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5권] 187회 - 사절 회담
마을의 정면이 손바닥에 가려질 만한 크기로 보일 때까지 마차는 좀 더 나아갔다. 일행 일곱은 들판에 나란히 서서 말없이, 다 같이 저곳을 관찰했다. 쌍안경으로 카르델이 저쪽을 노려보며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감시탑에 고블린이 근무를 서고 있습니다. 무장하진 않았고 상의는 일상복인데 하의는 군복에 군화 차림입니다.”
하딘이 그에게 물었다.
“우리를 경계하고 있나?”
“저쪽이 저희에게 관심을 가졌냐는 의미냐면, 온 마을이 어수선하네요. 그런데 싸울 준비를 하는 거로는 안 보입니다.”
레스가 눈 차양을 하고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정문에 누군가가 나타났어.”
카르델이 저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다시 보고했다.
“안경을 쓴 곱슬머리 콧수염 중년 남성. 수도복 차림의 덩치가 큰 흑인 중년 남성. 평상복 차림의 원주민 노인. 군복을 입은 고블린 여자? 고블린도 여자가 있었어?”
아비투스가 실눈을 뜨며 티 안 나게 짓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차별주의자.”
“닥쳐. 너도 본 적 없을 거 아냐. 아무튼, 대위님은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딘은 모자를 벗고 정수리를 긁적이다가 타티아나를 향해 찌푸린 표정으로 시선을 보냈다.
“소위. 마지막으로 자네가 저곳을 방문한 게 언제지?”
타티아나가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양측이 선전포고한 이후로 용건이 없었습니다. 최소 5년 이상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저곳은 어땠지?”
그녀가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시튼이 홀로 지내는 오두막과 그가 사적으로 알고 지내는 원주민들만 주변에 조금 있었습니다. 그 외에는 상회 관련 인물이나 어쩌다 정착한 민간인만 얹혀 지냈죠.”
“내가 경제학은 잘 모르네만 저기에 주민이 300명은 될 거 같아. 옥수수와 밀, 보리밭의 넓이도 상당하고. 마을 가장자리에 쳐진 가축용 울타리에는 철조망 고정할 때 쓰는 구부러진 쇠말뚝도 박혀있군.”
“이런 말씀 드리기 외람됩니다만 저도 이 상황이 당황스럽습니다.”
피카니가 끼어들었다.
“저쪽이 탁자를 가져오는데?”
카르델이 이어서 말했다.
“탁자랑 의자, 어. 탁자 위에 하얀색 식탁보가 깔려 있습니다. 탁자가 아주 크네요.”
하딘이 내리깐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나한테도 보여.”
“저희 방향으로 의자를 놓고 있습니다. 저희 머릿수만큼 가져옵니다.”
“나한테도 보여.”
“저쪽이 백기를 흔듭니다. 흑인 신부님도 이쪽으로 손을 흔듭니다.”
루나가 저쪽의 손짓에 맞춰서 팔을 번쩍 들어서 흔들며 말했다.
“저희를 맞이할 준비로 만반이네요.”
레스가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일행들의 옆얼굴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원래 계획은 저기서 내 친구들에 관해 물어보는 게 다였지?”
일행들이 나란히 레스를 향해 뚱하니 얼굴을 돌렸다가 다시 시선을 앞으로 되돌렸다. 레스가 다시 말했다.
“아무리 봐도 우리를 민간인으로 보는 낌새가 아닌데. 혹시 저 사람들 우리 뒤에 따라오는 놈들을 우리랑 같은 편이라고 착각하는 거 아니야?”
피카니가 낮게 신음했다.
“착각이라. 결과적으로 저쪽의 착각이 아니라서 비극이다. 우리가 사유지에 들어왔을 때부터 우리가 침입한 걸 저쪽은 알아챘나 봐.”
레스가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하딘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어쩌려고요?”
하딘은 미간을 꼬집고 수염을 쓸어내렸다. 잠깐 시간을 들여서 생각을 마치고 그는 아비투스와 카르델을 번갈아 가리켰다.
“너, 그리고 너. 여기서 마차를 지키고 있어. 아비투스는 대대가 이곳에 도착하면 상황을 알려주고, 카르델은 우리한테 무슨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총을 꺼내는 모습을 보이지 마라.”
카르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피카니가 말했다.
“사절로 어디를 방문하려면 무기를 가져가지 않는 게 예의겠죠?”
하딘은 실눈을 떴다.
“글쎄. 나는 싸움만 해봤지 이런 건 해본 적이 없거든.”
레스가 말했다.
“유목민으로서 한 말씀 하자면, 탁자에 앉기 전이나 천막에 들어가기 전에만 무장을 해제하면 예절에는 어긋나지 않아.”
루나가 말했다.
“좋은 지적이네요.”
“그리고 뭔가 선물이 될만한 걸 지참해야 해. 기본 중의 기본이야.”
그 말을 듣고 일행들은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다들 말은 안 했어도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타티아나가 슬그머니 말했다.
“보통 그런 용도로는 값나가는 예술품이나 책, 귀한 술이 보편적이던가?”
피카니가 말했다.
“우리가 가진 거 중에서 제일 값나가는 물건이라면 레스의 수제작 르맷 권총이야. 그거라면 충분히 예술품으로 취급할만하지.”
레스가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어쩔 수 없으면 그걸로 하자. 선물해주신 브라우닝 선생님에게는 미안하지만.”
일행들은 대수로워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 진심이냐고 말하는 듯 경악했다. 루나가 말했다.
“신문은 어때요?”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아서 느닷없이 자연의 소리가 유독 잘 들렸다. 루나가 말을 이었다.
“저곳은 외부하고 단절된 곳이잖아요. 도시를 떠나왔을 때 저 신문들을 챙겨놨어요. 바깥소식이 간절할 테니 고마워하지 않을까요?”
그들은 전부 챙겼다. 각자의 무장, 물을 채운 수통, 르맷 권총이 들어있는 나무 상자와 신문 다발. 레스는 자기가 쓰고 있는 터번을 벗어서 높이 들어 백기 대신 휘날렸다. 피카니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쪽 눈가를 찡그렸다.
“그 망토와 터번 차림을 끝까지 지킬 셈이야?”
“숨긴다고 숨겨지겠어?”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너 여태껏 쫓겨 다니는 신세면서 정체를 숨기려고 노력할 생각도 안 하는 거 같은데. 친구들은 그거 가지고 너한테 불만 안 품디?”
“닥쳐.”
레스는 관자놀이를 엄지와 검지로 지압하고 기운 빠지는 표정을 지었다. 카르델과 아비투스를 제외한 다섯 일행은 행진하듯 나란히 열을 지키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이 마을로 향한 지 1분 남짓 지나자 저쪽에서 탁자를 이쪽으로 들고 조금 가까이 다가와 줬다. 다들 말을 잃은 가운데 루나 홀로 ‘우와’하며 감탄했다.
곧, 마침내 그들은 들판 한복판에서 대면했다. 일행이 마을로 향하는 와중에 마을에서 참나무통 하나가 수레에 실려 근처에 왔다. 하딘은 긴장으로 표정을 굳히고 분위기를 지켜보다가 몸에 맨 레버 액션 소총과 권총집이 달린 허리띠를 땅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하얀 식탁보가 깔린 탁자 근처까지 앞장서서 자신을 소개했다.
“헨리 웨슬리 하딘 대위입니다. 저희가 시튼 빌리지를 찾아온 게 맞습니까?”
마을 쪽 사람들도 제법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그들 가운데 안경을 쓴 곱슬머리 중년 남성이 자신의 안경을 괜히 벗었다가 손수건으로 닦고 고쳐 쓰고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제가 어닝웨이 톰슨 시튼입니다. 방문을 환영합니다.”
루나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일행들에게 눈짓으로 이게 사실이냐고 묻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시튼은 이어서 자기 뒤에 있는 사람들을 차례대로 가리키며 소개했다.
“코랏 나자르바예 원사님. 가브리엘 신부님. 그리고 네르바의 투슈가쿡 추장님이십니다. 저희 마을은 이분들이 이끄는 사람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졌고, 유지되고 있습니다.”
투슈가쿡이라는 이름을 듣고 일행은 다들 속으로 매우 놀랐다. 시튼의 손짓을 따라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딘은 헛기침하고 몸을 돌려 타티아나가 양손에 들고 있는 신문 다발과 나무 상자 중에서 뭘 고를지 잠깐 고민했다. 그는 신문 다발을 공손히 들고 탁자 위로 조심스레 놓았다.
“저희가 급히 오느라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는데. 이건 아메리카 쪽 언론사에서 발행한 신문입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딘은 스스로 생각해도 꼴사나울 정도로 어색하게 군복과 챙이 달린 군모를 번듯하게 차려입은 여자 고블린을 향해 말했다. 도중에 하딘은 아차 하고 잊은 걸 떠올린 표정을 지으며 주머니에서 파이프에 넣는 담뱃잎이 들어있는 깡통을 꺼내 탁자에 놓았다.
“그리고 평화로운 자리를 위해 이 담배를 바칩니다.”
시튼은 진심으로 놀라고는 이내 안심하는 표정 뒤에 얼굴을 활짝 피었다.
“원주민들의 관습을 잘 아시는군요. 제국 군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예요.”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원주민 보호구역 출신이 하나 있었습니다. 백인이었죠.”
시튼이 하딘 쪽 일행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중에 계신가요?”
“아뇨, 없습니다.”
마을의 대표자들은 순간적으로 하딘의 얼굴에 스쳐 간 어두운 표정을 눈치채고 그의 말에 담긴 또 다른 의미를 이해했다. 분위기가 잠시 어색해지다가 시튼은 헛기침을 하고 탁자와 의자를 가리키며 또렷하게 외쳤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드셨을 텐데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그들은 서로 눈치와 눈짓을 교환하면서 알아서들 각자 몸에 찬 물건들을 벗어서 의자에 걸었다. 일행 다섯과 마을의 대표자 넷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시튼이 점잖게 손을 들고 먼저 말했다.
“저기 그런데, 대위님 옆에 얼굴을 착각하기가 매우 힘든 분이 있군요. 용사님 맞으시죠?”
피카니는 소리 안 나게 혀를 차고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 애썼다.
“예 맞습니다. 피카니 조슈아 홀리데이라고 합니다.”
“홀리데이 씨가 그쪽 일행의 대표이신가요?”
“아뇨. 천만에요. 전 그냥 일개 사람입니다. 죄송하지만 저희가 상황이 급해서 용건으로 바로 넘어가겠습니다.”
피카니는 아자리, 샤카자이아, 단테의 몽타주가 그려진 작은 그림들을 주머니에서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정황상 이곳을 거쳐 갔을 확률이 아주 높은데 보셨는지요?”
레스는 시튼이 눈 하나 껌뻑 안 하고 자신의 친구들이 그려진 몽타주들을 빤히 쳐다보는 걸 관찰했다. 무슨 생각인지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시튼은 몽타주들을 마을의 다른 대표자들에게 넘겨주고 대답했다.
“최근에 마을을 거쳐 간 손님이 있었는데 그때 저는 다른 일로 바빠서 그 손님들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주민들에게 물어봐야 확답을 드릴 수 있겠군요.”
긍정도 안 하고 부정도 안 하네. 미꾸라지 같은 양반이야. 피카니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화가 더 이어질 기미가 없자 타티아나가 눈치를 보고 손을 든 다음 말했다.
“시튼 씨?”
“그쪽이 누군지는 기억합니다.”
타티아나는 순간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다. 시튼이 계속 말했다.
“저번과는 상황이 바뀌신 거 같군요. 보다시피 저 또한 상황이 많이 바뀌었답니다. 묻고 싶은 게 그 점인가요? 그 세월 동안 이곳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타티아나는 마른 침을 삼키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것도 꼭 듣고 싶지만 일단 마을에 걸린 백기의 의미부터 알고 싶습니다.”
“백기는 저항을 포기하고 수동적으로 협상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입니다.”
시튼은 시치미 뚝 떼고 딱 잘라 말했다. 타티아나는 하딘과 시선을 나누었다. 하딘이 자기가 말하겠다는 듯 눈동자를 옆으로 슬쩍 움직이자 그녀는 살짝 끄덕였다. 하딘은 옷깃을 정돈하고 조금 거드름 피우는 투로 말했다.
“저희가 인근 주둔지에 약간의 지원을 부탁했는데 설마 전 병력이 올 줄은 저희도 미처 몰랐습니다. 마을을 겁에 질리게 해서 죄송합니다만, 인류를 수호하는 군인인 이상 보호구역을 이탈한 원주민들과 침략자들을 사유지에 은닉한 사실을 간과할 수가 없군요. 시튼 씨.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겁니다. 지금은 엄연히 전시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죗값은 기꺼이 치르겠으나 이야기를 들어주십사하고 백기를 걸었습니다.”
피카니와 레스는 곁눈질로 서로 마주 보았다. 서로 하고 싶은 말은 아주 많았으나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대위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그럼 말씀하시죠.”
시튼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마을을 향해 손짓했다.
“이 마을은 갈 곳 없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일구어낸 기적의 산물입니다. 그쪽에서 요구한다면 원주민들은 보호구역으로 돌아갈 것이고 마족 군인들은 포로가 될 겁니다. 그리고 저는 재판을 받겠죠. 하지만 지금은 전시잖습니까. 모두 물자가 모자라서 힘들어하죠. 하지만 이 마을은 최대한 생태계와 함께 균형을 맞추어 성장해왔습니다. 물자들을 그쪽에서 다량으로 징발해가도 주민들이 생활을 유지할 여유는 있습니다. 당장 이 마을을 뭉개기보다는 저희를 이용하는 편이 어떻습니까? 저희가 원하는 건 뿌린 대로 거두면서 조용히 지내는 겁니다. 전시가 끝나고 때가 되면 법대로 처우에 따르겠습니다.”
하딘은 눈을 몇 번 깜빡이면서 일부러 뜸을 들였다.
“확인차 묻는 건데 마을의 무기와 병력은 얼마나 됩니까?”
시튼이 주먹을 입가에 갖다 대고 헛기침을 하며 여자 고블린을 바라보았다. 코랏 나자르바예 원사는 챙이 달린 군모를 벗었다. 젊었다. 피부는 흙빛에 검은색 머리카락은 자로 대고 자른 듯 반듯하고 단정했으며 체격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보다 한 아름 작았다. 성인의 비율을 가진 아이 같았다. 그리고 코와 턱, 귀가 남자 고블릿들처럼 눈에 띄게 돌출되지 않고 날렵하기만 해서 엘프들하고 제법 느낌이 유사했다. 그녀가 말했다.
“선전포고 이후 저희 8사단은 중대 단위로 쪼개져서 전진했습니다. 그게 거의 5년 전 일이고 지금은 95명 남았습니다. 절반이 행군 도중에 탈영했죠.”
비음이 간드러지고 살짝 투박하면서도 매끄러운 발음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하딘이 코랏 원사를 향해 재차 물었다.
“남쪽? 아니면 북쪽?”
“북쪽. 산맥에 숨어서 몰래 여기까지 왔습니다.”
“나는 남쪽이었지. 당신 1차 전격전 참가자군. 아직도 살아있는 인원이 있을 줄이야.”
코랏 원사는 코웃음을 치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1차 전격전이요? 2차가 있어야 1차라고 불리죠. 완전히 멍청한 계획이었습니다. 대위님은 남쪽이라고 하셨죠. 켈트룰 공방전에 참가하신 겁니까?”
“그랬지.”
코랏 원사는 군모를 가슴에 대고 눈을 감으며 말했다.
“전우분들의 조의를 표합니다.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서 보유하고 있던 박격포와 가드너 기관총은 산악행군 도중에 무거워서 내다 버렸고. 수류탄들은 암염 채취 구역에서 다이너마이트 대용으로 다 썼습니다. 화기들은 소총이 77정, 권총이 20정. 탄약은 각각 한 상자 분량입니다. 종종 나타나는 도적들을 쫓아낼 때나 씁니다. 사냥은 활을 잘 다루는 원주민분들이 맡습니다. 수가 맞는지는 직접 확인하셔도 좋습니다.”
피카니가 감탄하는 투로 말했다.
“굉장히 구체적으로 대답하시는군요.”
“제 담당이 물자와 인원 관리니까요.”
코랏은 덤덤하게 대꾸했고 하딘이 넌지시 물었다.
“그쪽 중대장은 어떻게 됐지?”
“살해당했습니다.”
하딘은 단어를 자세히 다시 새겨들었다.
“전사(KIA)가 아니라?”
“하극상으로 죽는 건 전사가 아닙니다.”
“이유는?”
“민간인을 공격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코랏은 옆에 있는 마을의 대표자들을 바라보았다. 가브리엘 신부와 시튼, 투슈가쿡 추장은 말없이 끄덕이기만 했다. 피카니가 말했다.
“이곳을 마왕군의 주둔지로 보는 건 무리가 있군요.”
하딘이 그림을 저쪽으로 밀어주면서 말했다.
“시튼 씨. 마을 주민들에게 몽타주를 전달해서 본 사람이 없는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그동안에 저희끼리 이야기 좀 나누겠습니다.”
“얼마든지요.”
시튼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고 레스와 루나를 뺀 나머지 사람들도 자리에서 일어나고 뒤로 물러나 소곤거렸다. 피카니가 하딘에게 속닥였다.
“엄청나게 수상한데 꼬투리 잡을 부분이 없어서 더 이상합니다.”
타티아나가 말했다.
“심증으로는 알 하자르의 일행을 만난 사실을 숨기는 게 확실한데, 숨기고 있다면 왜 숨겨주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하딘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마을에 들어가서 질문만 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복잡해질 줄 누가 알았겠어. 난 땅개지 외교관이 아니라고.”
피카니가 하딘에게 물었다.
“코랏 원사의 말을 어디까지 믿습니까?”
“뭘 믿고 뭘 의심해? 지금은 심증밖에 없잖아.”
“직감으로 잡히는 점은요?”
하딘은 조금 생각하고 말했다.
“내 직감으로는 저쪽이 싸우지 않고 얌전히 지내고픈 마음은 진심이야. 추수기가 오잖아. 하지만 일이 수틀리면 작정하고 농성할 수준의 무장은 감추고 있겠지. 마을이 저만한 규모로 성장했으면 무기도 얼마든지 감출 수 있어.”
타티아나가 팔짱을 끼며 의견을 냈다.
“저희도 굳이 싸움을 벌여봐야 얻을 건 없으니 저쪽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죠. 은근슬쩍 위협만 하는 수준으로는 시튼이 저희가 원하는 정보를 인질로 쥐고 있을 겁니다.”
피카니가 아랫입술을 한쪽 송곳니로 잘근 물었다.
“시튼을 만만하게 보면 안 될 거 같다는 느낌이 물씬 납니다. 판에서 타짜를 만났을 때 드는 기분이 들었어요.”
레스는 뒤에서 일행들이 수군거리는 동안 양팔을 쭉 뻗어서 탁자에 올리고는 길게 하품을 했다. 코랏 원사와 가브리엘 신부, 투슈가쿡 추장은 피로에 가득 절어있는 레스의 안색을 은근슬쩍 계속 주시했다. 가브리엘 신부가 계속 입을 다무느라 마른 목을 가다듬고 물었다.
“형제님.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뭔가 마실 거라도 드시겠습니까?”
“아, 물이면 됩니다.”
신선한 물. 가브리엘 신부는 촐싹대는 투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근처에 놓아둔 잔에 주전자를 기울여 레스에게 물을 전해주었다. 레스는 단숨에 물을 들이켜고 죽다 살아난 사람처럼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이 계속 자신을 신기해하는 눈으로 보는 걸 레스는 뒤늦게 알아챘다. 루나가 의자를 옮겨서 레스에게 가까이 붙고는 속삭였다.
“저 사람들 아까부터 그쪽을 계속 보고 있어요. 바다위윤이 신기한가 봐요.”
“제가 보기엔 저 시선에 단순한 궁금증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거 같은데.”
“무슨 뜻이죠?”
“저도 제가 말하고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코랏 원사가 헛기침으로 레스의 주의를 끌고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그쪽 성함이?”
“사쿠라비의 레스. 레스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그녀는 마른 침을 삼키고 레스가 손에 들고 있는 하얀색 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거, 왜 머리에 두르고 있지 않죠?”
레스는 이상한 질문이라고 느끼면서도 정직하게 대답했다.
“자리에 앉을 때 모자는 벗는 게 예의니까요.”
코랏 원사는 이해하고 바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급하게 고갯짓을 멈추고 말했다.
“터번을 머리에 두른 모습을 봐도 될까요? 폰초는 반만 젖히고.”
그녀가 부탁하는 말을 듣고 뒤에서 숙덕이던 일행들도 놀라서 대화를 멈추고 이쪽을 보았다. 레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을 한 번 크게 껌뻑였다.
“특이한 부탁을 하시는군요.”
투슈가쿡 추장이 끼어들었다.
“나도 보고 싶네. 그대들에 관한 건 이야기만 들어보고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서 온전한 모습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그런 거라네. 다른 기회가 언제 오겠나.”
레스가 투슈가쿡을 향해 바라보며 물었다.
“네바로 부족의 추장님이라고 하셨죠?”
투슈가쿡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네르바, 네바로. 발음만 다르고 의미는 같지. 시튼은 네르바라고 했는데 어떻게 자네가 네바로를 알고 있나?”
“그게….”
레스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손짓으로 얼버무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폰초는 오른손으로 앞섶을 넘겨 비스듬히 섰다.
“여기요. 외국산 바다위윤 1인분입니다.”
일행은 마을 대표자들의 눈동자에 아주 한순간 경악과 공포의 감정이 스쳐 지나간 걸 보았다. 너무 짧아서 착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기억은 선명했다. 레스가 얼어붙은 상대들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제 태도가 너무 무례했나요?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가브리엘 신부가 급하게 대답했다.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처음 보는 이국적인 모습이어서 다들 잠깐 놀랜 거예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었지만 레스는 물고 늘어지지 않고 넘어갔다. 투슈가쿡이 바로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사쿠라비. 사적인 질문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네만 알고 싶네. 자네는 이들에게 누구인가?”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는 자신의 의지로 이들과 함께 있는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함께 있는 건가?”
이 질문에 커다란 분기점이 일어나리라는 걸 일행은 모두 알아차렸다. 다들 긴장하고 레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레스는 잠깐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저의 의지로 같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네는 겉돌고 있지 않나. 정확히 그들하고 무슨 관계지?”
피카니하고 하딘은 레스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들이 충동에 휘말릴 틈도 없이 레스는 주저 없이 말했다.
“전 그들의 손님입니다.”
“손님?”
코랏 원사가 얼이 나간 투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들은 절 손님으로 제대로 대접해주고 있습니다.”
레스는 한 호흡 뜸을 들이고 덧붙였다.
“그리고 저희는 제 친구를 찾는 중입니다. 제 친구를 다시 만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