠냐는 심정으로 목을 가다듬고 감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한 마디씩 낮고 또렷하면서도 느리게 곡조를 읊었다.
“나는 걸어가네, 죽음의 어둠이 덮인 골짜기 사이로. 그래도 내가 두려워할 것은 없다네. 왜냐면 내 눈은 멀어버렸으니.
오직 나의 신념과 권총만이 나의 편이지. 때로는 선과 자애도 삶에 나타나겠지만, 어차피 나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네. 왜냐면 나는 선을 넘었으니까.
깊은 물가 옆에 쉴 때도 있겠지만, 나는 밝은 곳으로 향할 수 없네. 왜냐면 난 실패했으니까. 영원히 헤매겠지, 나는 돌아올 수 없으니까.”
노래가 끝나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레스는 아무 일 없었다는 양 새침 떠는 표정을 지켰다. 루나가 간신히 운을 떼었다.
“왜 하필 그렇게 우울한 노래를 골랐어요?”
“누구나 그런 날이 있잖아요.”
타티아나가 물었다.
“자작곡이야?”
“아니, 친구한테서 배웠어.”
“어떤 친구? 네 스승?”
“더 묻지 마. 두 번 말하지 않겠어.”
가시 돋친 목소리로 레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타티아나는 그의 어두워진 표정을 보고 더 캐묻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고 피카니는 콧잔등을 긁다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레스를 노려보았다.
“본론만 말할게. 너 요즘 기운이 없었던 이유가 모르스가 너 때문에 그날 사람들이 죽었다고 해서 그런 거지?”
레스는 눈가를 손으로 부여잡고 팔꿈치를 무릎에 대었다. 길게 한숨을 쉬다가 레스는 완전히 모든 것을 포기한 얼굴로 겨우 대답했다.
“알 바 아니잖아.”
타티아나가 조금 뜸을 들이고 물었다.
“기타는 스틸 스트링 클래식이면 될까? 원한다면 내가 구해보지.”
“허허벌판에서 어떻게? 여태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텐데.”
레스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타티아나는 팔짱을 꼈다.
“우리가 가는 길에 상회의 지부가 있어. 안 그래도 여러 이유로 거기에 들를 참이었지. 상회가 어떤 조직인지는 알아?”
피카니와 레스는 같이 탄식하면서 머리를 헝클어트리거나 눈가를 감싸 쥐었다. 루나는 당황해서 굳은 표정으로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왜들 그래요?”
피카니가 대답했다.
“저희가 사고를 여러 가지 쳤는데 그중에 상회와도 마찰이 있었어요.”
“예시 하나만 말해주시겠어요?”
“그놈들 산하의 유정 하나를 통째로 터트렸어요. 겁나게 장관이었지. 기름 연기로 구름이 뭉쳐지고 검은색 비가 내렸어. 무언가가 불타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아.”
그때의 회상에 어지간히도 열중했는지 피카니의 목소리가 몽롱하게 들렸다. 루나는 경멸 비슷한 감정이 느껴지는 시선으로 피카니를 게슴츠레 노려보았다. 타티아나가 말했다.
“상회의 현상금 명단 윗부분에 있던 이름 불명의 2인조가 너희들이었구나?”
레스는 얼버무리듯 거칠게 손짓하고 말을 돌렸다.
“넘어가고. 거기는 어떤 곳이야? 지도에는 아무것도 없었잖아.”
“지도에 없는 마을이 있어. 마을이 먼저 생겨났고 그 뒤에 상회가 그곳을 지부로 정했지. 사실 상회의 지부라는 사실을 제외해도 마을 자체와 사연만으로도 특이한 곳이야.”
“마을 이름은? 있기는 한 건가?”
“있고말고. 시튼 빌리지.”
루나는 화들짝 놀랬다. 그녀가 몸서리를 너무 치는 바람에 주변 사람들까지 덩달아 놀랐다.
“어머나 맙소사. 죄송해요. 혹시 진짜로 어닝웨이 시튼은 아니겠죠?”
“그 시튼이 맞습니다.”
“꺄아아아!”
타티아나의 차분한 대답을 듣자마자 루나는 얼굴에 양손을 붙이며 소녀처럼 앙증맞은 비명을 질렀다. 피카니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정말로? 그 시튼? 시튼이 그 역겨운 놈들하고 관련되어 있다고?”
피카니의 말투에는 노골적인 혐오가 깃들어 있었다. 레스가 내리까는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대체 시튼이 누구야?”
루나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차의 짐칸으로 뛰어 들어갔다. 안에서 뭔가 우당탕하고 잡동사니들이 시끄럽게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곧 루나가 책 한 권을 들고 돌아왔다.
“저 시튼 씨의 엄청난 팬이에요! 한번 봐요!”
레스는 루나로부터 책을 받고 떨떠름한 반응만 보였다.
“[내가 겪은 동물 이야기]? 죄송한데 지금은 책 읽고 싶은 기분이 아닙니다.”
“절 봐서 첫 부분만이라도 읽어봐요. 그럴 가치가 있다니까요.”
레스는 마지못해서 표지를 넘기고 첫 장의 소제목을 소리 내어 읽었다.
“커럼포의 늑대왕 로보.”
같은 시각. 시튼의 오두막 안에서 샤카자이아는 푹신한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는 펼친 책장의 글자에 손을 대가며 천천히 또박또박 읽어갔다.
“1889년 커럼포라고 이름 붙여진 황무지에 정착한 목장주들이 어느 늙은 늑대에게 1천 탈레르에 달하는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다. 그곳에서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늑대 한 마리를 만났다. 이 늑대에게 붙여진 이름은 로보인데 목장주들의 모국어로 늑대라는 뜻이었다. 로보의 무리는 로보를 포함해서 여섯에 불과했으나 하나하나가 모두 덩치가 크고 영악했으며 여러 해 동안 그들이 해치운 가축은 수천 마리에 달했다.”
샤카자이아는 책을 읽다 말고 바로 옆의 안락의자 팔걸이에 걸터앉은 아자리를 보았다.
“미안, 다음 부분은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아서 못 읽겠어.”
“그래도 짧은 사이에 실력이 많이 늘었네요.”
아자리는 책을 건네받고 마치 다른 사람처럼 돌변하고 성숙한 어조로 책을 낭독했다.
“로보에게 피해를 본 사람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심혈을 기울였다. 사냥꾼을 고용하고 경계 태세를 유지하면 로보가 나타나지 않았으나 조금이라도 허술해지거나 허술한 곳에는 로보가 번개처럼 나타났다. 그리고 사람이 한 명이라도 나타나면 항상 싸움을 피하고 달아났다. 로보는 인간을 건드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또 인간이 무엇으로 무장했는지 이해했던 게 틀림없던 거리라. 로보의 무리는 도저히 사냥하거나 추적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샤카자이아가 어린아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슌카와칸은 잘 지내고 있을까?”
아자리가 쉿 하고 입술에 검지를 대고 그녀에게 주의를 시켰다.
“저 지금 몰입하는 중이에요. 어험. 사람들은 덫과 미끼를 셀 수 없이 깔았지만 로보는 반드시 자기가 직접 사냥한 고기만 먹었고 덫을 모조리 피했다. 한 번은 누군가가 죽은 소에게 독약을 끼얹었는데 로보는 그걸 조롱하듯이 독이 묻지 않은 부분만 골라서 먹어버렸다. 덫에 걸리는 건 언제나 엉뚱한 짐승뿐이었고 로보의 수하들조차 걸린 적이 없었다. 심지어 어떤 덫은 돌을 뿌려서 억지로 작동시켜 해체된 흔적까지 있었다.”
샤카자이아가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농장주들은 근방에 보이는 야생동물들의 씨를 모조리 말려버리려고 석유를 뿌려서 들판을 불태우자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꺼낼 지경이 되었다. 1893년에는 나도 커럼포를 방문해서 로보를 붙잡는 사냥꾼 중 하나가 되었다. 로보의 이야기는 문명 세계에 있던 나한테까지 들려올 정도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녀석은 고기가 아니라 순전히 재미를 목적으로 하룻밤 만에 250마리에 달하는 양 떼를 죽였다. 사냥이 어려운 야생동물 대신 인간이 기르는 손쉬운 사냥감에 맛을 들였으니 로보의 운명은 돌이킬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사냥꾼을 사냥감으로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자리는 침을 한 번 삼키고 책장을 넘겼다.
“나는 원래 따로 특수 제작한 덫을 주문해서 사용할 생각이었으나 도착할 기미가 보이질 않아 나만의 방식으로 덫을 만들었다. 암소의 콩팥에 치즈를 섞고 도자기 그릇에 담아 가열시켰다. 늑대라면 군침을 참을 수 없는 먹잇감이었다. 독극물로는 냄새가 없는 스트리크닌을 골랐다. 작업 내내 미끼에 입김이 닿지 않도록 입을 복면으로 가렸고 손에는 암소의 피를 적신 가죽 장갑을 꼈다. 도구로는 금속 냄새가 배지 않도록 뼈를 갈아내서 만든 칼을 썼다. 그리고 콩팥에 독극물을 넣은 뒤 다른 암소의 내장과 함께 자루에 담아서 오랜 시간을 들여 땅에 끌고 다녔다. 이런 미끼를 수십 개가량 준비해서 녀석의 영역으로 몰래 다가가 설치했다.”
같은 구절을 읽은 레스는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시튼이라는 양반도 여간 보통이 아니군.”
루나가 학생을 가르치는 투로 끼어들었다.
“동물학자니까요. 나중에 늑대에 대한 전문 서적까지 따로 낸 걸 보면 시튼 씨는 유난히 늑대에게 관심이 많은 거 같아요.”
게을러 보이게 옆으로 몸을 누이고 머리를 손으로 괴고 있던 피카니가 재촉하는 투로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궁금하니까 어서.”
레스는 한 손으로 들고 있는 책을 다시 불빛에 비추고 읽었다.
“미끼가 사라진 걸 확인했다. 그런데 사라진 미끼가 점점 늘어났다. 뭔가 심상찮은 예감이 들었다. 사라진 미끼가 세 개에 달했고 결국 다른 미끼 위에 여태껏 사라졌던 미끼들이 한데 모여 쌓여있는 걸 보았다. 그리고 위에는 나를 조롱하듯 로보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변이 얹어져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저것이 정녕 짐승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고 주변에서 날 도와준 사람들은 로보를 악마의 환생이라고 두려워하기에 이르렀다.”
레스는 진심으로 잠깐 감탄하고 다음 장을 넘겼다.
“크게 낙담을 겪었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로보를 붙잡지 못하면 분노한 주민들의 손으로 근방의 다른 동물들이 학살될 미래가 보였다. 로보에게 희생당할 가축들을 지키는 것도 중요했으나 균형이 무너진 생태계가 얼마나 빨리 자멸하는지 나는 직접 보았다. 늑대나 곰 같은 맹수들의 모피를 노리고 사냥꾼들이 한 지역의 포식자들을 전멸시키자 천적이 사라져버린 토끼와 사슴에 의해 숲이 순식간에 망가졌었다.
어느 날 나는 녀석의 흔적을 조사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로보보다 앞장서서 움직인 늑대의 발자국이 있었는데 이러한 행동은 늑대들의 사회에서는 반역을 의미했다. 하지만 반역자가 처단된 흔적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발자국의 주인은 블랑카의 것으로 블랑카는 하얀 털을 가진 아름다운 늑대이자 로보의 아내였다. 늑대들은 자신이 한번 고른 짝을 버리지 않으며 짝이 죽어도 재혼하는 일이 드물며 자신의 새끼도 포기하지 않는다. 로보가 자기 아내의 경솔한 행동을 봐줬던 그 흔적을 통해 나는 녀석을 더 이해하게 되었다. 사냥꾼이 사냥감을 쫓을 때는 대상의 영혼으로 생각하고, 대상이 되며, 이윽고 그 대상의 마음을 이해할 때 사냥꾼은 사랑에 빠진다. 난 진심으로 로보를 사랑하고 있었다.”
피카니가 콧방귀를 뀌었다.
“넌 그게 어떤 감정인지 이해가 가?”
“글쎄. 내가 누군가를 쫓을 때는 보통 금방 잡혔거든. 로보처럼 매력적이지도 않았고.”
무릎을 꿇고 눈을 감은 채 명상하는 자세로 가만히 있던 타티아나가 말했다.
“난 공감이 가. 우리도 로보 못지않게 매력적이고 잡기 힘든 대상을 쫓는 중이니까.”
레스가 잠깐 책을 내려놓고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희 친구들.”
눈을 감은 채로 담백하게 그녀는 대답했다. 같은 시각 아자리는 읽다 말고 잠시 여운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샤카자이아에게 물었다.
“언니네 숲에도 늑대가 있나요?”
“늑대는 드물어.”
“왜요?”
“곰이 많아서.”
“오.”
“다음 부분 읽어줘.”
아자리는 목을 가다듬고 다시 책장을 펼쳤다.
“블랑카는 로보의 총애를 믿고 무리의 서열을 무시하는 짓을 일삼았다. 단독으로 행동하는 일도 잦았기에 나는 블랑카를 먼저 노렸다. 일부러 허술해 보이는 덫을 하나 깔고 주변에 진짜 덫을 숨겼다. 로보였다면 이 정도는 눈치챘겠지만, 블랑카는 아니었다. 블랑카는 20kg에 달하는 무게의 덫에 걸리고도 그걸 끌고 달아나려고 시도했으며 우리는 지친 블랑카를 포위하고 밧줄로 목을 졸라 숨을 끊었다. 블랑카의 시체를 가지고 돌아갈 때 나와 동료들은 로보의 것으로 추정되는 구슬픈 하울링을 들었다. 그 소리가 너무나도 슬퍼서 여태껏 로보에게 시달렸던 사냥꾼과 목장 인부들마저도 저런 울음은 처음 듣는다며 가슴이 먹먹해졌다고 했다. 내게는 그 울음이 자신의 아내를 부르는 소리로 들렸다.”
아자리는 잠깐 읽는 걸 멈추고 심호흡 뒤에 이어서 읽었다.
“우리는 블랑카를 산채로 붙잡았어야 했다. 그편이 로보를 더 빨리 붙잡을 길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으니 나는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블랑카의 시체를 끌고 다니며 체취를 사방에 남겼고 시체의 한쪽 발을 잘라 가짜 발자국도 남겼다. 그 신중하고 영악했던 늑대왕이 분노와 슬픔으로 미쳐 날뛰었다는 목격담이 점점 늘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 아내의 발자국에 속아 덫에 걸렸다. 로보는 첫 번째 덫을 힘으로 부숴서 달아났으나 만일의 대책으로 깔아둔 다른 덫에 걸렸다. 늑대왕이 왕좌에서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분노한 사람들의 손에 로보는 바로 죽을 운명이었으나 내가 애원했다. ‘잠깐, 죽이지는 맙시다. 데려가자고.’ 우리가 로보의 발을 단단히 묶고 송곳니 뒤쪽에 막대를 끼워서 고정하는 동안에도 로보는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 녀석의 눈길은 자신의 왕국이었던 벌판을 떠날 줄을 몰랐다. 그곳에는 자신과 함께 이름을 날리던 부하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로보는 조랑말에 실려 바위산이 앞을 가릴 때까지도 하염없이 그곳을 바라보았다.”
레스는 책장을 넘겼다. 그의 눈가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고기와 물을 곁에 놓아봤으나 녀석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녀석의 황토색 눈동자는 하염없이 골짜기 너머에 광활히 펼쳐진 자신의 들판을 바라볼 뿐, 옆에서 건드려도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해가 기울어도 녀석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밤이 되면 로보가 자신의 수하들을 부를 거라 경계하고 대비했었다. 로보는 울부짖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고 그 뒤로 로보는 다시는 울부짖지 않았다. 타협을 모르는 무법자가 자유와 사랑을 잃고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녀석은 숨만 쉬었을 뿐 영혼이 이미 떠나 있었다. 늑대왕 로보는 죽은 것이다.”
레스는 자신의 눈가를 움켜쥐며 책장을 탁 닫았다. 피카니가 놀라서 경악에 찬 목소리로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다.
“너 지금 우는 거냐?”
습기 찬 목소리로 레스가 힘겹게 말했다.
“더는 못 읽겠어.”
레스는 책을 루나에게 돌려주었다. 레스가 눈물을 참는 모습은 다들 처음 보는 광경이었기에 그곳의 분위기는 딱딱하게 굳었다. 눈가를 움켜쥔 채 가만히 있는 그를 향해 루나가 책을 껴안으면서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
“로보는 결국 아무 먹이도 먹지 않고 굶어 죽었어요. 시튼 씨는 로보를 붙잡았다는 물증을 남기기 위해 가죽을 취하고 블랑카와 같은 곳에 묻어주었죠. 책에 적힌 바로는 시튼 씨도 로보를 붙잡은 게 승리인지 슬픔인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하네요.”
한참 뜸을 들이고 레스가 그녀에게 말했다.
“루나 씨가 옳았어요. 읽을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의문이 하나 드네요.”
“뭔가요?”
“로보와 블랑카 사이에 새끼는 없었습니까?”
루나는 표정 없이 그대로 가만히 있다가 눈동자를 떨었다.
“그러게요. 로보 같은 회색 늑대의 임신 기간은 두 달에서 석 달 사이니까 새끼를 낳았을 법도 한데 책에는 로보와 블랑카의 자식에 관한 건 전혀 적혀 있지 않아요. 참고로 시튼 씨는 그 이후로 더는 늑대를 사냥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피카니가 끼어들었다.
“다른 사냥꾼들이 씨를 말리려고 평원을 샅샅이 뒤졌겠지. 어디론가 떠났거나 쓸려나갔거나. 다 그런 거야. 무법자들의 말로라는 게 결국 그런 거지.”
아자리는 책장을 덮으면서 슬픈 목소리로 읊조렸다.
“로보는 신이 만든 세상의 섭리대로 살았고, 사람은 사람이 만든 세상의 섭리대로 살았고. 최후에는 사람이 신이 만든 세상을 이기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