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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화 〉[5권] 182회 - 금단증상 (182/188)



〈 182화 〉[5권] 182회 - 금단증상

시간이 흘러 해가 기울 무렵 평원에  도로를 따라 달리던 마차는 ‘사유지. 출입금지’라고 적힌 팻말과 만났다. 철조망이 쳐진 울타리 따위는 없다. 그들은 계속 나아갔다. 이내 다른 팻말을 만났다. 하딘이 먼저 달려가서 팻말에 적힌 걸 읽었다.

“맹수 주의, 무허가 사냥 금지.”


주위를 둘러보니 여태껏 황량했던 평원과는 달리 이곳에는 수목이 드물지 않았다. 건조하고 아무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던 바람에도 풀과 흙 향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먼지와 잡초밖에 없었던 주둔지와는 대조적으로 이곳은 자연이 숨을 쉬고 있었다.


하딘이 생각에 빠진 모습으로 가만히 있기에 마부석의  남자는 마차를 세우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명령을 기다렸다. 피카니가 하딘에게 가까이 말을 몰고 물었다.

“무슨 생각 하십니까?”


“우리가 가는 방향에는 원주민 보호구역이 나와. 사냥감이라고는 쥐밖에 없는 척박한 곳이라고 들었어. 그런데 저것 봐. 여기 주변도.”

하딘이 자기 앞에 있는 ‘맹수 주의’라고 적힌 팻말과 숲들을 향해 손짓했다.

“방금 사유지를 지나온  자네도 봤을 거야.  땅의 주인은 저번 전쟁으로 황폐해진 땅을 회복시켰어. 포식자와 피식자들의 균형을 유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세상에.”


그는 혀를 내둘렀다. 피카니는 숲 덕에 상쾌해진 바람을 크게 들이마시고 말했다.

“우리가  남자의 영역에 들어온 게 확실하군요. 이제 어쩌실 겁니까?”

“해가 완전히 저물기 직전까지 움직이고 도로 주변에서 야영한다. 밤을 지새우면서 이곳을 통과하는 건 안 되겠어.”


하딘의 말을 들은 카르델이 외쳤다.


“늑대들의 습격이라도 걱정하시는 겁니까?”


그가 침착하게 말했다.

“우리는 무단 침입자다. 늑대는 물론 토끼 한 마리까지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는다. 시튼은 우리가 생각하는 거 이상으로 이곳에서 중요한 인물 같다. 그를 자극하지 말자고.”

이번에는 아비투스가 그에게 물었다.

“대령을 따돌리는 건 어떻게 합니까?”

하딘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따돌리는 건 불가능해. 만나게 되면 우리 애물단지를 던져주자고.”

피카니가 그 말을 듣고 인상을 한 번 찌푸렸다가 옆으로 가래침을 퉤 뱉었다.


여명을 거쳐 석양이 지고 달이 태양의 자리를 대신할 때 마차는 도로에서 조금 벗어난 공터에 자리 잡았다. 여태껏 야영을 해오면서 모아둔 숯과 재를 흙바닥에 깔고  위에 생나무 장작들을 쌓아 올렸다. 아비투스는 ‘모처럼이니’라며 굳이 성냥을 쓰지 않고 부싯돌을 때렸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아무리 불똥이 마른 풀 위에 떨어져도 불이 붙을 기미가  보였다.


레스는 주변에서 모아온 잔가지 중에 유난히 단단한 것에 눈이 갔다. 땔감으로 쓰기에는 아까운 손가락만  굵기의 나무 막대였다. 저 앞에서 아비투스와 카르델끼리 누가 불을 피울  있느냐로 자존심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그가 저쪽으로 다가가서 제안하는 투로 말했다.


“내가 해봐도 될까?”

아비투스와 카르델은 부싯돌을 때리느라 퉁퉁 부은 손을 어루만지다가 레스를 위해 자리를 양보했다. 그가 자리를 잡고 넓은 장작 위에 마른풀을 얹고 거기에 막대를 꽂아서 양손으로 비벼 마찰열을 일으켰다. 자세부터 비비는 솜씨까지 숙련된 티가 났다. 10초가량 계속 막대를 비비자 연기가 나기 시작했고 남자들은 서둘러서 불씨를 옮겨 다 같이 입으로 바람을 불었다.

모닥불을 둘러싸고 일행은 불을 쬐거나 물 끓일 준비를 했다. 레스는 모닥불로부터 멀찌감치 서서 끝이 까맣게 타버린 막대를 한심해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고 타티아나가 말을 걸었다.


“무슨 생각해?”


“예전에 익히려고 그렇게나 애를 썼었는데. 성냥을 안 뒤로 새까맣게 잊고 있었어. 더 나은 게 나타나면 오래된 것들이 사라지는 건 당연한 거겠지.”

타티아나는 잠깐 멍하니 그의 눈을 노려보다가 한쪽 손을 골반에 올리고 말했다.


“아침부터 쭉 하고 싶었던 말인데, 그 명상은 여태껏 겪어본 것 중에서 손에 꼽았어.”


“잘됐네.”


레스는 나무 막대를 연필처럼 쥐고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으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 정도로 정신이 고조되는 순간은 목숨이 걸린 싸움에서나 겪어봤어. 하지만 싸울 때는 그 감각에 집중할 틈이 없잖아. 맨정신과 자신의 의지로 거기에 도달하는 건 정말…. 그건 네가 공유한 가르침 중에서 가장 값졌어.”


“말이 나와서 말인데 사격 솜씨는 얼마나 진전이 있었어?”


타티아나는 시선을 위로 든 채 곰곰이 생각하고 대답했다.

“날씨가 나쁘지만 않다면 나강 카빈으로 100m 내에서는 맞출 자신 있어.”


“잘됐네.”

“내가 어제 알려준 형(形)은 어땠어?”

레스는 바로 실눈을 뜨고 헛웃음을 뱉었다.

“어려워서 기억이 하나도 안 나. 기본자세와 기술들 하나하나 방법부터 부르는 발음까지 생소해서 뭐가 뭔지 모르겠더라고.”


타티아나가 레스의 어깨를 찰싹 때리면서 아쉬워하는 투로 말했다.

“너만큼 좋은 인재는 만나기 어려운데 본인은 배우기 싫다니. 대장간의 칼이 녹스는구나.”

“애초에 난 누군가와 싸우는 걸 좋아하지 않아.”

부츠를 벗고 맨발을 불에 쬐고 있던 피카니가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레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대꾸했다.


“사격보다도 손으로 누군가를 때리는  더 거부감이 들어. 몸이 닿잖아.”

“너하고 별일 다 겪어봤지만, 정말 이상한 소리다.”

피카니의 비아냥에는 레스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타티아나는 목을 가다듬고 진지하게 물었다.


“전사의 길은  택했어? 선택지가 없어서?”

레스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 상대에게 말했다.


“‘이븐 라 아하드’가 무슨 뜻인지 알아?”


피카니는 고개를 내저었고 타티아나는 말을 삼켰다. 레스가 재차 말했다.

“누구도 아닌 자의 아들. 길을 택하기 전에는 난 누구도 아니었지.”


그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고 짐칸으로 들어갔다. 일행들은 각자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며 여독을 풀었다. 타티아나는 차를 담은 머그잔을 들고 루나를 찾아가 아까 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루나는 슬픈 표정을 짓고 머그잔을 응시하며 말했다.

“본디 맹수로 태어났거늘, 양의 마음을 갖고 있군요.”

타티아나도 동감하는 표정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하늘 아래는 도의를 찾을 수 없는 맹수들의 세상인데.”


“…예, 약자들은 잡아먹히는 세상. 언제나 그래왔듯이.”

그녀는 가냘픈 입김으로 차를 식히고 머금었다. 이곳은 유난히 어둠이 빠르게 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숲으로부터 곳곳에서 달을 향해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퍼졌다.

모닥불 앞에서 레스는 기타를 쥐고 특별한 곡 없이 음계를 차례대로 켰고 피카니는 바로 옆에서 덜덜 떨리는 자기 손을 움켜쥐고 있었다. 레스가 현에서 손을 떼고 말했다.

“아직 하루도 안 지났는데 벌써 금단증상이야?”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안 나아져.”

피카니가 고개를 획 돌리고 그를 노려보자 레스는 시치미 뚝 떼고 다시 기타를 잔잔하게 켜면서 낮고 깊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서쪽으로 태양이 가라앉고, 가축들은 물길을 따라 내려가네. 붉은 날개는 둥지를 틀었으니, 이제 카우보이가 꿈으로 빠져들 때.”


피카니는 레스를 째려보면서도 입술을 모아 휘파람으로 그의 노래에 반주를 넣었다.

“계곡으로 드리우는 푸른 빛. 그곳이 내가 갈 곳이지. 가장 좋은 세 동무와 함께.  총과 조랑말, 그리고 나.”

피카니가 앓는 소리로 목을 가다듬고 후렴을 넣었다.

“그저 내 총과 조랑말, 그리고 나.” 그리고 휘파람을 불었다.


레스는 기타를 내려놓았다. 하딘과 다른 일행들이 모닥불로 모여들고 있었다. 각자 개인 무장을 옆에 두고 손에는 차가 담긴 머그잔을  채 그들은 이야기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하지만 피카니의 덜덜 떨리는 머그잔이 그들의 신경을 긁고 있었다. 피카니는 참으려고 필사적이었으나 애쓸수록 머그잔에 일어나는 폭풍은 점점 심해졌다. 루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어색한 분위기를 솔선해서 깼다.

“담배는 언제부터 피우셨죠?”

피카니가 잔을 내려놓고 손을 쥐락펴락하면서 대답했다.


“11살.”


“11살? 11살! 미쳤어요?!”


다른 사람들도 제법 놀란 눈치였다. 루나의 격한 반응에 피카니는 고자질하는 아이처럼 레스를 가리켰다.

“애는 13살부터 피웠데요.”


레스가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물담배는 우리 문화란다.”


피카니가  뭐라 말하려 하자 루나가 바로 나서서 그의 말을 도중에 막아버렸다.

“피카니 씨.  세월을 내내 피워오셨는데 조금씩 줄이지도 않고 바로 끊겠다고요?”


“까짓거 하면 되죠.”

그는 애써 태연한 척 말투를 꾸며서 대답했으나 괜찮지 않다는 티가 온몸에 드러났다. 하딘이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한 번 쓸어내리고 입을 열었다.

“가만히 있기 어려우면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경계라도 서지 그러나. 바람이라도 쐐.”

주의 산만하게 몸을 이리저리 계속 수선을 떨던 피카니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총과 소총을 몸에 매고 피카니는 어디론가 향했다. 겨우 주변이 침착해지자 아비투스가 먼저 헛기침으로 운을 띄우고 말했다.


“논의 끝에 우리는 너한테 어떤 소년의 이야기를 해주기로 했어.”

레스가 물었다.


“이름은?”


카르델이 말을 받았다.

“우리는 그 녀석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아.”


루나가 물었다.


“어째서요?”


이번에는 하딘이 루나의 질문에 대답했다.

“이름이 같은 다른 사람하고 존재가 겹쳐지는 게 싫어서요. 이해하기가 어렵겠지만 저희는 그러기로 정했습니다. 우리 나름으로 경의를 표하는 겁니다.”

타티아나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경의를 표한다고요? 그 말은….”

레스가 손을 들어서 그녀에게 더는 말하지 말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녀가 입을 다물고 시선을 살짝 내리자 하딘이 말을 이었다.


“혹시 싶어 묻는 건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알고 싶나? 다양한 면에서 말이야. 필요 없다면 넘어가지.”


“전부 듣죠. 드문 기회잖아요. 특히 저희끼리 이렇게 말을 나눌 기회요. 내일 시튼 빌리지에 도착하면 다음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하딘이 루나를 향해 손짓했다.

“그렇다면 우리 중에서 제일 해박한 분에게 부탁드리지. 루나 마법사님, 이 전쟁이 왜 일어났나요? 무슨 과정이 있었죠?”


루나는 들고 있던 머그잔을 옆에 살포시 내려놓고 입가에 주먹을 대면서 헛기침했다.

“어흠. 레스 씨.  전쟁에 대해서는 얼마나 아시나요?”

“마왕이 인간들 땅을 노리고 침략하러 왔다. 예전 이야기들처럼.”


“틀린 사실은 아니에요. 하지만 틀리지 않았다고 진실이 담긴 것도 아니죠. 지금 우리가 여기 있는 아메리카가 개척 시대를 거쳐 인간과 마족에 의해 갈라졌다는  이미 아시겠죠.”

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1898년에 마족 측에서 군대를 자신들의 국경에 주둔시켰고 저희는 철수를 요구했어요. 몰래 군대를 전진시키면서요. 서로 장전을 마치고 방아쇠를 당길 명분만 기다렸죠. 조금 이야기가 새는데 인간 쪽에 가장  나가는 언론이 둘 있어요. 하나는 조셉 퓰리처의 ‘네이션 월드’, 다른 하나는 루돌프 허스트의 ‘모닝 저널’이요. 둘 다 신문왕인데 하늘 아래에 왕은 하나만 있어야 하는 법. 퓰리처와 허스트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썼죠. 하지만 허스트가 이겼답니다. 비결은, 허스트가 신문에 사진을 최대한 많이 실었으니까요.”


레스는 루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신문왕이랑 주제와 무슨 상관이죠?”


“허스트의 신문이 가장 먼저 침략을 알렸어요. 전쟁이 시작됐죠. 허스트의 언론은 주가가 치솟았고 신문은 엄청나게 팔렸죠. 그 기사를  기자가 누구인지, 그 기사가 사실이었는지 알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아무도. 레모니 양. 마족들은 왜 전쟁이 일어났다고 알죠?”

타티아나가 덤덤하게 말했다.


“인간들이 먼저 국경을 넘어서. 저희 쪽은 그렇게 알죠.”

레스가 자기 눈가를 부여잡고 뇌까렸다.

“인간이 먼저 침략한 거였다고? 그 찌라시를 명분으로? 그게 사실이야?”


타티아나는 여전히 덤덤한 목소리로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뭐가 사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우리가 정말로 먼저 국경을 넘었을 수도 있어. 그리고 중요하지 않아. 서로 전쟁을 원했고 일어날  일어났을 뿐이야.”

“그리고 역사는 승자가 고쳐 쓰면 그만이다?”


“싸움에서 졌으면 잡아먹히는  세상의 섭리지.”


레스는 잠시 숨을 고르고 스스로 물었다.

“개척 시대 동안 서로 땅은 이미 많이 먹었잖아. 대체 뭐가 아쉬워서?”

하딘이 자신의 한쪽 무릎에 팔을 올리면서 대답했다.


“공동의 적이 나타났기 때문이지.”

“공동의 적이라니?”

그때 경계 근무 겸 금단증상을 달래기 위한 산책을 다 마친 피카니가 아까보다는 차분해진 모습으로 자리에 돌아왔다. 마침 잘 왔다는 양 하딘이 피카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공동의 적.”

“뜬금없이 뭡니까.”


피카니가 인상을 찡그리며 레스와 루나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하딘이 말을 이었다.

“두 문명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들. 기존의 문명에 속하지 않는 새로운 땅에서 태어난 사람들. 아메리칸. 그리고 아메리카에 세워진 도시들이 독립을 앞두고 있었지.”


“그게 전쟁까지 치러야 할 이유가 됩니까?”

루나가 화제를 이었다.


“이 땅에 도시가 13개 있어요. 그리고 도시마다 모두 한 나라의 수도와 규모가 맞먹어요. 이 땅이 가진 잠재력은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고요. 기존의 국가들이 여기 사람들을 여타 식민지처럼 다루기에는 상황이 까다로워졌죠.”


하딘은 검지를 위로 쳐들고 레스의 주의를 자신에게 끌고 말했다.


“엄청난 인구가 여기로 모이는 중이고 이미 세워진 공장도 많아. 문명 세계의 얼간이들이 낮은 인건비를 노리고 이곳에 세웠지. 그 공장들을 거느린 강도 백작들, 그놈들 중  명만 아무나 골라도 어지간한 진짜 귀족 백 명을 합친 것보다 부유해. 우리가 한때 황무지라고 비하했던 이 땅에 머지않아 최강의 문명이 새로 태어날 거다.”


“제 생각은 다른데요.”


피카니가 끼어들자 일행의 주목이 전부 저쪽으로 쏠렸다. 하딘이 눈썹을 씰룩였다.


“근거는?”

“아주 예전에 공화 독립을 위해서 투쟁한다는 놈들 만나본 적 있어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남들은 미터법 쓰니까 일부러 야드 파운드법을 쓴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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