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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화 〉[5권] 184회 - 수호천사 (184/188)



〈 184화 〉[5권] 184회 - 수호천사

두 중위는 걸었다. 참호의 벽과 바닥에 널빤지를 깔아서 보강하는 작업으로 못을 박는 망치질 소리가 벅적하고 병사들은 흙과 돌로 채운 부대로 차곡히 쌓느라 바빴다. 생명 가득한 대지에 자라난 꽃밭은 병사들에게 삽질을 방해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둘이 가는 길에 담배를 피우던 사내가 하딘을 눈치채고는 손을 들어 인사했다. 상대는 하딘과 같은 기병대 모자와 군복 차림이었고 계급은 소령이었다. 하딘은 상관을 향해 절도 있는 동작으로 경례했고 빈센트도 뒤따라 손을 들어서 경례하려 했다. 소령은 바로 손을 내저으며 빈센트의 행동을 말렸다.


“괜히 그러지 마. 하딘에게서 이야기 많이 들었네.”


둘은 악수했다.

“빈센트 피에르 중위입니다.”

“스피어스라고 부르게. 공화국 만세! 난 섬나라 사람이지만.”

스피어스 소령은 장난스럽게 외치고는 악수했던 손을 활짝 펼쳐 손바닥을 보였다. 피에르는 어색하게 미소로 받아주었다. 하딘이 정중한 목소리로 스피어스를 향해 말했다.

“다음 정찰 일정은 언제입니까?”


스피어스는 혀를 삐죽 내밀었다.


“그런 거 없어. 레인저는 남서쪽 보급 행렬을 호위한다. 내일부터 계속.”

하딘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왜 최정예인 저희가 신병들 길 안내나 하라는 겁니까? 놈들의 견제가 멈춘 지금 한시라도 순찰 범위를 넓히는 게 시급한데….”


스피어스는 흥분한 목소리로 떠드는 하딘의 말 허리를 끊었다.


“이곳은 전선이고, 우리는 까라면 까야지. 걱정하지 마. 정찰 임무는 다른 나라에서 오신 분들이 케이크 조각 자르듯이 골고루 나눠서 맡았으니까.”


모닥불을 바라보며 하딘이 말했다.


[전쟁이란 모험의 기회였다. 비단 리본이 달린 금빛 훈장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남자다운 영광은 없지. 나라고 그런 걸 원하지 않았다고는 빈말하지 않겠네. 소령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케이크 조각 자르듯이 임무를 나눠 가졌고, 우리 조각이 가장 작았지.]


하딘은 빈 담뱃대를 손안에 굴리며 기억으로 돌아갔다.

클레몽 중위는 산 송장 같은 얼굴로 나무 상자에 걸터앉아있다가 하딘과 빈센트의 기척을 느끼고 표정을 폈다. 빈센트가 클레몽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높으신 분들의 천막에 들어가니까 무슨 기분이야?”

클레몽은 눈을 까뒤집으면서 눈을 깜빡이고 심호흡했다.


“처음에는 내가 여기 처음 도착한 포병 장교라는 사실이 신의 계시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내가 여기 유일한 포병 장교라는 사실이 악몽이야. 석기시대 인간들하고 말하는 기분이었어.”


하딘이 고개를 기우뚱 옆으로 기울이며 살짝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그래도 훈장과 함께 특진도 땄잖아.”


“훈장은 폭발하지 않아!”

클레몽이 뜬금없이 소리를 지르자 근처의 행인들이 깜짝 놀라 이쪽을 쳐다보았다. 반면 하딘과 빈센트는 반응이 덤덤하기만 했다. 클레몽이 방금 자신의 태도를 사과했다.

“미안해. 내가 너무 신경질적이었지? 미안해…. 나쁜 뜻은 없었어. 내가 미친 거처럼 보여?”


하딘이 차분하게 말했다.


“너 안 미쳤어. 사관학교 시절 그대로야. 그리고 괜찮아. 우리 셋이 서로를 의지하지 않으면 대체 우리가 누구를 믿어야겠어?”

“그래. 맞는 말이야.”

그는 고개를 끄덕끄덕 흔들다가 빈센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특진하고 대대장이 된다면, 그 의미는… 그 의미는….”

상대가 대답을 기대하는 투로 말하는 거 같아서 빈센트가 넌지시 말했다.


“가문의 영광이지. 부모님께서 자랑스러워할 거야.”

“아니야, 더 큰 폭발을 의미하지! 드디어 좆만 한 견인포 대신 제대로 된 곡사포를 내가 지휘 할 수 있다는 뜻이야! 드디어 내 훈장에 의미가 느껴져! 나라면 내 부대를 포문마다 용의 거시기만큼 굵직한 155mm를 분당 2발씩 쏘도록 훈련 시킬 수 있어! 그리고 좌표 안의 목표물들은 전부 임신하는 거지!”

하딘과 빈센트가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고만 있기에 클레몽은 또 고개를 끄덕끄덕 흔들었다.


“알잖아. 불의 힘은 위험해서 근처에 있으면 정신을 붙잡기가 힘들어. 너희들 신화는 읽어봤지? 인간에게  피우는 법을 알려준 선지자가 신들의 왕에게 매일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는 이야기. 불은 인간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힘이야.”


하딘은 방금 들은 이야기는 무시하는 태도로 화제를 바꿨다.

“왈터. 혹시 그 소년 근황 들어봤어?”


“누구?”


하딘이 목소리를 깔았다.


“그 소년. 계속 수소문 중인데 주변에서 알법한 사람이 이제 너만 남았어.”

“아, 그 소년? 505고지에서 3중대를 찾아봐. 여기서 1km 넘게 떨어져 있어.”

하딘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 요즘 딱히  일 없지? 내일 우리랑 같이 다닐 생각 없냐?”


“레인저와 내가 같이 다녀서 구경할 거리가 뭐가 있는데?”

“우리가 보급 행렬 호위를 맡았는데 중화기들이 거기 몰려있어. 83년식 개틀링 기관총, 37mm 호치키스 리볼버 대포. 97년식 75mm 야포.”


클레몽의 눈이 번쩍하고 빛나더니 이내 교활하게 웃으며 검지를 위로 올렸다.

“우리가 그들하고 대화를 잘 나눈다면  중대가 몇 개는 대신 맡아줄 수 있겠지?”


“너한테 달렸지. 훈장을 딴 건 너잖아.”

빈센트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입가를 깨물었다.


“훈장도 폭발성 물질로 취급해야겠군.”







하딘은 말했다.

“사쿠라비, 궁금해할 거 같지는 않지만 알려주지. 자네와 자네 친구들이 국경을 넘었을  포격을 지휘한 놈이 클레몽이야.”

“오.”


레스는 한참 전의 일을 떠올리는 표정으로 눈을 한 번 크게 떴다가 시선을 조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때는 정말 죽을 뻔했죠.”

피카니가 말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친구분은 제대로 미치신  같은데요.”

하딘은 자신의 양철 머그잔을 검지 손톱으로 규칙적으로 톡톡 두드리면서 뜸을 들였다.


“사람의 능력이라는  한쪽이 특출나면 다른 쪽은 부실해지잖아. 광기와 지성의 균형이 위태로운 놈이고, 우리 편이라 정말 다행이지.”

레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때 도로 저편을 응시하던 카르델이 외쳤다.

“아, 시발.”


일행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불빛의 행렬이 어둠 속에서 깜빡였고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피카니는 자신의 앞머리를 부여잡고 뒤통수까지 닿을 기세로 신경질적으로 넘겼다. 아비투스가 하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희가 저쪽으로 갈까요?”


하딘은 일행들을 번갈아 보고 한숨을 푹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희 둘이 나 대신 이야기해. 내가 갈 테니 애물단지는 남아있어.”


피카니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반응했다.

“정말요?”


“둘이나 갈 필요는 없잖아.”

그는 덤덤히 대꾸하고 잠들었던 자신의 애마를 깨워 자리를 떠났다. 일행들의 시선이 아비투스에게 향하자 그는 자신에게 관심이 몰리는 걸 부담스러워했다. 소침해진 모습이 듬직한 체격과는 안 어울렸고, 인간적이었다. 그가 피카니에게 물었다.

“지금 몇 시입니까?”

“거의 21시.”

“그럼 슬슬 잘 준비를 해야겠군요. 대위님처럼 자세히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타티아나가 차를 마시고 말했다.


“왜?”


“너무 길어지니까요. 다음날부터 공방전이 시작됐는데, 가벼운 마음으로 산개해서 정찰을 나갔던 초짜 기병들 절반이 하루 만에 사라졌습니다. 고블린, 바다를 건너온 오크 용병들, 비스트맨(수인). 저들의 육군 주력을 담당하는 세 종족 여단이 우리를 향해 전진했습니다.”


카르델이 이어서 말했다.

“윗대가리들은 땅을 먹었으니까 이미 이겼다고 착각했어. 하지만 마왕군들이 노리는 건 그 땅이 아니었거든. 그 땅을 먹기 위해 몰리게 될 우리들의 목숨이었지. 놈들의 기병이 우리 보급 부대를 향해 돌격해왔다던데. 다행히도 우리 두목을 비롯한 레인저가 그들을 지켜준 덕에 피해는 최소한으로 끝났지. 전방 담당 최정예가 그런 곳에 있을  누가 알았겠어?”


아비투스가 한숨을 쉬고 자신의 삭발한 머리를 긁적였다. 표정이 어두웠다.


“넌 그때 어디에 있었지?”


“강 근처의 숲. 나처럼 감방 대신 군대를 택한 범죄자들이 모인 부대가 거기를 맡았는데 사실상 총알받이 역할이었어. 야밤에 놈들이 옷과 군장을 벗고 옷가지를 머리 위에 올리고서 알몸으로 강을 건너오던데, 우리는 알몸으로 강을 건너오는 새끼들을 쏴 죽였고….”


카르델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자신의 눈가를 부여잡았다.

“아침에 그곳을 보니 퉁퉁 불은 시체가 비버들의 댐에 걸려서 강줄기가 막혀있더라. 아무리 강의 상류로 올라가서 물을 길어도 물에서 피 맛과 썩은 내가 났고. 기분 탓이었는지 정말로 물이 썩은 건지는 모르겠어. 아무도 그곳의 시체를 치울 엄두를 못 냈지.”


일행은 다들 숙연히 침묵을 지켰다. 마음 약한 루나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코를 훌쩍이고 옆에 있는 타티아나의 손을 품 안에 끌어안았다. 카르델은 입술이 하얘지도록 입가를 질끈 깨물다가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공방전 3일째에 아비투스와 그 소년이 물통을 들고 우리 숲으로 왔어. 방어선 구축만으로도 버거워서 우물을 파지 못했으니 그 강이 유일한 물 공급원이었거든. 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고 데려가서 직접 보여줬지. 그런데….”

카르델이 아비투스에게 양보하는 손짓을 하자 아비투스가 말했다.

“그 소년이 신발을 벗었어. ‘뭐 하는 짓이야?’ 강 건너에 적이 있을 테니 목소리가 커지려는 걸 억누르며 말렸지. 기어코 우리 말은 들은 체도 안 하고 맨발로 그 소년은 햇살이 비추는 곳으로 모습을 드러냈어. 바짓단을 걷고, 깊고 거친 물살 속으로 들어가 시체를 치웠지.”


“세상에.”

레스가 경악하고 신음했다. 타티아나도 한마디 했다.

“물에 잠겨서 부패한 시체가 납덩어리 같았을 텐데.”

“그냥 치운 것도 아니고 반대편으로 끌고 갔어. 저들에게 돌려주려고. 우리는 꼭꼭 숨은  저 녀석이 기어코 여기서 죽겠구나 싶었지. 그런데 아무 일도 없는 거야. 거기 있던 시체가 50구는 됐는데 소년은 1시간 동안 홀로 다섯 구를 옮겼지. 소년이 탈진해서 저쪽 기슭에 쓰러지니까 놈들이 조심스럽게 나타났어.  녀석을 걱정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지.”


아비투스가 카르델의 눈짓을 받고 대신 이야기를 이었다.


“그래서 우리도 나왔어. 나하고 카르델 말고 다른 사람들도. 나부터 먼저 총을 내린 다음 신발을 벗었고, 광기가 전염되듯 모든 사람이 차례차례 총을 내렸지. 먼저 탈진한 그 소년부터 내 품에 안아서 돌려받았고, 다 함께 힘을 모아 강에 있던 시체를 전부 치웠지. 우리가 올려주면 저쪽이 당겨서 받아줬어. 그날 처음 알았지, 마왕군에 인간도 제법 있더라고.”


카르델이 마른 침을 삼키고 말했다.


“얼마 안 가서 다시 총성이 울리리라는 걸 모르는 놈은 없었지. 하지만 당장  평화를 깨려는 놈도 없었어. 그 소년의 이야기는 우리 군단만이 아니라 저들에게까지 퍼졌다더라. 물론 대부분은 그 이야기를 안 믿었으니 소년은 여전히 관심병사였지만, 아비투스가 괴롭힘을 막아주는 큰형 노릇을 해줬지.”

레스가 말했다.

“대체 그 소년은 누구지?”


아비투스가 대답했다.

“원주민 보호구역에서 태어난 백인인데 코앞에서 부모님이 강도한테 살해당했지. 선교사가 운영하는 보육원이 그를 거두어줬고. 다행히 그를 길러준 사람들과 식구들은 좋은 사람이었다는군. 그런데 징집령이 내려왔어.”

그는 잠시 목을 축이고 이야기를 이었다.


“보육원에는 소년하고 친하게 지내던 의형제가 있었는데 그는 조만간 대학에 입학할 예정이었지. 소년은 그를 위해 몰래 서류를 바꿔치기해서 대신 징집됐지. 보호구역의 관리는 머릿수만 채우면 그만이었으니 사람들 얼굴도  살펴보고 서류에 도장을 찍었고.”


다른 질문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비투스는 표정과 옷자락을 가다듬고 자신의 총을 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침번은 저와 카르델이 번갈아서 맡겠습니다. 나머지 분들은 취침하시죠.”

“잠깐만, 마지막으로 하나만.”

레스가 급하게 말을 걸자 아비투스는 기다렸다.

“그 소년은 죽은 거지?”

“반년 전에. 4년 동안 우리 분대의 수호천사나 다름없는 존재였어.”


레스의 얼굴이 세상이 무너지는 광경을 바라본 사람처럼 절망으로 가득하였다. 그의 눈이 순식간에 눈물이 차오르더니 물방울이 땅으로 뚝뚝 떨어졌다.

“내가 죽인 거로군.”

“우리가 죽였지. 우리가 지켜줘야 했는데. 들어봐 사쿠라비. 이거 하나만 알아둬. 그 소년은 절대 타협하지 않았어. 보육원을 떠나와 신병 훈련소부터 전쟁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멸시와 폭력, 죽음이 자신을 위협했지만, 죽을 때까지 자신의 믿음을 지켰어. 아무도 죽이지 않았고, 누구도 해치지 않았어. 난 그게 어떤 건지 곁에서 봤으니까 그게 위선이나 자기만족만을 위해서  수 있는  아니라는 거 이해해.”


레스는 자신의 얼굴을 망토 자락으로 가리고 웅크렸다. 카르델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소년에게 목숨을 빚진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세상에 살인자는 이미 충분해. 이 세상이 좀 더 나은 곳이 되려면 살인자보다는 다른 사람이 더 많이 필요하고. 안 그래?”

레스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카르델도 자신의 총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일찍 자둬. 내일 드디어 친구들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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