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5권] 172회 - 극약과 불치병
레스의 맞은편에는 한 청년의 모습이 수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으로 뿌옇게 떠올라 있었다. 겉모습은 그와 연배가 비슷하거나 살짝 어렸다. 중성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가늘고 선명한 눈매에 흐릿하게 처진 눈꼬리, 눈자위와 눈동자는 색이 뒤바뀌어서 검은색 자위 안에 하얀색 눈동자가 소용돌이를 치고 있었다. 레스가 기억하기로는 상대의 눈동자는 녹색이었으나 렌즈가 보여주는 모습은 빛과 약간의 그림자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올이 가는 머리카락은 산발이 될 지경으로 관리 없이 길게 자라 앞머리는 한쪽 눈을 가렸고, 귀는 안 보였고, 뒷머리는 목덜미까지 닿았다. 표정과 눈으로부터 생명력은 염전 속의 진흙에서나 피는 새싹만큼 희박했다. 옷차림은 거친 환자복 위에 성의 없이 외투만 걸치고 있었다.
파스낙 리차트라는 자신의 팔에 꽂힌 주삿바늘과 링거대와 연결된 고무관을 잠깐 바라보면서 매만지다가 초점을 다시 레스에게로 돌렸다. 그가 손톱으로 수화기를 두드리자 메마른 소리가 레스의 귀를 때렸다. 톡톡.
[귀신이라도 본 표정이군.]
“살아있었나?”
파스낙이 등받이에 체중을 실으면서 입가를 짓궂게 히죽거렸다.
[모르스에게 너한테 안부 전해달라고 부탁까지 했었는데 날 잊은 거야? 나쁜 남자 같으니.]
레스는 머리가 아파져서 팔꿈치를 탁자에 기대고 이마를 감쌌다. 그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생각에 빠진 찰나 파스낙이 마음대로 떠들었다.
[서로 그 난리를 쳐놓고 결말은 서로 포로 신세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안 그래?]
그의 음정과 발음은 음치의 노래처럼 불안정하고 담긴 감정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레스는 혼란에 빠졌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갑자기 파스낙의 모습이 일그러지더니 누군가가 옆에서 끼어들어 그의 수화기를 빼앗는 모습이 나타났다. 레스가 갑자기 끼어든 누군가의 얼굴을 보고 반사적으로 외쳤다.
“캘러헬 씨?!”
[미안해 하얀 모자. 많이 놀랐을 텐데. 사정을 설명해주지. 집중할 수 있겠나?]
“듣고 있습니다.”
렌즈가 비추는 화상에 파스낙과 캘러헬의 모습이 동시에 나타났다. 파스낙은 팔짱을 끼고 하품을 했고 캘러헬은 파스낙보다 조금 앞으로 나서서 수화기를 들었다.
[모르스가 나더러 이 녀석한테서 쓸모 있는 걸 얻어내라고 시켰어. 우리는…. 서로 대화를 나눴고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았지. 파스낙의 요구 사항은 콜라 한 병이 포함된 저녁 식사와 오늘 하루 치의 인슐린, 그리고 자네와 대화할 기회였어. 그렇게 된 거야. 모르스가 이것 때문에 나한테 또 뭐라 하겠지만 그건 우리가 알 바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지금 어디 계시죠?”
[그쪽하고는 먼 곳에. 일단 나는 여기까지.]
캘러헬이 레스에게 작게 손짓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수화기를 탁자 위에 내려놓은 다음 자리를 비켰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허공을 하염없이 노려보고 있던 파스낙이 팔만 움직여서 수화기를 돌려받았다.
[보면 알다시피 미스터 케이도 마침 그쪽하고 대화하고 싶었던 눈치여서 내 요구 사항이 통했어. 또 보면 알다시피 원거리 화상 통화는 자원과 인력이 많이 들어. 이렇게 유용한 수단은 극히 제한된 자들만이 누릴 수 있지. 남한테 자랑해도 좋아 데스페라도.]
레스는 이마를 감쌌던 손을 떼고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나한테서 원하는 게 뭐야?”
[그냥 잡담. 그거뿐이야.]
파스낙의 종잡을 수 없이 위아래로 떨리던 음정이 점잖게 가라앉았다.
“지금 진심이야?”
[당연히 진심이지. 솔직히 최근 1년 중에서 지금이 제일 진심으로 흥분되는 순간이야. 우리끼리 서로 죽이려고 했던 것보다도. 누구랑 서로 죽이는 거야 지긋하게 해본 거고, 누군가와 잡담해보는 건 내 인생에서 정말 드물거든. 특히나 내가 지금 갇혀서 감시당하는 중이잖아. 그쪽도 그렇고. 지금 우리의 대화는 순수하게 우리의 자유의지로 이루어지고 있어.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야.]
파스낙이 과장된 말투로 호들갑을 떨었고. 레스가 보기에는 상대의 감정에 꾸밈이 없었다. 밀실의 어둠에 눈이 익은 레스는 파스낙을 잡아먹을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피카니를 한 번 흘겨보고 입을 열었다.
“너는 저쪽한테 뭘 줬지?”
[내 비자금이 묻힌 위치 중 하나. 식물학자가 뿌려놓은 종자만큼이나 분산해서 이곳저곳 많이 숨겨놨지. 혹시 자네도 나처럼 쌓아둔 게 과해지는 날이 온다면 나처럼 해둬. 훗날 만약의 보험도 되고 탈세도 되거든.]
방안이 워낙 조용해서 수화기에서 나오는 소리가 다른 사람에게도 조금은 들렸다. 세금은 내고 있었구나. 릴리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다가 헛기침했다. 레스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수화기에 얼굴을 댔다.
“나는 너하고 떠들 말이 없어.”
[그럼 내가 알아서 떠들어야겠네. 자네 지금 원래 일행들을 쫓아가는 중이랬지. 얼마나 많이 따라잡았나?]
“내가 너한테 말해줄 의무도 없어.”
파스낙은 느긋한 말투 그대로 언성을 조금 높였다.
[난 잡힌 신세야. 겉으로든 속으로든 꾸미는 건 하나도 없다고. 내가 뭘 듣든 뭘 말하던 우리 사이에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나. 정 내 질문에 답해주기 싫으면, 질문만 해도 상관없어. 뭐든 상관하지 않고 성의껏 답해주지. 거짓말 하나 없이. 그게 잡담이니까.]
레스는 몸 안으로 깊은 한숨을 밀어 넣고 상대를 노려보며 말했다.
“좋아.”
상대는 흡족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레스는 한 호흡 뜸을 들이고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우리는 습격을 당했어. 습격자 중에서 특이한 자들이 있었지. 널 그랜드 마스터라고 부르는 마법사들이었는데, 타티아나가 말하길 그들이 ‘보가티에’라고 불린다더군.”
파스낙은 대답하면서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그랜드 마스터? 그렇게 불린지 참 오랜만이군. 모든 제국은 항상 특별한 전사 집단을 만들어왔지. 군대와는 별개로 자신들의 문화와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서. 보가티에 기사단은 대대로 마왕의 친위대원과 공작원, 정예병을 양성해왔고 구성원 상당수가 나처럼 주문을 외치지 않고도 마법을 쓸 수 있는 고위 마족인 ‘쿠드라크’로 이루어져 있다.]
“주워들은 소리로는 넌 뒷거리 출신이라고 하던데. 어쩌다 수장이 됐지? 유서 깊은 조직이라면 규율이나 명예, 출신에 얽매일 텐데.”
[그건 좋은 지적이야. 사연을 다 듣겠나? 조금 길어.]
레스는 방 안의 사람들을 향해 시선을 한 번 돌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듣지. 모처럼이니.”
[아주 오래전 내가 그날 벌어서 그날만 먹고 살던 시절의 이야기다. 어느 날 나에게 아주 이상한 의뢰가 왔지. 보가티에의 그랜드 마스터를 암살하라는 내용이었고 의뢰인은 익명이었어. 중개업자는 수상쩍으니까 관두는 게 좋다고 조언했지만 나는 흥미도 들었고 묘한 예감이 들어서 의뢰를 받았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그랜드 마스터에게 다가가는 건 성공했지만 녀석은 날 기다렸더군. 뭐, 싸움의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는 굳이 설명 안 해도 되겠지.]
“그리고?”
[의뢰인은 마왕이었다. 우리 서로 알고 있는 그 마왕이 맞아. 결투가 끝나자마자 수행원들과 함께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어.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날 새로운 그랜드 마스터로 임명했지. 기사들이 지켜야 할 규율이나 전통, 명예 따위에는 듣거나 읽은 적도 없었지만 그래도 한 조직의 수장이 되면 얻게 될 혜택은 쏠쏠했다. 그 뒤로는 나도 놀랄 정도로 일을 잘했지. 누구 훈계하거나 가르치는 게 의외로 내 적성에 맞더라고. 당연히 마왕이 외교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내게 직접 맡기는 일도 흔했고 나는 그런 건 한 번도 실수하지 않았다. 뭐, 예전에는 그랬다는 말이야.]
레스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마왕이 왜 그런 짓을 했지?”
파스낙이 어딘가로 손을 쭉 뻗더니 콜라병을 가져와서 힘겹게 들고는 병에 꽂아둔 대롱을 물고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목을 축이고 나서야 그가 말했다.
[힘이 강하고 역사가 오래된 조직들은 항상 머리부터 썩지. 마왕은 조국을 상징하는 위대한 기사단이 부패한 꼴을 참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젊고 혈기 왕성한 마왕은 내 이야기를 듣고는 날 중병을 치료하기 위한 극약으로 삼았던 거다. 물론 기사단 안에서 내 취임에 반대하는 자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결투를 신청하면 문제가 해결됐고 기사단도 한결 청렴해졌지.]
레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해가 안 돼. 아무리 마왕이 뒷배에 있다고 해도 사람들이 널 받아들였다고?”
[세상 물정 모르는 자네를 위해서 상식을 하나 알려주지. 마족 연합을 지탱하는 대의명분은 이거야. ‘능력은 출신과 종족보다 중하다.’ 블러디아의 위대한 기사가 일개 뒷골목 암살자한테 당했다? 그럼 수장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었던 거야. 안 그래? 실제로도 그 결투는 내가 치러온 밥값 벌이에 비하면 엄청나게 시시했어. 실전 경험의 차이가 차원이 달랐으니.]
파스낙은 친근한 척 이쪽을 향해 눈짓을 보냈고 레스는 뚱한 표정을 지켰다.
“그러니까 마족들 사이에는, 차별이 공공연하지 않은 건가?”
레스는 일부러 마지막 부분에 힘을 줬다. 파스낙이 대롱으로 콜라를 또 한 모금 마시고 헛기침을 한 다음 답했다.
[그래. 공공연하지 않지.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런데 마계 쪽에서 장악한 영토의 원주민들도 차별 없이 자치권을 받아서 멀쩡하게 살고 있다. 학살당하지도 않았고, 부족의 문화도 파괴되지 않았고, 어쨌든 최소한 인간 제국한테 당한 사람들에 비하면 사람답게 살고 있지.]
레스는 떫은 표정을 지었다.
“그건. 다행이군. 샤키의 부족이 이주할 곳을 찾을 가망이 생겼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레스는 상대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리냐니. 슈슈니는 인간들에게 밀려나기 직전이야.”
잠깐 침묵이 흐르자 파스낙이 탁자를 손바닥으로 세게 치고는 폭소를 터트렸다.
[아하하하하하하! 너 아무것도 모르는군! 아무것도! 보아하니 슈슈니의 추장이 너에게 자기 이름도 안 알려줬군! 콜록! 콜록! 콜록…. 실례. 보다시피 몸 상태가 엉망이라.]
파스낙이 또 대롱에 입을 대려고 하자 옆에서 튀어나온 의문의 손이 콜라병을 빼앗아갔다. 그가 콜라병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망연해하는 눈길을 보내다가 다시 레스와 마주 보았다. 레스는 머리가 어질거리는 걸 잠깐 흘려보내고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건 많지만 일단 넘어가고. 몸 상태가 어떻게 안 좋지?”
상대는 혀를 날름거려서 입술을 한 번 핥으며 시선을 크게 한 바퀴 돌렸다.
[몸이 망가진 이유 절반은 한계 해제의 반작용이다. 햇살 좋은 곳에 지어진 컨트리클럽에서 1년 미만으로 요양하면 나을 거야. 제일 문제는 당뇨지. 언젠가 일어날 일이기는 했는데 드디어 돌이킬 수가 없게 됐어. 난 이제 정기적으로 인슐린을 맞지 않으면 죽는 시한부야.]
“거참 유감이네.”
레스는 덤덤하게 말했다. 파스낙이 목덜미에 덮인 머리칼을 치우고 목을 긁었다.
[참고로 인슐린은 원래 지금 시대의 기술력으로는 만들 수가 없는 물질이야. 항생제처럼.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겠나?]
“톤토 씨만이 네 목숨을 이어줄 약을 만들 수 있다는 거군.”
[나는 지금 외통수에 외통수야.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못 죽어. 네가 맞았어. 죄는 생명으로 갚아야지. 죽음에는 의미가 없으니까. 그날 깔끔하게 죽는 편이 나에게 자비였다는걸 이성적으로 판단한 사람은 너뿐이었다. 무법자에게 경의를.]
레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시선만 내리깔았다. 파스낙이 탁자에 올린 팔짱에 체중을 싣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기껏 칭찬해줬는데 왜 그렇게 죽상이신가? 하다못해 날 비웃기라도 해야지.]
상대가 아직도 말이 없자 파스낙이 한쪽 입꼬리를 히죽 올리면서 고개를 살살 저었다. 그리고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아, 신념이 흔들리는 자의 눈이로군. 잡담이 좋은 이유가 뭔지 알아?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거야. 네가 허락해준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도 될까? 어쩌면 내가 조언을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돕는다고? 나를?”
레스는 인상을 쓰면서 눈을 가늘게 떴고 파스낙은 살짝 도발하는 듯 눈썹만 까딱거렸다.
[누구 상담해주는 거라면 나도 나름 도가 텄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