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화 〉[5권] 186회 - 불확정성의 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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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걷히고 해가 언덕에 걸릴 즈음 하딘은 피로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천천히 몰아 저 앞에 세워진 마차로 향했다. 불가에는 아비투스가 마침 배낭 깊은 곳에서 깡통을 꺼내고는 주전자로 물을 끓이려던 참이었다. 아비투스는 자기에게 다가오는 하딘에게 보라는 듯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깡통의 뚜껑을 비틀어 땄다. 원두 가루였다.
“중요한 날을 위해.”
하딘은 표정 없이 피식 웃었다.
“아침의 커피 한 잔은 누구도 거절 못 하지.”
아비투스가 원두 가루를 주전자 안에 붓자 향이 야영지 전체로 퍼졌다. 모닥불 근처에 소총을 껴안은 채 담요를 몸에 두르고 몽롱하게 선잠을 자던 카르델이 커피 향을 맡더니 눈꺼풀을 딸깍 열었다. 하딘을 향해 카르델은 누운 채로 인사를 올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래.”
카르델이 몸을 일으키고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근처에 앉은 하딘에게 물었다.
“이야기는 나눠보셨습니까?”
“롱 헤어와 대령은 긴급 지령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어. 우리가 떠난 시각에 때마침 그 군종 마법사가 외부로부터 연락을 받았다는군. 그래서 우리를 도와주러 왔대.”
아비투스가 나무 수저로 주전자 안을 저으며 물었다.
“아이스맨은 뭐랍니까?”
“행군 훈련 중이래. 우리와는 우연히 방향이 겹쳤고.”
“그것들이 제대로 알고 쫓아오기는 하는 겁니까?”
하딘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아는 게 없어. 하지만 내가 대령과 처음 대면했을 때 나는 지도에서 시튼 빌리지가 있는 방향을 짚으면서 순찰기록을 요구했었다. 내 불찰이다.”
그들은 잠시 숨을 돌렸다. 아비투스가 운을 뗐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아이스맨이 말하길 대령은 전공을 하나도 못 세우고 이대로 전쟁이 끝나는 걸 두려워하고 있어. 어떤 형태로든 우리와 무언가를 같이 했다는 사실과 기록이 절실한 거 같아.”
카르델이 경멸하는 표정으로 가래침을 뒤로 퉤 뱉었다.
아비투스가 달임 커피가 담긴 주전자의 주둥이에 천을 씌워서 가루를 걸렀다. 하딘은 잔을 얼굴 앞에 들어 올려 방금 담긴 커피의 온기와 향으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커피 향을 맡은 어느 마녀가 마차 짐칸 안에서 부스스하게 뻗친 머리를 긁적이며 기형생물처럼 기어 나왔다. 뒤이어 타티아나가 잠기운에 젖은 루나를 부축해줬고 마지막으로 나온 피카니는 불안해하는 얼굴로 엄지손톱을 깨물고 눈가를 소매로 신경질적으로 비볐다.
레스 알 하자르는 마부석에 앉아서 기타를 다루고 있었다. 운지법을 바꿔서 줄에 갖다 데기만 할 뿐 튕기지 않았다. 아비투스는 카르델에게 커피를 따라주고 주전자를 들어서 저쪽으로 향했다. 루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의 잔을 꺼내려 짐칸으로 도로 들어갔고 레스는 기타에서 손을 떼고 땅으로 내려왔다.
아비투스는 커피 주전자로부터 달아나는 피카니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금단증상 때문이라고 지레짐작했다. 루나가 음료를 한 모금 마시자 방치된 화분 같았던 생기 없는 표정에 주황빛 안광이 번쩍 들어왔다. 그녀가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커피가 저희 땅에 전파된 초창기에는 사람들이 사막의 이교도들이나 먹는 음료라며 반대가 심했데요. 하지만 교황이 이 맛있는 건 이교도들만 마시기에는 아깝다며 커피에 세례를 해줘서 소비를 권장했다는 설이 있어요.”
“흥미롭네요.”
레스는 덤덤히 맞장구쳤다. 그는 양철 잔의 손잡이를 쥐지 않고 직접 잔을 붙잡고 받쳐 들었다. 타티아나는 그걸 신기하게 여겼고 피카니는 계속 엄지손톱을 깨물다가 커피 냄새를 맡을 때마다 헛구역질했다. 레스는 두 모금에 걸쳐서 잔을 비우고 눈길을 피카니에게 향했다. 피카니의 엄지손톱은 너무 닳아서 하얀 부분이 사라졌다. 레스가 다가가서 물었다.
“잠은 제대로 잔 거야?”
“보다 못한 마법사님이 마법으로 도와주셨어. 다행이면 다행이고, 다른 면에서는 불행이지. 그분과 같은 공간을 공유할 순간이 앞으로 얼마나 오겠어? 바로 옆에서 체취랑 숨결, 온기가 느껴지니까 그 행복함이 정말….”
조금 뜸을 들이고 피카니는 말을 바꿨다.
“반드시 끊을 거야.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칭찬해주셨어. 엄청 기쁘더라. 진짜 내 노력으로 얻어낸 칭찬이니까. 오랜만에 살아있는 기분이 들어. 몸은 힘들지만.”
“어른 되려면 한참 멀었지만 힘내.”
레스는 피카니의 팔을 툭 쳐서 손톱 물어뜯는 걸 막았다. 피카니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손을 털고 입술을 핥다가 상대의 얼굴을 보고는 눈을 치켜떴다.
“잠깐, 꼴이 그게 뭐야. 너 한숨도 못 잤지?!”
레스의 눈두덩에 낀 기미는 광대뼈까지 닿았고 멍든 것처럼 진했다.
“마음 다스리기만으로도 벅차서 잘 틈이 있어야지.”
그렇게 말하며 땅에 세워둔 기타를 살짝 기울였다.
타티아나는 하딘과 그의 부하들과 같이 있었다. 천천히 내용물을 다 들이키고 잔을 허공에 털면서 하딘이 말했다.
“그 소년의 이야기는 영원히 묻어두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날 위해서. 이제 사쿠라비와 우리에게 유대관계가 생긴 거 같나? 자네 눈에는 어떻게 보이지?”
“그에게 큰 영향을 준 건 확실합니다.”
타티아나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비투스가 저쪽으로 한 번 눈짓하고 말했다.
“밤새 내내 저기서 소리 내지 않고 기타를 쥐었습니다. 밤바람을 종일 맞았는데 불가에 한 번을 안 오더군요. 망토를 입었으니까 괜찮다면서.”
하딘이 저쪽을 보며 말했다.
“수천 년을 사막에서 살아온 강인한 민족이야. 그런데 우리 뒤에 있는 놈들은 계란프라이에 칠 소금이 없다고 징징거리는 찌질이 아니냐. 누가 누구더러 열등하다는 건지.”
아비투스가 말했다.
“소금이 없다면 심각한 상황 맞습니다.”
“출발이나 하자.”
텐트를 접어서 짐칸에 넣고 불가의 숯을 거두고 풀어두었던 말들에게 고삐를 채웠다. 짐칸에 승객들이 올랐고, 피카니는 얼굴을 찰싹 때리고는 타고 있는 백마가 앞발을 번쩍 들게 하고는 힘껏 외쳤다.
“아이호! 실버!”
일행은 출발했다. 짐칸 안에 있는 레스가 피카니의 외침을 듣고는 인상을 구기면서 창문을 벌컥 열려다가 심호흡하고 자리에 도로 앉았다. 그 뒤로는 팔짱을 끼고 가만히 있었는데. 두 여자가 계속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레스는 조심스레 물었다.
“무언가 문제라도?”
타티아나가 말했다.
“너도 자기 모습이 어떤지는 알잖아.”
“하루 이틀 잠 거르는 거는 별거 아냐.”
“난 27살이야. 너만큼 살아봤어.”
레스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렸다.
“그래?”
“동갑에게 어른행세 하긴 싫은데 너 지금 정상이 아니야. 뭔가 필요한 거 없어?”
그는 시선을 잠시 다른 곳으로 두었다가 다시 상대를 바라보았다.
“지붕 위에 올라가 있어도 될까? 바깥바람을 쐬고 싶어. 물론 도중에 뛰어내리지는 않을게.”
타티아나는 한 번 깊게 숨을 내쉬고 손잡이를 돌려 지붕의 정사각형 덮개를 열었다. 레스는 상자를 밟고 윗몸을 바깥으로 꺼내고는 마차의 지붕 위로 기어 올라왔다.
“아냐 괜찮아!”
타티아나가 기타가 들어있는 가방을 올려주려고 하자 레스가 그쪽으로 크게 외쳤다. 바로 옆에서 말을 타고 나란히 달리고 있던 피카니가 가까이 다가오고는 말을 걸었다.
“그쪽 공기는 어때?”
“좋아. 진작 이렇게 다닐 걸 그랬네. 경치도 마음에 들어.”
풀벌레 우는 소리. 풀냄새. 코스모스 꽃밭, 바람에 흔들리는 푸른 덤불들이 잎사귀를 비비는 소리, 시야 가득히 펼쳐진 들판과 들짐승의 기척들. 소나무 숲에서는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쾌청한 가을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햇볕은 따스하고 바람까지 가족의 손길처럼 은은했다. 고개를 돌리면 정으로 내리친 듯 거친 바위산에는 어두운 계곡과 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만년설이 보였다. 새삼스레 신기하게 여길 거 없는 풍경인데 보고만 있어도 몸속에 응어리진 것이 녹는 기분이었다.
그는 뒤편을 보고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인파를 노려보았다.
“우리가 떠난 걸 보고 저쪽도 움직일 채비를 갖추고 있어.”
피카니도 뒤쪽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넌 저게 보여? 난 그냥 점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어쨌든 몇 시간 차이로 저쪽도 우리랑 같은 곳에 도착할 거야. 무슨 징조로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나한테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니까. 넌 어떻게 생각해?”
“경치 좋은 곳에서 대령이랑 같이 사진이나 한 장 찍으면 만족하고 물러나겠지.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마차 바퀴 구르는 소리는 별로 요란하지 않았다. 도로가 단단했다. 멍하니 다른 곳을 보고 있으니 언덕 위에서 코요테 한 마리가 이쪽을 궁금해하는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혼자였다. 레스는 하딘을 바라보았다. 하딘은 금방 그의 시선을 눈치채고 곁눈질하면서 물었다.
“뭔가?”
“그게… 저는….”
“어젯밤에 자네가 들었던 모든 것들.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해. 물론 자네는 몰랐던 거를 알게 됐지만 그래도 없었던 일이라고 쳐. 우리와 자네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자네 일 하나에만 집중하게. 그게 자네 일이야. 우리도 우리 일에만 집중할 거고. 알아들었나?”
“예.”
“좋아.”
지대가 높아졌다가 낮아지기를 반복했다. 나아갈수록 그들이 다니는 도로가 얼마나 잘 관리됐는지 일행은 깨달았다. 넓게 보면 평평한 들판이지만 바퀴 달린 물건이 굴러가려면 자잘한 언덕들을 깎아서 최대한 수평을 맞추고 땅을 다져야 했다. 피카니가 말을 몰다가 들판에 프레리도그가 몰려다니는 광경을 가리켰다.
“저것들 보여?”
“그래.”
“한 마리 길들여서 어깨에 태우고 다니고 싶어!”
살짝 덩치가 큰 다람쥐처럼 생겼는데 일제히 두 발로 서서 이쪽을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루나는 상자를 밟고 지붕 위로 머리를 내밀고는 저쪽을 향해 소녀처럼 감탄했고, 하딘도 잠깐 말의 방향을 틀어서 저쪽을 보았다.
“말을 타다가 놈들이 파놓은 땅굴에 걸려서 고꾸라지면 위험해. 말은 다리가 한쪽만 부러져도 그 자리에서 바로 안락사 행이니까. 그래서 가축을 풀어서 키우는 카우보이들은 저것들을 보는 족족 쏴버리거나 독을 뿌려서 소탕하지. 후유증으로 생태계가 망가지는 일이 잦다더군.”
너무해요! 루나의 불만 가득한 외침은 귓등으로 넘기고 레스가 말했다.
“그래서 시튼이 이렇게 정성스럽게 도로를 만든 걸까요? 외부와 접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다니는 길과 동물의 영역을 구별하려고요.”
“길이자 울타리인가.”
하딘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레스가 프레리도그 무리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어서 인사해줬다. 어느 틈에 레스의 뒤에서 타티아나가 한쪽 무릎을 세운 자세로 앉은 채 말을 걸었다.
“전에 왔을 때보다 풍경이 많이 달라졌어. 완전히 국립 공원이 돼버렸네.”
“이런 곳이라면 로보가 나타나도 놀랍지 않겠어.”
조금 뜸을 들이고 같이 바람을 쐬면서 타티아나는 말을 걸 기회를 엿보았다. 이내 그녀가 말했다.
“가혹한 질문일지도 모르겠는데. 만약 저곳에서 친구들과 재회한다면 어떻게 할 거야?”
“대화해야지. 그 애들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고.”
레스가 말을 끊자 타티아나가 재촉했다.
“그리고?”
“그다음은 모르겠어. 도저히 모르겠어.”
레스는 부자연스럽게 말을 도중에 멈추고 머뭇거렸다. 그가 불안해하는 기척이 모든 일행에게 다 전해질 정도로 레스는 대답을 주저하고 있었다.
“너희들은 내가 계속 친구들과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를 거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제 더는 그들이 친구라고 생각되지 않아. 마치, 만난 적 없는 사람 같아. 몇 주 전에 겪었던 일들이 날이 갈수록 스쳐 지나간 순간으로만 떠올라. 무의미한 일 아니었나 싶고.”
타티아나와 피카니는 그 소리를 듣고 정색했다. 창백해질 정도로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진지하게 하는 소리야?”
“내 의지로 거짓 없이 말하는 중이야. 지금 내가 제정신이냐면 그건 잘 모르겠어. 밤을 꼬박 지새웠더니 머릿속에서 자꾸 여러 가지 소리도 들리거든.”
“소리?”
루나가 지붕 입구 쪽으로 윗몸을 꺼내고 크게 외쳤다.
“정확하게 말해봐요. 그거 환청이에요 이명이에요?!”
[누구나 궁지에 몰리기 전에는 선을 넘지 않는 법이다. 너는 예외일 줄 알아? 특별하다고?]
레스는 머릿속에서 울려 퍼진 모르스의 목소리 때문에 루나의 말을 듣지 못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외쳤다.
“방금 뭐라고요?”
“지금 겪고 계신 증상이 신경성 이명인가요 아니면 환청인가요?!”
[우리 같은 사람이 갈 길은 하나뿐이야. 끝까지 가는 거지.]
레스는 머릿속에서 울리는 하딘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대답했다.
“그냥 좀 어지러운 거뿐입니다!”
[우리는 대체 무엇을 하는 걸까요? 전쟁이 일찍 끝나든 나중에 끝나든 둘 다 평범한 세상 아닐까요? 무의미한 일을 한다는 불안은 안 드나요?]
단테의 목소리가 들리자 레스는 속으로부터 무언가가 울컥 올라와 헛구역질을 삼키기 위해 잠깐 얼굴을 돌리고 견뎌야 했다. 레스의 형편없는 괜찮은 척하는 시늉을 타티아나는 불안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계속 말을 걸지 말지 주저하고 입을 옴죽거렸다.
레스는 미간을 긁적이고 심호흡 뒤에 어떻게든 생각을 돌리려고 마부석의 두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어?”
아비투스가 대답했다.
“조금만 더 가면 시튼 빌리지가 시야에 들어올 거야. 마침내.”
레스는 머릿속에서 또 이상한 소리가 들리려는 걸 자기 의지로 쫓아냈다.
“댁들은 힘든 순간을 넘기는 비결이 뭐야?”
“뭐?”
뜬금없는 질문에 카르델이 놀랬다. 레스는 어색하게 둘러댔다.
“아무것도. 그냥 물어봤어.”
“뭐, 비결이 뭐냐고 물으셨으니 대답하자면. 술이 최고지.”
레스는 입가를 잡아당기며 길게 내쉬었다.
“난 술 안 마셔.”
“술 이야기 꺼내니까 갑자기 맥주가 너무 간절해지네. 어떻게 도시에 있는 동안 내가 한 잔도 안 마셨지? 농담 아니고 나처럼 신체 건장한 남자가 한 달 가까이 맥주조차 안 마시면서 황무지를 돌아다니면 미친다고. 군에서 술하고 담배가 필수 보급품으로 지급되는 이유가 있어.”
아비투스가 냉랭하게 말했다.
“입 닥쳐 카르델.”
“뭔가 희망 가득한 생각을 하는 게 좋겠어. 맥주는 역사가 1만 년 가까이 됐고 문명사 내내 물 다음으로 소비량이 가장 많았던 음료란 말이야. 맥주가 사회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고. 그거 알아? 맥주잔이 비는 것을 두려워하는 증상이 학명으로도 있어. ‘세노실리카포비아’라고 하지. 하여튼 마을이 있다면 맥주가 있을 확률도 존재해.”
하딘이 외쳤다.
“입 닥쳐. 명령이다.”
카르델은 닥치지 않았다.
“관측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아. 아직 확률이 있다고! 우리가 거기 방문하면 주민들이 당연히 이방인들을 향해서 두려워하거나 경계하겠죠. 그럼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한잔하겠나? 우리가 사지.’ 평화 실현은 간단한 일이예요.”
타티아나가 외쳤다.
“그만! 우리가 향하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어! 꿈 깨!”
카르델이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자 레스의 시야 저편에 무언가가 보였다.
“우리 목적지가 나타났어.”
몇 분 정도 마차가 더 길을 가고 나서야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피카니가 말을 마차 쪽으로 가까이 몰더니 쌍안경을 꺼내고 말을 걸었다.
“레스!”
그는 피카니가 자신을 향해 던진 쌍안경을 받아들었다.
“우리 중에서 네가 제일 시력이 좋잖아. 먼저 살펴봐.”
레스는 잠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쌍안경을 통해 마을을 바라보았다.
“엥?”
반사적으로 레스의 입에서 단말마가 튀어나오자 일행들은 모두 당황했다. 타티아나가 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왜?! 무슨 일인데?”
“왜 마을 정문에 백기가 걸려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