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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화 〉[5권] 183화 - 집총거부 (183/188)



〈 183화 〉[5권] 183화 - 집총거부

레스와 하딘을 제외한 남자들 사이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스쳤다. 루나가 엄격하게 굳은 시선으로 피카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피카니 씨. 방금 화제의 논점을 흐리셨어요.”


“죄송합니다.”


그는 정색하고 바로 사과했다. 레스는 한 번 심호흡했다.

“그러니까 여태껏 한 이야기들의 논점은. 이 전쟁에는 제대로 된 명분이 없다는 건가요?”

하딘은 잠깐 생각하고 레스의 말에 대답했다.


“명분이라.  전쟁에 우리 종족의 운명이 달렸냐면, 맞아. 역사라는  어떻게 흐를지는 몰라도 이기는 쪽은 이 땅의 주도권을 잡겠지. 오랜 세월 인간과 마족 사이에서 완충 지대 역할을 해온  광활한 야생에 깃발이 꽂히면….”

하딘이 넌지시 대답을 기대하는 투로 말꼬리를 늘리자 레스는 말했다.


“균형이 바뀌겠죠. 온 세상의 균형이.”


“나도 전쟁보다는 평화를 원해.”


뜸을 들이고 하딘이 목소리에 무게를 담아 말을 이었다.


“하지만 본전도  건지고 끝낼 수는 없어. 군번줄조차 수습해주지 못한 수많은 전우가 아직도 전선에 묻혀있다. 그들이 묻힌 땅을 그냥 넘길 수는 없어. 나 같은 사람한테 이 싸움이 끝날 길은 하나뿐이야. 끝까지 가는 거지.”

레스는 숙연한 태도로 가만히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침묵을 지켰다. 하딘이 말했다.

“4년하고도 넉 달 전. 1899년 5월. 선전포고. 그 당시 나는 연방 정부의 지휘를 받는 기병대 부사관이었다. 계급은 중위.”

그는 눈을 감고 마음속에 묻힌 기억을 꺼냈다.


“연방 정부에 소속되는 군대는 다양한 국적의 자원자로 구성되고, 철저히 정예로 골라내지. 그중에서 제일 용맹하고 강인한 자들만이 최전방 정찰대, 레인저가 된다. 우리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지.”


하딘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아비투스.”

자기를 부르는 말에 아비투스가 시선을 그에게 향했다. 하딘이 재차 말했다.

“우리 중에서 그 소년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자네였지. 가장 먼저 만났고. 1899년 5월. 켄트룰 공방전. 떠올릴 수 있겠나?”

“그걸 제가 어떻게 잊겠습니까.”

“명령이다. 먼저 이야기해.”


아비투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들고 있던 머그잔을 입가에 대고 미지근한 차를 단번에 들이켜 목을 축였다. 그리고 아비투스는 눈을 감고 말했다.


“1899년 5월. 각국에서 온 군대들이 일제히 움직였지. 여왕의 이름으로 아카수스에서 온 11연대. 국왕의 이름으로 르바티아에서 온 5연대. 카이저(황제)의 이름으로 슈타이만에서 온 4대대. 중립국인 헬베티아 공국에서 지원 온 군무원들. 전투원만 5만 명에 달했고 보급품을 나르는 병력은 더 많았지.”


레스가 고개를 끄덕여 듣는 시늉을 해주자 아비투스가 계속 말했다.


“온갖 국적의 놈팡이들이 모여서 부대꼈으니 행군 분위기는 엉망이었어. 나처럼 복무 기간이 제법 되는 소수를 제외하면 다들 황무지에 처음 온 신병들이었고. 그 와중에 계절은 5월이라 햇볕은 따스하고 땅에는 초록과 야생화가 가득해서 소풍가는 기분이었지.”

하딘이 끼어들어 설명하는 투로 말했다.

“켄트룰 지대를 확보하면 세 도시와 이어지는 보급선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근처에 강도 흘렀어.  강은 남쪽의 항구와 이어지지. 사령부를 세우기 위해 우리는 단거리 달리기 선수처럼 서둘렀다.”


레스가 말했다.

“어느 싸움이든 기선이 중요하죠.”


“지리적으로 우리가 저쪽보다 일찍 도착할 거라고 예상됐다. 그런데 최단 거리로 수많은 병력이 한데 모여 지나치게 서두르다 보니 대열이 엉망이었어.”

내내 가만히 있었던 카르델이 입을 열었다.

“그때부터 우리가 좆되기 시작했고.”

피카니가 말을 받았다.


“어떻게?”

침묵이 한참을 흘렀다. 하딘이 카르델에게 말하라는  눈짓과 턱짓을 보내자 카르델이 한숨을  쉬고 그날의 풍경을 묘사했다.

“도끼로 쳐도 끊어지질 않는 덩굴로 그득한 숲길에 산양도 살기 싫어할 법한 언덕과 산, 군장을 메고 지나가려니 군화 안의 발바닥은 뒤꿈치까지 다진 고기가  지경이었지. 높으신 것들이 최단 거리로 도착하는 계획에 집착하느라 거쳐야 할 험지가 상상을 초월했어. 특히 보급품을 싣던 마차들은 같이 따라갈 수가 없어서 엉뚱한 곳으로 한참을 돌아가야만 했어. 남은 우리는 어쨌겠어. 한동안 하루에 한 끼만 먹는 신세가 됐지.”

“세상에.”


루나가 신음했다. 카르델은 미간을 꼬집고 모닥불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레스가 말을 꺼냈다.

“그래서  소년은 언제 나타나는 거지?”

카르델이 아비투스를 노려보자 아비투스가 바로 말했다.


“행군 도중에 소문을 들었지. 특이한 놈이 있다고. 물론 군대에는 별의별 놈이 다 모이지만 나이가 열셋 밖에  되는 꼬맹이가 이곳에 있다는 거야.”


레스가 눈을 크게 떴다.

“열셋?!”

“나이를 속이고 입대한 놈이래. 전쟁이 궁금해서 쫓아온 철부지인가 싶었는데 종교적 신념 때문에 총을 안 든대. 아무리 갈구고 두드려 패도 절대 총을 들지 않겠다는 거야.”


이야기를 듣던 일행들은 다들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팔짱을 끼고 여태껏 가만히 있었던 타티아나가 물었다.

“집총거부? 나이를 속여가면서 군에 입대하고서 왜?”


“지금 와서 집으로 가라고 사람 붙여서 돌려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 소년은 당시 허드렛일만 도맡아 하는 유명한 관심병사였지. 여하튼 그 지랄 맞은 행군 끝에 목표한 곳에 도착해서 깃발을 꽂기는 했는데, 기관총이고 철조망이고 방어 준비에 필요한 물품은 죄다 마차에 실려 있었어. 쓸 수 있는 도구라곤 야전삽이 전부였지.”

카르델이 덧붙였다.


“그리고 도착한 지 반나절 만에 일이 틀어졌지.”


레스가 말을 받았다.


“무슨 일이었기에?”

“강으로 가서 물을 길으러 갔던 놈들이 돌아오지 못했어. 놈들이 우리보다 한 박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하딘이 막대기를 들어서 땅에 커다란 원을 그리는 모습을 일행은 얌전히 지켜보았다.


“마왕군은 예로부터 여러 종족이 연대를 꾸려 훈련을 해왔기에 대규모로 진군하는 훈련이 몸에 배어 있어. 어쩌다 모여서 대충 몰려다니는 우리와는 대조적으로 그들의 지휘 체계는 효율적이고, 신속하고, 간결해. 우리들의 실책과 놈들을 얕본 대가가 겹쳤지.”

레스가 물었다.

“그들이 먼저 도착했다면 왜 그들은 거기에 주둔하지 않았죠?”


”아까 그곳을 점령하면 도시  곳과 연결되는 길이 생긴다고 했지? 그 도시들은 마족들의 편이 아니거든. 그 길이 우리에게는 생명줄이지만 놈들에게는 막아야만 하는 길이야. 주둔지 하나로  도시로부터 몰려오는 병력을 막는 건 부담이 크지. 그걸 고려해도 주둔하기 좋은 곳이기는 해,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으로 저울질한 결과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 거지. 그래서 주둔하지 않고 매복만  거야. 우리가 대열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거지꼴로 도착할 거란 것까지  예상하고서.”

레스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혀를 내둘렀다.

“전쟁이란 대단히 복잡한 일이군요.”

하딘이 방금 그린 원 주변에 점을 찍어 원을 둘러쌌다.

“그들은 우리를 둘러싸 집중포화를 가했다. 우리는 제대로 비축된 식량과 물도 없이 며칠을 일방적으로 갇혀 지냈지. 놈들도 여기 오기 위해 몸을 가볍게 하느라 소구경 야포와 박격포만 가져왔는지 포탄으로 직접 받은 타격은 거의 없었으나 포성을 견디는 건 끔찍했어. 폭탄 터지는 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실성하는 사람이 생겨났지. 그리고 천혜의 요새인 고지대에 세워진 사령부가 놈들의 최우선 목표물이다 보니 나도 고생깨나 했었고.”


루나가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위기를 극복하셨잖아요? 어떻게요?”

하딘은 잠깐 표정이 씁쓸한 음식을 씹은 사람처럼 일그러졌다가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아비투스가 그를 대신해서 답했다.


“저희가 고립된 지 4일째, 클레몽 중위의 포병 중대가 왔습니다. 그는 지금 소령인데 직접 대포를 설계해서 특허를 받을 정도로 포격에 관해서는 특출난 인물입니다. 다른 포병대가 마차로 대포를 끌고 오느라 도착이 지체되는 와중에 그의 중대는 미리 부품들을 분리해와서 도수로 운반했었죠. 그들이 조립한 120mm 견인포로 저희는 반격했습니다. 클레몽 중위는 탄도 계산을 벼락처럼 해내는 인물이었고 포탄은 골프공보다 정확하게 좌표에 꽂혔습니다. 포위망이 절반쯤 무너지자 나머지도 알아서 자기 자리를 벗어나 물러났습니다.”


레스가 손을 들고 물었다.


“좌표는 어떻게 찍었죠? 저쪽 포성의 반향음과 쌍안경으로?”

하딘이 대답했다.


“그럴 리가, 참호 바깥에서  발로 직접 뛰어 눈으로 확인했지. 급한 대로 자원자로 구성된 정찰대가 꾸려졌고. 거기 참여했던 놈들이 여기 있는 우리 셋을 포함한 나머지 여럿인데,  안에 그 소년도 있었다.”


레스가 상대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 소년. 어떤 사람이었죠?”


하딘은 자신의 턱을 긁적였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이상한 놈이라는 생각만 들었어. 군장 대신 구급낭만 잔뜩 메고 있었지. 어릴 때부터 제대로  먹고 자랐는지 체격도 왜소했고. 군인다운 놈은 전혀 아니었는데 눈을 보니 겁쟁이도 아니었지. 다들 포성에 시달리느라 정신이 반쯤 나가서 그랬는지 우리는 그 관심병사의 자원을 받아줬어. 나중에는 다들 녀석의 존재를 까먹었지.”

카르델이 입가를 송곳니로 잘근잘근 씹다가 중얼거렸다.


“보통 이렇게 예전 이야기할 때는 그때가 좋았을 때였다고 말하는데. 거지 같았던 게 한두 개가 아니니 차마 그렇게는 못 하겠네.”

“내 말이.”


아비투스가 담백하게 맞장구를 치고는 그곳에 아무 말도 안 흘렀다. 레스는 상대가 말할 때까지 기다리려다가 침묵이 너무 길어져서 먼저 말했다.

“그리고요? 당신들이 합친 계기가 그거였습니까?”


아비투스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고는 모닥불을 향해 장작을 하나 던졌다.

“진짜배기는 아직  나왔어. 그 부분은 떠올리기가 괴로워.”

하딘이 말했다.

“그 고비를 넘긴 이후로 우리는 각자 원래 소속된 곳으로 흩어졌고. 어떻게든 진지다운 구색을 갖출 즈음에 아비투스가 말한 진짜배기가 나타났지.”

그는 뜸을 들이고 목소리에 무게를 담았다.

“우리는 죽을 뻔한 경험이라면 이미 제법 겪어봤지만, 장담컨대 전쟁이 뭔지 알게 된 건 모두 그때가 처음이었다.”

하딘은 눈을 한 번 질끈 감고 그날의 기억을 향해 의식을 집중했다.








지도 위에 나무를 깎아 만든 독수리 모형과 박쥐 모형이 곳곳에 놓여있었다. 강이 그려진 곳에는 박쥐 모형과 독수리 모형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소장 계급장이 붙은 군복을 입은 중년 사내가 지휘봉으로 그곳을 집으면서 말했다.

“알다시피 우리에게 당면한 최대 문제는  강을 확보하는 거다. 누가 앞장서겠나?”


대령 계급장이 붙은 군복을 입은 사내가 말을 받았다.


“때가 되면 우리 대대가 나서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숲속에 자리 잡은 적들을 상대하려면 포격으로 한 번 흔들어놔야 들어갈 틈이 생깁니다.”


소장이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클레몽 중위. 의견을 말하게.”

클레몽 중위는 눈만 몇 번 껌뻑이다가 입만 열어서 말했다.

“당장 가진 대포의 위력으로 우거진 숲을 치기에는 폭죽이나 마찬가집니다. 남은 포탄도 10발 남짓인데 다른 포병대와 합류하기 전까지 저희의 유일한 중화기를 경솔히 쓰기는 힘듭니다.”

대령이 중위를 향해 째려보았다.

“뭐?  포격 요청이 경솔해? 지금 시비 거는 건가?”


클레몽 중위가 애써 침착하게 대령을 상대해주느라 천막 안이 분주해지는 와중에 다른 곳에서는 방금 여기 도착한 역마차에서 드레스와 보닛으로 한껏 치장한 여인들이 내리고 있었다. 부사관들이 여인들을 장교들의 천막으로 안내해줬고 그 모습을 보면서 기병대 모자를 쓴 남자가 땅에 가래침을 뱉었다. 핼쑥해진 얼굴은 말끔히 면도 됐고 군복에는 중위 계급장이 붙어있었다.

“아랫것들은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면서 버티고 있는데 우리 장군은 가족을 이곳으로 부르고 자빠졌네.”


“꽃이라도 보면서 진정해 헨리. 나중에는 종군기자들까지 와서 이곳을 찍는대.”

바로 근처에 있는 머리를 빡빡 밀고 입가에 꺼뭇하게 수염이 난 사내가 하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줬다. 하딘이 ‘맙소사’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리다가 평원에  꽃밭을 가리켰다.

“빈센트. 저거 양귀비 꽃밭이지?”

빈센트는 몸에 두른 흰 띠를 고쳐매고 한탄하는 투로 대답했다.


“초원 양귀비. 혹시 아편이 먹고 싶어서 하는 소리라면 열매가 맺히기까지는 한참 남았어.”

“아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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