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화 〉[5권] 168회 - 업보
같은 시간, 피카니는 병사의 안내를 받으며 지휘관의 자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병사는 피카니 때문에 잔뜩 긴장한 눈치였다. 가는 길 내내 병사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니 피카니는 문명 세계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피카니는 병사에게 고맙다고 가볍게 인사해줬다. 병사는 심장마비라도 온 사람처럼 격하게 경례를 하고 부리나케 자리를 떠났다. 피카니는 한 번 크게 지친 표정으로 숨을 내쉬고 문을 똑똑 두드렸다.
“부름에 응했습니다.”
곧 누군가가 이쪽으로 오더니 문이 열렸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하딘 대위였다. 하딘은 이상한 음식 먹은 사람 같은 표정을 지으며 피카니를 향해 극진히 정중한 말투와 억양을 썼다.
“들어오시지요, 홀리데이 경.”
피카니는 당황했으나 하딘의 눈빛으로부터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는 걸 알아채고 괜히 질문으로 시간 끌지 않았다. 두 남자는 복도를 걷다가 곧 식탁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거지소굴 같았던 주둔지와는 대조적으로 내부는 청결한 데다가 품질 좋은 가구들로 꾸며졌고, 남쪽을 향해 넓게 뚫린 유리창을 통해 가득 들어온 햇살 덕에 분위기도 일품이었다. 먼저 식탁에 앉아 있었던 나이 지긋한 남자가 피카니를 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경례했다.
“제국 만세! 이곳을 방문하셔서 영광입니다!”
세리던 대령의 피부가 얼마나 하얗고 윤기가 흘러넘쳤는지 박물관에 전시된 대리석 조각상에 견줄 정도였다. 또 풍성하게 기른 기병대식 콧수염이 어찌나 완벽하고 깔끔한지 지금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두면 미용사들에게 보여줄 실습용 본보기로 쓸 수도 있었다. 황야에서 거친 생활을 하면 얼굴이 쉽게 삭기 마련인데 대령의 2대 8로 활짝 트인 검은색 가르마 사이의 이마에는 주름살이 다리미로 밀어버린 듯 종적을 감추었다. 윗머리, 옆머리를 포마드로 듬뿍 발라 모조리 뒤로 넘겨서 다듬었는데, 대령의 뒤통수로 머리칼이 모인 꼴이 망아지의 갈기 같았다. 입고 있는 장교용 군복은 두말하면 입 아프게 소맷자락이 닳은 흔적조차 없었다.
목소리부터 몸동작, 표정에 이르기까지 상대의 행동에는 절도가 흘러넘쳤다. 그리고 가식도. 피카니는 무슨 일을 겪게 될지 직감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시발. 이럴 거 같더라.’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모자를 벗어서 가슴에 대며 고개를 앞으로 꾸벅 숙이고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환대 감사합니다. 저는 어디 앉으면 될까요?”
세리던 대령이 깍듯한 손짓으로 가장 햇살이 잘 닿는 자리를 가리켰다.
“급하게 준비해봤습니다만 차려둔 게 부족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식탁 위에는 설탕 과자와 탱글탱글한 과일 젤리가 크리스털 그릇 안에서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은제 주전자에는 홍차의 향이 피었고 옆에 놓인 백자로 만들어진 종지 안에는 차와 다과에 곁들일 꿀이 가득했다. 피카니는 종지의 뚜껑을 도로 놓고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방 안에 있던 다른 한 명을 향해 바라보았다.
“저쪽은 누구신지?”
피카니가 가리킨 자리에는 얼굴이 창백하고 검은색 머리카락에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젊은 청년이 실내 가구의 일부처럼 얌전히 앉아 있었다. 세리던 대령은 굳이 주먹을 입가에 대며 헛기침을 하고는 하딘을 향해 화살을 돌렸다.
“대위? 우리 군종 마법사를 소개해주게. 아까 먼저 소개를 듣지 않았나?”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하딘은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냉정한 목소리로 상대를 가리키며 피카니에게 말했다.
“이곳 11대대의 군종 마법사이자 군종 신부이신 알렉산더 크로네 형제님이십니다. 용사님.”
피카니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허벅지를 꼬집고 뺨을 깨물어서 견뎌냈다. 크로네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인사만 들었는데도 목소리에서 어수룩한 티가 느껴졌다. 발음도 뭉개졌다. 외모로는 스물 정도로 보이는데 변성기는 다 안 온 모양이다. 세리던 대령이 그것 때문인지 상대를 향해 매서운 시선을 보내자 크로네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굵은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피카니는 평범하게 인사를 받아주고 본격적으로 화제를 꺼냈다.
“대령님. 죄송한데 여기 지도는 없습니까?”
세리던 대령이 손을 튕기고는 하딘을 째려보았다.
“대위! 지도를 펼치게!”
잠깐 침묵이 흘렀다. 돌처럼 하딘은 가만히 있다가 기계적인 손동작으로 자신의 안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고 탁자 위에 펼쳤다.
“여기 있습니다. 선배님.”
평소 같았으면 하딘이 적극적으로 화제를 진행했을 터인데 지금 그에게서는 의욕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피카니가 자기도 모르게 하딘을 빤히 쳐다보자 하딘은 눈동자만 굴려서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을 또 눈치채고 대령이 외쳤다.
“대위! 왜 시선을 피했나!”
“시선을 피한 게 아니라 옮겼을 뿐입니다. 선배님.”
“지금 장난치나?! 군인의 미덕은 복종이거늘! 당장 용사님에게 결례를 사죄하도록!”
잠깐 침묵이 흘렀다. 하딘은 피카니를 향해 고개를 녹슨 기계부품이 움직이듯 삐거덕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용사님.”
“아닙니다.”
피카니는 참기 힘들어서 죽을 거 같았다. 허벅지를 너무 많이 꼬집어서 감각이 없어졌다. 잠깐 차를 마시는 척 찻잔과 잔 받침으로 얼굴을 효과적으로 가린 다음 피카니는 간신히 평정을 되찾았다. 지도를 가리키며 그가 물었다.
“대령님이 평소 수색하시는 범위가 얼마나 되시는지요?”
계속 자신 넘치는 태도를 지켜왔던 세리던 대령의 표정이 순간 무너지는 걸 피카니는 도박사의 눈으로 감지했다. 그는 또 굳이 입가에 주먹을 대면서 헛기침하고 입을 열었다.
“전술적으로 어떤 목적을 위해 묻는 말입니까, 용사님?”
피카니는 순간 어이가 나가서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잠깐 굳었다. 그리고 침착하게 말했다.
“수색하는 과정에서 확인하신 특별한 점이 있다면 저희도 참고하기 위함입니다.”
“아! 과연 그렇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그리고는 약 10초 정도 온갖 미사여구로 범벅된 대령의 피카니를 향한 칭찬이 방안을 꽉 메웠다. 하던 말을 다 마치고서는 세리던 대령이 크로네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예. 그래요.”
크로네가 풋내 나는 목소리로 말하자 대령이 이번에는 하딘을 바라보았다.
“자네도 동의하지?”
“그렇습니다. 선배님.”
차라리 앵무새가 저것보다는 사람답게 말할 지경이다. 피카니가 다시 차를 마시는 척 찻잔과 잔 받침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례합니다. 여기 도착하자마자 볼일 보는 걸 깜빡했지 뭡니까. 곧 돌아오겠습니다. 대위, 같이 가시죠. 안내 부탁드립니다.”
피카니가 하딘을 향해 눈짓하자 하딘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앞장서서 방을 나왔다. 그걸 보고 세리던 대령이 격하게 외치면서 그가 나간 곳을 향해 삿대질했다.
“저 저 버릇 없는 놈 같으니! 격식도 안 차리고! 저깟 놈 데리고 여태껏 어떻게 참아오셨습니까? 제가 따끔하게 혼 좀 내야….”
“실례하겠습니다 대령님.”
피카니는 적당히 얼버무려서 상대의 말을 끊고 서둘러 하딘을 따라갔다. 두 남자는 바깥으로 급히 탈출하고 인적 없는 곳까지 잽싸게 걸었다. 안심할 수 있을 만한 곳에 도착하자 하딘이 백 년 동안 응어리진 것 같은 한숨을 터트렸다.
“자네한테 빚 하나 졌군. 오 신이시여. 오 여왕님!”
피카니도 미간을 손으로 움켜쥐면서 앓는 소리를 한참 흘렸다.
“예비군 장교라는 족속들은 다들 저럽니까?”
하딘이 진저리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쓰고 있던 모자를 땅에 버리고 양손으로 두피를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눈빛에서 광기가 느껴졌다. 그가 양팔을 축 늘어트리면서 피카니를 바라보았다.
“내가 왜 승진을 거부했는지 이제 이해가 가나? 승진하면 저런 놈들이랑 부대껴야 해.”
“오늘 안에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는 있을까요? 평소 수색 범위가 어느 정도냐고 물었을 때 바로 대답하지 못한 거로 봐서는….”
하딘이 도중에 그의 말을 끊었다.
“모르니까 대답을 피했던 거야. 밑 것들한테 다 떠넘겼으니까.”
자신의 소중한 기병대 모자를 도로 줍고 정성껏 먼지를 닦아내며 그가 말을 이었다.
“그 양반 군복 깔끔한 거 봤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죠.”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야. 옷에 약장 없던 거 자네도 봤냐고.”
피카니는 떠올리기 싫은 방금의 체험을 떠올려야만 하느라 인상을 찌푸렸다.
“그 알록달록한 장식? 전혀 없었죠. 그게 왜요?”
하딘이 떨리는 손으로 안주머니에서 파이프 담뱃대를 꺼내고 자신의 담뱃대를 노려보았다.
“약장이란 전공을 세웠거나 전투를 겪으면 기념으로 받을 수 있는 장식이야. 훈장을 간소화해서 옷에 달아두는 거지. 대령이나 되는데 약장이 없다는 건 계급을 돈 주고 샀다는 뜻이고.”
“매관매직?! 그런 야만적인 풍습이 아직도 있습니까?”
피카니가 경악하자 하딘이 떨리는 손으로 성냥불을 켜려고 헛손질을 반복하며 대답했다.
“풍습 정도가 아니라 나라에서 권장하는 제도야.”
보다 못한 피카니가 하딘에게서 성냥을 빼앗고 손톱으로 긁어서 불을 켰다. 그리고 담뱃대에 불을 붙여주었다. 하딘이 담배를 태우고 나서야 침착해지자 피카니가 화제를 이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군요. 매관매직을 권장한다고요?”
“경매도 할 수 있어.”
입술을 모아 동그라미 모양으로 연기를 한 번 뿜고는 하딘이 자조적으로 씩 웃었다. 피카니가 말을 잃어버리자 하딘은 알아서 화제를 이었다.
“이유 하나. 신분제 때문이야. 제도적으로는 평민도 사관후보생으로 지원해서 승진하면 장교가 될 수 있지. 그런데 평민 출신 장교한테 귀족 부사관과 병사들이 충성을 바칠까?”
“그래서 장교는 무조건 귀족이 해야만 한다?”
“높은 계급일수록 가격이 비싸. 즉 자연스럽게 신분이 높은 귀족일수록 고급 장교가 될 확률이 높아지므로 서열도 자연스럽게 정리된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수수료를 떼가지.”
“카지노 하우스도 아니고 그게 말이 됩니까?”
“참고로 명예직인 예비역은 원래 계급보다 시세가 절반이야.”
하딘이 피카니를 향해 눈을 살짝 깔고 눈썹을 들썩거렸다. 피카니는 더 할 말을 찾기가 어려워서 양팔을 한 번 들었다가 늘어트렸다.
“웃음도 안 나오네.”
“장점이 전혀 없지는 않아. 전임자가 관직을 팔고 나가면 국가에서는 퇴직금을 지급해줄 의무가 사라지거든. 전임자는 원래 받을 퇴직금보다 비싸게 자기 관직을 팔려 할 거고 그럼 국가가 수수료로 채갈 금액도 올라가겠지? 군대는 돈을 물처럼 쓰는 곳이니까 예산을 얻기에는 이만한 방법이 없어.”
“그리고 전시 상황이 되니까 그 예비역이 진짜로 현장에 나왔다? 신이시여!”
“자. 홀리데이 용사님.”
갑자기 하딘이 피카니의 어깨에 손을 턱 얹으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내 부하들하고 같이 탐문을 하러 다녀야겠어. 이유는 말 안 해도 알 거라 믿네. 그동안 자네에게는 자네만이 할 수 있는 임무를 맡기도록 하지. 우리는 요 며칠 동안 철야를 거듭했고 씻지도 못하고 건빵만 먹으면서 버텨왔으니 오늘은 여기서 체력을 보충해야 해. 그동안 누군가는 책임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상대해줘야겠지?”
잠깐 침묵이 흘렀다. 피카니는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고 쪼그려 앉으면서 떨었다. 하딘이 담배 연기를 위로 불면서 피카니에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업보라고 생각해. 용사는 팔면 시세가 얼마나 되나 뜬금없이 궁금해지는군.”
“아아아아아아아아악!”
피카니는 땅에다가 얼굴을 박고 비명이 퍼지지 않게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