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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의 귀환-28화 (28/127)

# 28

은성이 말했다.

“야.”

드래곤은 완전히 회복됐음에도 차마 덤벼들지 못하고 움찔거렸다. 커다란 파충류의 눈망울엔 공포만이 잔뜩 떠올라 있었다.

“죽을래?”

은성의 물음에 드래곤이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꼴에 아직도 자존심이 남아 있었다. 만족하지 못한 은성이 바닥에 송곳니를 꽂아 넣자 얼음바닥이 쩌저적 갈라졌다.

그제야 드래곤이 빠르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사, 살려줘···.

은성은 확신했다. 이거, 어린 드래곤이다. 적당히 나이가 먹은 드래곤은 힘도 강하지만 자존심도 강하다. 하지만 어린놈들은 힘도 약하고 자존심도 없다. 머리는 똑똑한데 경험이 부족한 탓이다.

-제발 살려줘···!

은성이 반응이 없자 드래곤은 애간장이 탔다. 급기야 몸 전체가 반짝반짝 빛나더니 체구가 작아졌다. 마법을 통해 인간화 모습으로 변신한 것이다.

“제, 제발 살려줘요! 죽기 싫어!”

인간화한 드래곤이 은성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첫 인상이 앞으로의 관계에 영향을 끼친다던데 첫 대면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편견이 산산이 부서졌다.

“암컷이었나?”

은성이 황당해서 쳐다봤다.

새하얀 단발머리의 여자가 은성의 바짓단을 놓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입지 않아 연신 커다란 가슴이 출렁거렸다.

“살려줘! 죽기 싫어!”

“살려주면 뭘 할 건데?”

은성의 물음에 여자로 변한 드래곤이 즉시 대답했다.

“도, 돈을 줄게!”

“돈은 나도 많아.”

심드렁하게 대답하고 은성이 박아 넣었던 송곳니를 뽑아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여자의 작은 어깨가 크게 들썩 거렸다.

“아, 아이템도 많아! 나 이곳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엄청 가지고 있어!”

“재물이 있어도 살 수 없는 게 목숨이야. 재물로는 목숨을 못 구한다는 말 못 들어봤냐?”

드래곤의 눈이 한계까지 치켜떠졌다. 인간화해서 여자로 변신했더니 꽤 귀염상이다.

“제, 제발 살려주세요! 뭐든지 다 할게요!”

“뭐든지?”

“···네, 네! 뭐, 뭐든지!”

은성의 매서운 눈초리에 몸이 파들파들 떨렸지만 드래곤은 꿋꿋하게 말했다.

“맹세하냐?”

“매, 맹세합니다!”

은성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용언으로 맹세해야지.”

“···아, 아아···.”

용언은 절대적인 맹약이다. 드래곤이 용언으로 맹세를 하면 그것을 꼭 지켜야한다. 행한 맹세를 어기면 모든 마나와 함께 그 즉시 소멸하니까. 은성은 그 정도의 성의를 요구하고 있었다.

“싫으면 여기서 뒤지시던가.”

은성이 송곳니를 치켜들자 드래곤이 놀라서 소리쳤다.

“저, 저는 하프 드래곤이에요! 용언을 사용하지 못해요!”

“뭐?”

어린놈인 줄 알았는데 혼혈이었나.

“거짓말.”

“거짓말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드래곤이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자세히 뜯어보니 귀가 엘프처럼 뾰족했다. 은성은 깨달았다. 드래곤과 엘프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것이다.

‘그러면 역시 테이밍 뿐인가.’

김이 팍 샌 은성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좋아, 그러면 테이밍에 성공하길 빌어라. 실패하면 단칼에 죽인다.”

“제발···.”

무릎을 꿇은 드래곤이 기도를 하듯이 두 손을 모았다.

은성은 테이밍을 시도했다.

‘테이밍.’

파아아아!

빛의 글귀가 떠오르며 은성과 드래곤을 감쌌다. 잔잔한 기류가 둘 사이를 맴돌고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공포와 슬픔, 억한 심정이 은성에게 그대로 전해져왔다. 드래곤이 느끼고 있는 감정들이었다. 이질적인 감정에 거북스러움을 느낄 때 즈음 세계의 목소리가 솟구쳤다.

<테이밍에 성공하셨습니다.>

<하프 드래곤 : 벨레케세스 아무레부나 프리드리히 바하젠카티아가 소환수 목록에 추가되었습니다.>

탐색으로도 알지 못했던 세부적인 드래곤의 정보가 나타났다.

이름이 쓸데없이 기네.

“입어.”

은성은 배낭에서 챙겨온 옷들을 꺼내 갈아입고 드래곤에게도 여분의 옷을 던졌다. 드래곤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감사해했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휴지다.”

“휴지요?”

“그래.”

하얀 단발머리가 나풀거리는 걸 보니 당장에 떠오르는 게 휴지밖에 없었다. 다행히 드래곤은 만족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최초발견 토벌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

이윽고 던전이 클리어 되고 보상이 나타났다. 은성은 보상들을 모조리 챙겨서 던전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다른 던전들과 달리 포탈이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보스 러쉬 던전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그래도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얻었으니 훨씬 이득이지.’

아무 생각 없이 휴지와 함께 던전을 나왔다가 보초들이 출입인원이 다르다며 궁시렁거렸지만 문제는 없었다. 그들은 교대근무를 하는 만큼 전 근무자가 실수를 한 것으로 여겼다.

* * *

삼일 뒤 은성은 낙찰 받은 레어 던전 두 곳을 모두 클리어했다. 이제 수원시에는 커먼과 언 커먼, 매직 등급의 던전 밖에 남지 않았다. 다음 목적지를 두고 쉬고 있는데 협회에서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수원시 헌터협회 던전 관리부 김경애 주무관입니다. 실버스타의 길드마스터, 주은성 헌터님 전화 맞습니까?

“예.”

목소리가 낭랑한 여성이었다.

-낙찰 받으신 세 곳 던전 모두 클리어 확인 완료했습니다.

“일 처리가 빠르시네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던전 토벌을 반영해서 이번 달 안으로 B등급 길드로 승급심사 하겠습니다.

“목소리도 상냥하신데. 일 처리도 상냥하시네.”

-고마워요. 아니, 감사합니다.

보상금은 보고체계 탓에 한 달 후, 입장료의 정산비용은 던전이 개장된 뒤에 받는 것을 다시금 확인했다.

클리어한 던전 중 보스 러쉬 던전은 몬스터의 시체나 던전 내부를 확인할 수 없게 돼서 정산비 대신 보상금을 더 받는 걸로 얘기가 끝났다.

‘이 사람들은 24시간 일하는구나.’

협회에서 온 전화를 끊고 은성은 나무 밑동을 의자삼아 퍼질러 앉았다. 어느새 주변은 새까만 어둠. 첩첩산중에 은성과 휴지를 사이에 두고 모닥불만이 타닥타닥 타들어가고 있었다.

“휴지.”

“왜요.”

“배고파.”

은성이 배를 움켜쥐자 휴지가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드래곤만이 소유한 마법의 아공간에서 정체불명의 고기를 꺼내 은성에게 내밀었다.

“여기요.”

“고맙다.”

듀라한으로부터 노획한 장검을 생수에 씻고 고기를 끼웠다. 고기의 비늘을 미리 다 제거한 탓에 장검이 미끄러지듯 잘 들어갔다.

타닥타닥.

모닥불에 고기를 굽자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노릇노릇 고기가 익어갈수록 향기가 더해졌다.

“먹을래?”

“아뇨.”

휴지가 정색했다.

“그래, 아무리 맛있는 고기라도 자기 꼬리를 먹는 건 좀 그렇겠지.”

테이밍을 하기 전 육질을 확인하면서 자른 휴지의 꼬리부위였다. 유니크 던전에 있는 회생귀를 캐면서 버리기 아까워 같이 들고 온 참이었다.

“따로 더 자르진 않을 테니까 걱정 하지마.”

“그건 고맙네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휴지가 다급히 말했다. 소환수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만큼 은성이 그녀의 속내를 모를 리가 없었다.

은성도 경우는 있었다.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그녀에게 무작정 고기를 요구할 생각은 없었다.

‘힘을 보여줬으니 적당히 풀어줘야지.’

드래곤 고기를 우물거리며 먹자 피로가 싹 가시고 기운이 났다. 드래곤 고기는 스태미나 회복에도 좋지만 맛도 일품이다.

은성은 지도를 펼쳐서 가장 가까운 던전을 확인했다.

“이제 어디로 가요?”

휴지가 물었다.

“가장 가까운 곳은 금곡동 부근인데 이쪽을 가야지.”

사전에 답사가 끝난 매직 등급의 던전이었다. 협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폐던전인 만큼 길도 없고 인적도 드물었다. 대격변 이후 사람들이 많이 죽어서 인근에는 공동묘지까지 세워져 있었다.

“빨리 가요.”

“왜 이렇게 재촉해.”

“부하들이 더 필요하시다면서요. 쓸 만한 놈이 없나 빨리 물색해야죠.”

먼저 일어선 휴지가 낑낑거리며 은성을 일으켜 세웠다.

휴지는 은성의 옷에 묻은 흙먼지를 탈탈 털면서 거듭 재촉했다.

“금곡동이 이쪽 방향인가요?”

“그래.”

“얼른 끝내죠.”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납득했다 뿐이지, 여전히 수용하지 못해서 불만이 가득했다.

혼혈이라곤 해도 드래곤은 천성적으로 자존심이 강한 종족.

어린 나이와 은성의 주먹찜질로 다소 누그러졌지만 누군가에게 명령을 받는 건 아직도 익숙하지 못했다.

‘나도 부릴 사람이 필요해. 이건 치욕이야. 이렇게 살 순 없어!’

하지만 테이밍 스킬에 얽매여 주인인 은성에게 까불지 못하니 그 대신 생각한 게 다른 소환수의 존재였다. 그녀는 절실하게 아랫사람이 필요했다. 그간 은성의 성격을 볼 때 대화가 통하고 쓸모가 있으면 테이밍을 할 것이다.

“물.”

고기를 마저 먹고 은성이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여기요.”

“뚜껑.”

“땄어요.”

은성은 휴지가 건넨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뱃속 깊이 청량감이 솟구쳤다.

“아, 잘 먹었다. 이제 가자.”

“네.”

은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휴지가 어부바 자세를 취했다. 은성이 휴지의 등에 타자 휴지가 플라이 마법을 사용해 하늘을 날았다. 매번 장거리 이동은 이렇게 이동하는 편이었다.

“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너 체온이 되게 높아. 이불 덮은 채 선풍기 바람을 쐬는 기분이야.”

은성이 휴지의 등에 업힌 채 시원한 밤바람을 만끽했다.

“텔레포트는 사용 못 한다고 했지?”

“여긴 마나의 농도가 불규칙적이라서 좌표가늠이 안 돼요.”

“그건 아쉽군. 더 빨리는 못 가?”

“인간 형태로는 플라이 마법도 한계가 있어요.”

드래곤으로 변신시킬 수도 있었지만 그건 너무 눈에 띄었다. 게다가 인간화된 상태로 탑승하는 게 승차감이 더 좋았다. 따뜻하고 무엇보다 부드러웠다. 인간화된 휴지는 겉모습이 인간 여성과 완전히 똑같았다.

“그럼 알아서 가줘. 도착하면 깨우고.”

은성이 두 눈을 감고 스르르 잠에 빠졌다.

‘으으으! 라이트!’

휴지가 끓어오르는 속을 삭이고 라이트 마법을 사용해 어두운 구름 사이를 비췄다.

둘은 금세 던전 부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

“던전이 이 근처에 있었는데.”

은성이 휴지의 등에서 내렸다.

밤이 깊어서 사방이 어두워지자 산길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탐색 스킬은요?”

“아직 스킬 레벨이 3밖에 안 돼서 던전은 발견이 안 돼.”

꾸준히 사용해줬는데도 탐색 스킬은 레벨이 잘 안 올랐다. 스킬은 저마다 오르는 속도가 천차만별이었다.

“제가 변신해서 찾아볼까요?”

“아니.”

은성이 기감을 확장해서 주변을 살피자 반원형태의 둔덕들이 보였다. 연고가 없는 무연고자들의 무덤이 있었다.

“여기가 묘지 끝이면 이 쪽인가.”

“무덤이 신기하게 생겼어요.”

은성이 앞장서서 걷자 휴지가 빛의 구체를 앞세우며 종종걸음으로 뒤따랐다. 한참동안 걷다가 은성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왜요?”

휴지가 영문을 몰라서 물었다. 인간화된 그녀는 본래의 모습보다 신체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뭔가 있어.”

“몬스터예요?”

눈에 힘을 주고 집중하자 수풀과 나무들 사이에서 실루엣이 보였다. 일단 형태는 인간의 것이었다.

‘그런데 인간은 아닌 것 같고.’

살펴보니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기엔 덩치가 산만하게 컸다. 팔은 길고 다리는 짧고 몸통과 머리는 거대했다.

근처에는 다른 것들도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는데 사람들로 판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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