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수원시 천마신교 털리다!>
무협 컨셉 단체 무리맹이 발칵 뒤집어졌다. 전국 각지에 있는 천마신교 중 수원시에 있는 천마신교는 유독 유명한 곳이었다.
그런데 그런 곳이 털리다니.
범인은 전설 속의 대도라도 되는 걸까.
무협 컨셉의 커뮤니티는 난리가 났다.
(실시간 BEST) 와, 정의구현 오졌다. 누가 털어먹은 거지.
└그러게 적당히 해먹을 것이지. 언젠가 큰 코 다칠 줄 알았어.
└솔직히 쌤통. 자업자득.
└ㅇㅈ ㅇㄱㄹㅇ ㅂㅂㅂㄱ
천마신교의 문주는 결단코 아무 일이 없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은성이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서실을 모조리 털어먹은 까닭이다.
문파에 있는 무공 비급들 90퍼센트에 30억이 넘는 현금까지. 금괴는 3000돈을 가지고 갔다. 현금으로 약 7억 원의 가치였다.
그러니 낮말을 듣고 밤말을 듣는 사람이 어디 없을 수 있겠는가.
소문은 일파만파 무협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퍼져나갔고 각 문파의 무림인들은 두 팔을 걷고 나서서 범인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벌을 받아 마땅한 곳이라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 법.
게다가 몇몇 무림인들은 지금까지 저지른 죄가 있어 후한이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인력을 쏟고 자금을 부어도 범인의 흔적은 조금도 발견할 수 없었다. 심지어 피해를 입은 천마신교의 문주조차,
-으으··· 단순한 도둑놈의 소행입니다. 별일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넘어가버리니 더 이상 사건을 키울 수 없었다.
사건은 흐지부지 넘어갔다.
물론 사람들이 지켜보는 세간의 앞에서만.
* * *
“모두 다 모이셨습니까?”
어두운 공간.
거대한 책상을 사이에 두고 12명의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헌터회.
대한민국을 뒤에서 좌우지 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의 중추이자 최상위 계층 1세대 헌터들의 모임이었다.
“아, 또 무슨 일로 사람 귀찮게 오라가라합니까.”
“경조사 같은 걸로 부른 거면 진짜 빡친다.”
몇몇 이들은 사회에 관심이 없어 오늘 모인 이유를 몰랐고.
“이번에 헌터소행 범죄 때문에 그런 거 아닌가? 그··· 길드 털린 거.”
“새끼들, 그러니까 컨셉종자들을 헌터회로 받아들이면 안 돼. 현실은 게임이 아니라니까 자꾸 주제 파악 못하고 나대서 이러는 거 아냐.”
몇몇은 관심이 있었지만 문제의 경중을 몰랐으며,
“천마신교라고 했나? 풉, 우습지도 않아. 이참에 전국에 있는 천마신교를 다 없애버리는 건 어떻습니까?”
“네크로 필리아··· 시체에 성욕을 느끼는 당신들이 그런 말할 처지는 아닌 것 같은데.”
“뭐라고!”
몇몇 이들은 경중을 알았지만 서로 비방하기 바빴다.
“자자! 모두 조용하십시오! 회장님 오십니다!”
책상의 가장 앞에 비워진 화려한 의자. 회장의 자리.
그 옆에 서있던 중후한 얼굴의 사내가 외치자 사람들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회장은 강했다. 누구보다 똑똑하고 영악했다. 세계가 찬바람 앞 등불인 시절, 회장은 거의 단신으로 한국을 구했다.
게다가 인간을 초월한 지식과 정보.
당장 몬스터의 침입을 불허하는 차폐막조차 그가 고안한 것이다. 심지어 마석의 사용용도도 그가 가르쳐준 것이다. 회장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구국의 영웅이자 막연하고 불확실한 미래의 정답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1세대 헌터들이 이 자리에 모여 있을 수도 없었을 거다. 구심점이 없었을 테니까.
“모두 다 모이셨나요?”
사뿐한 발자국 뒤로 구슬을 굴리는 듯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모두 모이셨네요.”
회장이 테이블을 슥 둘러보며 웃었다.
놀랍게도 회장은 젊었다. 게다가 여자였다.
“일단 모두들 앉으시죠. 오늘 무엇 때문에 모였는지 아시나요?”
회장 유지미의 물음에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역시 사람이 모이면 고인물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이틀 전 있었던 수원시 천마신교 사건과 관련해서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들이 모인 겁니다.”
회장의 좌측에 서 있던 중후한 외모의 사내, 부회장. 죽림의 길드마스터인 이시백이 유지미를 대신해서 말했다.
고인물들은 그제야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수원시의 천마신교도 우리 헌터회의 일원이긴 하니까. 가만히 놔둘 수는 없지요.”
“음··· 새로 들어온 무협 오타쿠 한 명 때문에 기성멤버인 우리까지 모이다니.”
몇몇은 아직도 이해를 못하겠다는 말투였지만.
이윽고 좌중을 둘러보던 회장 유지미가 서두를 깔았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세상이 멸망의 위기를 한 차례 겪은 이후로 우리는 우리들만의 법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몬스터를 상대로 승전을 한 것도, 종전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차폐막을 통해 숨을 고르며 평화를 유지하고 있을 뿐, 휴전 상태죠.”
유지미가 하는 말은 뻔했다. 그럼에도 누구하나 나서서 시비를 걸지 않았다. 회장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헌터회가 세워질 당시 우리 헌터회의 1세대 헌터들 간에는 분란과 싸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서로 간에 불가침조약을 기본 방침으로 내세웠습니다. 인류의 주적은 우리들이 아니라 몬스터니까. 하지만 이틀 전 말도 안 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유지미가 눈짓을 주자 이시백이 리모컨을 조작했다.
책상 위의 빔 프로젝트로부터 한쪽 벽에 영상이 투영됐다.
영상에는 은성의 신원과 천마신교의 정보가 나와 있었다.
몇몇 이들은 은성의 얼굴을 알아보고 놀랐다.
“수원시의 천마신교 길드는 저희 헌터회에 속한지 몇 달 되지 않았지만 분명 헌터회 소속입니다. 서로 간에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어떤 행동을 하든, 설령 위법을 저지르더라도 헌터회 간에는 불가침조약은 유효합니다.”
애초에 헌터회는 도덕적 선악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단체가 아니다. 그저 위급 상황 시 인류를 지킬 힘이 있느냐, 없느냐의 무게로 만들어진 이익 단체일 뿐. 그러니 도덕적으로 악하다고 해서 지탄 받을 필요도 없고, 지탄할 사람도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트리플 S급 정도의 헌터로 파악되는 인물이 수원시의 천마신교를 무단으로 침입하여 길드마스터를 공격함은 물론 서실까지 털어갔으니까요. 덕분에 천마신교의 길드마스터는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빔 프로젝터가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병실에 누운 채 골골거리는 김무정의 모습이 투영됐다.
그 참혹한 광경에 사람들이 들끓었다.
“아무리 그래도 레벨 400은 되는 놈이었는데 저런 꼴이라니. 그렇다면 역시 범인은 무법지대 놈 인가?”
“미친, 오랜만에 쓸 만한 루키인가 싶더니 무법지대에서 넘어온 놈이었나.”
“조국을 버린 놈들이야, 애국심 없는 놈들.”
여론이 무법지대 쪽으로 일축됐다. 그렇지 않고선 은성의 무지막지한 강함과 혜성 같은 등장이 말이 안 됐다.
“역시 무법지대로 도망간 놈들은 그냥 놔두면 안 돼.”
“기회가 되면 다 쓸어버리든가 해야 합니다. 해충 같은 놈들.”
세상이 안정된 이후, 자국방위의 완결성을 추구하기 위해 헌터들은 권력을 잡았다. 앞에서는 권력과 거리가 멀지만 뒤에서는 단숨에 세상을 바꿀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에 반발해서 무법지대로 도망간 몇몇의 1세대 헌터들.
사람들은 은성을 헌터회의 반대세력인 그들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유지미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오늘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되도록 저 사람과 접촉을 하지도 말고 경거망동해서 나서지도 말라는 겁니다.”
뜻밖의 말이었다.
단숨에 잡아서 고문을 해도 모자라건만, 가만히 놔두라니.
“어째서입니까.”
대번에 반론이 튀어나왔다.
길드마스터를 대신해 이 자리에 참석한 김무정의 심복 강태상이었다.
‘네 까짓 게 감히 회장님께 반론을···?’이라는 눈총이 쏟아졌지만 강태상은 애써 무시했다.
“저도 접점이 있어서 제 부하를 시켜서 알아봤습니다만. 무법지대의 인물로 규정하기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습니다. 실제로 시비를 먼저 건 쪽은 그쪽 천마신교쪽이고요.”
얼굴이 구겨진 회장을 대신해 부회장 이시백이 말을 열었다. 눈매만 살포시 웃고 있는 표정. 보이지 않는 살기가 강태상을 따끔따끔 찔렀다.
“그리고 무법지대의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젊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십대 후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으니까요.”
결국 강태상은 더 버티지 못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곳에 앉은 헌터들은 전원이 트리플 S급의 헌터들이다. 비위가 상한다면 단번에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회장 유지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아본 바로는 수년간의 공백도 의심스러워요. 활동이 최근에서야 기록되었으니까요. 그는 우리와 다른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무법지대로 도망간 1세대 헌터 중에서 그와 같은 인물의 정보는 전혀 없어요.”
외국 사람도 아니고 한국 태생.
가족도 존재하고 거주지도 있다.
그런데 수년간의 활동이 완전히 백지다.
“그리고··· 저는 두 번 말하는 걸 싫어합니다. 제가 하는 모든 것들이 정답입니다. 그러니 이유를 묻지도 말고 그냥 제 말을 들어주세요. 굳이 대면으로 보자고 한 것도 혹시나 제 말을 듣지 않고 쓸데없는 생각을 가질까, 병신 같은 짓을 저지르진 않을까 걱정돼서였으니까.”
유지미가 나직하게 말했다. 목소리에 실린 감정은 부탁이 아닌 강요와 명령이었다.
이미 한 번 그녀에게 반발해서 얻어터진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고개를 조아렸고, 그녀의 강함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오직 강태상만이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이걸로 파합니다. 모두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유지미가 손짓하고 사라지자 남은 사람들이 일어서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회의실 밖으로 나가서 혼자 남게 된 유지미는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뭐지? 주은성?’
솔직히 헌터회에 속한 천마신교가 누구한테 쥐어터지든, 말든 그녀에게 있어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전 지역에 있는 수백 개의 무림 코스프레 길드 중 하나일 뿐이니까.
굳이 수원시의 천마신교를 헌터회에 가입시킨 건 김무정, 그 새끼가 가지고 있는 ‘천마신공’의 무공비급을 강탈하기 위해서였다. 강탈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기어코 천마신공을 익혀서 세상을 위협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미리 선수 친 놈이 있다니.
‘나비효과? 그런 것 치고는 이상하잖아?’
유지미는 입술을 찡그렸다. 그녀의 머릿속에 저장된 지금까지의 기억에는 주은성이라는 존재가 없었다.
‘변수? 신의 간섭력?’
놓치는 게 있나 머리를 곱씹어 봤지만 그래도 떠오르는 건 없었다. 정말 말 그대로 변수였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라이트 훅이었다.
‘그래 뭐, 어차피 천마신공은 내가 익힐 생각이 없었으니까.’
유지미는 순식간에 타협했다. 어차피 결말로 가는 방법은 많다.
그리고 오히려 오랜만의 변수가 반갑기까지 했다. 정말 오랜만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스릴 있네.’
일이 벌어지기 전까진 괜찮다. 어차피 모든 건 자신의 손바닥 위. 수면 위의 잔물결은 결국 자연스레 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잔물결이 아니라 거대한 파도라면. 혹은 쓰나미라면.
‘그럼 그때 제대로 나서주마.’
랭킹1위 번뇌길드의 길드마스터로서, 상위계층의 헌터로서, 그녀는 사회를 유지할 의무가 있었다.
그녀는 회귀자였으니까.
* * *
“너 면허 있다고 했지?”
“네에, 오빠.”
은성의 물음에 은애가 대답했다.
은성은 박은애와 박은호 남매를 데리고 시내로 나온 참이었다.
“은호야. 몸은 좀 어때?”
“아, 괜찮습니다. 형님. 아직도 좀 얼떨떨하긴 한데···.”
박은호는 은성이 준 포션의 효과로 금세 건강을 되찾아 퇴원했다. 굳이 집에서 더 요양하라는 은성의 말에도 그는 은성의 사정을 듣고 따라왔다.
‘뭐, 구라를 치는데 손바닥이 많을수록 좋으니까.’
둘이서 작당하면 거짓말로 판가름 나기 쉽지만, 셋 이상이 작당하면 진실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은성은 쫙 빼입은 정장을 탈탈 털고 외제차 매장을 방문했다.
미뤄놨던 일을 해야 할 차례다.
가족들을 만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