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그러니까, 미신?”
“네.”
은성은 납득했다. 차돌파는 능력적으로는 다 좋은데 신을 너무 과하게 믿었다.
은성은 길드사무실로 돌아와 그간 정보를 브리핑 받고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길드 규모가 커지고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운 만큼 할 일이 많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없었다. 시킨 일을 밑에 사람들이 해오면 그는 검토를 하고 결재를 하면 끝이었다.
“역시 위에 앉아 있는 게 편하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인터넷으로 헌터회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데 비서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은성이 없는 동안 은애가 고용한 일반인이었다.
“길드장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은성은 의자에 묻었던 상체를 일으켰다.
“손님요?”
질문과 동시에 책상 위의 달력을 확인하니 감이 잡혔다. 다른 길드와의 거래문제였다. 중요한 일은 직접 나서서 하는 편이었다.
“접견실?”
“예. 접견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최상층의 사무실을 나와 복도를 걸으니 새삼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이전된 길드건물은 넓고 깔끔했다. 창문 밖으로 세상을 보면 수원 시내가 훤히 보였다.
은성이 접견실에 들어가자 사람들이 일어서서 인사를 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실버스타의 길드장님.”
대표로 나선 여자가 깍듯이 고개를 숙여왔다.
“네. 잘 지냈습니다.”
나는 가볍게 대꾸하고 그들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오늘 모인 사람들은 진동토템길드의 이루나를 포함한 수원시 조합의 길드마스터들이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았어요. 마실 것은 뭘로 드릴까요?”
“저는 입이 싼 편이라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저는 믹스커피로···.”
비서를 시켜 그들에게 마실 것을 제공하고 나는 일상적인 대화를 꺼냈다.
“오랜만이네요. 던전 경매장에서 처음보고 이번이 두 번째인가.”
이루나는 모기 같은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어쨌든 안 좋은 일들은 훌훌 털어버리고 앞일만 바라봅시다. 중요한 건 앞으로의 일들이니까.”
나는 그녀와 함께 온 조합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성의 조합이 무너지면서 대부분이 이루나의 조합 쪽으로 흡수됐다. 지금 이 자리에는 나한테 두들겨 맞았던 놈들도 있었다.
“바로 본론을 꺼내죠. 악성 재고가 얼마나 있죠?”
이루나가 대답했다.
“저희 조합이 소유한 아이템들을 모두 합치면 매직 아이템과 레어 아이템을 포함해서 약 4만 개 정도 됩니다. 그 중 악성 재고는 약 3만개 정도고요.”
“악성 재고가 절반 이상이네요?”
“네.”
옆에 앉은 다른 길드마스터가 서류를 건네줬다. 받아서 훑어보니 판매하고 있는 아이템들의 정보였다. 나는 서류를 슬슬 넘기며 가볍게 물었다.
“안쪽에서 획득한 아이템들이죠?”
당연했지만 확인할 겸 물었다. 이중 차폐막이 있는 널문다리를 경계로 안쪽과 바깥의 아이템 옵션은 천지차이다.
“네.”
“판매가격은 어느 정도로 생각하시나요?”
내 질문에 이루나가 입술을 오므렸다. 그녀는 그런 끝에 천천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예전 시세보다 약 70퍼센트 정도로 판매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흠.”
내가 헛기침을 하자 그녀의 고개가 단번에 숙여졌다.
“···물론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아직 배가 덜 고픈가보군.
나는 서류를 책상에 두고 단숨에 말했다.
“전부 구매하겠습니다.”
“···저, 정말이십니까?”
“네.”
이루나의 동공이 커졌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보이겠지.
“대신 50퍼센트에 구매하죠.”
이루나의 동공이 또 다시 커졌다. 이제 악마로 보일 것이다.
“예전 가격의 50퍼센트면··· 너무 적은 금액이··· 아닐까요.”
“싫으면 관두시고요. 같은 수원내의 길드라서 편의를 봐주는 건데···.”
나는 단번에 손을 털었다. 그러자 이루나를 비롯한 수원시의 길드마스터들이 대번에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붙잡았다.
그들은 내게 설설 기다시피 했다.
그럴 수밖에.
“팔겠습니다. 팔게 해주세요.”
덩치가 크면 먹는 양도 많다. 하지만 덩치를 줄이기는 곤란하니 애가 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좋아요, 구매하죠.”
“감사합니다.”
우리는 세부적인 가격을 정하고 매매계약서를 나눴다. 순식간에 거래가 끝나고 혼자서 서류를 확인하는데 박은애가 들어왔다.
“또 아이템 구매하셨어요?”
“그래.”
“이미 치킨 게임은 끝난 것 같은데···.”
“확실히 해야지. 어차피 돈은 포션 판매 덕에 썩어 넘치잖아.”
“그건 그렇지만···.”
시설에서 나온 후 나는 가장 먼저 헌터시장의 거품부터 바로 잡기로 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치킨 게임.
헌터시장은 비정상적이다.
정부에서 정한 사회유지법의 일환으로 등급별로 수수료의 폭이 상이하고, 일반 경매장과 고급 경매장이 구별되어 있어 낮은 랭크의 헌터들은 상대적으로 저 성능의 아이템을 더 비싼 값에 구매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름 좀 있는 매니지먼트나 길드들은 아이템의 시세를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아이템의 재고를 쌓아놓고 저 성능의 아이템을 비싼 값에 판매한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에서 컴퓨터 부품을 판매하는 것처럼 라인업 구간을 나누고 판매재고를 따지면서 성능이 구린 아이템들을 비싸게 판매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간 여러 곳에서 기부 받은 아이템들을 본래 시세보다 10배 이상 싸게 팔았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포션 판매로 취한 이득도 모두 아이템 되팔기에 투자했다.
시세대로 구매한 아이템을 10배 이상 싸게 파니 효과는 크게 나왔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템의 수요가 줄어들자 아이템의 거품도 파격적으로 줄어들어 가격이 저렴해졌고, 더 높은 성능의 아이템들이 싼값으로 튀어나오면서 시세가 안정됐다.
그 결과 상대적으로 구린 아이템을 판매하지 않고 사재기 마냥 모아둔 길드들은 하나같이 바닥을 찼다. 내 예상대로였다.
박은애가 말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가 그냥 손해 보는 거잖아요.”
“근시안적으로 보면 그렇지.”
“장기적으로 봐도 우리가 손해 같은데···.”
나는 그녀의 말을 받았다.
“돈만 본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영향력으로 본다면 이게 훨씬 이득이야. 어차피 돈은 썩어 빠지게 많아. 이제 다른 걸 봐야지.”
“영향력이요?”
“그래. 내가 볼 때 이곳 사회는 꽉 막혀 있어. 위기를 한 차례 겪었음에도 구심점 없이 이해득실을 따지면서 서로 좀 먹는다고.”
사실 구심점은 있었다. 누군지 아직 정확히 특정할 순 없었지만 세상을 자기 입맛대로 바꾸는 누군가가 분명히 있었다.
나는 책상을 톡톡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에는 헌터등급 간의 벽부터 허물어야 한다고 봐. 지금 사회는 억압하는 게 너무 많아. 너 헌터등급을 나누는 기준이 뭔지 알아?”
“레벨? 아니면 힘이요?”
은애가 되물었다.
“그래, 힘. 어떤 방향이든 힘이 있으면 너무 유리한 세상이야. 반대로 힘이 없으면 너무 불리하고. 모든 사람들이 게임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사회가 그걸 억제하고 있어. 기껏 주어진 기회를 썩혀두게 만든다고.”
나는 은애와 아랑에게 돈과 아이템을 투자하면서 그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둘은 수억 단위의 아이템들을 발판 삼아 단번에 B급 헌터까지 승급했다.
A급 헌터부터는 레벨 제한이 있어서 아직 승급하지 못 했지만 그것도 조만간일 것이다.
“그래서 오빠가 구심점 역할을 하겠다는 거예요?”
은애가 물었다.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지. 돈은 넘치게 있어. 이제 앞장서서 이끌려면 다른 힘들도 필요한 거야.”
“확실히 우리 길드의 자본력이면···.”
말은 거창하게 했지만 사실 내 꿍꿍이는 달랐다. 나는 이곳에서 찾아야할 게 많았다. 지금처럼 경직된 사회라면 찾는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다. 그래서 스스로 구심점을 자초한 것이다.
‘사람들이 강해질수록 성검과 마검, 각종 에픽 아이템들을 찾기 쉬워진다.’
문득 얼마 전에 내 정체를 알아챈 신을 들먹였던 처자들이 생각났다. 미녀길드 소속의 최소영, 한주희라고 했던가.
‘신의 도움 따위 받을 줄 알고.’
나는 은애와 헤어진 후 접견실을 나와서 내 사무실로 돌아왔다. 길드와 관련된 일을 지시하고 무법지대로 가기 위해 채비를 갖추는데 휴지가 찾아왔다.
“주인. 부탁이 있다.”
“왜?”
내가 물었다.
“휴대폰 좀 개통시켜줘.”
“휴대폰?”
“응.”
뜬금없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깨달았다.
“너 갈수록 말이 짧아지는 것 같은데······.”
“소환수의 강제력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어.”
그놈의 강제력은 단점이 참 확고했다. 시간이 갈수록 증가하는 친밀도 때문일까. 나중에는 멱살잡이까지 하겠네.
“휴대폰은 왜?”
이유를 물으니 휴지가 간절한 어조로 대답했다.
“나도 인간들의 문화생활을 좀 더 누리고 싶다. 그리고 나도 사생활이 필요해. 저번처럼 자다가 소환을 받는 건 정말 싫어.”
그녀의 감정이 공유되어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다. 나는 입술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휴대폰이라···.”
휴지는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당연히 휴대폰을 개통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연락할 수단이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들고 있던 또 다른 휴대폰을 꺼내서 줬다.
“이거면 되겠냐?”
“응!”
“사용법은 알고 있고?”
“하프 드래곤을 무시하지마라.”
“그래. 데이터만 많이 쓰지 마라.”
그러자 휴지가 고개를 젖히며 은색 단발을 휘날렸다.
“데이터라니? 그게 휴대폰에도 있어?”
나는 즉시 휴대폰을 빼앗아 데이터를 끄고 그녀에게 돌려줬다. 뒷말을 덧붙이길 잘 했다.
“너 일단 은애나 아랑이한테 휴대폰 사용법부터 배우고 사용해.”
“응, 알았어!”
휴지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사이 나는 아공간을 챙겼다. 아공간이 하도 많아서 아공간 안에 아공간을 넣고 또 다시 아공간에 아공간을 집어넣었다.
인형 안에 인형이 계속 나오는 마트료시카처럼 아공간을 겹겹이 넣다보니 무게한도와 수량한도가 15톤 트럭과 맞먹을 정도가 됐다.
“이 정도면 어디 오지에 조난당해도 반년 간은 충분히 버티겠다.”
나는 휴지를 데리고 건물옥상으로 나갔다. 신원을 감추기 위해 대검을 등에 메고 검은색 마스크와 후드를 착용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휴지를 타고 하늘을 날으니 금세 판문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
언론기자들은 집요했다. 사건이 놀라울 만큼 묻혔음에도 그들은 나를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그래서 네크로 필리아가 사라진 날의 일은 음모론처럼 인터넷에 확산돼 있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내 몫이었다.
“오늘은 기자들도 없고 광신도들도 안 보이네.”
나는 신원확인을 끝내고 무법지대의 입구 앞에서 대기했다. 수많은 헌터들이 앉아 있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대검을 쥐고 있자 다행히 날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이해할 수 없어.”
휴지가 말했다.
“뭐가?”
“왜 주인이 숨어 다니는 거야?”
“귀찮거든.”
“그럼 없애버리면 되는 거 아냐?”
이래서 조기교육이 중요하다. 휴지는 생명에 대해서 극단적인 경향이 있었다. 사람 목숨을 벌레 정도로 하찮게 여긴다.
“도대체 어머님이 누구시니···. 어떻게 너를 이렇게 키우셨어···.”
“기억엔 없지만 어머니 쪽이 드래곤이셨다.”
“단숨에 이해했다.”
나는 다시 휴지에게 인간세상의 규칙을 설명했다. 그녀는 모두 알고 있음에도 생리적으로 잘 받아들이지 못 했다.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니냐?”
“누가 그래?”
“주인이 그랬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