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화 〉[5권] 175회 - 계승하는 자
하딘은 이쪽을 향해 간단한 작별 인사를 남기고 덤덤히 자리를 떠났다. 레스는 상대의 등을 계속 바라보다가 마차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루나와 타티아나도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침묵 때문에 분위기가 어두워지기 전에 레스가 솔선해서 루나를 향해 바라보며 운을 띄웠다.
“목욕은 잘 마치셨습니까?”
루나의 군청색 머리칼은 곱게 갈린 옥구슬에 맞먹는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타티아나도 검은색 종이 같았던 부스스한 머릿결이 명주실 같았다. 루나가 머리카락을 정돈해서 한곳으로 묶은 곳을 손으로 살살 쓸었다. 탄력이 눈으로도 느껴졌다.
“아주 좋았답니다. 셰리던의 접대가 어찌나 극진한지 부담스러울 정도였어요. 제가 미셸린 가이드의 평가원이라면 별 두 개는 줬을 거예요.”
어지간한 타인은 가리지 않고 경칭으로 불러주는 루나가 세리던 대령을 막 부르는 모습을 보고 레스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타티아나가 끼어들었다.
“보아하니 너하고 뺀질이가 저쪽 꼬투리라도 잡은 거 같던데, 아니야?”
“뺀질이한테 물어봐.”
레스는 입고 있던 폰초를 벗으면서 마차의 짐칸으로 들어갔다. 망토를 휘둘러서 안쪽에 쌓인 먼지들을 대강 바깥으로 쓸어내고 누울 자리를 만드는데 누군가가 짐칸 벽을 똑똑 두드렸다. 미닫이 창문을 열어보니 타티아나가 커다란 무언가를 한 손에 들고 있었다. 바깥으로 나와서 보니 그건 전용 보관 가방에 담긴 기타였다. 레스가 눈을 뜰 수 있는 최대한으로 커다랗게 뜨면서 외쳤다.
“그걸 어떻게?”
타티아나가 가방을 내려놓고 안에서 기타를 꺼내며 말했다.
“거래했지. 기타를 가지고 있던 병사와 정직하게.”
그녀가 줄을 살짝 퉁기자 조율이 안 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자기가 앉아있는 불가 바로 옆의 모포로 오라는 듯 그곳을 톡톡 두드렸다. 레스는 눈을 껌뻑였다.
“넌 저쪽한테 뭘 줬는데?”
“고급 시가 한 상자.”
레스의 눈썹이 내려갔다.
“너 담배 피웠어?”
“아니, 하지만 담배는 문화와 국가를 가리지 않고 화폐로 아주 유용하지. 여기는 보급이 뜸해져서 다들 술과 담배에 굶주렸더라고. 병사들이 말하기를 이곳은 버림받았대.”
타티아나는 자기 옆에 앉은 레스에게 기타를 건네주고 신발을 벗은 맨발로 가부좌를 틀었다. 레스는 엄지로 기타의 목을 붙잡고 현을 한 번 퉁겼다. 그리고 조율 장치를 살짝 비틀었다. 다시 현을 퉁기자 한결 맑아진 소리가 울렸고 레스는 떨리는 줄을 눌러서 소리를 끊었다.
“상태가 괜찮군. 주인이 공들여서 관리했어. 적막한 곳에서는 악기만 한 벗도 없는데. 그렇게나 담배가 고팠던 건가. 그 심정 전혀 모르는 건 아니다만.”
레스 바로 옆에 앉아있던 루나가 양손에 턱을 괸 채 말했다.
“담배 피워요?”
“끊었어요. 한방에. 누구에게나 당당하게 자랑할 수 있는 제 최고의 업적이죠.”
그렇게 말하며 레스가 경쾌하게 현을 위에서 아래로 긁었다. 투두둥! 그가 오른손을 매만지면서 자기 양옆에 있는 일행을 번갈아 보고는 물었다.
“그런데 그쪽은 어디서 자요? 간부 숙소?”
루나가 대답했다.
“제안을 받기는 했는데.”
루나가 도중에 끊은 문장을 타티아나가 맺었다.
“우리는 여기가 더 편해.”
레스가 기타의 울림통을 가볍게 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표정이 얼었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 그가 불안해하는 눈으로 자신의 양옆을 번갈아 보았다.
“뭐?”
타티아나가 눈을 내리깔고 그를 약 올리는 말투를 썼다.
“양손에 꽃이야. 기쁘지?”
레스가 속으로 뭔가 필사적으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힘겹게 그가 말했다.
“아니면 양날의 칼.”
두 여자가 그를 뚱한 시선으로 노려보자 레스가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나도 무례한 소리였다는 거 알아. 하지만 참을 수가 없었어!”
띠리디딩. 레스는 괜히 아래에서 위를 향해 현을 긁었다. 그가 헛기침하고 다시 오른손을 쥐었다 피며 손을 매만졌다. 루나가 미소와 경멸 중간에 있는 표정을 지으며 꼬챙이에 마시멜로를 하나 꽂고는 불가로 뻗었다.
“저쪽은 저쪽 나름대로 저희에게 점잖게 굴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몇 년 만에 나타난 여자들을 향해 남자들이 보내는 시선을 저희가 눈치 못 챈 척해주기란 한계가 있었답니다.”
타티아나는 콧방귀를 뀌고 자신도 꼬챙이에 마시멜로를 꽂아서 불가로 뻗었다. 레스가 마시멜로를 신기해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화제를 이었다.
“제가 떠난 동안 달리 특이한 일은 없으셨고요?”
루나는 김이 피어오르는 마시멜로를 입김으로 살살 식히며 대답했다.
“특이한 일이라. 교황청에서 제게 친히 내려준 성스러운 수류탄의 분석을 마쳤답니다.”
“아직도 갖고 계셨어요?”
타티아나가 표정을 살짝 찡그리며 루나를 쳐다보았다. 루나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것의 정체를 알기 위해 기억의 궁전을 한참이나 더듬다가 퀴리 부인의 방사능 연구 관련 논문까지 들춰봤어요. 그리고 저 물건을 만들었다는 전 성녀 주니아님과 제 모교의 전 학과장 캘커트리 경이 뭐하던 사람들인지 의심스러워졌죠.”
레스가 떨떠름한 말투로 말했다.
“그 발언은 공직자가 내기엔 부적절하지 않습니까?”
루나는 레스의 입에 마시멜로를 쏙 넣어주고 설명을 시작했다.
“그 수류탄 안에는 삼중수소와 리튬, 녹주석, 헬륨이 들어있어요. 제 지식을 쥐어짜서 가상 시연을 해본 결과. 설명서대로 성스러운 안전핀을 뽑고 둘 이상 넷 미만의 수를 헤아린 다음 적에게 던지면, 거대한 폭발과 파편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치명적인 살인 광선에 의해 생명체는 모조리 뒈집니다. 아무리 두꺼운 엄폐물에 숨어도 살인 광선은 햇빛이 유리창을 뚫듯 모든 물질을 관통하니까 무조건 뒈져요.”
상당히 보기 드문 루나의 냉소적인 말투 때문에 레스와 타티아나는 겁을 먹고 마른 침을 삼켰다. 루나가 손수 자신의 말을 이어 침묵을 깨주었다.
“재밌는 점은 켈커트리 씨가 그 효과를 정반대로도 쓸 수 있도록 수류탄을 설계해놨다는 거예요. 기타의 조율 장치를 다루듯이 간단하게요. 제가 마음만 먹으면 그 수류탄은 반경 안의 생명을 제외한 물질들을 먼지보다 작은 크기로 분해할 수 있어요.”
타티아나가 곰곰이 생각한 뒤에 손짓과 함께 상대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보통 생명 안에는 무기질 성분도 포함되지 않나요? 골격이라던가.”
마시멜로를 삼키고 레스가 끼어들었다.
“애당초 생명과 물질의 경계가 뚜렷하게 나뉩니까?”
루나가 발음에 힘을 줬다.
“실험하기는 싫고 또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니까 확실한 결론은 못 드리지만. 굳이 차이를 설명하면 화상과 물집투성이 시체로 죽느냐 아니면 흔적도 없이 죽느냐의 차이군요.”
굳은 표정을 지으며 레스가 자기 뒤의 마차 짐칸을 엄지로 가리켰다.
“여태껏 그런 물건이 밤마다 저랑 같이 이부자리에서 굴러다녔다고요?”
“그리고 낮 동안 제가 계속 손에 들고 다녔죠. 옙.”
루나가 ‘나더러 어쩌라고’라고 말하는 듯 양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고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레스와 타티아나는 말과 표정을 잃어버렸다. 침묵이 한참을 흐르자 루나가 다시 손수 화제를 이었다.
“안전핀만 손상되지 않으면 절대 안 터져요. 아마도 폭탄은 켈커트리가 만들고 안전핀을 성녀님이 만든 거 같아요. 이즈음에서 대체 대마도사와 성녀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하실 거 같은데 오늘은 지쳤으니까 다음으로 부디 미뤄주세요.”
루나의 차분한 표정과 말투 속에서 마치 땅속을 흐르는 용암처럼 눈에는 보이지 않는 열기와 분노를 느끼고 레스는 괜히 눈동자가 따가워졌다. 또 어째선지 모닥불의 장작 타는 소리가 유난히 잘 들렸다. 목울대를 가다듬고 그가 말했다.
“그냥 내다 버리면 안 될까요? 어디 파묻어둔다거나.”
“그 생각도 해봤는데 역시 안 되겠어요. 지진 때문에 수류탄이 찌그러지거나, 벼락이 그 자리에 떨어질 수도 있죠. 예상 못 할 변수와 예상 못 할 결과를 생각하면….”
레스가 고개를 급하게 끄덕이며 말을 끊었다.
“알아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만하죠.”
타티아나가 한쪽 손에 이마를 기대면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교황청은 저것의 정체를 알고서 우리한테 떠넘긴 거 같은데.”
레스가 그만하라는 뜻을 담아 기타로 G코드를 거칠게 치자 타티아나가 알았다는 뜻으로 맥빠지는 눈짓을 보냈다. 그가 한숨을 쉬면서 기타의 음계를 순서대로 하나씩 내보았고 선율은 건성으로 들어도 아직 미숙한 티가 느껴졌다. 타티아나가 또 쥐락펴락하고 있는 레스의 오른손을 바라보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네 손을 망가트린 놈이 헨리 플러머 연방 보안관이라며? 총잡이로서 참을 수 없을 짓을 당했는데도 죽이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어?”
“그래.”
“그게 어떻게 가능해?”
“죽음보다 두려운 게 많아지면 가능하지.”
레스는 대화하는 목소리가 묻히지 않도록 기타를 살살 쳤다. 타티아나는 그가 경련을 견디며 운지법을 바꾸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기타 다루기에 슬슬 손이 익자 레스는 심호흡을 하고 본격적으로 자신감을 담아 음을 띄웠다. 그 모습을 보고 제대로 된 곡이 나올 거라는 걸 직감한 두 여자는 소리에 집중했다.
오른손의 중지로 기타의 목을 찌른 채 굳은살 가득한 왼손이 팽팽해진 현을 퉁기자 평소보다 경쾌한 소리가 났다. 약지와 중지, 검지가 음표마다 기타의 철사 위에서 춤을 추었다. 오른손은 현란하게 움직이는 왼손과는 대조적으로 묵직하게 굵게 울리는 음만 내거나 손목으로 울림통을 북처럼 두드렸다. 1분가량 연주가 계속되다가 레스는 숨을 내쉬며 손을 기타에서 뗐다. 손목을 흔들면서 손을 푸는 그를 향해 루나가 말을 걸었다.
“방금 건 캐논 중 하나를 변주한 거죠?”
레스가 기타를 가지런히 모포에 눕히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바다위 전사는 보통 종교에 관련된 곡만 연주하죠. 싸움은 물론 음악과 삶의 방식까지 모조리 신과 연관 짓고 기도합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사쿠라비 전통 곡은 아는 게 없어요.”
루나가 측은 해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신을 혐오하면서도 갈망하는군요.”
“아마도.”
한참을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불에 두다가 레스가 얼버무리는 투로 말했다.
“실례합니다. 누울게요. 너무 피곤해서….”
그리고 모닥불을 향해 장작을 하나 넣고 뒤로 쓰러졌다. 레스가 앓는 소리를 내면서 밤하늘의 별을 노려보는 모습을 두 여자는 빤히 쳐다보았고, 서로 시선과 눈짓을 교환했다. 결국에는 나머지 사람도 그를 따라 나란히 벌렁 누웠다.
그들은 같은 하늘과 제각기 다른 별자리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의 감정을 레스는 거부하려고 의식하면서 자신과 싸워야 했다. 타티아나가 대뜸 레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말을 걸었다.
“파스낙하고 무슨 대화를 했지?”
“그 소리 왜 안 하나 싶었다.”
레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대답이나 해.”
“너희가 부렸던 시종, 이름이 소냐였던가? 그 소식을 들으니 좋아하더라고. 네 이야기도 조금 나누기는 했는데 별 건 아니야.”
“그 별 것 아닌 이야기가 뭔데?”
타티아나가 매섭게 그를 바라보자 레스는 그쪽 뺨이 근질거렸다. 그가 곤란해서 쩔쩔매는 투로 대답했다.
“말할 수 없어.”
“내 뒷담 했지? 그렇지?”
그녀가 이미 다 안 다는 양 짓궂게 말하고 은근슬쩍 레스의 팔을 잡아당겨 베개로 삼았다. 그는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휘둥그레 뜨다가 뒤늦게 반응했다.
“그 말에 대해서 부정이나 긍정을 하면 난 파스낙을 향해 뒷담을 하게 돼. 그 자식이 격식을 누릴 자격이 있느냐 여부를 떠나서 그건 명예롭지 못한 행동이야. 그리고 내 팔 돌려줘.”
“마침 좋은 베개가 있는데 안 쓰면 낭비잖아.”
그녀가 진심으로 편안해하는 감정을 목소리에 담아내며 갸르릉하고 묘한 울음까지 내었다. 레스의 눈가가 불안으로 떨렸다.
“얼마나 이럴 작정인데?”
“내가 만족할 때까지. 아직 9시도 안 됐어. 잠들기엔 지나치게 이르다고.”
그 행동을 인상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루나도 스르륵 손을 뻗어 레스의 팔을 자신의 머리에 갖다 대었다. 루나가 마침내 자신의 왼쪽 팔까지 팔베개로 삼아버리자 레스의 표정은 책장을 펼치다가 우연히 우주적 존재라도 접한 사람의 그것을 방불케 하였다. 잔뜩 졸아든 목소리로 레스가 말했다.
“이건 옳지 않아요.”
루나는 아이처럼 웃음을 쳤다.
“아뇨. 이건 저한테 딱 알맞은 베개에요. 단단하면서도 제 목에 맞춰서 형태가 변하죠.”
“남자가 자기 아내도 아닌 여자와 함께 신체를 정서적으로 맞부딪힐 수는 없어요.”
타티아나가 레스의 갈비뼈를 손끝으로 툭툭 찌르면서 능글맞게 말했다.
“그놈의 사쿠라비식 규율 정말 비합리적이네. 너희 남자들은 여자가 길에서 넘어져도 자기 아내가 아니면 손도 안 뻗어주겠네? 하지만 넌 그놈들하고 다르다고 자부하잖아?”
“지금 이 상황이 손 뻗어주는 수준을 넘어갔으니까 문제지!”
레스는 진지했으나 그 모습은 두 여자의 장난기에 불을 지를 뿐이었다. 루나가 아이처럼 일부러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하자르 씨를 틈날 때마다 자칭 무신론자라고 불러야겠어요.”
그의 입에서 숨 멎어가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잠깐의 틈 뒤에 그가 말했다.
“정곡을 찌르네요. 진심으로 뼈아파요.”
이번에는 자상한 목소리로 루나가 말했다.
“훌륭한 팔베개를 제공해주시고, 저 별빛 가득한 하늘 아래에서 손꼽히게 행복한 순간을 경험해주신 답례로 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졌어요. 어떤가요?”
그 이야기에는 레스와 타티아나 모두 흥미가 생겨서 토를 달지 않았다. 그들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그녀가 감정을 추스른 다음 동화를 읽어주는 어머니처럼 나긋하게 말했다.
“제 가문은 풀이 자라는 땅보다 바위와 산이 더 많고, 일 년 중 절반 이상을 축축한 안개가 햇살을 가리는 곳에 영지를 갖고 있어요. 내세울 거라고는…. 혈통뿐이었죠.”
레스가 말을 받았다.
“혈통이요?”
“제 몸에는 선대 용사 아서 아카수스의 피가 흘러요.”
레스가 놀라서 입을 쩍 벌리자 타티아나가 침착하게 레스를 진정시켰다.
“아카수스의 피를 이은 자는 흔해. 그의 자손들이 정략혼을 통해 온갖 가문으로 퍼져나갔으니까. 다른 제국들이 여태껏 해왔듯이. 하지만 용사의 힘을 계승했다고 불릴만한 인물은 여태껏 없었어. 이건 내가 저쪽의 공작원으로 있을 때 확실하게 파악한 정보야.”
레스가 다시 집중할 수 있는 상태로 돌아오자 루나가 화제를 이었다.
“그런데 족보 대대로 마법사가 없었던 저희 가문에 제가 태어났죠. 부모님은 제가 걸음마를 떼기 전부터 제가 결혼할 상대를 결정해버렸고요.”
레스가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외쳤다.
“그렇게 끔찍한 짓을!”
루나는 진정하라는 뜻으로 자기가 팔베개로 삼고 있는 그의 팔을 토닥거렸다.
“상류층 가문의 여자로 태어나면 다들 겪는 일이에요. 20세기가 된 지금은 물론 언젠가 신분제가 사라졌을지도 모를 미래에도 상류 사회에서 영영 일어날 일이죠. 마법사로 태어난 여자는 특별한 아이를 낳을 우량 종마로 취급받죠. 남편의 자랑이기도 하고요.”
레스가 진심으로 경멸을 담아 굵고 짧게 외쳤다.
“역겹군요.”
그녀는 편안한 표정으로 한 번 숨을 마시고 내쉬었다. 바람과 풀향기는 물론 저 하늘의 별이 보낸 수년 전의 빛이 몸속에 깃드는 걸 루나는 느꼈다. 자연의 모든 것에 비하면 그녀의 과거는 사소한 것처럼 느껴졌고, 또 그것을 말하는 게 행복했다. 노랫가락처럼 이성과 감성이 완벽하게 균형을 맞춘 목소리로 루나는 말했다.
“15살이 될 때까지 오로지 신부가 되기 위해서 살아왔어요. 왼손잡이였는데 오른손잡이로 교정했고, 사투리를 제 몸에서 뿌리 뽑기 위해 공용어를 쓸 줄 모르는 다른 사람과는 대화도 할 수 없었어요. 역사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조금이라도 남편보다 아는 척할 수 있을 법한 지식은 배우지 못하게 했어요. 제가 아는 세상은 가문 안이 전부였고 제가 어떠한 사람인지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도 못 느꼈었죠.”
레스와 타티아나는 숨죽이고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숨을 고르고 그녀가 말했다.
“마침내 당시 기준으로 제가 평생 기다려왔던 결혼 날이 다가왔어요. 남편이 될 사람이 먼저 와서 제가 어떤 사람인지 보러 왔었죠, 그 남자와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눈 순간 저의 세상에 첫 번째 균열이 일었죠. 완벽한 신부가 되는 것만이 제 삶의 목표였는데, 그 순간이 지나면 남은 평생 전 뭔지 그제야 의문이 들었죠. 난 누구지? 난 왜 태어났지?”
레스가 말했다.
“모든 시작은 질문에서 태어나죠.”
“네. 하지만 저는 아는 게 없었어요. 결혼 날짜는 다가오는데 비좁은 제 관점으로는 아무리 고민해도 결과물이란 혼돈과 고통뿐이었죠. 마지막 피난처로 저는 교회에 갔어요. 교회에 가는 건 아무도 말리지 않았죠. 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고해성사실로 들어갔는데 늦은 밤이라 신부님이 있을 리가 없었어요. 하지만 기적적으로 어떤 신부님이 이미 그곳에 계셨답니다.”
타티아나가 말했다. 그리고요? 루나의 눈가에 뜨거운 물기가 고여 있었다. 그녀가 감정을 추스르고 침착하게 말했다.
“저는 무슨 말부터 시작할 줄 몰라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울기만 했어요. 한참 뒤에 전 멍청한 질문을 했죠. 이곳의 신부님이신가요? 그 바보 같은 질문에도 불구하고 신부님이 자상하게 대답하시길, 자신은 이곳에 소속된 신부가 아니라 암 환자격리 시설에서 왔다고 하셨죠. 자원봉사만으로도 바쁘실 텐데 성실하시네요. 라고 제가 말하자, 그분이 말씀하셨어요.”
루나의 눈앞에 그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사실 저는 그곳의 환자랍니다. 몇 달 안 남았죠. 하고 싶은 말씀을 모두 털어놓으세요.”
타티아나는 누워서 들을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윗몸을 들어 올리고 경청했다. 루나의 얼굴에는 슬픔과 그리움이,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의 행복이 있었다.
“그분의 목소리는 바람 같았어요. 오로지 베풀기만 하고 어느새 흔적 없이 사라지는 만물의 파편 같았죠. 전 미련이 안 남을 정도로 신부님에게 제 모든 것을 털어놨는데, 사실 이미 그 순간에 제 운명을 스스로 고를 용기와 확신을 얻었답니다.”
레스가 말했다.
“방랑자가 자신의 길을 고르는 순간, 방랑자에게 막다른 길이란 없죠.”
한참 뒤에 루나가 울음을 삼키고 그녀도 윗몸을 일으켰다. 레스도 일어섰다. 각자 적당히 간격을 벌리고 제대로 자세를 잡았다. 타티아나와 레스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파문을 느끼며 루나가 스스로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울음을 다 가라앉히고 그녀는 말했다.
“제 독단으로 정략결혼을 깨고, 가문을 나가고 지금의 길을 고른 이후 다시 그분을 찾았지만 결국 다시 만날 수는 없었답니다.”
그가 말했다.
“사람은 언젠가 죽습니다. 예외는 없죠. 어떻게 사느냐는 어떻게 죽느냐와 같은 말입니다. 생존은 언젠가 죽을 걸 알면서도 맞서 싸우는 행위죠. 그 헌신과 자비를 루나 씨가 이어나가는 한, 그리고 타협하지 말고 맹세를 지키는 한 그분은 불멸입니다.”
레스의 말을 다 들은 루나가 차분히 말했다. 둘은 지금보다 확신으로 가득 찬 그녀의 모습을 여태 본 적이 없었다.
“레스 씨. 그리고 타티아나 씨. 문명이 시작된 순간이 언제인지 생각해보신 적 있나요? 원시인들이 짐승과 구별되기 시작한 계기요.”
레스는 말을 삼켰고 타티아나가 대답했다.
“불을 썼을 때부터 아닐까요?”
“그럴 지도요. 어떤 사람은 전쟁이라고 해요. 어떤 사람은 종교라고, 누군가는 농경이라고. 언젠가 해답이 나올 수도 있고 그저 지적 흥미를 자극하는 수수께끼로 남을지도 모르죠. 신의 존재만큼이나 모호하답니다. 제가 확신하는 건 사람이 동굴에 손바닥 자국을 남긴 순간부터 사람은 단순히 태어나기만 하다가 허무로 돌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마음을 남기고 계승하는 존재가 됐다는 거죠.”
레스가 말했다.
“우리는 방랑자이자 길이니, 발을 함부로 놀리지 말지어다. 뒤따라오는 사람이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