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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화 〉[5권] 185회 - 야만 전사 (185/188)



〈 185화 〉[5권] 185회 - 야만 전사



빈센트는 라카키가 손수 따라준 커피를 잔으로 받고 감사히 고개를 끄덕였다. 늦은 밤이다. 어둑한 카페에는 빈센트와 일행이 모여있는 탁자에 놓인 전등에만 불이 들어와 그들의 한쪽 얼굴만 간신히 비추었다. 빈센트는 목을 축이고 말했다.

“공방전에서 소년에게 목숨을 빚진  저희는 그의 신념을 존중해줬습니다. 분대가 꾸려지자 그는 저희의 전령이 되었죠. 혹시 하얀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으로 굳어진 유래를 아십니까?”

탁자 맞은편에 있는 레오포드가 대답했다.

“전쟁마다 전서구들이 수없이 희생됐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지.”

“비둘기보다 그 소년에게 어울리는 별명은 없었죠. 맡은 바도 실수하지 않았어요. 저한테서 응급처치법도 적극적으로 배워서  아군 가리지 않고 부상자를 구해줬고요. 녀석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한 번은 어느 장교에게서 소년을 빌려줄  없냐는 부탁도 받았죠. 녀석을 데리고 다니면 행운이 따른다는 미신이 퍼졌더군요.”

캘러헬은 자기 무릎에 앉힌 라카키의 어깨를 쓸어주면서 물었다.

“그렇게 같이 지낸 기간이 4년이라고요?”

“2년 전 기적적으로 저희가 한 달간의 휴가를 얻은 적이 있는데. 다 같이 녀석에게 문명 세계를 구경시켜줬습니다. 먼저 소년의 의형제를 만나러 갔고, 만나자마자 그 대학에서 다 같이 축구도 했고, 소년이 사과주에 취해서 옹알거리는 모습도 봤죠. 최근 10년 동안 겪은 일 중에 그보다 행복했던 순간이 없었습니다. 특히 헨리는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오래전에 잃어서 전쟁이 끝나면 소년을 양자로 입양할지 진지하게 고민까지 했었어요.”

이야기를 듣던 일행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캘러헬이 말했다.

“대위한테 자식이 있었군요.”

“사적인 이야기라 원래 말하면 안 되지만, 헨리는 소년을 우리 중 누구보다도 각별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반년 전 그 사건으로 충분한 보상과 함께 명예퇴직할 기회가 있었는데 포기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이유가 사라졌다며 전장에서 끝장을 보겠다고.”

레오포드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들의 죽음은 절대 익숙해지지 않네. 그대들의 마음을 이해하오.”

“그는 이제 영원히 소년입니다. 우리 어른들 때문에.”

빈센트는 말을 맺자마자 눈가를 손으로 움켜쥐고 얼굴을 감췄다. 캘러헬은 입을 꽉 다물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남겼다.

“힘든 이야기 꺼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대를 홀로 있게 하려고 자리를 떠난 일행들 뒤로 코훌쩍이는 소리와 소매로 얼굴 문지르는 기척이 느껴졌다. 레오포드와 캘러헬은 대들보에 기대어서 팔짱을   마주 보았다. 레오포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위의 바람대로  문명이 끝장을 봐야만 한다면, 둘은 같이 패배할 거야. 역사적으로 대국은 하나 같이 외부의 공격은 잘 견뎌냈어도 내부로부터의 붕괴는 못 막았어. 내가 정치를  아는 편은 아니지만, 마족 연합은 지금 진행 중이고 와시추 쪽도 멀지 않았어.”

캘러헬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괜히 그런 소리는  해?”

“각오를 되새김질하는 거뿐이야. 레스 알 하자르가 걱정돼. 안 그래도 짊어진  많은데 그는 마음이 벼랑에 몰려있었어. 그들이 이 사태의 최대 변수야. 소속될 곳을 잃어버린 자에게 부담이 너무 가혹해. 그가 소년의 이야기를 들어선 안 될 텐데.”

캘러헬은 입을 언덕 모양으로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문득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오포드도 캘러헬을 따라 시각을 확인하고는 상대와 눈빛을 교환했다. 캘러헬은 고개를 끄덕이고 라카키를 향해서 외쳤다.

“라카키.”

라카키는 기절한 파스낙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그의 팔에 꽂힌 주삿바늘과 연결된 링거대의 수액 유리병이 흔들거렸다. 라카키가 맑고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바깥에 나갈 일이 생겼어. 넌 여기서 기다려줘.”

라카키가 이쪽으로 한 발짝 다가왔다.

“도와줄게.”

“안 돼. 지금은 안 돼. 제발.”

그의 애걸하다시피 하는 모습에 라카키는 마지못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포드가 혀 차는 소리를 내자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웅크리고 있던 늑대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창가에서 바깥을 감시하던 양복 차림 사내들이 의자에서 일어나 그들의 앞을 막았다. 그들 중 하나가 말했다.

“지금  하는 거야?”

캘러헬이 대답했다.

“어제 보안관이 레오에게 조언을 받은 뒤로 모습이 안 보여. 낮에도 못 봤어. 이상하지 않아?”

“저쪽 사정이지 우리가 걱정할 일 아니야.”

“그랜드마스터가 여기에 둘이나 있고, 우리는 여기 이틀이나 머무른 데다가 원거리 화상 통화도 두 번이나 했어. 모르겠어? 지금 모르스는 우리를 미끼로 쓰는 중이야. 뭔가 일어날 때가 됐는데 관계없는 사람들이 휘말리는 건 막아야지. 이미 누군가가 휘말렸다면, 수습해야 댁들도 경위서 쓰는 일은 면하지 않겠어?”

사내들은 더 할 말이 없었다.

레오포드가 중절모와 외투, 와이셔츠를 벗자 문신으로 가득한 근육질 상반신이 나타났다. 허리춤에는 단검이 매여 있었고 겨드랑이에는 자동 권총이  총집이 있었다. 그는 몸을 이리저리 뻗어서 우두둑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켜고는 주머니에서 깡통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양복 차림 사내는 레오포드가 구두약으로 얼굴을 칠하는 줄 알고 기겁했다.

“맙소사 그러다 눈에 들어가면 실명할걸.”

레오포드는 전투 분장 겸 피부 위장을 마치고 깡통을 닫았다.

“이건 숯가루를 섞은 화장품이네.”

어느새 그는 중절모와 외투 차림의 멀쑥한 신사에서 웃통을 벗고 문신으로 치장한 모습과 전투 분장을 과시하는 야만 전사로 변모했다. 곁에 덩치 큰 늑대까지 있으니 그림으로 선입견을 그린 듯 노골적이었다. 사내는  모습을 마뜩잖아하는 티를 내며 말했다.

“영감이 직접 나서려고? 진지하게?”

캘러헬이 레오포드를 변호하듯이 대신 대꾸했다.

“웃통 벗었다고 무시하지 마. 누군가를 찾을  레오보다 뛰어난 사람은 이 대륙에 또 없어.”

레오포드는 다른 사람들의 태도는 무시하고 외투에서 안대를 꺼냈다. 이마에 띠를  바퀴 둘러서 찼는데 눈가리개는 정사각형 철판으로 되어 있었다. 레오포드는 철판 눈가리개를 자신의 왼쪽 눈에 대고 카페의 문을 양팔로 밀어 바깥으로 앞장섰다. 야밤의 거리는 전기 가로등 불빛으로 희끄무레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작게 휘파람을 불자 늑대는 도움닫기하고 3층 높이의 건물 옥상을 향해 소리 없이 펄쩍 뛰어올랐다. 레오포드는 건물 벽에 달린 빗물 배수관을 붙잡고 나무를 타듯이 순식간에 건물 옥상을 향해 올라갔다. 사내들은 건물 옥상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건물 옥상 사이를 펄쩍 뛰어다니는 야만 전사와 늑대의 모습을 넋이 나간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보고 배워.”

캘러헬은 사내들을 향해 그리 말만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같은 시각 촛불 하나만 켜진 캄캄한 방 안에 보안관과 그의 동료들은 재갈이 물리고 눈가리개에 포박까지 빠짐없이 당한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보안관 일행을 붙잡은 10명 남짓한 일당들은 그들을 둘러싸듯 허름한 가구에 대충 걸터앉아 있었다. 창가에 있는 누군가가 옆에 있는 동료와 말을 나눴다.

“장군이 그것을 나더러 맡아서 감시하라고 시켰을 때는 가슴이 철렁했는데. 설마 여기에 리차트라가 나타날 줄은 장군도 예상 못 했군. 의외의 기회가 찾아왔어.”

그의 동료가 말했다.

“먼저 동무에게 보고부터 해야 하지 않나? 이정도 인질만으로 놈들과 맞서기엔 역부족이야.”

“가장  위협인 캘러헬의 수호천사는 크게 약해진 상태야. 아무리 놈이라도 지금은 몸을 사릴 테지. 계획은 그대로야. 최대한 시간을 끌다가 빈틈을 노려 리차트라를 제거하고 사라지자. 그럼 지시받은 목표를 한참 뛰어넘을 수 있어. 조국에 큰 헌신이 되겠지.”

“일이 끝나면 인질들은 어쩌고?”

“우리의 대화를 일부 들었으니 입을 막는 수밖에.”

그의 동료가 흥분한 투로 반박했다.

“이미 저들을 꾀어내려고 민간인을 죽였잖아. 계속 무고한 사람을 해치면 우리가 서방 놈들과 다를 게 뭐야.”

그는 혀를 차고 인질을 향해 애써 무감정한 시선을 보냈다.

“수단 가릴 때가 아니야. 그게 우리가 하는 일이잖아.”

그때 누군가가 단말마를 내며 놀래는 소리를 질렀다.

“방금 저거 봤어?! 문지방 너머로 불빛이 쉭 지나갔다고!”

“무슨 불빛?”

“나도 몰라. 그냥 동그랗게 빛나는 거 2개가 허공에 떠 있었어. 마치 맹수의 눈처럼….”

그 말을 듣고서 창가의 남자가 급하게 뭐라 말하려 했다. 그 직전에 늑대는 태연히 고개를 이쪽으로 내밀고 방 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들개인가?”

“너무 크지 않아?”

“뭐야 저거?”

다들 경악하고 몸이 굳은 찰나 건물 바깥에는 오른쪽 눈을 감은 레오포드가 철판 가리개에 가려진 자신의 왼쪽 눈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얇은 나무  하나를 사이에 두고 권총으로 저쪽을 겨누며 레오포드가 중얼거렸다.

“잡았다.”

늑대의 시선을 따라 바깥에서 총성과 함께 벽을 뚫고 들어온 탄환들이 정확하게 사람들의 팔다리를 꿰뚫었다. 묶여있는 보안관 일행에게 닿은 탄환은 없었다. 레오포드가 자신의 베르그만 권총의 총열 하부에 달린 탄창을 교체하고 한 번 더 쏘자 벽을 뚫고 들어온 탄환이 유일한 조명인 촛불의 심지를 끊어버렸다.

“반격해! 뭔가 있다!”

사람들이 각자의 무기로 달빛이 들어오는 총구멍을 향해 마구잡이로 쏘았다. 눈가리개를 한 보안관은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로 가득한 숨소리와 기척을 느끼며 웅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둠에 갇힌 채 갑자기 나타난 난데없는 들짐승의 기척을 느끼며 난장판이 된 방안에서 소외되었다. 곧 짐승의 울음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방안을 휘젓는 듯 민첩하게 발을 놀리는 소리가 그를 자극했고, 예고 없이 소름 끼치는 침묵이 감돌자 정중한 손길이 그의 눈가리개와 재갈을 풀어주었다.

“콜록콜록…. 누구십니까?”

레오포드가 성냥으로 초에 불을 켜자 작은 빛이 핏자국과 탄흔으로 엉망이 된 방안을 비추었다. 일당들은 모조리 다친 곳을 움켜잡으며 꼼짝도 못 하고 있다. 보안관은 얼이 나간 표정을 지었고 레오포드가 단검으로 자신의 포박을 끊어주는 동안에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가 보안관의 어깨를 토닥이고 격려하는 투로 말했다.

“이놈들은 우리가 데려가리다. 애꿎은 일에 휘말리게 해서 미안하네.”

잠시 후 주변 일대를 포위했던 사람들이 뒤늦게 난장판을 정리했다. 얼굴에 칠한 분장을 지우는 레오포드에게 정장 차림 사내가 말했다.

“수완이 좋군. 인질은 전원 무사하고 심문할 대상들도 치명상을 면했어.”

“역시 지치는군. 이러기엔  너무 늙었어.”

분장을 다 지운 레오포드는 와이셔츠를 몸에 걸쳤다. 그리고 금속 단검을 손목의 힘으로 허공에 살짝 던져 칼날을 달빛에 비추어 살펴보고 칼집에 꽂았다. 사내는 그의 곁에 새 성냥갑 하나를 두고 자리를 떠났고 레오포드는 그걸 보며 코웃음을 쳤다.

일행은 우두머리로 보이는 놈을 먼저 응급처치를 해주고 카페로 데려왔다. 마침 파스낙도 의식이 돌아왔는지 라카키하고 같은 탁자에 앉아서 자기 얼굴을 손으로 콕콕 건드리는 장난을 받아주며 멍하니 있었다. 레오포드와 같이 돌아온 캘러헬을 향해 라카키가 말했다.

“탐. 멋있는 척하고 아무것도  했어.”

“나설 틈이 없더라고. 그래서 대신 쓸만한 걸 찾아왔지.”

캘러헬이 품에 안고 있는 종이봉투를 펼쳐서 내용물을 상대에게 보여주자 라카키가 ‘오’하고 작게 감탄했다. 파스낙도 내용물을 흘겨보고는 순식간에 인상을 찡그렸다. 보안관을 납치했던 일당의 우두머리는 젊어 보이는 인간 남자였다. 빈센트 중위는 요원들의 안내를 받아 2층의 객실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이제 1층에는 그들밖에 없다. 레오포드는 포박된 상대를 의자에 앉히고 파스낙에게 물었다.

“아는 사이인가?”

포박당한 상대는 씩씩거리면서 파스낙을 죽일 눈으로 노려보았고 파스낙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상대를 관찰하다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크게 대단한 놈은 아니야. 우리 쪽에 이놈을 붙인 걸 보아 장군은 지금 다른 일로 바쁘거나, 어지간히도 인재난에 시달리는 모양이군.”

“이 박쥐 자식!”

상대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파스낙을 째려보자 파스낙은 걱정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분명 장군이 너한테 쓸데없는 짓 말고 감시만 하라고 시켰을 텐데. 어설프게 주제넘은 짓 하니까 이 사달이 난 거야. 진지하게 조언하는데. 여기서 자존심은 의미 없어. 성질 죽여.”

“난 죽음 따위 무섭지 않다. 리차트라!”

파스낙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게 문제야. 이 친구들은 우리를 안 죽여. 요로결석 걸려본 적 있냐?”

“뭐?”

“보아하니 너한테는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할 거 같은데, 행운을 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캘러헬이 파스낙이 앉은 의자의 등받이를 당겨서 다른 곳으로 옮겨주자 파스낙이 손을 활짝 펼쳐 상대를 향해 배웅하듯이 천천히 흔들었다. 포박당한 상대의 앞으로 탁자가 성큼 다가오더니 이내 캘러헬이 종이봉투를 뒤집어 내용물을 쏟아냈다. 상대는 그것을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라듐 초콜릿, 라듐 생수, 라듐 크림, 라듐 사탕, 라듐 수면 양말. 상대가 반쯤 이성을 잃으며 포박을 풀려고 버둥거렸다.

“이거 치워! 저리 치우라고!”

캘러헬이 다소곳한 자세로 탁자에 앉으며 라듐 제품 하나를 손에 들고 넌지시 말했다.

“왜? 부상이 심각하다기에 애써 챙겨왔는데.”

“이건, 이건 아니야! 피폭되면 해독제도 없다고!”

“걱정하지 마. 라카키가 있는 한 죽을 일은 없어.”


상대는 얼이 나간 목소리로 방금 들은 말을 따라 불렀다.

“죽을 일이 없다니?”

“내 수호천사는 자비롭거든. 뱃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급사하지 않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캘러헬과 라카키가 해맑게 웃자 상대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진짜 재밌는 건 여기서부터야. 여기 있는 물건 중에서 진짜 라듐이 들어있는 게 몇 개나 될까? 우리랑 같이 지내면서 언제쯤 자네가 한계에 도달할까? 계속 생활하면서 자네가 사용할 일용품 중 어떤 것에 라듐이 들어있을지 알아맞히는 재미도 잊지 말라고? 하루하루가 아주 즐거울  같지 않아? 초콜릿 퐁듀부터 시작하지. 반짝거리면 당첨이야.”

카페 안에서부터 영혼이 쑤셔박히는 인간이나 내지를 법한 비참한 비명이 온 도시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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