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화 〉[5권] 173회 - 파자마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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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장님의 예지몽이 그런 식으로 맞아떨어질 줄 누가 알았겠어요.”
아자리는 줄무늬 파자마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마을 한복판을 돌아다녔다. 근처에는 샤카자이아가 똑같이 파자마와 슬리퍼를 신고 같이 있었다. 그녀가 말을 받았다.
“어젯밤에 있던 일. 레스에게 말해줘야 할까? 다시 만난다면.”
아자리가 하품을 길게 뱉으며 말했다.
“묵혀두기에는 아까운 모험이었잖아요.”
샤카자이아도 아자리의 근처에 나란히 목장 울타리에 팔짱을 올리고 기댔다.
“들으면 분명히 상처 입을 텐데.”
“어젯밤에는 많은 사람이 물리적으로 상처를 입었어요. 괜히 숨겼다가 나중에 밝혀지면 왜 진즉 말 안 했냐고 그럴걸요.”
아자리는 목장 울타리에 발을 걸치고 올라타면서 말했다.
“그 말도 일리는 있네. 언제 만날지는 요원하지만.”
샤카자이아는 아자리에게 하품을 전염 당해서 입을 크게 벌리고 손바닥으로 입가를 톡톡 때리며 ‘아바바바바’하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울타리 안에 모여있는 양 떼들이 두 여자를 낯선 눈으로 보았다.
양들 사이에 염소가 몇 마리 끼어 있었고, 개중에는 뭔지 모를 이상한 생물도 있었다. 그 생물은 털이 양들보다 훨씬 복스럽고, 다리는 몽땅했고 그에 반해 목만 몸통과 다리 길이를 합친 만큼 길쭉했다. 그리고 눈동자와 표정으로부터 깊고도 그윽한 감성이 느껴져 마치 사람 같은 인상이 들었다. 아자리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게 뭐예요?”
샤카자이아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이상한 생물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머리는 비둘기처럼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고 몸짓은 절도가 넘쳤으며 다리는 구름을 밟듯 산들산들 움직였다. 아자리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한테 와요.”
샤카자이아도 굳은 목소리로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어쩌면…. 배가 고픈 걸지도 몰라. 오늘 만든 페미컨이라도 줘볼까?”
“초식 동물이면요? 화나게 하면 우릴 잡아먹을 것처럼 생기긴 했지만.”
“진정하자. 진정하자.”
샤카자이아가 인형처럼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이상한 생물과 눈을 마주쳤다. 이내 몽실몽실한 몸을 산들거리는 걸음으로 이동시키는 이상한 생물체가 두 여자와 대면했다. 아자리가 눈동자만 옮겨서 샤카자이아를 바라보았다.
“언니, 어떻게든 해봐요. 위대한 정령께서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법을 가르쳐주진 않았어요?”
“내가 보기엔 이거 외계에서 온 거 같아.”
이상한 생물체가 귀를 쫑긋거리자 두 여자가 기겁하면서 몸을 한 번 떨었다. 뒤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시튼이 웃음을 참으면서 아자리 옆의 빈자리로 갔다.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그 외계 생물체들은 알파카라고 불리며 낙타과 동물이에요.”
아자리가 눈을 크게 뜨며 시튼에게 고개를 돌렸다.
“낙타의 친척이라고요? 그렇게 말하니까 굉장히 친근하게 들리네요! 타고 다닐 수도 있나요?”
시튼이 친절한 목소리로 말하고 소리 내 웃었다.
“인형이나 아기만큼 몸이 가볍다면 올라탈 수는 있죠. 하지만 애들이 겉보기와는 다르게, 아니 겉모습 그대로 성깔이 있어요. 체력도 강하지 않고요. 고산지대에서 사는 원주민들이 털과 고기를 목적으로 알파카를 길렀고 그들에게는 중요한 단백질 보충수단이었죠.”
잠깐 뜸을 들이고 샤카자이아가 말했다.
“하지만 여기는 평야잖아요.”
“그 말대로 여기에서는 나타날 리가 없는 동물이죠. 그런데 약 2년 전 이곳에서 발견됐고 계속 우리 마을에서 기르는 중이에요. 자연적인 현상은 절대 아니죠.”
그들은 마을 저편에 보이는 만년설로 봉우리가 하얗게 덮인 거대한 산맥을 보았다. 산맥의 꼭대기를 바라보면 시야 안으로 땅과 하늘이 절반씩 들어왔다. 아자리와 샤카자이아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 같이 산맥을 다시 노려보았다. 그대로 잠깐 시간이 지나자 시튼이 헛기침을 하고 침묵을 깼다.
“그것보다. 여러분들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진즉 말해야 했는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자리와 샤카자이아는 진심으로 당황해서 손사래까지 치며 고개를 젓거나 흔들었다. 샤카자이아가 말했다.
“빚이라뇨? 저희는 한 게 아무것도 없는걸요.”
“하지만 여러분이 아니었다면 해낼 수 없었으니까요.”
시튼의 말을 듣고 아자리가 목덜미를 긁적이며 멋쩍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엄연히 말하면 저희는 문제 해결을 도와드린 게 아니라, 문제를 부풀렸죠.”
“응.”
샤카자이아가 바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자리가 이어서 말했다.
“게다가 문제 해결의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잖아요. 앗! 악마도 자기 말을 하면 온다더니.”
아자리가 가리킨 방향으로부터 덩치가 크고 하얀 늑대가 성큼성큼 걸어서 다가왔다. 늑대는 시튼 곁에 오도카니 뒷다리와 하체를 땅에 놓았다. 눈처럼 하얀 털에 눈동자는 황토색이었고 꼬리털은 끝부분에 살짝 회색빛이 돌았다. 목장 울타리 안의 양과 염소들이 늑대를 보고 겁먹어서 구석으로 몰렸는데 알파카는 여전히 속세를 해탈한 듯한 오묘한 표정 그대로 제자리에 있었다. 시튼은 늑대를 향한 손길을 조금 머뭇거리다가 이내 애정을 담아 늑대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샤카자이아가 말했다.
“몇 살이죠?”
“9살이요. 1894년 로보를 사냥했던 해에 녀석의 영역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로보의 부하들이 커럼포를 완전히 떠난 걸 확인했고, 버려진 둥지에서 갓난쟁이였던 바고를 찾았죠.”
아자리가 하얀 늑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바고?”
“방랑자, 혹은 외톨이라는 뜻입니다. 울프 팩 중에서 블랑카를 제외하면 다들 수컷이었으니 이 아이의 부모가 누구인지는 명백했죠. 바고를 앞에 두고 크게 고민했어요. 이미 로보를 비열하게 죽였는데 내가 또 자연의 일에 간섭해도 되는 걸까? 내가 저 생명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인간 위주의 오만한 생각이 아닐까? 머리가 어지러워질 정도로 긴 생각 끝에 저 어린 것이 굶주려서 가늘게 신음하는 소리에 견디지 못하고 결국 바고를 몰래 보살폈고. 사람들로부터 감췄습니다. 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죠.”
아자리가 자기 발 밑의 땅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정확히는. 여기 시튼 빌리지가 세워지기 전까지죠. 마을 주민들 모두 바고를 알고 있었는데 어제 내내 한 번도 언급해주지 않았다니. 아무도!”
샤카자이아가 아자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야 우리는 어제 여기 처음 온 손님이었고. 우리도 딱히 안 물어봤었잖아.”
“언니, 질문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뭐 됐어요. 마을에 처음 온 사람한테 ‘어이 자네! 그거 알아? 우리 마을에 늑대 왕자, 아니 늑대 공주가 있어!’라고 누가 말해주겠어요.”
아자리의 아저씨 같은 어설프고 과장된 성대모사가 끝나자 하얀 늑대는 앞발을 겹치고 땅에 엎드리며 눈을 커다랗게 뜨고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림 모델처럼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살짝 위로 들어 올렸다. 늑대가 그대로 가만히 있자 아자리가 넌지시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죠?”
시튼이 대답했다.
“어제 수첩에 바고를 그려도 되겠냐고 물으셨잖아요. 지금 자세를 잡았네요. 수첩이 없으시다면….”
시튼이 자신의 재킷에서 종이와 연필을 꺼내주려다가 파자마의 바지 주머니에서 수첩과 연필을 꺼내는 아자리의 모습을 보고 그만두었다. 아자리는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직각으로 세워서 직사각형 모양으로 틀을 만들어 대상의 구도를 잡았다. 그리고 섬세하면서도 잽싸게 늑대의 모습을 수첩 안에 그렸다. 아자리가 앉아 쏴 자세로 자기 모습을 스케치하는 내내 늑대는 유리 방울처럼 크게 뜬 눈을 깜빡거리기만 했다. 그녀가 엄지를 척 세워주자 늑대는 그제야 자세를 풀고 입을 벌리며 헉헉거렸다.
아자리는 늑대의 그림 옆에 각주를 덧붙였다. ‘잊지 못할 거 같은 순간’, ‘우왕’, ‘아주아주 늑대’, ‘어쩌다 이런 일이’. 생각해보니 쓸데없는 각주여서 아자리는 지워버리려다가 귀찮아서 그대로 두었다.
“그러니까 시튼 씨가 약 한 달 전에 바고와 함께 저쪽을 수색하셨죠.”
아자리는 수첩을 닫고 아까 노려보았던 산맥을 가리켰다. 이어서 알파카를 가리켰다.
“저 외계 낙타도 저곳에서 찾으셨나요?”
시튼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샤카자이아가 물었다.
“그리고 로보. 아니, 로보에 한없이 가까웠던 ‘그것’도 저곳에서 나타났고요.”
시튼이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지금 지도에는 저 방향으로 황량한 석회질 산맥만 그려져 있지만, 진실은 달라요. 1700년대 이전에 만들어진 지도에는 사람이 살만한 땅, 강줄기, 그리고 사람이 사는 곳이 기록되어 있었어요. 하지만 200년 전부터 저곳에 대한 정보가 모든 지도에서 자취를 감춰 버렸죠. 국가 단위로 의도적으로 기록이 말살된 겁니다.”
샤카자이아가 산맥을 바라보며 팔짱을 끼고 울타리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제 어머니의 표식 나무가 저곳을 향해 구부러져 있었어요. 도움이 필요하다는 표시와 함께.”
아자리가 보다 보니 정이 들어버린 알파카에게 손을 뻗으면서 말했다.
“200년 전 국가 단위의 기록 조작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200년 전 용사와 마왕의 싸움하고 관련된 게 분명….”
알파카가 아자리의 손길을 고갯짓으로 뿌리치고 그녀의 얼굴을 향해 침을 분무기처럼 뿜었다. 아자리가 눈을 질끈 감고 주춤거렸다.
“악! 블럇!”
“이런.”
샤카자이아가 자기 소매를 손에 감아서 아자리의 끈적이는 얼굴을 닦아주려다가 시튼이 손수건을 들고 다가와서 먼저 닦아줬다. 시튼이 손수건을 건네주고 물었다.
“괜찮으세요?”
아자리는 손을 내저으며 점잖은 표정을 지키며 끄덕거렸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아까 뭐라고 하셨죠? 좋은 단백질 공급원? 저 녀석 얼마죠?”
샤카자이아가 웃음을 참으면서 말했다.
“참아, 아자리.”
알파카가 이번에는 샤카자이아를 노리려는 모양이다. 샤카자이아는 낌새를 느끼자마자 본능적으로 들짐승처럼 몸짓과 표정, 목소리를 바꿔서 알파카를 향해 괴성을 질렀다.
“키야아아아악!”
“께르르르릉! 께르르르르륵!”
알파카가 두려움에 떨며 양 떼들 속으로 달아났다. 샤카자이아가 서열을 정리하고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한 번 코웃음을 쳤다. 아자리가 얼굴에 묻은 침을 마저 닦으면서 감탄했다.
“저 외계 낙타가 늑대를 보고도 겁을 안 먹었는데 언니는 무섭나 보네요.”
시튼이 말했다.
“서로 얼굴을 아는 사이니까 겁을 안 먹죠.”
“모든 낙타가 저렇게 성깔이 더럽나요? 언젠가는 사쿠라비에 가고 싶었는데 처음 보는 낙타과 동물의 첫인상이…. 최악이네.”
“사막의 낙타는 사람한테 침 안 뱉어요. 물죠.”
시튼은 허허 웃으면서 아자리의 등을 두드려줬다. 그녀는 진저리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빌렸던 손수건을 가지런히 접어서 시튼에게 돌려줬다.
“너! 여기가 마을이라서 운 좋은 줄 알아! 야생에서 만나게 되면 그 자리에서 튀겨 버리겠어!”
아자리가 알파카를 향해 삿대질하며 고래고래 외치자 샤카자이아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다른 곳으로 질질 끌었다. 두 여자와 시튼을 따라 늑대도 자연스럽게 산책하는 개처럼 졸래졸래 따라왔다. 마을 주민들은 일행이 시튼의 오두막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들과 마주칠 때마다 다들 반겨주며 인사했다.
언덕을 올라 오두막 앞에 닿자 마침 사탄타가 몸에 감았던 붕대를 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자리가 남자아이처럼 껄렁껄렁한 손짓을 머리 높이로 보내며 말을 걸었다.
“몸은 어떠신가 카우보이.”
사탄타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힘겨워하는 신음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우보이는 와시추들이나 쓰는 단어야. 심지어 지금은 해체됐지. 이름으로 불러.”
“그럼 사탄타 씨. 어제는 정말 고마웠어요. 진심으로요. 저희가 키운 불이었으니 저희가 책임져야 했는데. 잘 해결된 건 정말이지 그쪽 덕분이에요.”
“흥.”
사탄타는 건성으로 대꾸하면서 양손 도끼의 가운데 부분을 비틀었다. 그러자 나선형 이음매가 갈라지면서 한 손으로 다루는 대형 토마호크와 짧은 투창으로 나뉘었다. 근처에는 600 익스프레스 니트로 탄환을 쓰는 중절식 대구경 소총, 일명 엘리펀트 건이 건포 위에 놓여있었다. 아자리가 재차 물었다.
“왜 바고의 존재에 대해 미리 말 안 해주셨어요? 늑대 공주말이에요.”
자신의 장비들을 바라보면서 사탄타가 말했다.
“그러는 너희야말로 왜 그랜드 마스터하고 면식이 있었다고 말 안 했지?”
“이유는 말 안 해도 다 아시면서.”
아자리와 샤카자이아가 나란히 어깨를 으쓱였다. 사탄타는 맥 빠지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해줄 말은 똑같아. 어쨌든, 과정은 엉망이었어도 어제 다 같이 힘을 모은 덕에 마을의 큰 시름을 덜었잖아. 수고들 많았어. 부족 사람들도 바고가 돌아와서 좋아하고 있어.”
시튼이 이어서 말했다.
“단테 씨는 상태가 어떻죠?”
“그 형씨는 한 번 깼다가 다시 곯아떨어졌습니다. 안단시움에 정통으로 맞아버렸으니 무리도 아니죠. 생명에 지장은 없겠지만 더 지켜봐야 할 겁니다.”
아자리가 머리를 긁적였다.
“여기서 지체하면 가장 반대할 사람이 단테 씨였는데, 단테 씨 덕분에 여기서 더 노닥거릴 핑계가 생겼네요.”
사탄타와 시튼이 나란히 피로에 찌든 표정으로 하품을 뿜고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그러다 아자리와 샤카자이아가 따라서 들어오려는 기미가 없어서 둘은 뒤를 돌아보았다. 두 여자는 늑대를 여기저기 쓰다듬어주거나 털에 얼굴을 파묻으면서 같이 놀고 있었다. 아자리가 바고의 꼬리를 감싸 쥐었다가 부드럽게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알아서 들어갈게요. 어쩌면 좋아. 늑대 공주에게 푹 빠져버렸어요.”
“파자마 차림으로 저녁에 너무 오래 돌아다니면 감기듭니다.”
시튼은 그렇게 말을 남기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사탄타도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잊은 걸 떠올린 듯 걸음을 멈추고 급히 몸을 돌려 두 여자에게 다가갔다. 샤카자이아가 물었다.
“무슨 일이죠?”
그가 자기 옷깃에 넣어둔 꿈 덫 목걸이를 꺼내 보여주면서 말했다.
“몇 시간 전에 내 토템이 공명했어. 누군가가 이것과 거의 비슷한 토템을 이용해서 이쪽을 향해 신호를 보낸 거 같아.”
아자리와 샤카자이아가 눈을 크게 뜨면서 늑대에게 하던 장난을 멈추고 그의 말에 집중했다.
“박쥐가 초음파의 반향으로 물체를 감지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야. 저쪽에서 신호를 보냈고 무언가를 감지한 다음 주인에게 돌아갔어.”
샤카자이아가 한 걸음 다가갔다.
“누가 그런 건지는 알 수 있나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못해. 그리고 날 찾는 건 결코 아니었어. 내 토템의 반응이 정말 미세했거든. 조용한 다락방에서 여우 형씨 지켜보느라 한가하지 않았으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다. 너무 늦지 않게 들어와.”
샤카자이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상대를 손짓으로 배웅해줬다. 시선을 돌리니 아자리는 늑대 옆에 우두커니 서서 마을의 정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샤카자이아도 곁으로 다가가 같이 풍경을 봤다. 시선을 그대로 둔 채 그녀가 아자리에게 말을 걸었다.
“2주하고도 조금 더. 따라잡히기까지 빠른지 느린지 구분하기 참 애매한 시간이네.”
“우리의 머리카락으로 만들어줬던 그 부적, 미완성이었을 텐데. 완성됐다는 건 마법사가 도와줬다는 뜻이에요. 레스가 그 푸른 머리하고 친해진 거라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까지 각오해야 한다는 거겠죠?”
“확인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알 수 없어.”
늑대가 근처에 다가와서 걱정하는 시선을 보내주자 아자리가 쑥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시튼 씨가 대답을 피했던 저희 의문 말이에요. 이제 답을 알겠어요. 되살아난 로보를 목격한 시튼 씨는 마을로 돌아와서 생각을 정리하고는 로보의 딸을 자연으로 보내야겠다고 결론을 내리신 거겠죠. 그래서 일부러 바고를 숲에 풀어주고 홀로 마을로 돌아왔던 거고요. 바고에게 선택지를 주려고요.”
샤카자이아는 석양의 빛에 눈이 부셔 손차양을 눈가에 대고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기 친아버지를 본 이 아이는 쉽게 걸음을 뗄 수 없었겠지. 되살아난 로보와 그의 딸이 서로 무슨 말을 나누고, 무슨 시간을 보냈을지는 우리야 알 길이 없겠지만.”
아자리가 바고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시튼 씨가 주변 사람들에게 자세한 사정을 설명 안 하고 홀로 끙끙대며 해결하려 한 심정도 이해는 가요. 되살아난 로보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업 때문에 자연이 벌을 내렸다고 착각할 법도 해요. 그리고 자신이 일으킨 재앙이니 휘말리는 사람 없이, 또 누구의 도움 없이 결착을 내야 한다고 강박에 시달렸겠죠. 커럼포의 늑대왕과 다시 싸우려고. 그리고 비열하게 블랑카를 붙잡았던 저번과는 달리 정직하게. 자신의 딸도 마을을 습격한 주범이라면 더욱 그래야만 했고요. 세상에, 무슨 심정일지 상상하기조차 힘드네요. 가슴이 찢어졌을 텐데.”
아자리가 손길을 떼고 자연스럽게 샤카자이아를 향해 늑대를 보냈다. 이번에는 샤카자이아가 쪼그려서 커다랗고 하얀 늑대의 털을 가지런히 쓸어주었다.
“자연과 정령이 그런 식으로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는 일은 없어. 벌을 내린다면 교묘하게 내리지, 눈에는 보이지 않아. 시튼 씨는 너무 사람 위주로 생각하셨어. 만사는 자연의 사소한 일부에 불과하다는 걸 시튼 씨가 모를 리 없었을 텐데. 죄책감이 그의 눈을 가렸어.”
아자리는 파자마 바지의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고 지나간 낱장들을 차근히 살펴보다가 다시 소리 내어 닫았다.
“중요한 건 여기 적어놨으니 단테 씨에게는 이걸로 설명해주면 되고. 내일은 어쩌죠?”
“내일 단테가 일어나자마자 이곳을 서둘리 떠날 수도 있고. 아니면 이곳에서 각오를 세우고 우리의 의문을 확인할 수도 있겠지. 언젠가 해야만 하는 일을 위해서.”
조금 뜸을 들이고 아자리가 말했다.
“레스는 변했을까요? 붙잡히고 많은 고초를 겪었을 테니 변하고 타협했어도 우리가 그를 비난할 자격은 없지만. 그런 상황을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무서운 기분이 들어요.”
샤카자이아도 뜸을 들이고 시간을 들여 힘겹게 말했다.
“이럴 때 내가 널 위로해주는 말을 해줘야겠지만. 나도 무서워. 철부지 사냥꾼에서 조금이나마 전사의 길로 갈 수 있던 건 그날 밤 레스의 뒤를 따라 달렸던 덕이야. 하지만 사람은…. 변해. 변화는 누구도 못 이겨. 어머니가 그랬듯이.”
아자리는 저 위에 떠 오른 황혼의 달을 보았다. 슬슬 오두막으로 들어갈 때가 됐다. 침묵이 길어지자 샤카자이아는 아자리에게 눈짓을 보내고 오두막을 눈동자로 가리켰다. 아자리는 생각과 달빛으로부터 헤어지려는 행동에 미련이 느껴졌다. 그러다 생각이 다른 생각끼리 맞부딪혀 머릿속에서 부싯돌처럼 불이 튀었다. 아자리의 손이 다른 생물처럼 저절로 주인의 얼굴과 시선과는 별개로 장을 넘기더니 세계 지도를 작게 축약해서 그린 장이 나타났다.
황혼 속의 산맥에는 빛과 어둠이 공존했다. 곧 순수한 어둠만이 그곳에 내릴 터다. 아자리는 어두운 땅과 수첩의 지도를 번갈아 보고는 자신의 입가에 손을 갖다 댔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언니. 레스와 헤어지기 직전에 나눴던 마지막 대화들 기억해요? 파스낙한테서 알아낸 지리 정보가 언제까지 기억에 남을지 장담할 수 없으니까 서둘러서 지도를 펼치라고 저한테 재촉했었죠.”
샤카자이아는 아자리가 달빛에 비춘 수첩의 장에 시선을 집중했다.
“뭔가 알아냈어?”
“200년 전에 대대적으로 기록에서 사라진 수수께끼의 땅, 그리고 되살아난 로보에 한없이 가까웠던 ‘그것’이 나타난 저곳, 언니의 어머님이 도움 요청을 표시하고 방향을 가리킨 저곳, 그리고 아까 그 튀겨먹을 외계 낙타가 나타났다는 저곳. 저 방향에 레스가 지도에 표시한 장소가 나와요. 두 문명의 감시망이 닿지 않는 우리가 지나갈 곳이요.”
샤카자이아가 관자놀이에 손을 대면서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여태껏 목적지를 이곳으로 정해두고 움직였으니까 이곳과 가까워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야. 그런데 이 모든 게… 합쳐졌다고?”
“그리고 레스는 틀림없이 말했어요. 고향으로부터 이곳을 지나와서 인간들의 문명으로 왔다고. 레스와 피카니가 갈라진 계기도 지도에 적힌 것과는 전혀 다른 지형 때문이라고 했었죠.”
“어젯밤에 봤던 ‘그것’이 득실거릴지도 모르고 200년 전에 기록이 사라진 수수께끼의 땅을 레스는 이미 지나왔어. 그런 곳이라면 군대가 없을 법도 해.”
“피카니가 레스에게 자신이 배신한 사연을 털어놨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했어요. ‘네가 갔던 방향을 보니 죽음밖에 없는 곳이더라.’”
샤카자이아가 시간을 들여서 말귀를 알아듣고 입을 멍하니 벌렸다.
“모든 게 저곳을 가리키고 있어.”
“레스가 대체 저기는 어떻게 통과했을까요?”
샤카자이아가 아자리의 말투를 따라 하듯 비슷한 어조로 따라 말했다.
“레스가 어떻게 했겠냐고?”
“예. 레스가 어떻게.”
“레스가 어떻게.”
한 박자 뒤에 샤카자이아가 말했다.
“질문 자체에 답이 들어있었어. 레스가 어떻게.”
“역시 언니는 천재예요.”
“우리가 답을 구해야 할 질문은 따로 있어.”
아자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수첩을 소리 나게 딱 닫았다.
“저희는 도망쳐야 할까요? 아니면 맞서 싸워야 할까요? 어느 쪽이 관철이고, 타협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