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드래곤.”
새하얀 거체가 입을 쩌억 벌리고 표효 했다. 그것만으로도 천장에 균열이 생기고 고드름들이 떨어졌다. 빙판이 깨지듯 천장이 모두 부서져 내리자 따가운 햇살이 공동전역을 내리쬐었다.
‘마룡인가.’
은성이 놈을 노려보았다.
기본적으로 드래곤들은 약한 종족이 아니었다.
태생부터 압도적인 강함으로 생태계 피라미드의 정점에 서 있는 존재.
지구에 있는 수많은 던전들은 마왕이 이곳 세계를 잠식하기 위한 일종의 테라포밍이었다. 상위계층의 페널티를 받아서 던전의 형태로 나왔다곤 하나 명백한 악의 그 자체였다.
그러니 정상적인 드래곤이라면 던전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놈들은 세계의 균형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벽에 똥칠할 때까지 오래 사는 놈들이니까. 기본적으로 중립 아니면 선한 부류다.
-내 레어에 침입하다니. 겁도 없는 인간이로구나.
드래곤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말했다. 괄괄한 목소리가 귓가를 관통했다.
‘정신은 멀쩡한 것 같고, 자의로 마왕 쪽에서 일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놈의 몸 전체를 훑어보자 한 가지 의문이 스쳤다. 이상했다. 이 놈 드래곤치고는 너무 작다. 대략 11에서 12미터 정도?
‘아까 거대 백곰이 천장에 닿을 듯 말 듯 했는데 그 놈보다 조금 더 큰 정도네.’
머리가 덜 여문 어린 드래곤일까. 생각하고 있는데 뾰족한 냉기의 창이 수십 개가 날아왔다. 아이스 스피어였다.
펑! 펑! 펑!
손가락을 튕겨 탄지공으로 대항하고 드래곤을 노려보았다.
드래곤이 감탄했다.
-호오, 인간치고는 제법이구나.
철저히 위에서 깔아보는 말투.
은성은 이해했다. 대부분의 놈들은 자기 수준에서 상대를 파악한다. 드래곤은 지금 상식수준에서 생각하고 있는 거다.
“그럼 비상식을 보여줘야지.”
탄지공을 손가락에 모았다. 거대한 마력의 파동이 손끝에 모였다. 주변의 기류가 일렁이자 드래곤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잔재주를 부리는 구나. 인간.
드래곤이란 놈들은 타고난 수명 탓에 무료함의 반대급부로 호기심이 왕성했다. 때문에 오히려 허무하게 목숨을 날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피잉!
빛줄기가 쏘아져 나가자 드래곤이 심드렁한 얼굴로 실드를 구사했다. 거체 앞에 커다란 육망성의 마법진이 펼쳐졌다. 그러나 새하얀 빛줄기는 실드를 너무나도 쉽게 부쉈다.
빠지직!
-으응···?
그러고도 빛줄기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돌진했다. 놈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마치 불장난을 하다가 들킨 아이 같은 표정이다.
-어억···, 뭐야!?
드래곤도 얼빠진 소리를 내는구나.
빠지지직!
-끄아아아악!
그래도 제법이다. 오른팔을 잘라낼 생각으로 탄지공을 날렸는데 놈은 순식간에 몸을 틀어서 날개 하나로 표적을 바꿨다.
덕분에 놈의 오른쪽 날개는 텐트 장막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뻥 뚫려 있었다.
“호오, 드래곤치고는 제법인데.”
은성이 비아냥거리자 드래곤이 앓는 소리를 내며 어처구니없어 했다.
-크으으으··· 감히 인간 주제에···.
새끼, 같잖네.
아직도 입이 살아있다.
물리치료로 노선을 갈아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드래곤이 마법을 사용했다.
-──!
마치 초음파 같은 소리. 동시에 녀석의 손에서 영롱한 기운이 쏘아져 나왔다. 기운은 일직선으로 날아와 은성의 머리를 정확히 관통했다.
‘뭐야, 이거?’
순간 머리가 띵했다. 차가운 음식을 급히 먹으면 이런 느낌일까. 그러나 별 건 없었다.
<정신계 마법 저항에 성공했습니다.>
아, 같잖은 수작인가.
뒤늦게 깨닫고 웃었다.
은성이 웃자 드래곤이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뭐, 뭐, 뭐야···! 인간 주제에, 어떻게 버틴 거냐···!
심지어 말까지 더듬었다.
은성은 관자놀이를 톡톡 두들기며 대꾸했다.
“내가 더 놀랍다. 어린 놈 같은데 정신계 마법까지 사용하다니.”
-이, 이익!
질겁한 드래곤이 그제야 밑천을 모두 꺼내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커다란 우박이 쏟아지고 땅에선 뾰족뾰족한 가시가 솟구쳤다. 눈앞에선 불덩이와 얼음덩이가 한 되 뒤섞여서 날아왔다. 얼음불꽃 화살인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번개도 합쳐져 있었다. 트리플 조합 마법이다.
-엘라스트라!
심지어 정령까지 소환했다. 아직 머리가 덜 여문 놈답게 정령왕이 아닌 최상급 정령에서 그쳤지만 말이다.
뻐억!
“갸아아아악!”
그러나 소환된 최상급 정령은 은성의 강권 한 방에 몸이 펑 터지며 기화해버렸다. 순식간에 역류한 마력이 드래곤에게로 고스란히 되돌아갔다.
-캬아아아아아악! 쿨럭!
피를 울컥 토한 드래곤이 황당해서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꼭 동네 똥 강아지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드래곤은 피도 비싼데.’
은성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드래곤이 피를 꿀꺽 삼키고 말했다.
-너···, 너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구나.
그걸 이제야 알았나.
“보여줄 건 더 없나?”
약한 상대의 바닥을 확인하는 건 즐겁다.
은성이 묻자 드래곤이 부들부들 떨었다.
은성은 마음속으로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테이밍을 할까, 갈아버릴까.’
드래곤은 모든 부위가 영약이다.
뼈부터 시작해서 가죽, 피, 비늘, 눈알, 뿔, 각종 장기들.
드래곤 하트만 해도 잘 달여서 먹으면 귀찮게 레벨 업 할 필요도 없이 마력 능력치를 손쉽게 올릴 수 있다.
심지어 드래곤의 소중한 부위를 달여 먹으면 물리적인 남성의 상징도 커진다. 침대 위의 절대자가 될 수 있는 거다.
‘아, 덜 자란 놈이라서 적게 오르려나.’
하긴 그러니까 유니크 난이도에 있는 거지.
-가, 가까이 오지 마!
은성이 다가가자 드래곤이 계집애 같은 소리를 냈다. 고민을 하고 있는데 드래곤이 또 다시 초음파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
이번에는 뭘까 쳐다보니 주변의 시체들이 슬렁슬렁 일어서기 시작했다.
‘언데드로 부활시킨 건가?’
지금까지 죽였던 보스 몬스터들이 일제히 되살아났다. 몇 놈들은 시체가 증발해서 없었지만 대부분이 살아생전과 똑같이 멀쩡해졌다.
드래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각종 버프마법들을 구사했다. 붉은 기운과 푸른 기운, 노란색 기운들이 몬스터들에게 흡수됐다. 버프를 받은 몬스터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크취이이익!”
“크오오오!”
“우와아아아아!”
“배고프다! 인간··· 고기··· 맛있겠다!”
지켜보던 은성이 웃었다.
‘새끼. 고맙게도 경험치를 또 주네.’
그렇게 생각하며 나서려다가 문득 깨달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자신에게도 똘마니가 있었다.
‘마나 골렘이 있었지.’
은성이 시동어를 외우자 마나가 뭉텅 사라지고 눈앞에 미지의 기운이 소용돌이 쳤다. 생겨난 기류는 주변의 박살난 얼음파편들을 끌어 모으더니 이내 사람의 형체가 됐다.
-큭큭큭. 네 소환물은 쥐새끼만하구나.
드래곤이 은성의 마나 골렘을 보고 비웃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탄지공에 마나를 많이 소모해서 소환하는데 마나를 많이 쓰지 못 했다. 소환 마법은 일시적인 마나소모도 크고 유지하는 것에도 소모량이 극심했다.
‘마나를 많이 부울 수록 강한 놈이 된다고 했으니까. 존나 부어보자.’
은성은 결심하고 배낭을 뒤졌다. 내친 김에 마나포션을 스무 개 정도 꺼냈다. 포션을 마시면서 회복된 마나를 골렘에 모두 붓자 골렘의 덩치가 훅 커졌다.
쳐다보던 드래곤의 눈도 점점 커졌다.
“이래도 쥐새끼냐?”
-······.
포션을 열 개 정도 마셔서 포션중독의 위험이 떠오르자 마나 골렘의 덩치는 거대 백곰과 비슷해졌다. 은성이 손짓하자 골렘이 달려 나갔다. 골렘의 거대한 얼음 주먹이 되살아난 몬스터들을 공격하자 몬스터들이 피를 쏟으며 쥐포처럼 납작해졌다.
빠직! 빠각! 뽀각! 푹찍!
“갸아아악!”
“캬아아악!”
“구아아아악!”
은성은 연기로 변하는 몬스터들을 바라보며 메마른 입술을 적셨다. 언데드로 변한 탓에 죽으면 시체가 그대로 사라졌다.
“경험치는 얻어도 시체들은 못 얻겠네. 아공간을 비우고 온 이유가 없잖아.”
마나 소모량이 극심하다는 단점을 빼고 골렘의 위력은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슬슬 포션중독이 엄습하자 은성은 들고 있던 포션을 마저 마시고 소환을 해제했다.
‘위력 대비 가성비가 너무 안 좋아.’
레벨 업을 해서 마력이 완전히 회복됐음에도 마력이 부족했다. 효율이 구린 것이다. 은성은 남은 몬스터들을 단숨에 극락왕생 시키고 드래곤에게 다가갔다.
드래곤이 침을 삼켰다.
-어, 어떻게···!
“이제야 얼굴 표정이 좀 봐줄만 하네.”
생각했는데 드래곤이 갑자기 숨을 훅 들이켜더니 브레스를 쏟아냈다. 검은 악취가 사방을 메웠다.
“윽.”
살이 녹아내려서 핏방울이 맺히고 엄습하는 차가운 한기 탓에 상처가 얼어붙었다. 은성은 빠른 걸음으로 뛰어서 브레스를 피했다. 계속 맞아주다간 흉터까지 생길 것 같았다.
‘그래도 드래곤은 드래곤이구나.’
은성은 땅을 박차 녀석을 향해 곧장 쇄도했다. 드래곤이 경악할 틈도 없이 비늘을 타고 올라가 턱밑에 그대로 주먹을 꽂아 넣었다.
뻐억!
-갸아아아아악!
턱뼈가 으스러지고 사방에 피가 튀었다. 고통에 울부짖은 드래곤이 마법을 마구 난사했다. 그러나 은성은 조금도 맞아주지 않았다. 재롱 잔치를 보는 것도 처음에만 즐겁지 나중에는 따분했다. 강권과 붕권으로 연달아 드래곤의 몸을 타격하니 두꺼운 비늘이 깨지는 대신 내부에 충격이 전해졌다.
드래곤이 울부짖었다.
-캬아아아아악! 아파! 아프다고!
몸 내부가 파괴되는 고통에 드래곤이 그레이트 실드를 펼쳤으나 은성의 주먹에 속절없이 깨졌다. 드래곤은 황당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야,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우으으으으···.
“드래곤도 처 맞아서 죽으면 고기육질에 영향이 있나?”
-······.
순전히 호기심이었다. 하지만 드래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거대한 불덩이가 날아왔다. 은성은 피하기도 귀찮아 주먹으로 내쳐버렸다.
파각!
이등분 된 불덩이는 은성을 지나치고 곧 사라졌다.
은성은 보답으로 드래곤의 다리에 로우킥을 선사했다. 드래곤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넘어졌다. 눈높이가 얼추 맞아떨어지자 은성은 녀석의 아가리 부근으로 갔다. 적당한 크기의 송곳니를 발견한 그는 강권으로 때려 부쉈다.
뻐걱!
거대한 이빨이 허공을 날았다. 드래곤이 경악해서 두 눈을 치켜뜨자 만족한 은성이 뽑힌 송곳니를 주워들고 드래곤의 비늘을 베어봤다. 역시 잘 베어졌다.
“이참에 확인해보면 되지.”
-아, 안 돼! 제발!
드래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몸을 일으키려는 녀석의 뒷목을 찌르고 은성은 등을 꾹꾹 눌러 밟으며 단숨에 꼬리로 향했다.
척추가 마디마디 부서지자 드래곤이 일어서지 못했다. 은성은 주먹으로 꼬리를 수십 차례 두들기고 송곳니로 꼬리 끝을 베어냈다. 잘려진 꼬리가 갓 낚은 연어처럼 펄떡펄떡 뛰었다.
“육질에 영향 없네.”
단순한 결과였다.
그때 드래곤이 또 초음파 같은 소리를 냈다. 따뜻한 기운이 녀석의 몸 전신을 감쌌다. 등 위에 서 있던 은성도 녀석의 실수인지 그 기운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회복 마법인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자세히 보니 잘린 꼬리 끝 부위가 재생되고 있었다. 삽시간에 흉터 진 곳도 없이 완전히 회복됐다.
‘오호라.’
은성은 좋은 생각이 나서 공중제비를 돌며 땅바닥에 착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