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우리는 당신을 존중합니다. 아니, 대다수의 사람들은 당신을 희망적인 존재, 구원자로 보고 있습니다. 당신은 혁명 그 자체입니다. 사회를 발전시키고 계층 간의 벽을 깨부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헌터회는 다릅니다. 그들은 당신을 적으로 규정했습니다.”
“가만···, 헌터회라면 1세대 헌터들의 모임 아냐?”
기억을 되짚으며 물었다. 김경호와 하재팔에게 들었던 정보들을 다시 떠올렸다.
“날 좋게 보고 있던 거 아니었어?”
“처음엔 그런 지시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당신이 헌터회의 명령을 순순히 응하지 않는다면 분명 불이익이 생길 겁니다. 수원시에 계엄령이 떨어지고 헌터와 군대가 동시에 들이닥칠 겁니다. 제 아무리 당신이 미국시민이 됐다고 해도 멈추지 않을 겁니다. 이미 한국은 헌터회의 것이니까.”
“미국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언론을 속이는 건 쉽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헌터들은 수준급입니다. 비대칭 전력은 미국이 우위에 있다고 하지만······ 그들은 당신 하나 때문에 전면에 나서지는 않을 겁니다.”
확실히 한국만 해도 내 마케팅이 덜 됐다. 미국이 내 가치를 제대로 알아줄 리가 없겠지.
나는 그를 묵살하고 생각에 잠겼다.
“헌터회라···.”
그간 법을 지켜가면서 지내온 내가 우스웠다.
나는 사회가 혼란에 빠지길 원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남들에게 되도록 피해를 주기 싫었고, 나도 피해를 입기 싫었다. 실제로 최대한 법을 지키며 조용히 불합리한 것들만 처리했을 뿐이다.
그런데 결과가 이 따위라니.
결국 시스템 안에서는 시스템을 깨부술 수 없는 거였나?
“씨발, 그냥 헛짓거리했네.”
어느 순간부터 유사국가라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지레 짐작이었다. 그런데 진짜 유사국가였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헌터회에 대해서 설명해봐.”
내가 요구하자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고 생각했는지 김하균이 술술 풀어서 말했다. 나는 적당히 듣고 그에게 다가갔다.
“자, 잠깐. 저는 살려주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내가 왜?”
“저, 저는 아까 말했다시피 처음부터 당신을 존중하고 희망적인 존재로···.”
“순수성이 없어. 수가 뒤틀리니까 살려고 지껄이는 거잖아.”
나는 그를 죽이고 휴지를 불러 뒤처리를 맡겼다.
* * *
번뇌 길드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정보화 시대답게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주소와 연락처를 알 수 있었다.
“랭킹 1위 길드 번뇌, 여기 길드마스터 유지미가 헌터회의 수장이라고 했지?”
나는 건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최대한 빠르게 머리를 잡고 장악해야 한다.
이 새끼들, 언론 통폐합을 통해 언론까지 장악했다고 하니 머리를 잡고 정보를 감추면 사회적 혼란은 크게 없을 거다.
* * *
번뇌길드의 건물은 대한민국 최고의 마천루로 서울시 압구정동에 위치해 있었다. 높이가 어찌나 높은지 층수만 해도 151층에 달했다.
번뇌 길드의 마스터 유지미는 오늘 정계인사들과 헌터회의 마스터들을 불러 모은 채 은성에 대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정계인사 중에는 대통령과 국무총리, 각부의 장관들까지 대한민국 권력의 핵심인물들이 모두 자리하고 있었다.
철저하게 유지미 쪽이 갑이었으니 을인 그들이 직접 찾아오는 것은 당연했다.
헌터회의 부회장 이시백이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
“실버스타 길드에서 포션과 고급 아이템들을 저렴한 가격에 팔고 있다는 건 여러분 모두 알고 계실 겁니다.”
그가 리모컨을 조작하자 빔 프로젝트로부터 자료가 출력됐다. 새하얀 스크린 위에 몇 개의 그래프 곡선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파급력은 정확히 모르고 계실 겁니다. 그래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현재 사태가 꽤 심각합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민간인들의 평균 레벨은 최고 50정도, B랭크 이하 헌터들의 레벨 평균은 120에서 130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약 그 두 배 수준인 각각 100과 250에 달합니다.”
고급 아이템들이 시장에 풀리기 전과 풀리고 난 후, 그 결과가 극명하게 차이가 났다.
은성이 아이템을 끊임없이 시장에 풀자 아이템들의 시세가 폭락했고, 그 이후 고급 아이템마저 시장에 넘치자 사람들의 아이템 수준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민간 쪽에서 고급 아이템들을 얻자 언더그라운드를 통해 일반 시민들의 레벨 평균이 엄청나게 상승했고, 낮은 등급의 헌터들은 던전을 통해 레벨 평균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레벨이 높을수록 레벨 업이 힘들어지니 계층 간의 차이 폭이 줄어드는 건 당연했다. 결과적으로 높은 등급의 헌터들에 맞서 사람들 간의 레벨 격차가 상당히 줄어 들었다.
“이대로라면 향후 일반적인 사회유지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국가전복사태가 일어날지 모릅니다.”
이시백이 목에 힘을 실어 말했다.
대격변 이후 무엇보다 힘이 중요시 되는 세상이었다. 겉으로는 민주주의인척 투표도 하고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한 척 했지만, 실상은 힘이 우선시 되고 있었다.
이들은 몬스터들을 몰아낸 후 눈에 거슬리는 인사들을 모두 암살하고 사고사로 위장했다. 혼란스러운 시기인 만큼 몬스터의 습격은 민중들에게 잘 먹혔다. 대통령부터 국회의원까지, 자신들의 지인과 부하들로 정권을 꽉 쥐고 있는 것도 상대 후보자들을 죽인 후 몬스터 사고사로 위장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민중들이 강해지면 위험하지.”
“이래서 개돼지들은 가만히 놔두면 안 돼.”
“크흠.”
장내의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거나 침을 삼키며, 각기 다양한 반응들을 보였다.
그들은 민간인들이 강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세상이 몬스터의 위협에 멸망할지도 몰랐지만 그것보다는 자신들의 잇속이 더 중요했다.
음흉한 속내는 시간이 갈수록 커져서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었다. 신흥강자가 나타나거나 세력이 분열된다면 서로가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몰랐다.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없지만 지금의 이 체제를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 대처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타이거 길드의 김강호가 물었다.
이시백이 유지미를 은근히 흘겨보고 대답했다.
“실버스타의 길드마스터 주은성, 그 자가 여러가지 정보를 알고 있는 만큼 일단은 포섭과 대화를 통해 정보를 양도받을 생각입니다. 이를 위해 사회유지수석 보좌관과 서울시 헌협본부 본부장이 이미 나섰습니다. 네크로 필리아 길드 건도 그렇고, 아무래도 찝찝해서 이번에는 확실히 처리할 생각입니다.”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회유지수석 보좌관과 서울시 헌협본부 본부장은 정계에 속한 사람들 중 꽤 높은 레벨을 자랑했다. 네크로 필리아의 하재팔과 비교해서 결코 뒤처지지 않았다. 그 둘이 나섰으니 결과는 기대해볼만 했다.
“정보도 중요하지만 되도록이면 그냥 죽였으면 좋겠군.”
“모난 싹은 놔두는 게 아냐. 아무리 잡초라도 거슬리면 진즉에 없애야 해.”
사람들이 말하자 이시백이 웃었다.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보를 모두 캐낸 후 쓸모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죽일 생각이니까요.”
이시백의 말이 끝나자 유지미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혹시라도 자신을 배신하는 자가 나오진 않았을까 조금은 걱정했는데 그건 아니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던 헌터회의 사람들은 그 웃음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주은성과 유지미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었다.
탕탕탕!
그때 거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어찌나 거센지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고 순식간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뭐야?”
유지미가 짜증을 냈다.
지금 이 자리는 극비밀리의 회의였다. 정계가 헌터회의 끄나풀이란 사실이 세간에 밝혀진다면 귀찮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엄한 말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회의 시작 전에 항상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들여보내줘요.”
유지미의 말에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비서가 문을 열었다. 문이 덜컥 열리자 번뇌 길드의 경비부장 장박웅이 들이닥쳤다.
“크, 큰일 났습니다!”
“뭐야? 무슨 큰일?”
장박웅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는 헐떡거리는 숨을 겨우 몰아쉬고 다급히 소리쳤다.
“시, 실버스타의 길드 마스터 주은성이 쳐들어와서 살인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 * *
은성은 네크로 필리아 때를 떠올리며 길드 건물을 부쉈다.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라는 자부심 때문인지 만년한철로 된 벽이 적어서 나름 수월하게 진입할 수 있었다.
“귀찮게 안쪽 방에 몰려 있어서는.”
탐색 스킬을 사용해서 유지미의 위치를 이미 파악했다. 그는 최상층부터 모조리 부수고 죽이며 내려가고 있었다.
유지미가 창가 쪽에 있었다면 천마비행술로 단숨에 들이 닥쳤겠지만 귀찮게도 만년한철로 이뤄진 안쪽 방에 위치해 있었다. 은성은 옥상에서 내려가는 쪽을 택했다.
“멈춰라!”
“이런 미친 새끼! 제 정신이냐! 번뇌길드에 쳐들어와서 살인을 저질러?”
모퉁이를 돌자 이미 정보가 퍼졌는지 화살세례가 날아왔다. 전기 속성과 불 속성이 담겨 있는 화살이었다. 일반적인 길드에서는 돈이 아까워 사용도 못 할 거금의 소모성 아이템을 마구잡이로 뿌려대고 있었다.
“귀찮게. 올 거면 한 번에 좀 모여서 오지.”
은성은 즉시 탄지공을 수십 발 날렸다. 벼락같은 섬광이 그들의 두개골을 꿰뚫었다. 피와 뇌수가 복도를 흥건히 적시고 그들의 몸이 짚인형처럼 힘없이 고꾸라졌다.
그다지 마력을 실을 필요도 없었다. 기본 마력이 높으니 기본 마법공격력도 높아서 쏘는 족족 사람들이 죽었다.
천마비행술로 목적지를 향해 미끄러지듯 걸어가니 얼마 지나지 않아 검과 총을 쥐고 있는 수십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의 눈빛은 철천지원수라도 본 것처럼 이글이글 타올라 있었다. 그들 중 대표가 쩌렁쩌렁 고함을 치며 은성에게 경고했다.
“지금이라도 순순히 투항해라!”
은성은 대답대신 몸을 날리고 주먹을 휘둘렀다. 총알이 곳곳에서 빗발치고 검격이 사방에서 몰아쳤지만 개의치 않았다.
강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그들을 휩쓸자 그들의 머리가 폭죽처럼 연쇄 폭발했다. 수십의 사람들이 수초에 죽었다.
“으, 으아아아아! 괴물이다···!”
뒤늦게 파악한 몇몇이 도망쳤지만 은성은 살려두지 않았다. 귀신같이 쫒아가서 마무리를 했다. 그간 이곳에서 누린 게 있다면 그들도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말의 자비심조차 없었다.
“어차피 단순 변덕이지만.”
은성은 길을 찾아 다시 걸었다. 시체를 거쳐 복도의 끝 방에 도달하니 생각 외로 인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고 손잡이를 돌리는데 갑자기 내부에서 기운이 몰아쳤다. 문이 폭발하고 부서진 문의 파편들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같잖은 수작을.”
은성이 호기심 섞인 눈으로 방 내부를 훑었다.
놀란 유지미가 은성을 보고 물었다.
“너···, 너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