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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7화 〉[5권] 167회 - 타협 (167/188)



〈 167화 〉[5권] 167회 - 타협





레스 알 하자르는 한쪽 팔은 허리 뒤에 대고 한쪽 팔로만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었다. 태양의 열기가 땅에 반사되어 눈을 감아도 눈알이 뜨끈하다. 그때 나이가 열일곱이었던가, 열여섯이었던가. 레스는 또렷하게 기억이 나질 않았다. 먼 곳에는 자신의 부족이 오아시스 근처에 세운 천막들의 군집이 달궈진 아지랑이 너머에 신기루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주변에 특별한 건 전혀 없다. 레스는 아무 생각 없이 한쪽 팔로 팔굽혀펴기를 하는 젊은 시절의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실 특이한 게 있기는 했다. 근처에 커다랗게 자란 야자나무의 어둠 속에 누군가가 해먹을 치고 팔자 좋게 누워 있었다. 레스는 저쪽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어린 레스는 계속 한쪽 팔로 팔굽혀펴기를 하면서 숫자를 세고 있었다.

“백 이십칠. 백 이십팔. 백 이십구.  삼십. 백 삼십일.”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수를 세고 있는 어린 자기 모습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신기했다. 그 시절에는 머리를 길게 길러서 어깨까지 한 줄로 땋아 늘어뜨렸지. 잠시 후에 어린 레스가 야자나무의 어둠을 향해 외쳤다.

“백 오십 개 끝났어.”

야자나무의 어둠 속에서 자신의 스승이 말했다.

“오른팔 했으니 이제 왼쪽 팔 해야지 왜 가만히 있어?”


“숨 좀 돌렸다가 하면 덧나?”


“말대꾸했으니 스무  추가다.”


어린 레스는 투덜거리면서 입고 있던 땀투성이 웃통을 벗고 왼손만으로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팔굽혀펴기 횟수가 오십을 넘을 즈음 스승이 어린 레스에게 물었다.

“저번에 만났던 도적놈이 그저께에 몰래 다가왔었다. 그래서 내가 처리해야만 했지. 네가 책임지고 맡는다고 하더니 왜 자꾸 살려 보내는 거야?”

“그냥 보내지 않았어. 고환을 쏴버렸지.”

“멍청하긴. 그러니까 목숨을 걸고  다시 쫓아오려고 하지.”

어린 레스가 잠깐 몸을 부들거리면서 팔굽혀펴기를 멈췄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댁이 끝장을 냈어?”

“한쪽 불알이 남아있기에 그것도 내가 날려줬다.”


쉬고 있던 어린 레스는 팔굽혀펴기로 돌아갔다. 스승이 다시 물었다.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이냐?”


“뭘.”

“그냥 놔주는 거 말이다.”


“가끔은 타협할 날도 오겠지.”

그의 스승이 해먹에서 일어나 다리를 바깥으로 꺼내고 어린 레스를 바라보았다.

“그건 위험한 생각이야.”


“뭐가.”


“타협은 약자들만 하는 거다.”

어린 레스가 대꾸했다.


“약함과 강함을 무엇으로 구분하는데?”


어느 틈에 레스의 생각과 감각은 어린 시절의 자신으로 빨려 들어가 있었다. 열기와 몸의 박동, 바람과 냄새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사쿠라비의 땅으로 돌아왔다. 방랑자들의 땅으로. 그의 스승이 말했다.

“지켜주는 이 없을 때 우리는 누구에겐가 죄를 짓는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약자는 자기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이다. 총잡이가 되겠다면 여차할 때 타협해서 도망치려는 생각 따위 해선 안 돼.”


“난 당신 같은 괴물이 아니야. 백오십  끝났어.”

그의 스승이 어린 레스를 향해 조약돌을 휙 던졌다.


“분명 스무  추가 했었지?”

레스는 쳐다보지 않고 기척만으로 조약돌의 방향을 예상하고 팔굽혀펴기를 하던 왼팔을 옆으로 뻗어서 날아오는 조약돌을 붙잡았다. 그리고 허리에 대던 오른팔로 땅을 밀었다. 레스는 엎드린 채 조약돌을 스승에게 도로 던졌고 날아가던 조약돌은 다시 날아온 다른 조약돌과 부딪혀 어딘가로 튕겨 나갔다. 레스는 자세를 고쳐잡고 다시 팔굽혀펴기했다. 너무 지쳐서 고개를  기운도 없다. 자신을 향해 스승이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백… 칠십…. 끝.”


그는 앞으로 엎어졌다. 땅에 떨어진 땀방울에서 지글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의 스승이 레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타협은 약자만 하는 거다. 여차할  타협하는 전사는 없느니만 못한 법이야.”

“하지만 사는 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잖아. 당신이야말로 왕을 지켜야 한다는 맹세를 깨고선 우리한테 온 주제에.”

땅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 레스는 말했다. 다음 순간을 레스는 직감했다. 그의 스승이 자신의 등을 엉덩이로 깔고 앉자 자신의 내장까지 사막의 열기가 전해졌다.

“으가가가각!”

“맞아.  타협했다. 형제들이 일으킨 반란에 동참하느냐, 아니면 지킬 가치도 없는 술탄을 위해 다른 모든 형제에 맞서서 싸울 것이냐. 결국, 나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다.”

레스는 어떻게든 몸이 달궈진 땅에 익어버리려는  막으려고 양팔로 몸을 일으켜 버텼다. 팔이 부들거리면서 떨리는 와중에도 레스는 화제를 이어갔다.


“그런 사정이 있었으면 미리 말하던가! 그런 상황이면 선택지가 없었던 거네!”

“나한테 선택지가 없었다고? 천만에. 사람은 언제나 선택할 힘이 있어. 나는 내 의지로 선택해서 타협했다.”

“맹세를 지키고 예니체리로 남았더라면 반드시 죽었을 텐데도?”

“생명은 죽었더라도 전사로서는 살았겠지. 나는 이제 전사로서 죽을 수 없을 거다. 너는 어쩔 거냐? 지키지 못할 맹세는 애초에 하지도 마.”


레스는 심호흡을 하고 팔을 단단히 굳혔다. 숨을 고르면서 그가 중얼거렸다.


“타협은 약자들이나 하는 것이다. 그거 하나는 확실히 기억해두죠.”

“그럼 언젠가 맹세를 깨고 싶어질 때마다 떠올려라. 타협하는 날이 네가 이름을 포기하는 날이라는걸. 그걸 죽음보다 두려워해야 전사는 진정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다.”

 말을 듣고 머릿속과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탈진해서 정신을 잃는 순간인가, 이미  번 겪어봤을 텐데 이번에는 참 기분이 좋네. 하지만 알고 보니 정신을 잃는 순간이 아니라 정신을 차리는 순간이었다. 레스는 마차의 짐칸에서 눈을 떴고 바닥에 엎드려 뻗친 채 두 팔로 몸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코앞에는  짐칸 문을 연 피카니가 황당해하는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바깥바람이 시원했다. 피카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상대의 시선이 자기 등을 향하고 있기에 레스는 그제야 왜 자기 몸이 이렇게 무거운지 깨달았다. 좌석에 앉은 타티아나와 루나가 앞으로 고꾸라져서 마차 짐칸 바닥에 엎드려 뻗친 레스의 등에 자연스럽게 양팔과 머리를 기대어 졸고 있었다. 더는 버티기 힘들어진 레스가 팔을 떨면서  목소리로 피카니에게 말했다.

“도와줘.”

“저희 도착했어요! 나오세요!”


피카니가 다급하게 외치자 두 여인은 레스의 등을 밀면서 윗몸을 일으키고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켰다. 타티아나가 눈을 비비면서 바닥에 뻗어있는 레스를 내려다보며 비웃었다.

“아하핫. 잠버릇하고는.”

“끄르르르르르륵. 끄오르르르르륵.”


엎드린 레스의 목에서 못 알아먹을 이상한 소리가 기어 나왔다. 여자들이 먼저 짐칸에서 나왔다. 레스는 피카니와 아비투스의 도움을 받아 짐칸에서 끌려 나왔다. 안색이 심하게 퀭해진 레스를 보고 아비투스가 경악했다.

“날이 갈수록 상태가 나빠지잖아. 마법사님에게 상담이라도 받는  어때?”

“그냥 재수 없는 꿈을 꿔서 그래.”


레스가 꿍얼거렸다. 피카니가 레스의 몸에 묻은 먼지를 대충 털어주고 주변을 가리켰다.

“어쨌든 여기가 전에 말했던 주둔지야.”


레스는 피카니가 가리킨 곳을 따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군사적 거점이라기보다는 어설프게 꾸며진 마을에 가까웠다. 때가 잔뜩 탄 텐트가 줄줄이 늘어섰고 외곽에 배치된 감시탑에 경계 근무 중인 보초병은 소총을 그냥 구석에 내팽개치고 주저앉아서 하염없이 지평선을 초점 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레스의 시선이 어설픈 밧줄 울타리로 둘러싸인 밭에 멎었다.

“둔전을 하네.”


피카니가 대답했다.


“고구마와 감자밭이야. 참고로 여기 친구들이 마지막으로 사격 훈련을   2년 전이래.”


카르델이 옆으로 다가오면서 끼어들었다.

“저건 대체 뭐야?”

거점의 제일 가운데에는 뜬금없이 조립형 목조 건물이 우뚝  있었다. 피카니가 저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곳의 총지휘관이자 예비군 장교인 세리던 대령의 자택이야. 공금으로 주문해와서 저기에다가 지었다는군. 하딘 대위는 저기에서 세리던 대령을 상대하는 중이고.”


레스가 피카니에게 물었다.

“넌 여기서 뭐 해?”

“피난.”

그때 타티아나가 이쪽으로 다가오며 외쳤다. 손에는 종이쪽지가 들려 있었다.


“높으신 분께서  보고 싶다고 하신다.”


피카니가 대답했다.


“바쁘다고 해줘. 용건은, 위험한 포로를 감시 중.”

“직접 가서 바쁘다고 해.  너랑 교대하러 왔으니까.”


카르델이 피카니의 등을 툭 하고 떠밀었다.


“어서 가 애물단지야. 가장 잘하는 게 그거인데 그거라도 하란 말이야.”


아비투스는 레스는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피카니는 혀를 차고 잘 안 들리는 목소리로 욕을 중얼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타티아나가 들고 있는 종이쪽지를 일행에게 보이며 말했다.


“전서구가 우리보다 먼저 여기에 도착해 있었어. 적혀있는 바로는 모르스와 마담 윈프리끼리 서로 정보망을 공유하기로 협의했나 봐. 다른 그랜드 마스터들이나 핑커튼이 알아낸 정보도 우리한테 전달되도록 처리됐어.”


레스가 물었다.

“과정이 복잡해질 텐데 보안 문제는?”


“그건 그쪽이 조심할 문제지. 어쨌든 지금 나머지를 읽어줄게. 캘러헬과 라카키 그리고 조 레오포드와 슌카와칸이 빈센트 중위와 오늘 아침에 합류했음. 현재 소령과의 합류를 대기 중. 대체 소령이 누구지?”


팔짱을 끼고 귀를 기울였던 아비투스가 곤란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설명하려면 복잡해.”

타티아나가 콧방귀를 한 번 뀌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목표물이 시튼 빌리지에 있을 확률이 높다고 모르스가 전함.”


레스가 눈을 크게 뜨면서 외쳤다.


“애들이 거기에 있다고?! 모르스는 어떻게 알았지?”

“근거, ‘앞질러서 배치해둔 정보원들로부터 소식이 없음’이라고 적혀있네.”


카르델이 투덜거렸다.


“쓸모없는 소식이네.”
타티아나가 레스의 목을 가리켰다.


“토템을 꺼내봐. 어젯밤에 루나 씨가 완성했잖아. 여기서 시튼 빌리지까지 마차로 달려서 하루 정도 걸려. 그 친구들이 저쪽에 있다면 반응이 있을지도 모르지.”


레스는 옷깃에 넣어둔 꿈 덫을 꺼내 손가락 사이에 끼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타티아나가 재촉하는 투로 말했다.

“사용법은 들었지? 이제 그들을 떠올리고. 집중해.”


아자리아 비온 라프라스, 샤카자이아, 단테 팡랑. 생각할수록 참으로 굵고 짧은 인연들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어째서 그들이 자신을 그토록 믿어줬는지 새삼 레스는 의문이 들었다. 레스는 꿈 덫 목걸이를 목에서 빼내고 한 손으로 줄을 움켜쥐었다. 한쪽 무릎을 굽혀서 땅에 댄 다음 톱니바퀴 속에 엉킨 거미줄 장식의 한가운데를 한참 노려보다 레스는 눈을 감고 손이 떨릴 정도로 힘을 줬다. 극한의 집중상태에 들어가기 위해 레스는 자신에게 암시를 거는 주문을 읊었다.

“사냥꾼이란 동시에 사냥감. 그리하여 내 활이 당긴 무수한 화살들이 기어코 내 가슴을 찾아왔구나. 날아가는 자는 동시에 기어가는 자. 그리하여  날개가 태양 속에 펼쳐졌을 때 땅 위에 비친  그림자는 거북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는 믿는 자이자 의심하는 자이니. 때로 나는 내 상처에 스스로 손가락을 찔러 넣어야만 했다. 다른 이들에게서 더 큰 믿음을, 다른 이들보다  큰 지혜를 얻기 위하여.”

토템이 떨렸다. 그의 손이 부서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심하게 경련했다.


“죽음이 나를 가릴지라도, 더욱 거대한 침묵이 나를 껴안을지라도, 나는 진정 사라지지 않으리. 모든 것은 변하지만 사랑은 변하지 않으며 사라지지도 않으리. 들판에 이슬을 남기며 새벽을 떠도는 안개도 언젠가는 솟아올라 구름이 되어 하늘로부터 쏟아질 터이니.”


토템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휘파람으로 부는 노래처럼 아름다운 메아리가 울렸다. 거미줄 장식에 빛의 방울이 맺히고 거미줄 자락을 따라 중력을 향해 뚝뚝 떨어졌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숨도 쉬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밤이 될 때마다 어둠은 태양이 떠나는 걸 자신이 이겼다고 착각하나 결국 밤은 태양에게 패배하리라. 밤과 태양처럼 모든 것은 변하나 진정 사라지지 않으리!”


레스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악을 지르다시피 낮게 소리 질렀다. 목걸이를 움켜쥔 레스의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뚝뚝 흘러내릴 지경이 되자 타티아나는 깜짝 놀라 그만하라고 외쳤으나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우리 만약 기억의 새벽빛 속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러면 우리 다시 함께 이야기하고, 너는 내게 노래 불러주게  것을. 우리의 손이 또 다른 꿈속에서 만날 수 있다면 우리 함께 또 하나의 탑을 쌓으리라!”

레스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면서 온몸을 위아래로 들썩거렸다. 핏물과 빛나는 방울이 뒤엉킨 자신의 토템 가운데에 어느샌가 눈동자처럼 밝게 빛나는 보석이 엉겨있었다. 검으면서도 하얗게 빛났다. 그리고 꿈 덫은 나침반의 바늘처럼 손의 움직임과는 무관하게 계속 똑같은 방향을 향해 그 눈동자를 향하고 있었다. 말을 잃어버린 일행들의 시선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레스가 꿈 덫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우리가 정말 다시 만나기는 하겠구나.”

잠깐의 간격을 두고 그가 다시 말했다.

“정작 나는 길을 잃어버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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