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의 귀환-22화 (22/127)

# 22

대한민국엔 관행이란 게 있다.

규범과 법을 초월하는 암묵적인 룰.

‘F급 길드가 폐던전 경매에 입찰을 해?’

진동토템의 길드마스터 이루나는 황당했다. 그녀는 입을 떡 벌리고 지금의 상황을 의심했다.

‘미친놈 아냐?’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심해트롤길드의 하지성도 어처구니가 없었고, 경매장에 참석한 모든 길드마스터들이 지금의 상황을 믿지 않았다.

‘실버스타? F급 길드가 겁을 상실했나.’

‘처음 들어보는 길드인데. 상위 길드에서 파생된 놈도 아니고.’

‘길드마스터라는 사람 제정신인가.’

헌터사회에는 암묵적인 룰이 꽤 있다. 단체의 전통이 오랫동안 내려와 관습처럼 굳어진 것이다.

그 중 하나가 폐던전 경매는 C급 길드부터.

사실 상 C급 미만의 길드는 폐던전 경매에 낙찰을 받게 되더라도 그것을 소화해낼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지역마다 혹은, 세력마다 길드단위의 조합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실버스타? 길드마스터는 누굽니까? - 1분전.

-이번 폐던전은 루나님의 진동토템길드 차례 아닌가? - 1분전

-실버스타라고 누구 아는 분 아무도 안 계세요? - 1분전

진동토템이 속한 길드모임 메시지 방에 불이 났다. 쟁쟁한 길드들이 인맥을 통해 가입된 곳이었다.

수원시에 있는 길드조합은 크게 두 군데였다.

한 쪽은 하지성의 심해트롤길드를 위시한 세력. 다른 한 쪽은 이루나의 진동토템길드를 위시한 세력이다. 두 세력은 폐던전 공략의 권한을 적당히 나눠서 과도한 입찰이 되는 것을 서로가 방지했다.

당연히 은성의 실버스타는 둘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았다.

-5억 낙찰! - F급 실버스타길드.

스크린에 첫 경매의 결과가 나왔다. 은성의 예상대로 낙찰이 성공적으로 완료됐다.

‘일단 유니크 던전 하나.’

웃고 있는 은성과 반대로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우중충했다.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경매가 계속 진행됐다.

“자, 다음 경매를 진행하겠습니다. 이번 폐던전은 시내 외곽에 위치한 던전으로 포탈 색을 확인했을 때 레이드형 던전으로 파악되며···.”

오늘 폐던전 매물은 총 다섯 개. 분기별로 있는 폐던전 경매 중 이번만 유독 매물이 많은 편이었다.

그런데 경매가 진행될수록 사람들의 얼굴이 점점 석고상처럼 굳어갔다.

그럴 수밖에.

-4억 낙찰! - F급 실버스타길드.

-5억 낙찰! - F급 실버스타길드.

-5억 5천 낙찰! - F급 실버스타길드.

-6억 낙찰! - F급 실버스타길드.

남은 매물도 모두 실버스타에서 들고 갔다. F급 길드에서 매물을 싹 쓸어간 것이다. 심지어 뒤늦게 낙찰금을 더 올렸지만 그것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뭐야.’

‘이런 미친!’

각 조합의 대표인 이루나와 하지성의 얼굴이 시시각각 붉게 물들었다.

‘저 새끼는 대체 누구야.’

‘배후 세력이 있는 건가? F급 길드에서 저런 자금력이라니.’

그들은 슬슬 은성의 뒷 배경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수원시에서 오랫동안 헌팅을 한 그들에게 실버스타라는 길드는 이름도 낯선 신입길드였다. 그런 F급 길드 주제에 수십억의 자금력이라니. 도대체가 말이 안 됐다.

결국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설마 하지성 이 새끼가 약속을 깨고 얄팍한 속임수를···.’

‘설마 이루나 이 년이 계약을 무시하고 치졸한 계획을···.’

사전에 그들끼리 약속하기로 이번 던전은 3대2로 나누기로 했다.

이루나 쪽에서 3개의 폐던전을, 하지성 쪽에서 2개의 폐던전을 들고 가기로 합의한 것이다. 입찰금액도 담합의 감시망을 피해 3억에서 3억 5천으로 입을 맞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튀어나온 F급 길드라니. 틀림없이 상대의 연줄이 분명했다. 서로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누구냐? 실버스타.’

‘여기 있는 놈들 중 한 명인데.’

몇몇 이들은 장내를 이리저리 훑으며 실버스타의 길드마스터를 찾았다. 경매장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지만 실버스타의 마스터를 특정 짓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곳에서 낯선 얼굴은 은성일행 밖에 없었으니까.

‘저 새끼는 지난번 헌터고시 수석이잖아!’

진동토템의 길드마스터 이루나는 단번에 은성을 파악하고 놀랐다. 다른 길드마스터들과 달리 그녀는 신규 길드원을 직접 영입하는 편이었다.

지난번 헌터고시의 수석은 B급 자격증을 받았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 속하지 않고 직접 길드를 만든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지기반이 하나도 없을 텐데. 이 미친 자금력은 도대체···. 역시 하지성 그 새끼가 뒤에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건가.’

하지만 석연치가 않았다. 하지성 쪽의 인원들도 크게 당황한 것이 눈에 띄었다.

한편 은성은 속으로 손익을 계산하고 있었다.

‘내친 김에 전부 낙찰해버렸군.’

보통 길드에서 던전 공략에 걸리는 기간은 평균 한 달에서 길게는 세 달. 그래서 4억 이상의 낙찰가부터는 낙찰 받은 던전이 레어급 이상이 아니라면 손해가 확실했다. 인건비부터 식비, 재료비 등 준비에 필요한 금액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기적인 정산금으로 손실을 메우더라도 이득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은성의 경우 유니크 던전도 이틀에서 일주일 사이면 충분했다. 심지어 솔로 플레이. 그러니 평균 낙찰가를 조금 오버하더라도 손해는 아니었다.

“와··· 오빠 지금 폐던전 전부 낙찰 받은 거야?”

잠자코 지켜보던 아랑이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그녀는 은성의 방문 목적을 단순 견학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맞아. 너 아이템 경매 때문에 왔다고 했지?”

은성은 그녀의 말을 묵살하고 되물었다.

“어, 어···.”

“계좌 불러. 10억 넣어줄게. 생각보다 낙찰을 저렴하게 받아서 돈이 남네.”

“헐··· 뭐라고?”

아랑은 기가 막혔다.

B급 헌터의 재력수준은 원래 이렇게 엄청난 걸까.

“은애야. 너도 아랑이랑 같이 있다가 경매 마치면 연락해.”

“아, 저도요? 오빠는요?”

“난 볼일이 있어서 볼일 좀 보고 올게.”

아랑에게 돈을 이체해준 은성은 둘을 등지고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따끔따끔한 눈총들이 느껴졌다.

‘역시 가만 놔두질 않네.’

경매장을 나서기 전 은성은 고개를 돌려 경매장 내부를 슥 쳐다봤다. 수많은 길드마스터들이 자신의 눈을 씹어먹을 기세로 마주보고 있었다.

* * *

집 근처에 위치한 행복 부동산.

뒤를 밟는 인기척들이 느껴졌지만 은성은 무시하고 일단 계획해둔대로 행동했다.

“안녕하세요.”

“어이구, 어서 오십시오.”

은성이 건물 안에 들어가자 업자가 반갑게 맞이했다.

“사이트를 보니까 이 근방에 매물이 있는 집들이 많던데.”

“아아, 집이 필요하셔서 오셨습니까. 전세? 월세?”

은성의 얼굴을 흘겨보며 나이를 유추한 업자가 물었다.

“매매요.”

“아, 매매!”

업자가 반색하며 웃었다.

은성의 부모님이 계신 동네는 낙후된 지역이었다.

과거엔 수원시청이 있고, 근방에 저수지도 있는 신도시였지만 대격변 이후 땅값이 뚝 떨어졌다.

곳곳에 폐던전이 수두룩해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인 것이다. 심지어 차폐막이나 협회의 관리도 없이 그대로 방치된 던전도 많았다.

“허허, 사이트를 보고 오셨다면 알아보신 매물은 있으십니까?”

“네, 물론.”

은성은 가게의 한쪽 벽에 걸린 커다란 지도를 보며 점 찍어둔 곳을 찾았다. 그리고 거침없이 요구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이 근방에 있는 매물 전부요.”

은성이 가리킨 곳을 확인한 업자가 황당해서 되물었다.

“예?”

하나같이 근처에 폐던전이 있는 건물이었다.

게다가 한두 채도 아니라···.

“나와 있는 건물 전부요. 빌라, 주택, 원룸 전부 가리지 않고.”

“어어···, 매물이야 많습니다만. 그런데 그 근방은 폐던전이 있어서···.”

“빨리 알아봐주세요.”

“흐으으······.”

업자는 의아한 얼굴로 매물 확인에 나섰다.

폐던전이 근처에 있는 건물은 안전지대와 비교해서 건물 값이 절망적이게 쌌다. 게다가 언제 몬스터의 습격이 닥칠지 몰라 매물도 넘쳐나는 편이었다.

“전세가 있는 건물도 괜찮습니까?”

“네. 그냥 매매되는 거면 전부다 주세요.”

업자는 기가 막혔다. 이런 손님은 처음이었다.

은성은 업자와 얘기를 끝내고 계약서 작성과 세세한 일정들을 잡았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건물주들과 얘기되는 대로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은성은 허리를 숙이는 업자를 뒤로한 채 부동산 건물을 나왔다.

‘역시 돈을 벌려면 건물을 사야지.’

보통의 길드들은 폐던전을 공략하기 전 협회로부터 승인을 받고 공략을 한다. 목숨이 저당 잡히고, 일정부분 돈을 지출하며, 한두 달의 시기가 걸리지만 그 편이 돈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성은 아니었다.

‘어차피 여기엔 유니크나 레어 던전도 없어.’

보상금이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다. 게다가 협회가 관리조차 하지 않는 던전들이 꽤 있다. 그것들만 공략해도 집값이 훅 오를 것이다.

‘목적은 집값에만 있는 게 아니지만.’

은성은 생각을 곱씹으며 으슥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까지 등 뒤에서 추격자들의 존재가 느껴졌다.

‘새끼들, 귀엽네. 열 명 정도인가?’

나름 기척을 숨기는 것 같은데 우스웠다. 저마다 살기를 풀풀 풍기는데 모른 척 하는 게 더 힘들었다.

은성은 일부러 인적이 드문 산 쪽으로 향했다. 적당히 CCTV와 차량들이 없는 산길의 둔덕에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일말의 경고 없이 탄지공을 사용했다.

파밧!

적절히 위력을 조절했다. 그것만으로도 나무 뒤에 숨었던 누군가가 으아악! 소리를 내며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나와.”

은성의 최후통첩 같은 협박성 발언에 그제야 추격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친 새끼. 도대체 무슨 배짱이냐. F급 따위의 길드마스터가 감히 폐던전을 낙찰 받아?”

하지성과 그 패거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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