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씁. 갑작스럽게···!”
떨어지면서 나는 사태파악에 나섰다. 우선 마법의 사용이 제한돼 있는 유적인 듯했다. 휴지가 플라이 마법을 사용할 수 없어서 나는 그녀를 공주안기로 안고 땅에 떨어졌다.
쿵!
휴지가 칭얼거렸다.
“허리 아파.”
“나는 무릎 쑤셔.”
그녀를 내려다주고 떨어진 구멍을 쳐다보니 깊이가 꽤 됐다. 목을 완전히 꺾어서 입구를 쳐다보자 적어도 아파트 50층 높이는 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저기서 떨어진 거야? 엄청 높아.”
“그러게.”
천장에서 이곳까지 빛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주변은 꽤 어두웠다. 나는 아공간에서 대형전등을 꺼내 사방을 이리저리 살폈다.
떨어진 곳은 5평 남짓한 원형의 공간이었다. 벽면에 온갖 언어가 새겨져 있어서 유적 주인의 성향을 대강 예측할 수 있었다.
“싱크 홀부터 예상되기를 함정 성애자 같은데.”
전등을 돌려 함께 떨어진 한소라와 그 일행들을 쳐다보니 그들은 울부짖고 있었다. 부상을 입은 자들도 있었고 심한 경우 사망한 자들도 있었다. 애초에 그들 수준으로 탐낼만한 유적이 아닌 것이다.
“유적 주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거름망은 상당히 잘 만들었네. 목돈병들을 사전에 걸러주고.”
“목돈병이 뭐야?”
“목숨보다 돈이 더 중요한 병신들.”
“아하.”
가만히 놔둬도 죽을 것 같아서 나는 신경을 끄기로 했다. 그때 한소라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으아아아아아!”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는 미친년처럼 자신의 팀원들을 바라보며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녀까지 포함해 여덟 명이었던 팀원들 중 네 명이 죽고, 세 명이 의식불명의 부상상태였다.
“안 돼! 이럴 수가!”
그녀는 자신의 부상을 돌보지도 않고 길길이 날뛰었다. 평소 동료애가 넘치는 사람인가 싶었는데 이어서 그녀의 자포자기 섞인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이, 이건 시말서 수준이 아냐···. 안 그래도 밑바닥 수준의 6팀장인데··· 이제 가망이 없어···.”
몬스터를 떠넘길 때부터 알아봤지만 이기적이고 영악한 사람인 듯했다. 이 여자도 남의 목숨 따위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끼리끼리 잘 어울리네.’
나는 금세 흥미를 잃고 벽면에 새겨진 언어들을 살폈다. 아르카디아의 언어가 분명한데도 도통 읽을 수 없었다.
“이게 뭐야? 지역마다 방언이 있었나.”
몇 개의 언어를 띄엄띄엄 가까스로 읽고 있는데 휴지가 끼어들었다.
“이건 고대 드워프들의 언어다. 주인.”
“고대 드워프들의 언어? 너 드워프들의 언어도 알고 있었어?”
놀라서 되묻자 휴지가 커다란 가슴을 쭉 폈다.
“엘프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보고 듣고 배울 기회가 있었다.”
“엘프와 드워프는 사이가 안 좋잖아?”
“사이가 안 좋기 때문에 배웠어. 녀석들의 유적을 털어먹어야했거든.”
나는 더 물어보려다가 관뒀다. 휴지가 말을 이었다.
“여기 써진 대로라면 이곳은 보물이 숨겨져 있는 창고 같은 곳이 분명해.”
“함정 성애자 드워프의 창고라···.”
“우리가 있는 위치가 일종의 현관문인데 여기서 암호를 입력해야 창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써져 있다.”
“도어 락 같은 거군.”
깨닫고 있을 때 휴지가 한쪽 벽면의 글자들을 가리켰다.
“암호입력은 저기 있는 글자들이다, 주인.”
나는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글자들 앞에 섰다. 네모박스의 그림 안에 갖가지 문구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들을 눌러야 하는 건가?”
“마력을 주입해서 입력하는 방식이라고 써져 있어.”
“거참, 세세하고 친절하게도 써놨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벽면의 글자들을 연속으로 눌렀다. 그러자 어느 순간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뒤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렸다.
“끼아아아아아아악!”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한소라의 팀원 중 한 명이 바위에 깔린 채 피를 토하고 있었다.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곧 절명했다.
“주인. 암호를 틀리면 함정이 나온다.”
“아, 진작 말하지.”
글자들을 다시 누르고 있는데 한소라가 경악하며 내게 고함을 쳤다.
“당신! 당신 뭐 하는 짓이야!!”
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유적 탐사하잖아.”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한 줄 알아!? 우리 팀원이 죽었다고···! 대한민국 랭킹 1위 번뇌 길드의 수색 팀원이 죽었다고···!”
아까 들어보니 6팀장이면 말단 쪽에 가까운 것 같은데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 놈의 번뇌 길드. 정점에 있는 길드라서 그런 걸까.
“그러게 왜 유적에 따라 들어와서는, 쯧.”
“당신,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번뇌 길드를 건드리고도 무사할 줄 아냐고!!”
그녀는 이성이 감정에 먹힌 듯했다. 지금의 모든 불합리함을 내 책임으로 전가하고 있었다. 나는 슬쩍 낮은 어조로 으르렁거렸다.
“무사하지 못 할 건 당신 같은데. 아까 몬스터를 사냥할 때도 그렇고, 지금도 되게 위기감이 없어. 천성적인 성격 결함인가.”
“뭐?”
“지금도 전혀 모르고 있잖아. 지금 나한테 시비를 걸면 당신 목숨이 괜찮을 것 같아?”
그러자 한소라가 입을 꾹 다물고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내 능력을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그제야 제대로 깨달은 것이다.
나는 기분이 상해서 글자들을 마구잡이로 눌렀다. 그러자 사방에서 연속으로 함정이 솟구쳤다. 급기야 바닥에서 염산까지 쏟아져 나왔다.
“아얏!”
벽 쪽에 있던 휴지가 칼날에 베이고 다급히 내 쪽으로 달려왔다.
공동의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꺄아아아아악! 그만! 그만해!”
한소라가 소리쳤다.
나는 탄력을 받아서 더욱더 열심히 글자들을 눌렀다. 암호가 틀릴 때마다 함정들이 튀어나와 세차게 사람들을 공격했다. 비명소리가 잠잠해질 때쯤 손을 멈추니 한소라의 팀원들은 모두 사망하고, 그녀는 피투성이가 된 채 구석에 쓰러져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목숨이 꽤 질긴 것은 팀장이라는 직함 때문일까.
“······.”
대한민국 랭킹 1위 길드라는 놈들이 이렇게 허약하다니. 아무리 말단이라지만 이건 좀 심했다. 나는 실망했다.
‘사람들을 더 빨리 키워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휴지가 암호박스의 아래를 가리켰다.
“주인. 여기에 암호의 힌트가 새겨져 있는 것 같다.”
“힌트?”
“응.”
“뭔데? 읽어봐.”
“세계를 구한 용사의 업적을 기리며··· 노르만이 용사를 위해 남긴다라고 적혀 있어.”
순간 나는 강한 의문이 들었다.
“노르만이라고?”
“응.”
노르만이라니.
머리를 쥐어짜내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도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용사의 업적을 기리며 보물을 남긴 걸까.
나는 세계를 구한 용사라는 말을 되새기며 휴지에게 물었다.
“혹시 내 이름을 드워프 언어로 쓸 수 있어?”
휴지가 즉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주인 이름은 드워프 언어로 나타내기 애매해.”
“하긴.”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암호 문구를 쳐다봤다. 지난번 미녀길드의 광신도들이 말했던 유적이 바로 이 유적일까? 그렇다면 암호도 그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
그런데 순간 묘한 글자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설마······.”
나는 서둘러 암호 문구의 전체를 훑어 내렸다. 집중을 하며 글자들의 파악에 힘쓰자 오래지 않아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내 이름 세 글자가 아르카디아의 언어로 곳곳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망설임 없이 내 이름을 입력하자 벽이 움푹 들어갔다. 동공전체가 흔들리고 눈앞의 벽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주인 이름이 암호였어?”
휴지가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 이름이 암호라니. 기쁘면서도 꺼림칙한데.’
흙먼지가 모두 걷힌 후 안을 살펴보자 열린 벽의 틈새에서 새하얀 대리석의 복도가 보였다. 우리는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발을 뻗었다.
“저 사람은?”
휴지가 발을 딛기 직전, 한소라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녀는 겨우 숨만 내쉬고 있었다.
“구해주라고?”
“아니. 왜 안 죽이나 궁금해서. 지금은 들키지 않아야 하잖아.”
“맞아. 이해가 빠른데.”
나는 한소라를 조준하고 탄지공을 날렸다. 빛의 줄기가 날아가 그녀의 두개골을 꿰뚫었다. 그녀가 쓰러진 것을 확인한 나는 시선을 거둬들이고 복도를 이리저리 훑었다.
“와이번과 가고일 석상이다, 주인.”
“두 몬스터를 합쳐놨어.”
복도의 양옆에는 몬스터의 석상들이 일렬로 세워져 있었다. 탐색스킬로 훑어보니 모두가 핵이 있는 누더기 골렘들이다. 암호를 모르는 이가 강제로 들어오면 깨어나서 공격하는 장치인 듯했다.
우리는 곧 복도의 끝에 다다랐다. 이번에도 막힌 벽면에 암호박스가 있었다. 내 이름을 멋쩍게 입력하자 역시나 출입구가 손쉽게 열렸다.
“나한테 종족을 뛰어넘는 열혈 팬이 있었던가.”
“무슨 말이야?”
“아냐. 그냥 혼잣말.”
그 뒤로 함정이 있었고 우리는 문제없이 그곳을 지나쳤다. 그리고 한참을 걸어 마지막이라 생각되는 복도의 끝에 도착했다.
“드디어 도착했다, 주인.”
“어째 거저먹는 기분인데. 마지막에 뒤통수치는 거 아냐?”
“빨리 열어봐.”
휴지가 재촉하자 내가 마지 못 해 문을 열었다. 그러자 끝 모를 넓이의 공동에 각종 무기와 방어구들이 보였다. 아이템들이 얼마나 많은지 야트막한 산을 몇 개나 이루고 있었다.
“대박! 대박이다, 주인!”
휴지가 호들갑을 떨었다.
“정말 보물창고네.”
나는 발치에 놓인 클레이모어를 줍고 아공간에 담았다.
* * *
무작정 쓸어 담다보니 금세 아공간이 가득 찼다. 휴지와 내가 흡족한 얼굴로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또 다른 문제가 우리를 맞이했다.
“엄청 높아.”
“이제 어떻게 돌아가느냐는 건데.”
고개를 한계까지 치켜들자 저 멀리 우리가 떨어진 구멍입구가 보였다. 플라이 마법은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뛰어서 올라가려니 땀이 날 것 같아 귀찮았다.
“뭐해? 주인?”
나는 내 정보를 확인하고 즉시 몬스터의 석상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기억대로 양옆에 석상들이 각각 1열로 먹음직스럽게 정렬돼 있었다.
“이참에 레벨 업해서 천마신공을 배우려고.”
마력을 최대치로 실어 탄지공을 날리니 석상들이 관통당해 우수수 쓰러졌다. 동시에 레벨 업 표시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양옆의 석상들을 모두 쓰러뜨리자 순식간에 440레벨이 됐다.
나는 능력치를 적당히 마력에 투자하고 아공간에서 천마신공과 경공서 천마비행술을 꺼냈다. 천마비행술 또한 천마신교로부터 기부 받은 경공서였다.
이곳에서 탄지공이 사용되니 같은 무공인 경공도 이상 없이 사용될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천마신공을 익혔습니다.>
<천마비행술을 익혔습니다.>
천마신공을 배우자 마력 량이 3배로 늘어 1500이 됐다. 휴지를 안고 천마비행술을 사용하자 단숨에 입구 밖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굉장하다, 주인!”
“천마 붙은 것들이 성능이 좋긴 좋네.”
휴지를 풀숲에 내려다준 나는 근처를 물색해 커다란 바위로 유적의 입구를 틀어막았다. 아직 유적의 아이템을 다 옮기지 못 했다. 수고스럽게도 수백 차례 왔다 갔다 해야 할 것 같았다.
“15톤 트럭 용량으로는 안 돼. 아공간을 더 사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