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5권] 166회 - 표식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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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튼을 따라서 덩달아 추장의 만찬회에 초대받은 아자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상에 늘어진 요리들을 보고 감탄사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아자리가 신기해하는 눈으로 요리들을 이것저것 살펴보자 탁자 건너편에 있는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친절한 말투로 뭐라 말했다. 원주민들의 말을 못 알아듣는 아자리를 위해 시튼이 통역해주었다.
“그건 ‘위위시’라고 부르는 도토리 빵이에요. 도토리는 삶은 다음에 식히면 쓴맛이 빠지고 단맛이 올라오죠. 오늘은 반죽에 소금을 넣어서 구웠다고 하시네요.”
그녀의 옆자리에 있는 샤카자이아가 그것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우리는 단풍나무 시럽을 써.”
일행은 추장과 그의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어느 정자에 있었다. 근처에 피워둔 모닥불에서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바로 완성된 요리들을 탁자 위로 날라왔다. 아주머니가 또 요리 하나를 가리키면서 설명하자 시튼도 통역하느라 바빠졌다.
“이건 ‘타말레스’. 여러 가지 재료를 부드러운 옥수수 잎으로 감싸서 통으로 구운 겁니다. 소고기랑 치즈, 블랙 커런트, 산딸기가 안에 들어있대요.”
추장이 조금 느릿한 손짓으로 일행을 향해 가리키며 천천히 말했다.
“부담가지지 말고 마음껏 들어라. 소개가 늦었구나. 난 네바로의 투슈가쿡이다.”
능숙한 공용어 억양이었다. 평범하게 늙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추장의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칼은 잡초 뿌리처럼 생기 없이 엉겼고 등은 앞으로 굽혀 있었다. 모직 셔츠를 입었고 목에 맨 군청색 리본 타이 말고 장신구는 없었다. 샤카자이아가 추장을 향해 물었다.
“깃털 관은 안 쓰시나요?”
“내 관? 오래전에 누군가한테 팔았단다. 새로 만들 수는 있지만 지금 와서 무슨 쓸모겠니.”
샤카자이아는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팔다니. 깃털 관은 중요한 전통인데.”
투슈가쿡 추장 주변의 사람들이 추장을 향해 불안해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너희 추장은 아직도 깃털 관을 쓰느냐? 지금도 아슈타쿰이 추장이니?”
“네.”
“그래. 그럼 됐다. 다들 식기 전에 먹자꾸나.”
아자리는 슈슈니 족 추장의 이름을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생각에 빠지려던 찰나 그들 앞으로 진하게 끓여진 고기 스튜가 놓이자 아주머니가 또 설명했다. 물을 마시던 시튼이 급하게 삼키고 통역했다.
“이건 ‘탄카 미 알로’라고 불러요. 원래는 버펄로로 만들던 요리인데 오늘은 늑대한테 당한 소를 썼다고 하네요. 애초에 버펄로는 이제 없기도 하고.”
아자리는 자신들 앞에 놓인 성찬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부담도 늘었다. 시튼을 향해 그녀가 헛기침하고 물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드시는 건 아닐 텐데, 환대가 너무 과하지 않나요?”
“요즘 필요 이상으로 도살되는 가축이 많아져서 이런 식으로 소비하는 중이랍니다. 되살아난 로보는 고기도 챙기지 않고 의미 없는 살육만 반복하고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정말이에요.”
샤카자이아가 시튼을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로 로보가 죽음으로부터 돌아왔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식사 중이잖아요. 따듯할 때 안 먹으면 저희를 위해 쓰인 생명에게 실례에요.”
“맞는 말씀.”
단테가 끼어들어서 화제를 마무리 지었다. 샤카자이아는 자신의 원래 언어로 중얼중얼 기도하고 수저를 들었고 평소 신앙과는 거리가 멀었던 아자리도 오늘만큼은 식전 기도를 올리고 신과 자연을 향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을 들었다. 신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식사 자리에는 시튼 곁에 사탄타도 같이 있었다. 샤카자이아가 어느 정도 자기 몫을 먹을 즈음이 될 때까지 사탄타는 은근히 눈치를 줬고 샤카자이아도 시선을 눈치채고 있었다. 샤카자이아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빤히 쳐다보자 사탄타가 최대한 점잖게 말했다.
“잠깐 우리끼리 얘기 좀 할까?”
투슈가쿡 추장이 그를 향해 무게를 담은 투로 말했다.
“손님께 무례를 저지르지는 마라.”
“알고 있습니다.”
사탄타는 추장에게 정중히 허리를 한 번 숙였다가 샤카자이아를 사람들에게서 떨어트렸다. 충분히 거리가 멀어졌다고 생각하고 샤카자이아가 먼저 운을 뗐다.
“아까 내가 뭔가 잘못했던 건가?”
“너 몇 살이야?”
“열일곱. 내 나이가 무슨 상관이지?”
“장난치지 마. 그런 발육 상태로 어떻게 열일곱이야. 게다가 너 엘프잖아.”
샤카자이아가 눈을 치켜떴다.
“속이지 않았어. 난 열일곱이야.”
사탄타의 눈가와 뺨이 움찔움찔 경련했다. 그녀의 말을 곧이 믿고 싶지 않으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거로는 보이지 않아 혼란에 빠진 것이다. 그는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치우고 머릿속을 정리했다.
“좋아. 일단 네가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말하기 앞서서 이건 너한테 사적인 감정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야. 네가 알아둘 필요가 있어서 그러는 거지. 이제 집중해. 어떻게 슈슈니 족만 와시추한테 덜 당했다고 생각해?”
샤카자이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덜 당했다니? 우리도 싸웠어. 내 아버지가 와시추한테 죽었어! 아직은 운이 좋아서 숲에서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물러나야겠지. 우리도 그 날을 각오하고 매일 부지런히 살아.”
사탄타가 입가를 한번 굳게 다물었다가 힘겹게 운을 뗐다.
“네 아버지 일은 유감이다. 그런데 황무지의 다른 부족들과 슈슈니는 큰 차이가 하나 있어. 개척 시대 때 수많은 부족이 문명 세계에 맞서서 오랫동안 싸웠지. 이쪽 지방에는 부족이 스물이나 있었어. 그때는 열아홉 부족의 추장이 조약으로 뭉쳐서 싸웠지. 하나만 빼고. 너희 추장님은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어.”
“뭐?”
샤카자이아가 충격으로 잠깐 표정이 얼었다. 잠시 후 떠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추장님은 그런 말 한 적 없어. 우리도 열심히 싸웠다고 했어.”
“그래 싸웠지. 너희들의 땅에서만. 그래도 너희 추장님, 아슈타쿰의 마음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야. 너희들은 깊은 숲속에서 살고 있었으니까 무리해서 병력을 바깥으로 빼내면서까지 전쟁을 하면 부담이 크다고 생각했을 거야. 심지어 너희들의 숲은 지금 기준으로 국경 너머에 있으니 지리적으로도 위험했지. 자신의 땅을 지키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당연해.”
샤카자이아는 시선을 땅에 내리고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난…. 생각도 못 했어. 우리 추장님이 다른 땅의 동포들을 무시했다니. 우리는 항상 다른 부족들과 우애를 다져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니가 우리 부족의 사자이자 길잡이였어.”
사탄타가 한숨을 길게 쉬었다.
“우리는 졌지. 너희와 같이 싸우더라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거야. 한때 우리 부족에 있었던 제일 뛰어난 전사조차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며 타협하자고 했어. 혹시 들어봤어? 게안내타하 들로오라는 남자야. 준비된 새라는 뜻이지.”
샤카자이아가 그 말을 듣고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빤히 쳐다만 보고 있자 사탄타는 자기 마음대로 그녀의 생각을 해석하고 이어서 말했다.
“많은 부족이 자신들의 상징으로 늑대를 흔히들 고르는데 우리 부족은 그중에서도 남달랐지. 먼 옛날 조상이 발견한 고독한 늑대를 대대로 수호신으로 모셔왔거든. 오직 소수의 전사만이 그 고독한 늑대와 신성한 의식을 통해 교감할 수 있어. 준비된 새가 마지막 르팡 레나페(늑대 사람)였고. 준비된 새는 늑대를 커다란 개라고 부르는 괴짜이기도 했지.”
“슌카와칸.”
샤카자이아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사탄타가 자기가 제대로 들었는지 의심이 들어서 저절로 고개를 그녀에게 가까이 대려고 했다. 그때 그림자처럼 기척 없이 다가온 투슈가쿡 추장이 그의 귀를 잡아당기고 야단하는 투로 외쳤다.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지!”
“아야야야야! 오해입니다! 오해입니다!”
“됐다. 들어가!”
사탄타가 허리를 굽실거리며 잡힌 귀를 매만지며 자리로 돌아갔다. 일행들이 자신을 향해 걱정하는 시선을 보내자 샤카자이아가 괜찮다는 뜻으로 애써 손을 흔들어줬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슬퍼 보였다. 투슈가쿡이 숨을 길게 내쉬면서 뜸을 들이다가 말을 걸었다.
“네 어머니를 오래전에 만난 적이 있다. 많은 부족이 너의 어머니를 알지. 백 년 가까이 슈슈니의 사자 역할을 했으니 기억 못 할 수가 없지. 그리고 넌 어머니와 정말 닮았구나.”
샤카자이아가 우울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깔았다.
“전 어머니에 대해서 기억이 잘 안 나요. 추장님조차 자세히 말씀을 안 해주셨어요. 과거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뜻이었을까요?”
“아슈타쿰은 내가 알기로는 500살이 넘는다고 들었다. 세 번의 마왕과 용사를 보았고 그중에서 마지막 용사와는 직접 아는 사이라지. 미안하다 이미 질리도록 들어봤을 텐데. 어쨌든 그런 사람이니 무언가 뜻이 있었겠지.”
그렇게 말하며 끌끌 웃었다. 그런데 샤카자이아가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로 깜짝 놀라서 뒤로 자지러지자 투슈가쿡 추장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왜 그러니?”
“죄송합니다. 친구들을 데려와야겠어요.”
샤카자이아가 급하게 자리로 돌아가서 일행에게 뭐라고 말하자 단테와 아자리도 경악했다. 곧 일행은 무슨 일인지 몰라서 당황하고 있는 추장에게 함께 몰려들었다.
“내가 뭐 잘못 했느냐?”
아자리가 자신의 지팡이를 들어보이면서 물었다.
“실례합니다. 슈슈니의 아슈타쿰 추장님에 대해서 더 아시는 거 없으시나요?”
“왜 그걸 나한테 묻느냐? 난 직접 만난 적도 없단다. 알면 너희들이 더 잘 알겠지. 마토아카의 딸이 여기 있다는 건 직접 만나고 왔다는 뜻이니까.”
샤카자이아가 헛기침하고 조심스레 말했다.
“추장님은…. 자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하셨어요. 이름으로도 부르지 않게 시키셨죠.”
“뭐, 정체를 생각하면 아주 현명하게 대처했구나. 너무 심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투슈가쿡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능청스럽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아자리가 단테를 향해 물었다.
“분명 마지막 마왕을 무찌른 구성원에 아슈타쿰이 있었죠?”
단테가 손가락을 하나씩 펼쳐가며 말했다.
“용사 아서 아카수스, 대마법사 켈커트리, 성녀 주니아, 길잡이 아슈타쿰. 틀림없어요.”
“그 사실이 너희하고 무슨 상관이니?”
추장이 그렇게 묻자 아자리가 바로 뭐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에 어색한 목소리로 원래 하려던 말 대신 다른 대답으로 얼버무렸다.
“그냥, 그냥 저희와 마주친 분이 그런 분이신 줄 미처 몰랐어요. 설마 동명이인인가 했는데.”
말하면서 아자리는 은근슬쩍 자신의 지팡이를 자기 뒤로 치웠다. 추장은 코웃음을 한 번 치고 눈을 몇 번 껌뻑거렸다. 일행이 긴장하고 계속 입을 다물자 그가 솔선해서 침묵을 깼다.
“흠. 뭐. 그래. 밥은 입에 맞았느냐?”
그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거리자 추장이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소화 시킬 겸 걷자. 보여줄 것도 있고.”
“보여줄 것?”
아자리가 그렇게 물어도 추장은 대답하지 않고 아까 한 손짓만 반복했다. 아무래도 따라가야만 하는 분위기 됐으니 일행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가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추장은 숲길로 그들을 안내하면서 샤카자이아에게 말을 걸었다.
“요즘 특이한 꿈을 계속 꾸었다. 독수리, 까마귀, 검은표범, 여우가 한데 모여 이곳을 지나가는 꿈이었지.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너희를 보니 아마 예지몽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너희 중에 독수리는 안 보이는구나.”
아자리가 단테에게 속삭였다.
“누가 봐도 여우는 당신이고.”
단테가 속삭였다.
“검은표범은 샤키.”
“아무래도 전 독수리보다는 까마귀에 가깝죠?”
“소거법으로도 그렇죠.”
“의외네요. 전 제 상징동물로 항상 박쥐를 생각했는데.”
“왜요? 박쥐 좋아해요?”
아자리는 단테의 질문을 무시하고 추장을 향해 말문을 돌렸다.
“독수리는 저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어요. 정말로 독수리가 저희와 같이 있었나요?”
“꿈을 해석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서 뚜렷한 답을 내릴 수가 없단다. 한때 차기 추장 후보였던 내 조카, 톤토가 있다면 큰 도움이 됐을 텐데 그놈은 문명으로 쫓겨난 지 오래됐어.”
샤카자이아는 애써 놀라거나 아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표정을 굳히면서 말했다.
“아까 일에 대해서는 죄송해요. 그런 사정이 있는 줄 몰랐어요.”
“사탄타도 딱히 널 야단치거나 화내려고 그런 말을 한 건 아니다. 그냥 알려주려고 한 거지. 나야 너희에게 사적인 감정은 없다만 슈슈니를 나쁘게 생각하는 부족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너희들이 방관하고 배신했다고 여긴단다.”
아자리는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반박했다.
“그건 너무하잖아요! 진짜 나쁜 놈들은 따로 있는데!”
투슈가쿡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싸움에서 좋고 나쁨이란 없다. 동물들의 영역 다툼에 나쁘고 좋음이 있더냐. 어미 토끼는 물론 새끼 토끼들까지 물어 죽이는 맹수에게 좋고 나쁨이 있더냐. 그들은 죽였고. 우리도 죽였다. 싸운 자들 사이의 우열은 승리로만 매기는 법이지. 남겨진 우리는 증오에 고이지 말고 흘려보내는 게 최선이고.”
아자리가 외쳤다.
“흘려보내면 안 되죠! 죄와 책임은 대물림되어야만 해요. 그게 문명의 의무에요. 과거의 죄를 그냥 흘려보내면 앞으로 일어날 죄까지 용서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추장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하지만 놓아줄 때도 알아야 해. 어쨌든 저것이 내가 보여주려는 거다.”
아자리는 상대가 가리킨 것을 보고 첫눈에 대체 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이상하게 생긴 나무였다. 그녀의 상식에 본디 식물이란 건 땅에서 태어나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뻗어 나가는 생물이었다. 그러나 일행들 앞에 있는 저 나무는 몸통의 중간이 쇠막대기처럼 직각으로 꺾여서 몸통이 수평으로 뻗었고, 수평으로 나아가던 나무의 몸통이 도중에 또 직각으로 꺾여서 하늘을 향해 가지와 잎을 뻗고 있었다.
“대체 저게 뭐야?”
크게 당황한 아자리와는 달리 샤카자이아와 단테의 반응은 평범했다. 단테가 아자리의 놀란 얼굴을 보고는 나서서 저 나무의 정체를 알려줬다.
“이건 표식 나무(trail tree)에요.”
“표식 나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죠?”
샤카자이아가 나무에 가까이 다가가서 줄기에 손을 대며 평범한 말투로 설명했다.
“간단해. 아직 자라고 있는 어린나무를 골라서 끄트머리나 중간 부분을 끈으로 잡아당기고 끈은 땅에 박아서 고정하는 거야. 그렇게 휘어진 상태로 나무가 자라면 끈이 풀려도 나무는 그 모습 그대로 굳어버리고 남은 세월 동안 성장하는 부분은 수직으로 자라지.”
추장이 이어서 말했다.
“우리에게는 대대로 물려 전해져 오는 문화란다. 와시추들은 이걸 보고 나무에 귀신이 들렸다고 생각해서 건드리질 않지. 저주받을까 봐.”
아자리는 가까이 다가가서 기이한 모습으로 자란 나무를 자세히 관찰하며 말했다.
“확실히 함부로 건드리고 싶지는 않아요. 이런 걸 베어버리기는 아깝다는 생각도 들고.”
“직접 자세히 보렴. 왜 내가 보여주고 싶어 했는지 알게 될 거야.”
샤카자이아는 표식 나무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그러다가 직각으로 꺾여있는 곳을 유심히 살펴보고는 거기에 손을 댔다.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여기 뭔가 새겨져 있어. 표식 나무를 만든 사람은 항상 이곳에다가 무언가를 기록해.”
아자리가 자기 겉옷의 주머니에 넣어둔 수첩과 연필을 꺼내고 그쪽으로 갔다.
“탁본을 떠야겠어요. 잠깐만요.”
그녀가 종이를 한 장 찢어서 나무에 대고 연필로 살살 문지르자 검게 칠해지는 종이 위로 하얀색 글자와 문양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아자리와 샤카자이아는 그걸 보고 눈을 크게 떴다.
“1893 08 21. 그리고 뭔가 이것저것 그려져 있는데 뭐지?”
“우리 부족이 쓰는 기호야.”
샤카자이아가 귀신이라도 본 사람 같은 표정으로 턱을 떨궜다. 그녀가 아자리를 향해 말했다.
“예전에 버려진 마을의 동굴에서 봤던 그 표식들 기억나? 앞에 적혀 있는 숫자가 와시추들이 쓰는 기년법을 뜻한다면 어머니가 사라진 날짜하고도 들어맞아.”
“그럼 뭐라고 적혀 있나요?”
샤카자이아는 침을 한 번 삼키고 입가를 가리면서 중얼거렸다.
“도움이 필요하다.”
경직된 채 가만히 있는 샤카자이아를 배려해서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일행은 얌전히 기다렸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사람들이 크게 지르는 고함이 이쪽까지 닿았다. 아마 경계를 서던 원주민들이 소리를 치는 건지 아자리는 뜻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유난히 단어 하나가 귀에 확 들어왔다. 로보. 추장이 다급하게 외쳤다.
“로보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