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개 같은 새끼. 기어코 날 보냈군.’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고 눈을 떴다. 천장엔 종유석이 가득했고 바닥엔 샘물이 흘렀다. 아무래도 동굴 안인 것 같았다.
‘설마 한국이 아니라 외국은 아니겠지.’
신이라도 실수를 하는 걸까.
잠깐 불안한 생각이 스쳤지만 그럴 리는 없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상태 창을 열었다. 일단 내 상태를 알아보는 게 급선무다.
<주은성>
레벨: 1(윤회+1) [경험치 0/50]
[체력: 500(+30)] [감각: 338(+30)]
[의지: 155(+30)] [마력: 130(+30)]
[미 분배 포인트: 0]
‘능력치는 멀쩡하고, 레벨은 초기화인가?’
레벨이 1이 됐다.
마지막에 빛의 글귀가 ‘레벨 제한’을 해제한다고 했는데 그것과 연관이 있는 듯했다.
그 결과 레벨 옆에 (윤회+1)이 붙은 거고.
흘겨보자면 만렙의 능력치로 1레벨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특전치곤 괜찮은데. 페널티는 없는 것 같고.’
나는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감각은 이상이 없고 정신도 또렷했다.
그리고 아이템은···.
‘모두 사라졌군.’
시선을 내리깐 내가 입맛을 다셨다.
에픽으로 도배되다시피 했던 아이템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흰색 면 티에 면 바지. 그리고 허름한 신발.
이것들이 지금 내가 가진 전 재산이었다. 아공간마저 확인이 안 됐다.
‘그나마 입고 있는 옷들은 매직아이템들인 건가.’
변화된 상황에 담담한 것은 막연한 그리움 때문일까.
아니면 필멸자의 운명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시무룩해봤자 나만 손해지. 일단 동굴부터 벗어나자.’
나는 생각을 접고 걸음을 옮겼다. 방향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일단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걸으면 된다.
그런데 갑자기 동굴 안쪽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씨발 새끼들아!!”
눈매가 가늘어졌다.
‘한국어다.’
과연 제대로 온 게 맞구나. 그나저나 처음으로 듣는 모국어가 욕이라니.
나는 호기심을 품고 소리의 근원지로 달려갔다.
넓은 공터인 그곳엔 웬 여자가 서 있었다.
“개새끼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구, 그러게 삼키지도 못할 걸 왜 처먹었나?”
여자의 맞은편엔 산적 같은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다.
한 명은 근육질 덩치, 한 명은 삐쩍 마른 멸치였다.
“처음부터 공평하게 나누기로 했잖아!”
“공평? F급 헌터 주제에. 공평하게 나누려면 그걸 우리한테 줬어야지.”
잠자코 있던 멸치가 삿대질을 했다.
이거 일이 재밌어진다.
자세히 살펴보니 수적 열세에 의해 여자 쪽은 옷도 헤지고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멀쩡한 남자 두 명과 대비된다. 헝클어진 머리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그녀의 죽음을 예고하는 듯했다.
‘뭐, 내가 나설 필요는 없지.’
나는 멀거니 선 채 그 광경을 지켜봤다.
자고로 약하다는 이유로 도와줄 필요는 없다. 강하다는 이유로 나설 필연도 없다. 사람의 강함은 도덕적 우위와 전혀 관계가 없다. 약한 사람이 도리어 나쁜 놈일 수도 있다는 거다.
하지만···.
“뭐야, 거기! 넌 뭐야!”
“이런 미친 새끼! 어떻게 던전 안으로 들어온거야?”
초면에 반말을 내뱉고 욕하는 사람의 인성은 쉽게 판가름할 수 있다. 그것도 멸치 쪽은 또 삿대질을 하는 군. 습관인건가.
“저 좀 도와주세요! 저 새끼들 머더러예요!”
여자가 나를 보며 애타게 소리쳤다.
나는 손가락을 튕기며 고민했다.
‘요정 그년이 말하길 지구가 위험해졌다더니. 인성들도 흉흉해진 건가.’
그런데 조바심을 느꼈는지 덩치 쪽에서 먼저 내게 달려왔다. 손에는 커다란 장검을 위협하듯이 쥐고서.
이건 범죄현장을 은폐하겠다는 행동인가. 말보다 날붙이가 먼저 나오는 걸 보니 인성에 확신이 든다.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운을 원망해라!”
덩치가 사선으로 검을 휘둘렀다.
나는 대응방법을 고민하다가 상체를 비틀어 옆으로 피했다.
그러자 고스란히 드러나는 녀석의 하복부.
“정신을 절구로 빻았나.”
그대로 주먹을 꽉 쥐고 미끄러지듯 복부를 강타했다.
뻐억!
“꾸에에엑!”
덩치가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피와 타액을 흘렸다. 급기야 공중에 붕 뜨더니 저 멀리 날아가 벽면에 처박혔다.
쿠웅!
‘흠, 오버 밸런스인가. 무슨 공격력이···.’
나는 새삼 놀랐다. 손속을 가볍게 뒀는데도 이 모양이라니.
설마 저 녀석 엄청나게 약한 건가. 좀 더 살살 때릴 필요가 있다.
“이, 이 미친놈이!”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멸치가 반사적으로 달려와 내게 창을 휘둘렀다. 어디서 본 건 있는지 허리의 회전을 제대로 살린 횡 공격이었다.
휘익!
나는 몸을 뒤로 빼내 가볍게 피했다. 뒤이어 왼발을 내딛고 순식간에 근접해 주먹을 뻗었다. 붕권이었다.
뻐억!
“갸아아아악!”
강렬한 타격음이 들렸다. 주변에 핏줄기가 흩날리고 멸치가 일직선으로 곧게 날아갔다.
그리고···.
<스킬: 붕권을 터득하셨습니다.>
뜬금없는 스킬 획득 알림 말이 떠올랐다.
나는 고개를 갸웃 숙이며 의아해했다.
‘뭐야, 붕권은 이미 가지고 있는 스킬인데···?’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게다가 「세계의 목소리」가 여기서도 적용되다니. 허공에 떠오른 빛의 글귀를 보며 나는 확신했다. 지구도 이세계처럼 게임시스템이 적용되고 있는 것 같다.
‘나만 게임시스템이 적용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군.’
확실히 지구도 많이 변한 듯했다. 대략적으로 예측이 된다.
“히, 히익···.”
기절한 멸치와 덩치를 사이에 두고 여자가 화들짝 놀란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메가 힐.”
그런데.
‘···뭐야?’
뭔가 이상했다. 분명히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 변화가 없다. 스킬이 실패할 리는 없는데. 나는 몇 번이고 소리쳤다.
“메가 힐! 메가 힐! 메가 힐···!”
여전히 묵묵부답.
아.
순간 깨달았다.
아까 터득한 붕권, 그리고 지금 사용되지 않는 메가 힐.
‘골 때리네. 설마 스킬들이 모두 초기화된 건가.’
다급히 스킬 창을 확인해보니 과연 텅 빈 목록이 보였다.
남아있는 스킬은 딱 두 개뿐.
[윤회: 에픽 1]
효과 – 경험치 획득률 1000%, 최고레벨 제한해제
설명 – 성장의 한계를 뛰어넘은 자.
[붕권: 레어 1]
효과 – [기본 5] + [근력 계수 0.1]
설명 – 근력을 한계치로 사용해 강력한 한방을 구사합니다. 타격 성공 시 상대방은 [기본 50] + [근력 계수 0.1]의 확률로 다운됩니다.
그런데 방금 체득한 붕권 외에 다른 스킬이 조금 이상하다. 아무래도 특전으로 받은 보상 같은데 윤회라고···?
‘허, 미쳤네. 경험치 1000퍼센트라고!?’
경악한 나머지 내 두 눈이 한껏 치켜떠졌다.
경험치 획득률 1000퍼센트!
말도 안 되는 개사기 특전 아닌가.
게다가 레벨 제한이 해제되었다니.
나는 놀란 숨을 훅 들이켜고 찬찬히 머리를 되뇌었다.
본래 저쪽 세계에선 1000레벨이 만렙이었다. 그래서 레벨 1000이후론 성장의 벽에 가로막혀 나태하게 살았다.
그런데 이제서 에픽레벨이라니.
나는 멀거니 선 채 그저 입만 크게 벌렸다. 어이가 없어서 저절로 바람 빠진 소리가 났다.
‘만렙까지 10배나 쉬워졌다. 아니··· 이제 만렙이 없어졌으니 레벨을 무한정 올릴 수 있겠구나.’
불현 듯 향상심이 일어나 가슴을 두들겨댔다. 더 강해지라는 뜻은 이런 보상을 의미하는 거였나.
‘그 새낀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지.’
나는 메마른 입술을 적시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깊게 생각해도 해답은 나오지 않는다. 날고 기고 머리를 쥐어뜯어도 높은 놈의 뜻을 어찌 알 수 있을까. 골몰한 놈만 암 걸리는 거지.
‘일단 지금은 현재에 적응부터 하자. 돌아가서 개판 치는 건 그 다음이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나는 쉽게 납득했다. 적어도 지구에 적응하다 보면 마왕 놈들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러면 분명히 신을 엿 먹일 기회도 생기겠지.
“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뭐예요.”
고개를 들자 기겁한 여자가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한 발자국 다가가자 그녀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어떻게 E급 헌터들을 한 방에 때려눕히는 건데···.”
여자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구태여 긴 말을 하기 싫어서 본론부터 꺼냈다.
“하나만 물읍시다.”
“······에?”
“지금이 몇 년돕니까?”
“···네?”
예상대로 여자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의 끝에 나는 가장 무난한 변명을 꺼냈다.
“아무래도 제가 기억상실증인 것 같아서.”
* * *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박은애라고 소개했다.
현재 년도는 2040년.
내가 소환되고 13년이 지난 시기.
10년 전 지상전역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오고 세상이 게임처럼 변했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게임시스템과 레벨이 생겨난 게 딱 그 무렵이에요. 던전이 생겨나고, 아이템도 생겨나고··· 정해진 기간에 꼭 클리어 해야 하는 레이드 형 던전도 그때 생겨났구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소환되었던 이세계와 그다지 차이는 없는 것 같다.
이해하기 썩 편하군.
“대빵은 없습니까?”
“대빵······ 이요?”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은애가 고개를 갸웃 숙였다.
“거, 마왕이나··· 그런 놈이요. 세계를 이렇게 만든 원흉.”
“그런 건 들어보지 못했어요.”
은애는 짐짓 입술을 매만졌다. 그러더니 한참 만에 입을 벌리고 떠올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꼭 토끼 같은 얼굴이다.
“아, 맞어. 생각해보니 탑이 있어요. 이게 원하시는 답이 될지는 모르겠는데···.”
“탑?”
“네에. 하늘로 우뚝 솟은 탑인데 바벨의 탑이라고 불려요. 위치는 중국 베이징에 있고요.”
“역시 그런 건가.”
단숨에 이해했다. 탑의 맨 마지막 층에 마왕이라는 놈이 있겠지. 뻔한 클리셰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탑으로 가서···.
“으음, 진짜 기억상실증이신 것 같은데···. 덧붙이자면 바벨의 탑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요.”
은애가 내 표정을 읽고 즉시 태클을 걸어왔다.
오랜만의 반박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자에서 일반인이 됐다는 건가.
머리가 말랑말랑해지는 기분이군.
“왜죠?”
“어··· 그게 정부에서 출입을 엄격히 봉쇄하고 있기도 하고. 중국은 심각한 몬스터 지역이거든요. 완전히 죽은 땅이라서 언데드 종류의 몬스터들 천지예요. 좀비나··· 뭐, 그런 것들. 대부분의 나라들도 그와 비슷한 사정이지만···.”
이어진 그녀의 말은 놀라웠다. 중국을 포함한 거의 모든 국가가 폭삭 망해버렸다는 거다.
“땅이 넓을수록 던전도 많고 몬스터 진압에 불리해서 그래요.”
묻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내 눈짓만 읽고 뒷말을 덧붙였다.
나는 새삼 관자놀이를 긁었다.
10년 만에 대부분의 나라들이 망했다고?
게다가 땅 덩어리가 넓은 국가들 위주로만?
“근데 아까 그 남자들과는 뭣 때문에 목숨 걸고 싸운 겁니까?”
상념을 접고서 한참 만에 내가 물었다. 그러자 은애는 당황하는 듯 겁먹은 눈초리로 우물쭈물 거렸다. 그런 끝에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이는 것이었다.
[귀속] [정예: 고블린 족장의 장갑]
등급 – 매직
내구도 - 10
물리 공격력 – 2
방어력 – 3
설명 – 고블린 족장이 착용하던 장갑. 주술적인 마법이 걸려있어 착용하면 물리 공격력에 추가 보너스를 받는다.
“아이템을 공평하게 나누기로 했었는데 제가 죽인 몬스터가 정예 몬스터다보니, 정예등급의 귀속 매직템이 나왔어요. 이것 때문에 싸움이 일어났죠.”
정보를 공유하며 은애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황당해서 아이템을 지긋이 쳐다보자 그녀의 얼굴이 시시각각 새파랗게 질렸다.
“왜, 왜요? 설마 절 죽이고 아이템을 뺏어가려는 건···.”
“음.”
기가 막혔다.
아이템의 등급은 커먼, 매직, 레어, 유니크, 에픽 순서.
귀속 아이템은 정예등급의 매직부터 위치해 있다. 당연히 매직아이템은 초보자 때나 거쳐 가는 아이템이다. 즉, 잡템인 거다.
그런 쓰레기를 신줏단지 모시듯 하다니. 나아가 그걸로 칼부림까지 일어나다니. 대체 지구의 아이템 수준은 얼마나 처참하단 말인가.
‘심각하다. 거의 아이템 성능이 노멀과 헬 차이잖아.’
이 정도면 귀속해제 포션이 아까울 지경이다. 내가 잠자코 있자 그녀는 저 혼자 떠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그 두 명은 길드도 없고 공개 파티로 모은 사람들이기도 하고. 오빠는 그들보다 훨씬 더 높은 랭크의 헌터 같으니까요. 운이 좋네요.”
은애가 내 눈치를 살살 살피며 베시시 웃었다. 유독 ‘오빠’라는 단어에 강조를 둔다. 내가 황당해서 되물었다.
“오빠라고요?”
“네에. 오빠.”
“아니, 저 28살인데. 그쪽은 몇 살입니까.”
어렸을 적 소환당한 이후 13년이 지나서 지구로 되돌아왔다. 생일이 지나지 않았다면 만으로 28살이다. 그러자 은애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나를 마주봤다. 그녀는 고개를 모로 숙인 채 인상을 찌푸리더니 겨우 입을 여는 것이었다.
“뭐, 어쨌든 보기에 멋있으면 오빠죠.”
확실했다. 그녀는 나보다 연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