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방안에는 오직 유지미밖에 없었다.
“쯧. 나머지 놈들은 다 도망갔나.”
정계인사가 죽으면 일이 커지고, 일이 커지면 귀찮아진다.
유지미는 손수처리 할 생각으로 포탈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을 모두 대피시킨 뒤였다.
-얼마나 강하려나?
절반쯤은 호기심도 있었다. 숱한 회귀의 굴레 속에서 자신을 짜증나게 만든 변수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정확히는 벌레를 찢어발기는 것처럼 저 혼자서 가지고 놀고 싶었다.
“······.”
하지만 은성을 보자마자 그것이 오판이었음을 깨달았다.
“너···, 너 뭐야.”
유지미가 뒷걸음질을 치며 경악했다.
“너, 너 뭐냐고···.”
말도 안 돼.
심장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녀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지금 이 시점에서, 이 상황에서 존재하면 안 될 사람이 눈앞에 서 있었다.
‘말도 안 돼! 나보다 강하잖아!’
그녀는 강했다. 강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숱한 회귀 속에서 매번 모든 것들이 초기화됐지만 머릿속의 기억과 몸에 체득된 무공만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회귀의 방법과 규칙을 알고부터 그녀는 꾸준히 무공을 연마했다.
혈마검식, 이화검법, 도룡검식, 탈명검법··· 얻을 수 있는 모든 검법부터 권법, 장법, 신법, 도법, 봉법, 궁법, 창법··· 익힐 수 있는 모든 무공까지 무엇 하나 빼지 않고 모두 익혔다.
주로 사용했던 마혼검법은 무공 레벨이 300을 돌파했고, 숙련도가 오를 때마다 무공 자체의 파괴력도 강해져서 이제는 검법을 초월한 새로운 무공이 되었다.
오직 내공심법만은 그간의 성취를 잃을 수 없어 첫 회귀 때부터 지금까지 처음 익힌 혼원일기공만을 고집했다. 그럼에도 수많은 회귀를 거치자 내력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지미는 은성의 내력을 알 수 없었다. 강함의 깊이를 읽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은성이 자신보다 성취가 높다는 걸 의미했다. 단순히 말해 강하다는 것이다.
“너, 너 뭐야! 도대체 정체가 뭐야!”
유지미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은성은 말이 없었다. 그는 탐색 스킬로 유지미를 훑어보고 판단했다.
“네가 헌터회 회장 유지미군.”
경고 없이 날아간 탄지공이 그녀의 머리를 노렸다. 유지미가 다급히 내공을 끓어 올려 손으로 튕겨냈다.
파앙!
내공을 극성으로 끓어 올렸음에도 손등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고통보다 공포가 더 컸다. 무거운 압박감이 어깨를 내리눌렀다. 죽음의 무게였다.
‘닫힌 포탈이 다시 열리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유지미는 평정을 되찾고 머리를 굴리려고 노력했다. 거친 호흡이 점차 고르게 바뀌면서 상황을 서서히 냉정하게 인식하게 됐다.
왜 이 시점에서 이런 괴물이 나타났지?
가장 큰 의문이었다. 이런 일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10여 차례가 넘는 회귀생활 동안 이런 거대한 변고는 처음이었다.
‘어째서!’
잠자고 있던 활화산이 하루아침에 폭발한 것 같은 대재앙이었다. 견딜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었다. 상대는 대화마저 거부하고 공격을 해오고 있었다.
파앗!
묵직한 은성의 주먹이 유지미의 복부를 엄습해왔다. 무기를 꺼내기 전이라, 그녀는 태극권의 묘리로 주먹을 흘리려고 노력했다. 내력을 최대한 끓어 올려 저항했음에도 파공음이 일고 권풍이 몰아쳤다.
뻐억!
“커헉!”
호신강기로 겨우 버티고 섰다. 내력이 없었다면 가슴뼈가 으스러지고 심장이 파괴됐을 거다. 유지미는 호흡이 턱 막혀서 굽혀지는 무릎을 가까스로 펴고 아공간에서 명검 가르간티아을 꺼냈다.
순간의 발도술이 은성의 목을 노렸다. 은성은 손가락을 튕겨 가볍게 검날을 쳐냈다.
타앙!
검은 부서지지 않았다. 대신 검을 쥐고 있던 유지미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은성은 그 틈을 노려 살쾡이처럼 달려들었다. 묵직한 강권이 이번에는 턱뼈를 부수기 위해 쇄도해갔다.
유지미는 품새를 갖추고 마혼검법을 펼쳐 방어 자세를 취했다. 공작전병의 수법이 상단을 보호하며 그녀의 턱을 지켰다. 하지만 그 대신 검의 내구도가 훅 감소했다. 눈에 띄게 진동하는 검날을 그녀는 손바닥의 감촉으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자, 잠깐만! 말 좀! 대화 좀 나눠요!”
중재를 외치면서 유지미가 초식을 펼쳤다. 마혼검법의 정점인 마혼환영검무가 빛을 발했다. 수십 개의 내력을 머금은 검날이 시뻘겋게 빛나며 전방을 수놓았다. 그대로 맞았다간 벌집처럼 몸 곳곳에 구멍이 뚫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은성의 손끝에서 새하얀 섬광들이 일어나 정확히 검들과 일대일로 대응했다. 허공에서 탄지공과 환영검들이 하나하나 맞부딪히고 있었다.
“뭐야··· 이게···.”
유지미는 경악했다. 조금이나마 타격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공 스킬을 미치도록 올렸네.”
그제야 은성은 유지미의 정보를 유심히 살펴보고 감탄했다. 레벨도 900레벨이 넘었고 착용한 아이템들도 굉장했다. 은성이 고급 아이템을 시장에 풀기 전이었다면 돈으로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정점 수준의 장비들이었다.
특히 놀라운 건 무공 스킬들의 수준이었다.
은성은 그녀가 어떻게 혼원일기공을 294레벨까지 올렸고, 마혼검법을 318레벨까지 올렸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아르카디아에서 만렙을 찍도록 은성은 무공 스킬의 레벨을 150도 채 넘기지 못 했다. 다른 스킬들과 달리 무공은 한계가 없었지만 그만큼 올리기가 까다로웠던 탓이다.
“자, 잠깐만요!”
기회가 생겼다. 유지미가 살기 위해 존댓말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제발! 잠깐만! 공격하지 말아주세요!”
유지미가 황급히 검을 거두고 공격의사가 없음을 알렸다. 회귀를 거치면서 성격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녀의 천성은 계획적이고 조심스러운 편이었다. 생존욕구가 우선시 되면서 자연스럽게 천성이 깨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은성은 들어주지 않았다. 매서운 강권이 그녀의 가슴을 노리고, 로우킥이 칼바람처럼 다리를 엄습했다.
유지미가 호신강기로 버티고 대항했지만 맞은 부위의 살점이 패이고 핏줄기가 터졌다. 그녀는 고통을 내지르며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끄으으윽! 자, 잠깐만!”
공격은 멈추지 않고 계속 됐다. 날카로운 권풍이 연이어 공기를 헤집었다. 순수한 무공수준은 유지미가 높았지만 레벨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유지미가 검을 세워 번개처럼 공격을 막아섰지만 역부족이었다. 내력을 머금은 주먹이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기어코 검마저 조각조각 부서졌다.
“가, 가르간티아가 부서졌어!?”
놀라움이 멎기도 전에 주먹이 날아와 갈비뼈를 부수고 내장을 뒤섞었다. 통렬한 아픔이었다. 유지미가 보법으로 즉시 몸을 내뺐지만 이미 몸은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꽉 다문 입술을 비집고 피가 한 움큼 터져 나왔다.
“커헉! 헉헉!”
등줄기를 타고 피인지 땀인지 모를 액체가 흘러내렸다.
그제야 은성이 물었다.
“혼원일기공을 어떻게 294레벨까지 올렸나?”
유지미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그, 그걸 어떻게···?”
“마혼검법은 318레벨에, 검법부터 도법, 권법, 장법, 창법, 봉법, 궁법··· 없는 게 없이 다 배웠네. 그리고 이건 또 뭐야? 회귀···?”
은성은 그녀의 정보를 살펴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마치 자신에게 중얼거리듯 다시 말했다.
“에픽 스킬 회귀가 13레벨···?”
은성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에게도 에픽 스킬이 있었다. 이곳으로 돌아오면서 특전으로 받은 윤회였다.
“회귀 스킬 때문에 무공들이 초기화 되지 않은 건가?”
은성은 회귀 스킬의 정보를 읽고 웃었다. 살펴보니 회귀 스킬에는 조건이 있었다. 패시브가 아닌 액티브형 스킬에 사용조건도 까다로웠다.
은성이 물었다.
“너도 차원여행을 갔다 온 거냐?”
유지미는 질문의 의도를 읽지 못 했다.
“···네? 차원여행?”
“아니군.”
질문을 바꿨다.
“어떻게 회귀 스킬을 습득한 거지?”
유지미가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물었다.
“다, 당신은 혹시 신이십니까?”
독기와 울분이 섞인 눈이 은성을 마주보고 있었다. 은성은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신과 비슷한 무언가지. 그보다 회귀를 어떻게 습득했나?”
유지미의 눈동자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녀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소원을 빌었어요.”
“소원···?”
은성은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거짓말 같지는 않았는데 뭔가 석연치 않았다.
소원을 빌었다니···? 개떡 같은 소리 아닌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아아아!
유지미의 등 뒤에서 갑자기 파란 섬광이 번쩍 빛을 발했다.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포탈의 빛이었다.
“나는 세상을 구해야 해! 아직 죽을 수 없어!”
그녀는 은성에게 고함을 치고 재빨리 발을 놀렸다. 그녀가 포탈에 삼켜져 사라지자 은성이 다급히 뒤쫓았다.
“미친, 간이 포탈까지 독점하고 있었다니···!”
유지미가 포탈을 닫기 직전, 은성은 간신히 그녀를 따라 들어올 수 있었다. 뒤를 밟힌 유지미가 놀랐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속도를···!”
“천마비행술이 좋긴 좋네. 안 되기는. 돼, 다 돼!”
은성은 그녀를 순순히 죽일 생각이 없었다. 회귀에 대한 정보를 모두 캐내고 죽일 생각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이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최대한 이용해 먹고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이 이득이었다.
쿠르르르릉!
그때 갑자기 사방이 진동했다. 은성이 시선을 거둬들이고 주변을 훑자 그제야 사방에 꽉 찬 만년한철들이 보였다.
“뭐야? 만년한철?”
“여기는 정계의 고급 인력들을 위한 지하피난시설인데······.”
유지미도 뭔가 안 좋은 예감을 느낀 듯 스스럼없이 말했다. 땅의 떨림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았다.
* * *
“역시, 이번에도 놈을 죽이지 않았군.”
“저년이 무법지대의 인원들과 협약이라도 맺은 걸까요?”
“확실해. 유지미는 우릴 갈아치울 생각인 것 같다.”
한편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로 지켜보던 헌터회 인원들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 미리 도망쳐온 그들은 사전에 저들끼리 입을 맞춘 게 있었다.
이번에도 유지미가 주은성을 죽이지 않는다면 배신자로 처단할 것.
그간 많이도 참았다. 유지미의 무력이 무서워 반론도 재기하지 못 하고, 의심도 묵은지처럼 묵묵히 묵혔다.
하지만 네크로 필리아의 하재팔이 죽고, 주은성이 사람들 간의 빈부격차를 줄이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명분과 구실이 확실하고 계획마저 완벽한 기회!
“유지미가 죽을까?”
타이거의 김강호가 물었다. 그는 유지미에 의해 아내를 잃은 사람이었다. 그는 그간 아내의 유품을 가슴에 묻고 매일 같이 복수의 칼을 갈아왔다.