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왜?”
“여기 마나농도가 굉장해요. 숨만 쉬어도 마력이 회복되는 것 같아요.”
“아, 그러고 보니···.”
은성도 느끼고 있었다. 차폐막 안과 달리 확연히 마나가 체감됐다.
‘여기서 내공을 쌓으면 수월하겠는데.’
차폐막은 단순히 몬스터를 억제하는 장치가 아니었나?
‘이상하군.’
어쨌든 의문을 지우고 은성은 수풀을 헤치고 걸었다. 대부분의 헌터들은 익숙한 길로 갔지만 은성은 인적이 전혀 없는 곳으로 향했다. 얼마 걷지 않았을 때 몬스터의 기척이 느껴졌다.
“휴지, 너는 사냥하지 말고 부산물 나오면 그거 주워.”
“네.”
은성이 탐색스킬을 사용하자 나무 사이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트윈 헤드 오우거였다.
[트윈 헤드 오우거 LV 311]
“오우거 따위도 311레벨. 확실히 차폐막 안과 수준이 다르네.”
차폐막 안에 있던 몬스터들은 시간이 갈수록 약해졌다. 약한 몬스터는 경험치도 적고 보상도 낮다. 같은 등급의 몬스터라도 무법지대와 차폐막 안의 몬스터가 수준이 차이나는 것은 이러한 이유였다.
“크워어어어억!”
오우거가 크고 굵은 흑 방망이를 휘둘렀다. 일반 사람이 맞으면 단숨에 피떡이 될 위력. 은성은 가볍게 방망이를 잡고 주먹으로 놈의 팔꿈치를 때렸다.
뻐거걱!
“캬아아아악!”
뼈가 으스러지고 핏줄과 근육이 실밥처럼 터져 나왔다. 오른팔이 뜯기자 오우거가 흉성을 터뜨리며 울부짖었다. 오우거는 하나 남은 왼팔을 채찍처럼 휘두르며 반항했다.
“네 팔 돌려주마.”
은성은 뜯어놓은 오른팔을 오우거의 면상에 던졌다. 그리고 그대로 달려가서 로우킥으로 놈의 정강이를 때렸다. 가죽 찢어지는 소리가 숲속 전역을 울렸다.
“갸아아악!”
오우거의 눈알이 한계까지 치켜떠졌다. 정강이뼈가 핏물과 함께 튀어나오자 놈의 한쪽 다리가 저 멀리 날아가 나무기둥에 박혔다. 다리를 잃은 오우거는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쿵!
놈은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버둥거렸다. 한쪽 다리를 잃은 상태인데도 전의를 잃지 않았다. 마치 이성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죽어.”
마지막 일격으로 머리를 깨부수자 더 버티지 못하고 오우거의 거체가 축 쳐졌다. 피부가 선득해서 쳐다보니 몸에 체액이 다 묻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탄지공으로 죽일 걸 그랬다.
‘습관이 참 무서워. 나도 모르게 근접공격부터 나간단 말이야.’
이어서 빛의 글귀가 떠오르고 레벨 업을 했다. 그간 던전 순회공연을 하면서 올린 레벨이 꽤 돼서 이제 394레벨이 됐다. 이번에도 레벨 업 포인트는 모두 마력에 투자했다.
“확실히 무법지대가 경험치를 잘 줘.”
새삼스럽게 느꼈다. 같은 레벨의 몬스터라도 무법지대의 몬스터가 경험치를 잘 준다. 노멀과 헬 수준의 난이도 차이 탓이다.
은성이 말했다.
“씻겨줘.”
휴지가 물의 정령을 소환해 은성의 몸을 씻겼다. 더럽고 냄새나는 오우거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보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훨씬 낫다.
“휴지, 아이템은 어때?”
“중급 마석과 매직 등급의 아이템이에요.”
아이템을 확인해보니 확실히 아르카디아에서 흔히 보던 수준의 아이템이었다. 매직 등급의 아이템임에도 지구의 일반 경매장에 있는 아이템들보다 월등히 성능이 좋았다. 역시 차폐막은 양날의 검인 것이다.
‘사람들을 지켜주지만 반대로 사람들의 성장을 억제하고 있어.’
그 다음부터는 쉬운 쪽으로 사냥했다. 탐색 스킬을 사용해 주변의 몬스터를 확인한 후 마력을 실어 탄지공을 쏘았다. 나무와 수풀을 뚫고 날아간 탄지공은 몬스터들의 머리를 일격에 박살내며 경험치를 선사했다.
“아이템은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가 주워와야지.”
“···에엥?”
“가서 주워 와.”
그렇게 한참을 사냥했다.
마지막으로 몬스터에게 둘러싸여 위기에 빠진 헌터 두 명을 향해 탄지공을 연발하고 은성은 손을 털었다.
슬슬 해질 무렵이었다. 아직은 겨울이라 해가 짧았다.
“슬슬 돌아가야겠네. 곧 있으면 오후 7시야.”
무법지대의 입구는 오후 1시와 오후 7시, 하루에 두 번 열렸다. 은성은 예기치 않게 노숙을 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드디어 돌아간다!”
휴지가 폴짝폴짝 뛰며 기뻐했다. 그녀는 사냥개처럼 아이템을 줍는 지금의 행동이 너무나도 싫었다.
은성이 물었다.
“뭐해?”
“···네?”
“마지막이야. 힘내서 주워 오렴.”
“으으으···.”
휴지가 수풀을 헤치고 아이템을 줍기 위해 달려갔다. 그런데 갈 때는 혼자 가더니 돌아올 때는 혹을 들고 왔다.
“도와주셔서 감사합······ 응?”
한주희가 또 다시 출현했다. 옆에는 다른 여성도 함께였다.
“아주 찰거머리네.”
“내가 그 쪽한테 관심이 있어서 그러는 줄 알아요?”
묻지도 않았는데 또 지랄이다.
“제가 당신들 도와준 건 알고 있죠?”
“아··· 당신이···저희를···.”
“면상이 티타늄 합금급으로 뻔뻔한데.”
쏘아붙이려고 하자 함께 있던 여성이 말을 잘랐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미녀길드 소속의 최소영이에요.”
로브를 깊게 두른 여자였다. 은성은 예감이 좋지 않아 손사래를 치고 몸을 돌렸다.
“네. 그럼 감사인사 받았으니 먼저 가볼게요. 수고하세요.”
막 휴지를 트랜스포머 시켰는데 최소영이 말을 이었다.
“할 말이 있어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동행할 생각은 전혀 없는데요.”
“그게 아니에요.”
은성이 무시로 일관하자 최소영이 물었다.
“혹시 신을 믿으시나요?”
“신?”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신이라는 단어에 은성은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네에. 신이요.”
하지만 이성이 돌아오자 황당해졌다.
뜬금없이 신을 믿냐니? 개떡 같은 소리였다.
“주소 잘 못 찾으셨네. 저는 혐신론자입니다. 신의 존재 자체를 혐오해요.”
“사실 저는 예지를 받았어요. 지금 우리가 만나고 있는 것도 예지 때문이고요.”
이 여자가 낮술을 마셨나.
“예지를 받았다고?”
“네.”
“사이비에요?”
은성은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을 하고 휴지의 등에 탑승했다. 플라이 마법으로 단숨에 멀어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어진 최소영의 말을 듣고 멈칫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귀환자.”
“···뭐?”
귀환자라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사실이다.
그런데 이 여자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아르카디아의 용사.”
“······.”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어요. 주은성. 신께서 말씀해주셨어요.”
이쯤하면 개소리라도 들어줄 가치가 있었다.
은성은 휴지의 어깨를 톡톡 두 번 두들겨 자동주차 시켜놓고 몸을 돌렸다.
“진짜 예지를 받았어요?”
“네. 신에게 계시를 받았습니다. 정확히는 예지 스킬로요.”
은성이 EX스킬로 탐색과 식별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지구의 몇몇 이들도 엑스트라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다. 최소영은 예지 스킬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며칠 전 계시가 있었어요. 구원자가 이곳에 온다고. 부정의 문지기가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구원자라고 했습니다.”
최소영이 한껏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한주희는 팔짱을 낀 채 은성에게 다가왔다.
“이제 알겠어요? 내가 왜 동행하자고 했는지?”
한주희는 실실거리며 은성의 어깨를 쳤다. 지금까지 쌓인 울분을 푸는 듯했다. 얻어맞은 은성은 똑같이 한주희의 어깨를 때렸다. 그녀가 어깨를 붙잡고 바닥을 구르며 악 소리를 내질렀다.
“꺄아아아악! 내 어깨! 왜 때려!”
은성은 어처구니가 없어 대꾸했다.
“먼저 때렸으니까 나도 때리는 거죠.”
“이, 이이익······!”
은성이 물었다.
“그래서요.”
“네?”
최소영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뒷얘기 더 없어요?”
“신께서 점지해주신 유적이 이곳 무법지대에 있습니다. 그곳에 당신과 함께 가라는 계시였습니다.”
“아, 그런가.”
그냥 고생시키기 미안하니까 뭐라도 던져주는 걸까. 하지만 방식이 마음에 안 들었다. 아르카디아에서부터 느낀 거지만 신이라는 작자는 항상 떠먹여주지 않고 찾아서 먹으라는 식이다.
“위치는?”
“저희와 함께 가야 가르쳐 드릴 수 있어요.”
“그럼 됐네. 피곤하니까 이쯤 하죠. 소모적인 만남은 항상 결말이 거지같으니까.”
은성이 너무도 쉽게 손을 털자 최소영이 황당해서 한 번 더 말했다.
“신의 계시에요.”
“신? 좆까.”
최소영이 명함을 건넸지만 은성은 뿌리쳤다. 뒤에서 보고 있던 휴지가 바닥에 떨어진 명함을 주웠다.
“가자. 휴지.”
“네.”
휴지가 트랜스폼을 해서 탑승모드인 어부바 자세를 취했다.
“신의 계시라고요!”
“그건 느그 신이고요. 내 신은, 자신 밖에 없네요.”
최소영이 발악했지만 은성은 무시하고 입구를 향해 날았다. 차폐막 안으로 이상 없이 들어온 다음 수원시의 길드사무실로 돌아왔더니 이상한 사람들이 와 있었다.
* * *
‘이 사람들은 뭐야?’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사무실 안에서 주아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왔어? 언더그라운드 매입 건은?”
“구매완료.”
“문제는 없었어?”
“전부 못 팔아서 난리지. 근데 이 사람들은 누구야?”
은성이 입구에 서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길드사무실 이전 때문에 오셨어. 이사 날짜는 잡았는데 이삿짐들 견적 보신다고.”
“아, 그러냐.”
길드가 커진 만큼 길드사무실을 수원시청 부근의 건물로 옮기기로 한 참이었다. 대격변 이전엔 대한민국 마천루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건물이었는데 대격변 이후엔 폐던전의 중심지가 돼서 헐값이 됐던 건물이었다.
“저녁식사들은 하셨어요? 되게 늦게 오셨는데.”
은성의 말에 이삿짐업체 팀장이 말했다.
“하하하, 밥 먹고 살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죠. 요즘 이사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좀 늦었습니다. 어디서 듣기로는 수원시의 폐던전이 줄어들어서 그렇다는데···.”
“견적은 다 보셨나요?”
“아, 네. 네. 이 정도면 트럭 한대면 될 것 같습니다. 저희 이사 업체는 아공간을 사용하고 있어서 비용이 꽤 비싼 편인데 파손방지 하나는 기가 막힙니다.”
“얼마죠?”
“550만 원입니다.”
“선불로 결제할게요.”
은성은 그 자리에서 모바일 뱅킹을 이용해 계좌이체를 했다. 추가로 지갑에서 5만원권 20장을 꺼내서 건네니 팀장이 진땀을 흘렸다. 은성은 비록 돈을 받고 하는 일이지만 자신의 일을 도와주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고생 많으신데 이걸로 직원들이랑 밥 챙겨 드세요.”
“어, 어엇··· 아니···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
팀장은 거절하는 말과는 달리 벌써 주머니에 돈을 집어넣고 있었다. 뒤에 서 있던 이삿짐 업체 직원들이 쾌재를 외쳤다.
“사장님. 그럼 이삿날 뵙겠습니다. 가보겠습니다.”
이삿짐업체직원들이 사라지고 포션 포장을 위해 고용했던 사람들도 퇴근했다. 샤워실에 들어가 샤워를 끝내고 나오니 은애가 와 있었다.
“오셨어요?”
“그래.”
수건을 의자 등받이에 걸치고 자리에 앉았다. 최근 길드를 키우느라 신경 써야 할 일이 조금 있었다.
“길드원 모집은?”
“순조롭게 진행 중이에요. 오늘까지 받은 가입신청서만 10만 건이 넘어요. 지금 낮은 랭크의 헌터들 사이에서 우리 길드가 완전 이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