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화 〉[5권] 177회 - 앞면과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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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의 빛이 지평선을 비추자 하늘도 눈을 뜨듯 음영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대지가 숨을 쉬자 모닥불이 한 차례 타는 소리를 내며 바람에 자신의 몸을 털 듯 재를 날렸다. 근처에서 무릎을 땅에 대고 명상하던 레스는 어깨에 묻은 재를 툭툭 털고 눈을 떴다. 타티아나는 저 앞에서 새로운 날의 태양과 바람을 몸으로 한껏 누리며 유연하게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그가 무릎을 세우고 일어나자 상대가 레스에게 물었다.
“명상을 잘하네. 네가 그럴 때마다 내 사부님의 모습이 겹쳐 보여.”
“자리 비켜줄 테니 너도 해봐. 모닥불 온도가 딱 좋아.”
옷자락을 매만지면서 그는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난 명상이 안 맞아.”
“그래?”
“생각을 비우기 위해서 생각을 집중하라니 정말로 이상하잖아. 몸과 마음이 이어져 있다는 건 알겠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그럴 시간에 체력을 써서 머리를 비우는 편이 낫더라고.”
“사람마다 다른 법이지.”
레스도 팔과 다리를 이리저리 쭉쭉 뻗으면서 몸을 풀었다. 타티아나는 그를 지켜보며 한 손으로 팔꿈치를 감싸고 다른 손을 턱과 입가에 대며 깊이 생각에 빠졌다. 레스가 낑낑거리면서 다리를 양옆으로 찢을 때 그녀가 조심스레 말했다.
“어쩌면 다른 사부를 만나면 다른 결과가 나올지도 몰라.”
다리를 완전히 일자로 뻗은 레스의 몸에서 다양하고 이상한 소리가 났다. 고통을 참느라 레스는 머리와 표정이 덜덜 떨리는 채로 말했다. 목소리도 진동했다.
“그거 무슨 소리야? 이번에는 나더러 명상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레스가 일어나려고 하자 타티아나가 슬쩍 다가와 그의 어깨를 꾹 눌렀다. 레스의 입에서 낮은 비명이 튀어나왔다. 가악!
“정확히는 너를 가르친 스승의 지혜를 나도 물려받는 거지. 어젯밤에 마법사님도 말씀하셨잖아? 우리는 마음을 남기고 전승하는 존재야.”
타티아나가 레스의 어깨에서 손을 떼자 그가 숨을 헐떡이면서 자세를 고쳐잡고 쪼그려 앉았다. 상대가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훔치자 그녀는 재촉했다.
“그래서 대답은?”
레스는 관자놀이를 긁적이다가 다시 무릎을 땅에 대고 자기 앞에 있는 땅을 펼친 손으로 가리켰다. 타티아나는 그를 따라 무릎을 땅에 대고 맞은 편에 꿇었다. 그가 말했다.
“방금 갓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내 목소리를 따라와.”
상대는 눈만 깜빡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레스는 최대한 차분하고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눈을 감아도 좋고, 눈을 떠도 좋아. 선택해. 하지만 대답은 안 돼. 나는 여기 없는 존재야.”
그녀는 눈을 감았다.
“넌 자유로운 존재다. 너는 무슨 생각을 해도 좋아. 숨도 자유롭게 쉴 수 있어. 아무도 널 방해하지 않는다. 누구도 그 마음속에 들어올 수 없어.”
레스는 큰 소리가 나게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네가 할 일은 오직 둘 중 하나야. 하거나 말거나. 선택마다 떠올려. 모든 선택은 하느냐 마느냐로 이루어져 있어. 자연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듯.”
상대의 감긴 눈꺼풀 밑으로 눈동자가 산만하게 움직였다. 레스는 주위를 한 번 돌아보고 근처에 사람은 없는지 확인했다. 지금 상황이 눈에 띄면 부끄러웠다. 레스는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표정을 다스리고 다시 어조에 집중했다.
“이제 너는 나한테 말을 걸어도 좋아.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억지로 가만히 있으려니 몸이 근질거리고 머리가 어지럽네.”
“명상하는 방법도 둘 중 하나야. 하나는 자신의 의지로 내면을 비우는 거고, 아니면 잡념을 다른 것으로 덮고 집중하는 거야. 가장 집중하기 좋은 대상은 당장 몸으로 느껴지는 감각이지. 내 눈에는 지금 나무를 태우는 불이 보여. 그리고 너도.”
타티아나의 앞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너는 눈을 감고 있지. 지금 느껴지는 감각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마음에 들어?”
“내 머릿결을 쓸어주는 바람. 땀을 흘린 몸을 식혀주는 바람.”
“바람은 아주 좋은 선택이야. 집중해. 바람이 숨결이 되어 네 몸에 들어오고 있으니까.”
상대가 심호흡하자 레스는 그녀의 모습을 유심히 보면서 같이 숨을 쉬었다. 그리고 상대가 자신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휘파람과 비슷하게 소리가 선명한 날숨을 내쉬었다.
“불안하고 어쩔지 모르겠다면 다시 떠올려. 하거나 말거나야. 네 안에는 네가 느끼고 만드는 생각보다 더 깊은 무언가가 존재해. 그것이 널 밀고 당기지. 그것에 저항할 필요 없어. 바람에 몸을 맡기듯이 흐름을 따라가.”
레스가 일부러 소리가 잘 들리게 다시 심호흡했다. 어느새 상대는 레스의 호흡을 따라서 몸이 들썩이고 있었다. 눈꺼풀 밑의 눈동자도 가만히 있었다.
“아주 좋아. 잘하고 있어. 어떤 선택이든 우리가 하거나 마느냐 달렸어. 그리고 우리에겐 언제나 선택을 내릴 힘이 있지. 난 지금 태양을 보고 있어. 햇살이 땅에 드리웠고. 어두운 땅 위로 빛의 빗줄기가 흘러. 보고 싶다면 눈을 뜨면 돼.”
그녀는 눈을 뜨고 잠깐 호흡을 멈추고 하늘과 태양, 지평선, 어둠과 빛과 바람, 소리에 이르기까지 만물을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사람처럼 받아들였다. 순간 그녀의 정신이 극한으로 집중되어 동공이 수축하는 모습을 레스는 보았다. 틀림없이 지금 타티아나는 현실과 정신의 경계선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아침의 햇살에 발그레해진 얼굴도 잘 보였다. 그냥 감정이 고조돼서 붉어진 건가. 햇살이 그 정도로 강하지는 않은데. 레스는 더 건드려봤자 방해라는 걸 알았기에 상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딱 하나 그의 마음에 걸리는 건 타티아나가 어디를 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는 거였다. 자기 눈을 보는 건지, 자신의 등 뒤에 드리운 깨어난 새벽을 보는 건지 아무리 눈썰미 좋은 레스라도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더 신경 쓰지 않았다. 모든 것에 집중하는 걸 수도 있고, 눈을 뜨는 동시에 눈을 감았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깨달음은 그 자체에 가치가 있는데 뭐하러 정답을 찾아야 하는가.
어쩌다 보니 레스도 자신의 감각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덕에 그의 귀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기척이 들리는 쪽을 보니 먼 곳으로부터 낯익은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했다.
“밥 먹을 시간 됐나 봐. 일어나자.”
대답이 없다. 눈만 깜빡였을 뿐이다. 레스가 의문형으로 다시 말을 걸었다.
“타티아나?”
“어? 어? 어! 왜?”
그녀는 지나쳐 보일 정도로 과격한 반응을 보이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레스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면서 물었다.
“현기증 나? 다리에 쥐 났어? 손 필요해?”
타티아나는 괜히 헛기침하고 레스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겨서 힘겹게 일어났다. 일부러 자신의 손길을 피한 걸 레스는 알아챘으나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녀가 바로 뭐라 말하려다가 근처까지 온 피카니의 인사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다들 좋은 아침.”
그가 손을 들어서 피카니의 인사를 받아줬고 타티아나도 떨떠름하게 손을 들었다. 피카니가 손에 주머니를 꽂은 채 삐딱한 자세로 이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마주 앉으면서 뭐 하고 있었어?”
레스가 대답했다.
“너도 해봤던 거야. 하느냐 마느냐, 둘 중 하나다.”
그의 점잔 떠는 목소리를 듣고 피카니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혀를 삐죽 내밀었다.
“그래그래. 기억난다. 한 번 해볼 만했어. 딱 한 번은. 루나 씨는?”
레스와 타티아나가 나란히 또 함께 자신들의 등 뒤에 있는 마차 짐칸을 엄지로 가리켰다. 그리고 다 같이 저쪽으로 향해 걸었다. 걸으면서 피카니가 재차 물었다.
“아직도 주무시나?”
타티아나가 대답했다.
“정확히는 우리가 지나치게 일찍 깨어났지. 이유야 뭐, 앞으로 다섯 발자국만 더 걸으면….”
마차 짐칸을 뚫고 메아리가 치는 코골이가 여기까지 충분히 들리자 타티아나는 말을 끊었다. 레스가 이어서 말했다.
“입을 막으… 어흠. 플랜 B를 쓰려고 해도. 알다시피 어젯밤에 우리가 가진 손수건이나 양말이 전부 세탁되어있었잖아.”
피카니는 모닥불 근처에 놓인 두 사람 몫의 깔개와 모포, 그리고 숯이 된 수북한 장작들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완벽한 사람은 없지…. 난 상관없지만.”
주둔지 쪽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누군가가 부는 굉장히 날카로운 나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곧 주둔지 전체에 수많은 사람의 불평과 불쾌해하는 기운이 이쪽까지 피부로 느껴졌다. 일행은 그 소리를 듣고 절로 진저리가 났다. 소름이 돋아버린 레스는 자기 팔을 껴안고 문지르면서 중얼거렸다.
“역시 입대 안 하길 잘했어.”
피카니가 팔꿈치로 레스를 툭 밀쳤다.
“언제는 기회가 있었다는 듯이 말하네.”
레스는 마차 짐칸을 손등으로 두드리며 외쳤다.
“마법사님! 밥 먹으러 가요!”
잠시 후, 주둔지에 있는 대형 천막 아래에 그들은 모두 모였다. 아비투스가 잠이 덜 깬 얼굴로 스크램블 에그가 담긴 접시를 사람들에게 돌리면서 중얼거렸다.
“주둔지에 있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나팔수를 투석기로 저쪽에 던져버리면 참호 미는 건 순식간이야. 그놈이 포로 대접받기 전에 우리가 죽여버릴 거거든.”
카르델도 옳다구나 우거지상을 쓰면서 그 말에 거들었다.
“난 나팔수를 깨우는 새끼도 죽여버릴 거다.”
하딘이 턱을 괴면서 그들을 한심하게 여기듯 듯 쯧쯧 혀를 찼다.
“좆만 한 새끼들. 사관 학교에서는 국기 게양 때마다 대포를 쏜단다.”
레스가 식사를 한 점 떠서 먹다가 하딘을 향해 말했다.
“대포를? 그거 인상적이네요.”
“아침과 저녁마다 예포를 쏴. 운 좋게도 내 기수 때 어떤 놈들이 작당한 건지 대포가 고의로 고장 났어. 대포는 내가 졸업할 때 보수가 끝났지.”
식사 자리에 의미심장한 침묵이 흐르자 하딘은 차분한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아무튼, 에그 베이컨이라니 훌륭한 성찬이야. 베이컨은 우리가 가져온 거지만 여기서 닭을 기르고 있었다니. 원래 계란 프라이는 자살 임무나 총살형 받은 놈들이나 먹는 건데.”
루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먹던 걸 삼키고 말했다.
“아쉬워라. 커피만 있으면 완벽한데.”
“2년 전에 배급이 끊어졌다는군요. 마법사님. 아이스 맨이 말하기를 어떤 병사들은 커피가 너무 그리워서 고구마랑 감자 껍질 태워서 달인 물을 마신답니다.”
“아이스 맨?”
타티아나가 그 말을 듣고 귀를 쫑긋거리자 하딘이 멋쩍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실례, 설명이 부족했군. 카르델.”
카르델은 기꺼이 명령을 받아들이고 바로 수다 떠는 투로 말했다.
“막말로 여기 대부분은 폐급인데 둘 있는 중대장 중 하나는 사람답습니다. 매사에 항상 냉철하고 원칙대로 일한다며 모든 병사가 아이스 맨이라고 부릅니다. 짓궂게 존경을 담아서요. 다들 아이스 맨이 대령을 죽이고 계급을 찬탈했으면 좋겠대요.”
레스가 물었다.
“다른 중대장은?”
아비투스가 대신 답했다.
“롱 헤어. 머리카락이 여자처럼 길어서.”
“별명 붙이는 모습이 마치 원주민 식 이름 짓기 같네요.”
루나가 그렇게 말하자 레스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
“원주민들은 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특징을 따서 이름을 붙여주거든요. 예를 들어 톤토는 ‘커다란 눈’, 게안내타하 들로오는 ‘준비된 새’라는 뜻이죠. 그리고 샤카자이아는….”
레스의 표정이 얼어붙는 걸 보고 루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서둘러서 얼버무렸다.
“가까운 사람이 직접 말하는 편이 좋겠네요. 샤카자이아는 무슨 뜻인가요?”
“저도 몰라요.”
레스는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하려 했으나 분위기가 가라앉는 건 그의 능력 바깥에 있는 문제였다. 피카니가 상황을 수습하듯이 급하게 말했다.
“뭐, 여기 중대장이 어떻든 우린 곧 떠날 테니 아무래도 좋은 일이죠.”
아비투스가 그 말을 듣고 평소보다 눈을 크게 떴다.
“전 오후에 떠나는 줄 알았는데. 병사들이 다들 그러던데요.”
하딘이 말했다.
“저쪽한테 거짓말했어. 아침 먹고 준비 마치는 대로 떠날 거다. 대령이 우리를 위해서 예정 시간 전까지는 군악대를 준비하겠단다. 세상에, 기상나팔조차 엉망이었는데.”
카르델이 피식 웃고 포크 끝부분을 접시에 대면서 빈정댔다.
“군악대? 아쉽네! 저희 신세 생각하면 다음은 없을 텐데.”
식사를 마칠 때까지 레스는 표정 없이 묵묵히 먹었고 다른 일행들은 애써 신경 쓰지 않는 척했다. 그 낌새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레스는 둔하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고 일행들이 각자의 역할로 바빠졌을 때 레스는 마차의 짐칸 근처에서 기다리는 거 말고는 할 게 없었다. 감시역으로 누가 오나 계속 기다렸더니 피카니가 그에게 왔다. 레스는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꿈 덫 목걸이를 손에 쥔 채 한창 집중하던 참이었다. 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 벽에 기대어 섰다. 피카니는 품에서 담뱃갑을 꺼내더니 한 개비 바깥으로 꺼내고는 레스에게 내밀었다. 레스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썼다.
“무슨 짓이야?”
“매우 필요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저번에는 받았잖아.”
“저번에는 어쩌다 네 유혹에 넘어갔다만 이번에는 아니야. 저리 치워.”
“흠.”
피카니는 습관적으로 빼낸 담배의 끄트머리를 입에 물고 성냥을 켜려다가 눈치 보여서 불을 붙이지 않았다. 그리고 근처에 팔짱을 끼고 같이 짐칸에 기대어 섰다. 불을 안 붙인 맨 담배를 문 채로 그가 레스에게 물었다.
“어제처럼 반응은 있었어?”
레스는 톱니바퀴 테두리에 머리카락으로 거미줄 장식이 얽힌 꿈 덫을 손안에 굴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피카니가 재차 물었다.
“전하께서 그새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나셨나?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꾸미는 건가?”
“아자리는 마법사야. 그리고 자기 앞가림은 할 줄 알아.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랄 게 없어.”
“네 말이 맞겠지. 나보다야 더 오래 같이 있었으니까.”
“지금 아자리에 대해서 기억나는 거라고는 영화관에서 들었던 그 웃음소리밖에 없어.”
그 말을 듣고 피카니는 물고 있던 맨 담배를 손가락에 끼운 채 깊이 생각에 빠졌다.
“루나 씨 말이야. 그것보다 더 무서울까? 평소에 화 안 내던 사람이 그런 법이잖아. 부부싸움이라도 일어났다간….”
레스는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 알아?”
“들어본 적은 없는데 제목만 들어도 내용을 알 거 같네. 맞춰보자. 내가 토끼지?”
“토끼는 거북이와 달리기 시합을 하기도 전에 이미 이겼다고 자만해서 경기 도중에 낮잠을 잤지. 하지만 거북이는 부지런히 달려서 토끼를 제치고 먼저 결승선을 넘었어. 이제 내가 무슨 말 하려는지도 알겠지.”
피카니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이성이 사라진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네가 거북이고 루나 씨가 결승선이냐?”
레스는 이빨 갈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어금니를 힘껏 깨물고 낮게 외쳤다.
“내가 거북이였으면 낮잠 자고 있던 토끼를 깨웠을 거다! 그리고 지금 낮잠 자려고 하는 널 깨워주는 중이고!”
피카니는 무안해하는 표정으로 자기도 모르게 악력으로 부러트린 담배를 땅에서 주웠다.
“맞아. 맞아. 미안. 어제부터 내가 정신적으로 여유가 너무 없었거든. 어서 이 빌어먹을 곳을 떠나야겠는데. 사실 대령으로부터 도망치려고 네 감시역을 자청했어.”
레스는 경멸 가득한 시선으로 피카니가 부러진 담배 절반을 입에 끼우려는 걸 노려보았다.
“정말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금연부터 하시지.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
그 말을 듣고 피카니는 정말 이상한 걸 들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한테서 연애 조언을 듣고 있다니.”
“YES를 받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던 건 너였어. 루나 씨의 호감을 얻기 위해서든 내 도움을 받기 위해서든 소박한 노력부터 해! 날 더러운 놈으로 취급하기 전에! 썅!”
피카니는 레스의 욕설과 격렬한 모습을 보고는 화 없이 호기심과 순수한 놀라움을 표했다.
“너 묘한 곳에서 엄청나게 화낸다? 내가 공적을 가로챘다고 했을 때조차 이러진 않았는데.”
진이 빠져서 기운 없는 목소리로 레스는 대답했다.
“내가 치정에 관계된 일에는 굉장히 민감하다는 것만 알아둬.”
“그건 또 지금 처음 알게 된 사실일세. 허.”
피카니는 습관적으로 또 꽁초를 입에 끼우려다가 손을 멈췄다. 충동적으로 그의 손아귀 안에서 꽁초가 뭉개져서 바스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레스는 놀란 눈으로 피카니가 심호흡을 하면서 천천히 담뱃갑을 꺼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상대의 눈에 담긴 감정들을 무슨 단어로 표현해야 할까. 너무 서글프고 강력해서 남 일인데도 보고 있는 사람에게까지 전염될 정도로 진했다. 피카니의 눈동자는 뱀처럼 떨리는 일이 없었건만 지금은 시간을 울리는 자명종 같았다.
피카니가 마침 지나가던 병사를 향해 손을 뻗고 외쳤다.
“어이!”
지나가던 병사가 그 소리를 듣고는 자기를 가리키며 멈춰섰다. 피카니가 쥐고 있던 담뱃갑을 야구공처럼 힘껏 던지자 그것은 포물선을 그리며 상대에게 닿았다. 병사는 그걸 보고 당연히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깜짝 놀랐다. 피카니는 가던 길 가라는 뜻과 어서 떠나라는 재촉을 손짓으로 동시에 전했다. 애써 침착한 척 팔짱을 끼며 짐칸에 기대는 그의 모습을 레스는 불안한 시선으로 보았다.
“누누이 말하는데 넌 너무 충동에 휩쓸려.”
그는 시치미 뚝 떼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왜. 전부터 네가 나더러 누누이 말했잖아. 스물 초반이면 아직 젊으니까 늦기 전에 서두르라고. 별일이야 있겠어?”
짐칸 맞은 편에서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타티아나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렇게 필사적으로 안쓰럽고 한심할 수가 있나.”
타티아나 바로 옆에 있는 루나가 속삭였다.
“저…. 분위기가 너무 심각해지기 전에 레스한테 아까 일을 사과하고 싶은데요.”
레스가 한숨을 푹 쉬고 근처에 놓아둔 가방에서 기타를 꺼내 그대로 주저앉았다. 타티아나가 그 소리를 듣고는 루나에게 조용히 하라고 입술에 검지를 대며 급하게 경고했다.
기타의 반주가 흐르자 피카니는 첫마디를 듣고는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눈치챘다. 온기가 느껴지는 자기만의 방에서 들리는 메아리처럼 레스는 낮고 깊은 음을 연주했다. 피카니가 입을 열고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나의 돛천을 펼쳤으니. 바람에 몸을 맡겨 날아오릅니다. 집으로 돌아가네, 정겨운 집으로.”
레스가 낮고 거친 목소리로 천천히 다음 가사를 낭송했다.
“등을 누이자…. 하늘과 구름이 갈라져 길이 보이네. 나는 돌아가네, 정다운 집으로.”
땅에서 하늘로 향하듯 피카니가 높은 성량으로 외쳤다.
“당신의 별이, 보입니다. 당신이 저를 위해 별이 됐죠. 어머니, 저는 이곳에 있습니다.”
둘은 합창했다.
“이제 당신의 손을 잡습니다. 다시는 외롭지 않겠지요. 이제 집에 있을 테니까요. 정다운 집에. 당신의 별이 보입니다. 저를 위해 별이 됐죠. 아버지, 저는 이곳에 있습니다.”
레스는 현을 쥐어뜯듯이 여운을 남길 여지도 없이 연주의 메아리를 끊어버렸다. 철사가 긁히는 무기질적인 소리가 귀를 기울이는 두 여자를 긴장시켰다. 피카니가 말했다.
“음유시인이 돌아오니 기분이 좋은걸.”
“이건 내 노래가 아니야. 이건….”
“알미트라의 노래지. 다 기억해. 너의 마녀, 그리고 어머니 같았던 존재. 아버지 같았던 너의 스승은 널 총잡이로 만들어줬고 그녀는 너에게 다른 모든 것을 가르쳐줬지.”
타티아나와 루나는 눈이 충혈될 정도로 부릅뜨고 소리에 집중했다. 두 남자는 서로의 대화에 집중하느라 평소라면 그들의 단련된 직감이 단박에 눈치챘을 묘한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다. 한참 뜸을 들이고 힘겹게 레스는 말했다.
“왜 내가 사실상 너를 향한 복수를 포기했는지 한번 짐작해줄래? 의미 없는 수사학적 질문이라는 거 알지만 이것 말고는 대화를 어떤 방법으로 이어야 할지 모르겠어.”
피카니는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바라는 대로 해줬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사적인 감정 때문에 내가 죽어버리면 세상에 혼란이 일어나니까.”
“그것도 있긴 하지.”
“네 맹세 때문에? 솔직히 난 네가 맹세와 타협에 왜 그리 집착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어.”
“맹세는 변하지 않는 것이고, 타협은 변하는 거야. 둘은 섞이면 안 돼. 특히나 지금처럼 온갖 것들이 변하는 혼란한 세상일수록 믿음을 지킬 필요가 있어. 그게 나의 ‘별’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변해도 진정 사라지는 것은 없다며?”
“한가지 믿음이라도 여러 면이 존재해. 너도 내가 레오포드 씨하고 대화하는 거 봐서 알잖아. 내가 동전의 앞면을 본다면….”
피카니가 어느 틈엔가 동전을 꺼내더니 엄지로 동전을 위로 튕기고는 검지와 중지 사이로 붙잡았다.
“나는 동전의 뒷면을 볼 수밖에 없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독한 술 한잔이나 담배를 권했을 텐데. 너는 그게 안 되니까 잠깐 심호흡하고 진정해봐. 그렇게 해줄래?”
레스가 한 번 크게 숨을 쉬자 피카니가 말했다.
“왜 내 행동을 눈감아준 거야?”
“너희들은 이 모든 난리가 나 때문에 생긴 거라고들 하지. 내가 아자리를 지켜주고 도와줬기 때문이라고. 아니. 이 모든 건 네 덕분이야. 우리들의 여행은 네가 만들었어.”
“내가?”
“아자리가 차기 마왕이라는 거. 네가 알려준 거야. 말 안 해줬으면 우리는 영영 몰랐어.”
피카니는 잠깐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너무 한참 전 이야기라 까먹어버렸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나는 우리 서로 싫어하는 그 단어를 꺼낼 수밖에 없겠다. 그날 밤 아자리의 정체가 내 운명으로 느껴졌어. 내가 다시 무법자로 살아갈 명분이 생겼어.”
“그 얘기는 괜히 전하한테 꺼내지 마라.”
레스가 현을 하나 잡고 놓자 외롭고 높은 소리가 튀어 올랐다.
“만나면 전부 말할 거야. 네가 루나 씨를 향해 그러듯이 나도 그래야만 해.”
“맙소사….”
“난 샤카자이아에게 그 이름에 무슨 뜻이 담겼는지 물어보지 않았어. 왜 난 언제나 그 모양일까? 그 아이는 순수해서 항상 먼저 나한테 다가와 줬는데 나는 그러질 못했어. 아자리, 샤키, 단테. 내가 정말 그들을 새로운 고향으로 여겼던 걸까? 내가 나의 무가치한 삶에서 달아날 핑계로 삼은 게 아니라?”
“내가 이 말까지 하면 너무 호모처럼 보여서 꺼렸는데 그냥 말하련다.”
레스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돌리자 그가 말했다.
“넌 내가 여태껏 만나본 사람 중에서 제일 특별한 존재야. 루나 씨보다도 더. 손에 들어온 원 아이드 잭보다 더. 전하를 포함해서 널 반겨준 다른 사람들도 분명 그랬을 거다.”
레스는 고개를 되돌리고 표정 없이 코웃음을 쳤다. 피카니가 물었다.
“왜 날 안 죽였어?”
“네가 죽어버리면 난 다시 혼자야. 또 그렇게 되긴 싫었다.”
목울대를 한 번 가다듬고 레스는 괜히 기타를 고쳐잡으며 재차 중얼거렸다.
“확실히 이 말도 호모처럼 들리네.”
피카니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레스의 어깨를 부드럽게 건드렸다.
“오랜만에 네가 연주하는 걸 봐서 좋았다. 오랜만에 같이 노래를 부른 것도. 기타 계속 연습해봐. 손 떨림이 사라졌어.”
레스는 그 말을 듣고서야 깨닫지 못한 사실을 알아챘다. 그의 오른손에 역병처럼 깃들어있던 수전증이 지금은 사라졌다. 피카니는 레스를 혼자 있게 하고 싶어서 짐칸 반대편으로 별생각 없이 걸어갔다가 거기에 숨어있던 두 여자와 마주치고 말았다. 눈을 휘둥그레 뜬 피카니를 향해 타티아나와 루나가 조용히 하라고 합을 맞추듯이 같이 자기 입술에 검지를 댔다.
피카니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시선을 피하면서 얼굴을 붉히는 게 고작이었다. 한동안 마차 짐칸에는 한 방랑자가 흥얼거리는 허밍과 잔잔한 반주가 흘렀고, 그들은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