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택배요.”
“감사합니다,”
은성은 직거래도, 택배거래도 혹은 소량도, 대량도 어느 것 하나 빼지 않고 모두 구매했다.
빨간색 풀, 파란색 풀, 초록색 풀. 커먼과 언커먼 등급의 낮은 던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들이었다.
한 푼이라도 더 벌길 원하는 낮은 랭크의 헌터들을 주축으로 풀들을 쉽게 모을 수 있었다.
‘아까 그 사람 덕에 금방 모았다.’
은성은 방금 전 끝낸 직거래를 떠올렸다.
특이한 헌터 한 명 덕에 필요한 만큼의 수량을 금세 모을 수 있었다.
던전 보스 룸의 풀에 독성이 있다는 걸 깨달은 그는 풀을 갈아서 무기에 발라 독 대신 사용했다고 했다. 그러나 일부 몬스터에게 전혀 통하지 않자 다른 사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고 했다.
‘고마운 사람이야. 덕분에 종류별로 1만개씩은 만들 수 있겠는데···.’
어느새 사무실의 한쪽 구석을 풀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만족스러워진 은성은 시선을 거둬들이고 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받을 물건들은 모두 받는 게 좋겠지. 포션을 만들 사람이 있다면 더 좋겠고.’
몸이 두 개였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애석하게도 하나뿐이었다.
던전을 공략하는 중에도 구매하기로 약속한 약초들을 대신 받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덧붙여 포션을 제작할 사람도.
은성은 바쁜 은애를 대신해 동생 주아랑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오빠, 왜?
아랑이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통신대기 하나는 기가 막혔다.
“아랑아.”
-왜?
“너 바빠?”
-응. 지금 밀린 드라마 보고 있어.
은성은 이해했다. 한가하다는 소리였다.
“네가 도와줘야 할 일이 있어. 당연히 수고비로 용돈은 줄 거고···.”
-뭐, 용돈? 지금 사무실이지? 당장 달려갈게.
용돈이라는 말에 아랑이 반색하며 소리쳤다. 수화기 너머로 들뜬 목소리가 그대로 전해져왔다.
아랑은 그로부터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길드사무실에 도착했다.
“헉헉, 오빠 뭐야? 도와줘야할 일이?”
아랑이 씩씩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두꺼운 코트 아래, 짧은 돌핀팬츠와 검은 티셔츠로부터 폭발적인 몸매가 고스란히 엿보였다.
“내가 며칠 간 자리를 비울 건데 그동안 물건 좀 대신 받아줘.”
“물건?”
땀을 닦던 아랑이 의아해서 되물었다.
어떤 아이템에도 초연하던 오빠가 받을 물건이 있다고?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일까.
“돈은 미리 냈으니까 물건만 받아주면 돼. 저기 풀들 보이지? 저런 것들이야.”
은성이 사무실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엔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의 풀들이 겹겹이 탑처럼 쌓여 있었다.
“뭐야. 저거 잡풀이잖아.”
아랑은 급히 실망하며 보통 헌터들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풀. 줘도 안 가질 쓰레기를 돈 내고 받는다니.
아랑이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특이한 거라곤 풀밖에 없었다. 장비와 마석 등의 전리품들은 이미 분류해놓은 뒤였다.
“다 쓸데가 있어서 그래. 따라와 봐. 보여줄 테니까.”
은성은 말로 하기 보단 보여주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탕비실로 그녀를 이끈 은성은 회생귀로 물약을 만들 때와 똑같이 재료들을 세팅했다.
커다란 냄비, 가시 구렁이의 사체, 재료로 쓰일 빨간색 약초.
은성은 냄비에 물을 가득 붓고 가시 구렁이의 사체를 끓였다. 아직도 냉동 보관된 가시 구렁이들이 많았기에 재료는 부족함이 없었다.
“뭐야, 이걸 왜 끓여?”
“잠자코 보고만 있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공기방울이 부글부글 끓어오르자 은성은 빨간색 약초를 집어넣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하얀 가시 구렁이의 사체가 보라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독은 다 빨아들였고.’
보라색으로 물든 가시 구렁이의 사체를 빼내고 은성은 홀로 남은 빨간색 약초를 마저 끓였다. 흐물흐물 녹아내린 약초는 풀처럼 끈적끈적해지더니 급기야 완전히 물에 녹아 없어졌다.
‘됐다.’
은성은 그것을 투명한 유리컵에 따라 붓고 아랑에게 흔들어 보였다.
붉은 색깔의 걸쭉한 액체.
유리컵 안의 내용물은 힐링포션이었다.
아르카디아에서 배운 제작법 그대로 은성이 제작한 것이다.
“뭐야, 이게?”
아랑이 의아한 얼굴로 기묘한 액체를 뜯어봤다.
“힐링포션이야.”
“힐링포션이라고···?”
아랑이 어처구니가 없어 멀거니 은성을 쳐다봤다. 은성의 표정을 관찰하며 말의 진위여부를 확인했지만, 그럴수록 고개가 갸웃 숙여졌다.
‘장난이나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녀도 힐링포션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직접 제작한다는 말은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다. 지구의 모든 힐링포션들은 특수한 성역, 전사의 성소에 있는 샘물로 만들어지기 마련이었다.
샘물의 양은 한정돼 있어서 힐링포션의 가격은 무척 비싼 편에 속했다. 샘물을 독점하고 있는 길드에선 그마저 물에 희석해서 판매하여 포션의 등급을 세분화시켜 나눴다.
“말도 안 돼. 이게 어떻게 힐링포션이야?”
의아한 아랑이 은성을 추궁했다.
은성은 대답대신 그녀를 향해 손바닥을 펴 보였다.
새하얗게 드러난 손바닥. 손톱을 세운 은성은 일직선으로 손바닥을 긁었다. 하얀 손바닥 위에 새빨간 생채기가 고스란히 생겨났다.
“이제부터 잘 봐.”
은성은 손바닥 위에 유리컵 안의 액체를 부었다.
촤르륵!
그러자 손바닥위의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었다. 급기야 생채기가 없어지더니 상처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는 게 아닌가.
표정 없던 아랑의 얼굴이 일순 경악으로 물들었다.
“뭐야! 진짜 힐링포션이잖아!”
말도 안 됐다. 정말로 힐링포션을 제작한 것이다.
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 힐링포션은 분명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제작할 수 있다는 건 완전히 다른 말이었다.
‘미쳤어!’
너무도 기가 막혔다.
이게 상용화가 된다면 돈을 쓸어 담는 건 시간문제였다.
심지어 기존의 비싼 힐링포션과 달리 제작에 부담도 없었다. 치료효과의 수준에 의문이 들었지만 적당한 값에 팔기만 한다면 불티나게 팔릴 것은 분명했다.
아랑이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그녀의 물음에 은성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제작법을 그대로 설명했다. 덧붙여 빨간색 약초대신 파란색과, 초록색을 넣으면 각각 마나포션과 피로회복포션을 만들 수 있다는 것마저도.
“약초와 가시 구렁이의 시체를 많이 넣고 끓일수록 농도가 걸쭉해져서 치료효능이 높아져.”
“허···.”
“내가 없는 동안 제작 좀 부탁할게. 색깔로 등급을 구분 지을 수 있으니까 대충 알아서 만들어줘.”
은성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단속도 시켰다. 은성과 마찬가지로 억척스럽게 자란 아랑은 옛날부터 입이 무거운 편이었다. 정보가 엄한 곳에 새어나갈 위험은 전혀 없었다.
“와, 진짜 대박이다. 이건 거의 혁명이자 혁신인데···. 세계의 발견 아냐? 이게 상용화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목숨 걱정 안 하고 헌팅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목숨의 부담감이 덜어질수록 헌터들의 질적 수준은 엄청나게 향상될 것이다.
‘어쩌면 헌터들 간의 격차도 훨씬 줄어들 수 있겠어.’
은성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아랑의 생각은 정확했다.
힐링포션의 값이 비싼 탓에 높은 랭크와 낮은 랭크의 헌터 간에는 격차가 더욱 심한 편이었다. 높은 랭크의 헌터들은 돈이 많아서 목숨의 담보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고, 낮은 랭크의 헌터들은 가난하다보니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 낮은 랭크의 헌터들은 보통 자신의 수준보다 하향평준화해서 헌팅을 하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돈이 많이 벌려도 생존욕의 본능이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게 만들었으니까.
“그럼 부탁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의 머리를 쓰다듬은 은성은 미리 준비한 배낭을 메고 사무실을 나섰다. 포션들은 이미 넉넉하게 제작해서 준비한 뒤였다.
멀어져 가는 은성의 등을 보고 아랑은 토끼처럼 맑은 눈동자를 치켜떴다.
‘굉장해.’
은성은 진즉에 사라졌지만 그녀는 은성이 사라진 방향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 * *
“실례지만 동행 분들은?”
“혼잡니다.”
“예···?”
얼빠진 경비를 뒤로하고 은성은 던전의 가림막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솔플을 한다니 자살자를 보는 것 같은 아련한 시선이 뒤따랐다.
“으음··· 그럼 차폐막을 10초간 개방하겠습니다. 빠르게 입장해주십시오.”
경비의 말에 은성은 고개를 끄덕이고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수원시 광교산 근처의 던전.
낙찰 받은 던전 중 유니크 던전을 가장 먼저 클리어할 생각으로 찾아온 참이었다.
‘가장 귀찮은 것부터 빨리 처리해야지.’
새하얀 빛이 잠식되고 주변의 풍경이 서서히 인식되자 가장 먼저 뾰족뾰족한 한기가 느껴졌다.
발을 내딛고 고개를 치켜들자 천장의 고드름들이 보였다.
‘냉장고 스타일인가.’
뻥 뚫린 천장의 구멍너머로 햇빛이 넓은 공동을 비추고 있었고 군데군데 얼어붙은 빙벽들이 사방을 메우고 있었다.
은성은 이리저리 주변을 훑다가 고개를 갸웃 숙였다.
무언가 이상했다.
‘뭐야? 왜 길이 없어?’
분명 마법진으로 막혀 있어야할 길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저 넓은 공동 하나뿐이란 거다.
은성이 황당해서 멀거니 서 있으니 뒤늦게 세계의 목소리가 그를 맞이했다.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유니크 등급의 던전입니다. 최초발견 토벌 퀘스트를 부여받습니다.>
<1인 플레이입니다. 던전 클리어시 특수보상을 지급받습니다.>
역시나 보통 던전과 달랐다.
[보스 러쉬 던전]
등급 – 유니크
적정 레벨 - ???
적정 인원 – 5인.
설명 - ???
추가 보상 - ???
1인 추가보상 - ???
‘굿. 잘 됐네.’
떠오르는 빛의 글귀에 맞서 은성은 가볍게 웃었다.
방이 하나 뿐인 던전.
갖가지 보스 몬스터들이 연속으로 쏟아져 나오는 던전.
이름하여, 보스 러쉬 던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