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낙찰 못 받을 건 또 뭐냐.’
속으로 어이없는 반문을 하면서 은성은 손을 풀었다.
순탄한 인생을 살고 싶은데 방해하는 놈이 이다지도 많다.
애초에 경매는 순수한 재력으로 매물을 낙찰 받는 것.
그 외의 출처불분명한 규칙은 지킬 필요가 없다. 단체만의 관행은 단체에 속한 자들에게만 부여되는 것이다.
은성은 조합에 가입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의 규칙을 지킬 필요도 없었다.
‘그나저나 다른 쪽에선 안 왔나보네.’
은성은 자신을 쏘아보던 여자를 되뇌었다. 경매장에 있던 대부분의 강자들이 모두 올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은성의 예상과 달리 이루나 쪽에선 석연치 않은 점을 들어 그를 따라오지 않은 듯했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낙찰 받은 던전들 모두 토해내면 목숨만은 살려준다.”
하지성이 아공간에서 커다란 양손도끼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은성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 급기야 대답대신 주먹을 휘둘렀다.
콰지직!
은성의 옆에 서 있던 멀쩡한 나무가 단숨에 두 동강이 났다.
지켜보던 하지성의 눈 밑이 파르르 세차게 떨렸다.
“기껏해야 이루나의 진동토템 쪽 끄나풀 같은데 너 그런 식으로 굴면 세상 하직할 수도 있다.”
그들은 아직도 은성의 정체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길드마스터들이 신규길드원을 직접 영입하는 편이 아니었으니 은성의 얼굴을 모르거나 잊을 법도 했다.
“아직 새파랗게 젊은 놈이, 어디서 온 뜨내기인지 모르겠지만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르란 말 못 들어봤나.”
“법은 지금도 부족함 없이 충분히 지키고 있어. 위법은 지금 너네들이 하는 이런 거고.”
은성이 무심한 어조로 대꾸했다. 하지성은 커다란 양손도끼를 흔들어 보였다. 사람 몸집만한 도끼는 한눈에 봐도 일반적인 아이템이 아니었다.
“길드를 만들었으면 지역 길드조합에 가입하고 그다음 순서를 지켜서 폐던전 경매를 하는 게 원칙이다. 너처럼 위아래 구분도 없이···.”
“거참, 더럽게 말 많네.”
공통적인 특징일까.
천마신교의 놈들도 혓바닥이 엄청 길었던 것 같은데.
파앗!
은성의 손끝에서 한줄기 빛이 불을 뿜었다. 탄지공이었다.
불시에 날아든 빛줄기는 하지성에게 그대로 쏘아져 나갔다. 질겁한 그가 간발의 차이로 피하자 뒤에 서 있던 애꿎은 다른 길드마스터가 대신 맞았다. 공교롭게도 아까 맨 처음 허벅지를 맞은 놈이었다.
“갸아아아악!”
하지성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시뻘겋게 물들었다.
“말이 안 통하는 놈이군.”
차르릉!
하지성이 손짓하자 주변의 다른 길드마스터들이 저마다 아공간에서 무기를 꺼내들었다. 그 중 세 명은 미리 꺼내놓은 길쭉한 몽둥이를 쥐며 마법시전 자세를 취했다. 희끗한 머리털을 보고 등산용 막대인 줄 알았는데 마법 지팡이였다.
“덤비면 죽어요.”
은성의 나직한 경고에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어코 선을 넘었다. 영롱한 보랏빛 구체와 시뻘건 불덩이가 은성을 향해 날아왔다. 심지어 긴 투창과 화살 세례도 함께였다. 저마다 개성 있는 무기들로 은성을 일시에 공격한 것이다.
콰과과과광!
강렬한 굉음이 연이어 숲속전역을 울렸다. 은성이 서 있던 곳에서 자욱한 모래먼지가 피어올랐다.
경매가 끝난 폐던전은 해당 길드마스터가 공략하지 않은 채 사망하면 재경매를 실시하기 마련. 그들은 그 사실을 알고 은성을 죽일 생각으로 공격한 것이다.
‘미련한 놈. 그러니까 말을 들을 것이지.’
이러면 시체조차 남지 않는다.
경험에서 우러러 나온 행동이었다.
“해치웠나?”
양손도끼를 어깨에 짊어진 채 하지성이 말했다.
하품을 쩌억하며 사람 목숨을 거둔 것에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모습.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먼지가 서서히 걷히면서 검은 인형이 모습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어?”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파앗!
“캬아아아아악!”
새된 비명과 함께 옆에 서 있던 길드마스터가 볼품없이 쓰러졌다. 다급히 확인해보니 정강이에 주먹 만한 구멍이 뻥 뚫린 채 오른발이 완전히 찢겨져 나간 상태였다.
“뭐, 뭐야!”
“이런 씨발! 보통 놈이 아니잖아!”
심해트롤길드를 위시한 조합원들이 경악해서 소리쳤다.
이곳에 있는 인원들은 전원이 한 단체의 수장, 길드마스터들.
최소한 B급 헌터이거나, 그것과 견줄만한 능력이 있는 자들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공격을 맞고도 멀쩡히 반격을 했다고?
“씨발! 다 쫄지마! 어차피 놈은 한 명입니다!”
놀란 하지성이 숨을 훅 들이켜며 소리쳤다. 모래먼지가 완전히 걷히자 은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입고 있는 옷가지들이 찢겨져 넝마가 된 모습. 그러나 타격은 거의 받지 않은 듯 사지가 멀쩡했다.
“확실히 마력을 올렸더니 마법도 이제 덜 아프네. 퉤!”
바닥에 침을 뱉으며 은성이 이를 악 물었다.
그가 한발자국 다가서자 길드마스터들이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본능적으로 좋지 않은 분위기를 읽은 것이다.
“하지성 마스터님.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저 사람 저희보다 훨씬 강한 헌터인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씨발. 그래서 뭐요? 지금 와서 그만 두자고? 놈은 한 명입니다. 저희는 아직 9명이나 있고. 아무리 강해도 다굴에는 장사 없어요. 좆까는 소리 하지 말고 저 새끼 죽이는 것에나 집중합시다!”
누군가의 정확한 판단에 하지성이 부정하며 소리쳤다.
맞는 말이었다.
제 아무리 강해도 다구리에는 장사가 없다는 것.
하지만 은성은 단순히 몸이 우람하고 힘이 센 장사가 아니었다.
사투의 끝에 마왕도 봉인한 용사. 그러니 머릿수를 앞세워도 부족했다. 생존의 측면에서 보자면 지금이라도 은성의 자비심에 기대는 게 훨씬 승산이 있는 것이다.
“──.”
다가서던 은성이 무언가 희미한 소리를 듣고 고개를 휙 돌렸다.
‘헛짓거리를.’
지팡이를 들고서 마법을 영창 하는 마법사들이 보였다. 인원은 총 세 명. 보통 고차원의 마법 스킬에는 영창이 필수다. 당연히 은성은 얌전히 마법을 맞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팟!
은성의 두 다리가 땅을 박차고 마법사들에게로 쇄도했다. 그는 빛과 같은 속도로 돌진한 다음 즉시 강권을 연타했다.
뻐억! 퍼억! 뻐걱!
“갸아아악!”
“커헉!”
“꺼걱!”
마법사들이 저마다 비명의 하모니를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맞은 부위 별로 팔과 어깨, 턱뼈가 기괴하게 꺾인 걸로 보아 당분간 위협은 되지 않을 듯했다.
“마법은 좀 아파서···.”
은성은 온몸의 관절을 풀며 고개를 돌려 하지성을 쳐다봤다.
그것만으로도 하지성의 어깨가 담이 걸린 듯 경직됐다.
‘이 무슨 씨발···! 저게 말이 돼?’
방금 그 엄청난 속도의 공격을 무리에서 가장 강한 하지성조차 식별하지 못했다. 도대체 얼마나 레벨 차이가 심하다는 건가.
‘일단 우두머리부터···.’
경악하는 하지성을 묵살하고 은성은 단숨에 달려갔다.
놀란 하지성이 양손도끼를 휘두르며 저항했다.
“이, 이 씨발 새끼야! 꺼져!”
거대한 도끼가 위협적인 자세로 허공을 찢어발길 듯 휘둘러졌다. 그러나 은성에게는 세 살 아기의 재롱잔치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뻐억!
“캬아아아악!”
턱을 얻어맞은 하지성이 두 눈을 부릅떴다.
분명 주먹에 맞았는데 예리한 칼에 맞은 것처럼 아래턱의 감각이 완전히 상실됐다.
마치 잘린 것처럼!
은성은 뒤이어 로우킥으로 녀석의 정강이를 찢어발겨버리고 강권으로 양팔을 난타했다. 그리고 마지막을 장식하는 붕권!
뻐억!
“끄어어어억!”
명치를 맞은 하지성이 일직선으로 곧게 날아가 나무 밑동에 처박혔다. 그의 몸은 허물어져 있었다. 사지의 뼈가 으스러지자 연체동물처럼 흐물흐물 퍼진 것이다.
“하지성 마스터님! 이 씨발 새끼가!”
“죽어!”
얻어맞은 하지성을 대신해 뒤에서 다른 길드마스터들이 창과 검을 휘둘러 왔다. 몸을 돌린 은성은 맨주먹으로 반발했다. 허공에서 양 주먹과 무기들이 각각 맞부딪혔다.
챙강! 파가각!
“허······.”
“이런 미친!”
무기의 소유자들은 경악했다. 할부도 채 끝나지 않은 4천만 원과 5천만 원짜리 무기들이 조각조각 부서지며 산화했다. 그것은 그들과 은성의 능력치 차이가 엄청나다는 증거였다.
‘이, 이건··· 미친놈이다. 맨손으로 상급 레어 무기를 부술 정도라면···.’
꿀꺽.
목젖 뒤로 공포의 감정이 침과 함께 삼켜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도 두 눈을 한껏 치켜떴다.
그들은 그제야 마주한 적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그들의 능력으로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에 지나지 않았다. 승산이 없었다는 거다.
‘씨발, 어쩐지 감이 안 좋더라니. 갑자기 튀어나온 F급 길드가 그런 자금력을 그냥 가지고 있을 리 없잖아.’
‘기껏해야 이루나의 진동토템 앞잡이인 줄 알았는데···. 씨발.’
계란이 백 개가 있든, 천 개가 있든 혹은, 수만 개가 있어도 바위를 부술 수 있을까. 운이 좋으면 좁쌀 만한 흠집을 내는 게 고작이다. 그 정도로 아득한 차이인 것이다.
‘좆 됐다.’
모두가 머릿속에 공통된 상념을 떠올릴 때, 눈치 빠른 누군가는 재빨리 몸을 틀고 땅을 박찼다. 그는 아공간에 무기를 집어넣으며 동료를 팔아치우는 주도면밀함도 잊지 않았다.
“씨, 씨발! 난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성 그 새끼가 혼자서 꾸민 짓이에요!”
그는 그렇게 변명하며 빠른 발걸음으로 산 둔덕을 내려갔다.
당연히 가만 놔둘 은성이 아니었다.
파밧!
손끝에서 튀어나간 탄지공이 그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갸아아아아아악!”
경사진 곳에서 한쪽 다리에 구멍이 뚫리자 그는 볼썽 사납게 고꾸라져 수십 바퀴나 지면을 굴렀다.
“죽고 싶은 사람?”
은성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어중간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치 사람 목숨 따윈 신경도 쓰지 않는 담담한 어조.
단지 말만 했을 뿐인데 질겁한 사람들이 순식간에 아공간에 무기를 집어넣은 채 항복의사를 표출해왔다.
“죄, 죄송합니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아니··· 저는 사실 공격할 마음이 전혀 없었고, 하지성 저 새끼가 모두 다 꾸민 짓입니다. 정말입니다!”
“제가 방금 전에 그만두자고 한 사람입니다. 저는 진짜 선생님을 공격할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앞 다투어 은성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한쪽 발이 찢겨져 기절한 놈과 해파리가 된 하지성이 그들의 뇌리에 깊숙이 각인됐다.
그들은 사지 멀쩡히 살아남고 싶었다.
“저희들이 높으신 헌터분인 줄 모르고 괜히 까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한번만 용서해주세요.”
“집에 제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병아리 같은 처자식들이 있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도 딸애가 하나 있습니다. 집에서 저만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어요.”
“저, 저도요! 저는 늙으신 어머니께서 홀로 집에···.”
새끼들, 이제 가족들을 팔기 시작한다.
이러면 또 마음 약해지는데.
“뭐··· 저도 경우 없는 놈은 아니니까.”
은성은 나직하게 말했다. 그 말에 길드마스터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반색하며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래도 피해보상비는 받아야겠는데··· 한 가지 제안을 해드려도 괜찮습니까?”
“예예, 말씀만 하십시오.”
“목숨만 살려주신다면야···.”
은성의 낯 위로 미소가 스치듯 지나갔다. 사람들은 그것을 호재로 여기고 기뻐했다. 하지만 그것은 천사의 미소가 아니었다.
“목숨 값으로 지금 들고계신 아공간만 내세요.”
비싼 아이템들과 갖가지 재물들이 들어있는, 심지어 아공간 그 자체로 수억 원이 넘어서는 아이템.
기뻐하던 사람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전 재산을 달라고 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아니면 여기서 뒤지시던가.”
은성이 같잖다는 듯이 웃었다.
그것은 악마의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